'남자가 은퇴할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가지' 저자, 한혜경 교수
글 박덕건 글로벌인베스터 편집장
최근 '남자가 흔퇴할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책을 출간하여, 화제가 되고 있는 한혜경 교수는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 학위와 사회복지학 석,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40대 초반에 대학으로 옮겨 노인복지를 세부 전공으로 연구하며 다수의 논문과 저서를 발표했다. 2012년 '나는 매일 은퇴를 꿈꾼다'를 출간했고, 문화일보, 여성신문 등에 칼럼을 썼으며, 동아일보에 '한혜경의 100세 시대'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정신없이 달렸던 고도성장 세대가 은퇴를 시작했다.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질주였던 만큼 이들이 이룩한 성과는 찬탄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런 질주가 남긴 내상도 상당하다. 옛날에 비하면 엄청나게 잘 살게 되었지만 우리가 인생에서 느끼는 만족감은 턱없이 빈약하다.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의 한혜경 교수는 이렇게 고도성장 시대를 주도했던 은퇴자들이 과연 무엇을 후회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를 해왔다. 2001년부터 1천 명에 달하는 은퇴자를 조사했고, 특히 2010년부터는 은퇴자 300명을 심층면접해서 그들이 지난 인생에서 무엇을 후회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한 교수는 그 내용을 분석해서 은퇴자가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의 목록을 추렸다. 그리고 그것을 ‘남자가, 은퇴할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그 후회 목록을 몇 가지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인생의 한창 때 나만의 시간을 가졌더라면, 아무 데나 최선을 다하지 않았더라면, 나를 ‘돈버는 기계’로 만들지 않았더라면, 외로움과 좀 더 친하게 지냈더라면, 자식에 대한 투자에 상한선을 정했더라면, 물질보다 경험을 더 많이 소비했더라면, 감정을 전하는 법을 미리 배웠더라면, 여자들처럼 사는 법을 배웠더라면,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었더라면, ‘도와달라!’ 소리치는 법을 배웠더라면 등등.
조사하신 분이 아주 많던데 대상자는 어떻게 고르세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하는데, 복지관을 통하기도 하고, 주변에 아는 분을 통해서 소개를 받기도 했어요. 그런 걸 눈덩이 표집이라고 하는데 눈덩이가 구르면서 커지듯이 계속 소개를 받으면서 대상자를 늘려가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여러분을 만났는데 다행히 그분들이 이야기를 잘하셔서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 것 같아요.
그런데 책을 보니 시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몇 분 있어서 저는 특별히 감성적인 분들을 고르신 건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만...
그런 건 아니구요. 앞부분에 나오는 ‘아버님의 일기장’이라는 시는 그 분이 말씀하신 내용과 아주 잘 어울리는 시라 제가 넣은 거고...
그렇군요. 제가 아는 그 또래 양반들은 만나도 늘 공장 이야기, 아니면 골프 이야기나 하는 터프가이들인데.
그런데, 의외로 그런 이야기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사실 남자들끼리 만나면 자기 속 깊은 이야기는 잘 안 하잖아요.
인터뷰를 할 때 대상자들이 말씀을 잘해 주세요? 책을 보면 자기가 속에 담아뒀던 상당히 내밀한 이야기들이고,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은데...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었던 내용일 수 있잖아요. 사실 은퇴자들이 생각도 많고, 고민도 많고,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의논도 해보고 싶은데 그럴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는 거죠. 어떤 면에서는 제가 잘 모르는 사이니까 오히려 부담 없이 이야기하기 좋은 점도 있구요.
그런 인터뷰를 늘 하시다 보면 이야기를 끌어내는 선생님만의 비결도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전공이 사회복지고, 직장생활도 여기저기서 했으니까 남자 동료를 많이 보잖아요. 그런데 사실 예전부터 그런 경우를 많이 겪었는데 남자 연구원들이 자기네끼리는 안 하는 이야기도 저한테는 와서 해요. 한 명씩(웃음).
하긴 남자끼리는 그런 이야기하기가 좀 그렇죠.
그래요. 남자는 자기들끼리 경쟁의식도 있고요. 이 책에도 나오지만 누가 심각한 이야기 꺼내면 갑자기 조용해졌다가 ‘야, 야, 집어치우고 술이나 마시자’하고 넘어가는 거죠. 그런데 여자들은 좀 다르죠. 누가 고민을 꺼내면 ‘아 그러니? 나도 그래’ 하면서 공감해주면서 위로가 되는 거예요. 내가 가진 문제를 다른 친구도 갖고 있구나 확인도 하구요. 반면 남자들은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이 책을 보면 여러 가지 후회가 나옵니다만 전체를 관통하는 바탕은 '좀 느리게 살았으면 좋았겠다'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제게 한 가지 드는 의문이, 과연 이분들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렇게 느리게 살 수 있었을까 하는 겁니다. 아예 시골로 튕겨져 나간다면 모르겠지만 직장생활하면서 살아가려면 여전히 정신없이 바쁘게 살 수밖에 없지 않나 싶은 거죠. 우리가 사는 사회 자체가 그렇게 빠르게 살도록 짜여 있는 사회이니까요.
베이비부머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면이 있죠. 그런데 저는 오히려 지금의 삼사십대가 선배 세대의 후회를 보면서 배우는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회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예측하기도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변화에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느리게 산다기보다는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좀 위하면서 살아야 되지 않나 생각해요.
따지고 보면 우울하고 어두운 내용인데 읽다 보면 별로 그런 느낌이 나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게 술술 읽힙니다.
저는 사실 이런 글은 처음 써봤어요. 연구원이나 학교에 있을 때는 늘 논문만 썼구요. 이 책이 두 번째인데 첫 번째 책도 일반대중용 책이기는 했지만 이것보다는 그래도 이론적인 내용이 많았거든요. 처음에 출판사에서 이 책 제안을 했을 때도 사실 저하고는 안 어울리는 책이다 싶어서 안 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거기 사장님이 그냥 쉽게 감성적으로 이야기하듯이 쓰는 게 어떠냐고 해서 시작한 거죠. 어쨌든 쓰는 동안에는 재미있었어요.
논문은 젊은 친구들에게 맡기고 이런 글을 더 많이 쓰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러려고 생각해요. 논문은 사람들이 안 읽잖아요(웃음). 복지부 공무원 같은 분들이 정말 어쩌다 한 번씩 논문 잘 봤다고 이야기하는 정도지 보는 분이 없어요. 그래도 이런 글은 사람들이 읽으니까 쓰는 재미가 있어요.
우리나라에 이런 분야를 연구하는 분들이 사실 얼마 없지 않습니까?
없죠. 연구자도 많지 않고... 이 은퇴라는 주제에 대해서 재무 쪽에서는 꽤 연구가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관심 자체가 많지 않았죠. 그러다 보니 연구자도 별로 없고, 더더구나 이런 글을 쓸 사람도 거의 없는 형편이죠.
선생님이 본래 여성학을 하셨다고 했는데 저는 이 책을 보다 보니 여성학보다는 오히려 남성학 내지는 할아버지학?(웃음) 이런 게 필요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동아일보에 ‘100세 시대’라고 연재를 하면서 느낀 건데 70대 남자들이 심각해요. 자살률도 굉장히 높구요, 치매 아내 돌보다가 그 아내를 살해하고 본인도 자살한 사건, 그런 게 다 70대 남자들이거든요.
흔히 남자들이 가부장제 위에서 군림한다고 합니다만 사실 속을 뒤집어보면 망가져 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70대 남자들이 자아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그런 건 일본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노인문제는 어느 나라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건 우리나라가 특히 심각한 것 같아요. 우선 자살률이 아주 높아요. 그중에서도 70대 자살률이 가장 높고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그런 걸까요?
그런 것도 있구요. 가족 안에서의 자기 위치도 문제죠. 예를 들어 부부싸움 하다가 욱하고 자살한다든가... 물론 이런 게 본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여자들도 책임이 있는 것 같아요. 여자들이 남자를 너무 돈 버는 기계로만 생각하고, 또 너무 많은 걸 요구하기도 하구요. 그러다보니까 서로 자존심 싸움이 되면서 여자들이 그 자존심을 건드리면 욱해서... 그 사건을 보면서 정말 70대 남자에 대한 심층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어느 소방관이 그러는데 요즘 출동하는 것 중에 한 달에 한 번은 노인 자살 때문에 나간다고 하더군요.
통계에 이미 다 나타나고 있는 사실이죠. OECD국가 가운데 가장 높고 등등 보건사회연구원의 빅데이터 분석에 다 나와요. 그런데 그런 사고가 날 때마다 심리적 부검을 해봐야 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해요. 자살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심리적인 원인을 파헤쳐 보는 거죠. 그렇게 해야 앞으로의 자살도 막을 수 있는 거구요.
‘은퇴남편 길들이기’라는 책을 낸 오가와 유리라는 일본인 수필가가 있는데요. 이 분이 저희 ‘은퇴와 투자’에도 글을 쓰십니다만 이 분 이야기는 남편이 은퇴한 후 적응하는 데 아내도 도와주는 등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거예요.
그건 정말 맞는 이야기예요. 제가 이 책 쓰면서도 반은 남자 책임이지만 여자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면에서 여자 독자 중에 이 책 보고서 자기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엄청 도움이 됐다는 말을 하는 분도 있어요. 남편도 이해가 되고... 그래서 남편한테 이 책을 보여줘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이 된다고(웃음).
아버지가 뭘 어쨌길래요?
최근에 만난 30대 여성인데요. 아버지가 회사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갑자기 음식점을 한다고 그러면서 퇴직금을 다 날렸대요. 이분은 그때는 정말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대요. 그런데 이 책을 보고나서는 당시 아버지의 다급했던 마음과 가족을 위한 생각을 이해하게 됐다고 했어요.
그런 거야 정말 흔한 케이스죠. 재무적으로 은퇴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까 다급한 마음에 뭔가 시작했다가 퇴직금 날리고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그러니까 재무적인 준비가 꼭 필요하다고 흔히 말을 합니다만, 재무적인 준비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게 또 문제죠.
그래요. 심리적인 문제도 있죠. 그러니까 돈을 벌어야겠다, 나의 정체감을 빨리 찾아야겠다, 그리고 가족에게도 뭔가 해줘야겠다. 이런 모든 문제가 겹쳐 있는 거죠.
제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문제가 남자들이 왜 그렇게 쉽게 좌절에 몸을 내던지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좌절에 너무 약하다는 거죠. 아무리 좌절이 닥쳐도 자기를 좀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갈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거예요. 힘들면 자기를 내던질 게 아니라 좀 도와달라고 하기도 하면서요.
과거에 잘 나가던 분일수록 상실감이 더 크지 않을까요? 이 책에도 보면 대개 직장생활은 평탄하게 끝까지 한 분들이 대부분인데 이런 분들일수록 은퇴로 비롯되는 상실감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요.
그래서 인생은 공평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잘 나갔던 분일수록 확실히 은퇴 후 자존감이 더 떨어질 수 있어요. 어떤 교수님이 복지관에 갔다가 누가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고 불같이 화를 냈다는데 그런 분은 행복하기가 힘든 거죠. 이에 반해 잘 지내시는 분의 공통된 특징은 다 자존감이 있다는 거예요. 잘 나갈 때의 기억은 다 잊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자존감을 갖고 계신 거죠.
자식에게 들이는 돈을 줄이면 은퇴 이후의 문제가 많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만...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는 자식 결혼할 때 집까지 해줘야 자기 책임을 다한다고 생각해요. 어느 신문 조사를 보니까 자기는 자식에게 도움을 못 받아도 자식은 끝까지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굉장히 많아요. 저는 한국 남자들이 그렇게 가족애가 강한 줄 예전에는 정말 몰랐어요(웃음). 그 과도한 책임감... 정말 대단해요. 어떤 면에서는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여자보다 더 심한 것 같아요.
보통 아내들 이야기는 자기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이라는 거잖아요.
네, 그러죠. 근데 아닌 것 같아요. 이기적으로 보이는 면도 있지만 사실은 가족에 대해서는 무한책임을 느끼는 거죠. 남자들이 삐끗 잘못하면 노숙자가 되는 것도 이유는 가족을 볼 면목이 없다는 건데요. 그것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참 안타까워요. 살다보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건데 말이에요.
현역으로는 어쨌든 그렇게 보냈다 치고 이제 남은 은퇴 인생을 다시 후회로 채우지 않으려면 선생님 말씀대로 역시 정신 차리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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