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수필문학의 변화 모색
때 : 2.15.화요일.11시
장 소: 예총회관 문인협회
참석자: 정주환(진행)
지연희
권남희
김사연
김선화(정리)
정주환: 반갑습니다. 새해 들어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올해는 더욱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뜻대로 이루어지는 한 해이기를 바랍니다. 한국 수필계는 그간 양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많은 발전을 거듭해왔고, 또 앞으로도 발전해가리라 믿습니다.
한국수필가협회가 결성되던 1971년을 기점으로 한국문단에서 수필문학은 비로소 문학 장르의 한 축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수필의 문학적 위상이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1975년부터 문인협회기관지인 ‘월간문학’이 신인 문학상 부문에 수필문학을 신설하고 정식으로 수필가를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한 수필가들은 ‘대표에세이’라는 이름으로 17명의 수필가가 1984년 2월 동인회를 결성하였는데, 이는 등단제도를 거친 한국수필문단의 최초 동인회라 하겠습니다. 이즈음 1980년대 초만 해도 수필문단엔 기존의 수필가와 신인문학상 출신 수필작가가 백 명 안팎이었습니다. 그런데 24년이 지난 지금은 수필 인구가 근 2천여 명에 이르고 있는 것을 보면 실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실감나도록 그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였습니다. 또한 수필에 대한 이론서와 작품론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연구물이 출간된 것도 수필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무척 즐거운 일이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미래 수필문학의 변화 모색>이란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수필의 현재성이랄까, 아니면 한국수필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 또는 수필문학의 한계성 같은 것이 파악되어야 만이 미래 수필문학에 대한 해법을 모색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지연희: 수필은 사실체험의 문학이기 때문에 과거 지향적 문학입니다. 바로 펜을 들기 이전의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문학입니다. 물론 어떤 문학일지라도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이라는 문제를 등에 지고 출발하는 수필문학에 있어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문제 역시 쓰기 전에 설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현재진행형 문장이라 하더라도 백지 상태의 현재의 길(책상) 위에서 과거에 체험했던 무엇을 배제하고 써 나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붓 가는 대로’라는 모호성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수필을 펜만 들고 막연히 쓰기 시작하는, 목적 없이 출발하는 문학(붓 가는 대로)이라는 잘못된 생각의 시작부터 뛰어넘을 수 있어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거론할 가치조차 없을지 모를 일이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한 상태의 수필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활자화 되어 범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남희: 작가적 혜안으로 새 개념을 제시해야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제 경우를 비추어 볼 때 아직 과거 교실에서 배운 몇 가지 수필 쓰기 패턴이나 정통성에 얽매여서 다양한 수필 쓰기 시도를 위한 모험심이 부족한 점과 문학성의 콤플렉스 미 극복, 그리고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 작가들과의 활발한 정보교환 교류장애를 들 수 있겠습니다.
김사연: 수필 인구가 증가하고 수필 서적이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전문성 내지는 개성이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고 있는 점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김선화: 양적 팽창이니 질적 저하니 하는 문제는 수도 없이 다뤄왔고, 새로워져야 한다는 논의도 여러 차례 있어왔습니다. 수필의 격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되고 있지요. 이런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수필을 잘 써보자'일 것입니다. 어떻게 잘 쓸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요. 그것이 변화를 꾀하는 것일 테고요.
정주환: 사회자 역시 많은 독자 또는 타 장르 작가들로부터 누누이 들었던 지적들입니다. 수필이 ‘재미없다’, ‘이것도 문학이야’, ‘잡다한 신변 넋두리다’, ‘획일적이다’, ‘치열함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선생님들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자면 수필은 문학으로서의 기본구조 결여, 소재 탐색의 진부성과 일상성의 반복,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한다면 미래 수필의 변화에 대한 방향이 저절로 설정되리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방금 전의 지적들을 다시 축약한다면 두 가지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수필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지적이었고, 하나는 작가적인 책임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미래 수필의 변화에 대한 방향은 ‘수필의 현재성(보편성) 탈출’과 ‘작가정신의 치열성’으로 논의의 방향을 맞춰서 말씀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수필문학의 보편성 탈출을 위해서는 수필의 본질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지연희: 문자가 발생하기 전부터 인간은 노래하고 재미나는 이야기를 전하고, 그러다가 본격적인 문학 활동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원래는 운문과 산문이라는 두 산맥이 문학의 큰 줄기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고대문학 가운데 수필류의 자료들이 풍부한 것만 보아도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개화기 이후 서구 문학이 진입하면서 산문 즉, 수필은 소설에 자리를 내주고 그 변두리 문학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때부터 사실상 수필은 문학권 안에서 서자 취급당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문학보다도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시를 읽는 인구보다는 수필을 읽는 인구가 더 많다는 사실을 얼마 전 모 연구소에서 수집한 자료를 보고 알았습니다.
권남희: 수필은 다른 장르보다 독자들과 수평적 관계를 추구하는 문학입니다. 공감대가 큰 반면 간결한 문장으로 심리적 부담을 주지 않기 때문에 사랑받지 않을까요. 인터넷을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소통하는 사회에서는 속도가 중요합니다. 생각의 속도로 모든 일상이 변화하고 있지요. 초등학생도 소설을 써서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리고 팬클럽을 관리하는 세상이고, 서울대생의 10퍼센트가 문학작품을 읽을 필요를 못 느낀다고 설문에 응답한 게 현실입니다. 지나치게 함축된 언어나 자기만이 아는 관념어나 아는 사람만 아는 기호화된 메시지 나열의 문학을 자기 시간을 할애하여 인내하면서 읽어줄 독자가 많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대중가요의 노랫말 변화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감정을 베일에 싸서 위선적으로 드러내던 노랫말은 없어지고 ‘어젯밤에 집에서 잠잔다고 휴대폰 꺼놓고 다른 남자 만난 너. 그렇지만 너는 분명 내게 돌아올 거야. 내가 더 잘해주니까.’ 이런 정도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원하는 위악의 시대입니다. 무엇이든 빠르고 분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런 세대에게 외면당한다면 앞으로 문학의 대가 끊어지는 것 아닐까요? 지금 본격문학이 캠퍼스 안에서조차 고사(枯死)직전에 놓여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문학성만 따지는 일은 시간 낭비입니다. 그러나 수필정신이 가진 ‘진정성’은 대중적 친화력과 통하여 흡인력일 것입니다. 수필이 신변잡기일 뿐이라고 비난받는 측면도 있지만 독자들은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하고 행간에서 작가의 정신을 엿보며 삶의 통찰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수필에는 판소리 한마당처럼 대중이 원하는 정서가 알기 쉽게 녹아있습니다.
정주환: 평소의 제 생각과 같군요. 수필이 이렇게 대중과 친숙한 데에는 수필만의 어떤 비밀이 분명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비밀이 바로 수필의 특성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비밀이 무엇인지 선생님들의 의견을 먼저 듣도록 하겠습니다.
지연희: 수필이 문학 장르의 한 가닥이라면 예술의 한 뿌리 안에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창작하고 표현하는 어떤 문학작품도 그 작품의 예술적 완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독자를 의식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작품과, 작품을 감상하는 독자의 관계는 불가분의 유대를 지니고 이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자에게 읽히는 수필이, ‘문학성’이 배재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라 이해합니다.
김사연: 시의 표현이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반면에 수필은 인생의 경륜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자기 성찰과 철학이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선화: 문학은 글 쓰는 이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문학 장르속의 수필에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잘된 수필 한편은 읽는 이의 가슴에 정화작용을 합니다. 원고 매수 몇 장으로 독자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감동은 진실의 교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함축적인 수필에서 더욱 느낄 수가 있습니다. 훌륭한 수필은 잘된 문장에서 읽어내는 것이지요. 수필가의 눈은 늘 열려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늘진 곳의 단면까지를 헤아릴 수 있는 정신이 요구된다 하겠지요. 읽는 이의 미소를 자아낼 수 있는 해학수필, 또는 얼음장같이 냉철한 비평정신도 가미된다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출렁거리는 감동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때로는 지성의 번뜩임으로 삶의 결을 꿰뚫는 안목도 갖춰진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이러한 요인들이 바로 독자들과의 친근감을 자아내는 비밀이라 생각합니다.
정주환: 선생님들께서 수필의 비밀에 대해서 다양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아마 대중과의 “친화력”이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필문학은 어느 문학이 가질 수 없는 친화력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접근성의 용이성이 크게 작용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내용이 난해하지 않다든지 길이가 짧다든지 하는 것 등이 일반 독자에게 “친화력”으로 다가오는 요소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수필문학의 문학적 특질은 “친화력”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을 간과하고 수필의 특질을 ‘형식의 자유성, 개성의 노출성, 유머와 위트성, 문체의 품위성, 소재의 다양성, 허구를 배제한 사실성, 붓 가는 대로 쓰는 글’ 등으로 규정지은 데서 문학 권 밖으로 축출당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연희: 대중과의 교감이 여느 문학 장르에 비해 원활하다는 것은 짧은 매수의 진솔한 이야기가 부담 없이 독자의 감성을 움직일 수 있는 까닭입니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든지, 가슴 벅찬 기쁨이든지 어떤 이야기든 그 근저에는 ‘사실’이라는 메리트가 독자의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필이 독자와 가장 친근한 거리에 있으면서도 문학 권 밖의 문학 장르로 인식되어지는 이유는 ‘이야기’는 그럴법한데 문장의 구조가 허술하여 글을 읽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회자께서 ‘문체의 품위’라고 말씀하셨는데 수필문학의 향기는 아니, 산문구조의 향기는 문장에 있습니다. 지문이 지닌 향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비문(非文)나열, 불필요한 이야기 반복 등이 수필을 문학으로 보지 않으려는 시각이라 생각합니다.
권남희: 문학의 시작은 누구나 과거의 기억을 회복하려고 하는 노력과 저항에서 비롯되어집니다. 절실한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흔적입니다. 장르는 문학을 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수필이나 시나 소설이나 희곡이나 글을 써야하는 숙명을 타고난 사람들은 같은 문학권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구는 도구일 뿐인데 본질을 놓쳐 버린 채 배타적 시선으로 끊임없이 문학성 시비를 일삼는 건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얼마 전 아날로그 사진작가가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그 때 인터뷰하던 기자가 비슷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날로그 사진과 디지털 사진 중 어느 쪽이 더 예술성이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때 사진작가가 ‘어느 것이든 예술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도구가 예술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하고 답했는데 정곡을 찌른 말이었습니다. 빌렘 플루서는 ‘디지털 시대에서의 글쓰기’에서 앞으로 글쓰기는 사라지고 ‘수다’만 남는다고 경고했습니다. 신문조차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만큼 읽을거리도 입맛에 맞게 골라서 올려주는, 인터넷이 선물한 가벼움에 취해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오직 작가만이 어떤 책임의식으로 스스로 엄숙해지고 엄격해질 수 있을까요.
김사연: 오래 전, 흥행에 실패한 한국 영화들을 두고 ‘비록 흥행엔 실패했지만 작품성과 예술성은 뛰어난 작품’이라고 자기변명을 합리화시키며 오히려 관객의 수준을 비하시키기에 바빴던 감독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요즘 한국 영화의 수준은 수입영화보다 월등하게 향상되었고 관객을 만족시켜주고 있기에 작품 한 편으로 일천만 관객시대를 열었습니다. 수필도 언젠가는 이런 황금기 시절이 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일반 대중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수필이라면 문학 권 밖으로 축출될 염려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정주환: 그렇습니다. 수필 생명의 본체를 “사실”이라는 데서 그 특질을 찾다보니 문학 권 밖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문학에 있어서 가장 핵이라 할 수 있는 것이 ‘허구성’입니다. 그동안 수필에서도 ‘허구’에 대해 여러 번 논의가 있었지만 아직도 그 해결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허구를 사실이 아닌 꾸며낸 이야기라는 틀에서 이해하려 들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됩니다. 허구를 작품의 구성의 원리로 받아드리면 자연스러울 터인데 그렇게 생각지 않는데서 허구를 배타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허구를 배제하면 그것은 수필문학이 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지연희: 허구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진 현상이라고 봅니다. 문학에서의 허구성은 작품 구성에 대한 하나의 장치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인데, 사실이 아닌 픽션으로 받아들인 데서 이런 문제점을 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인간의 거짓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진실이나 사실이 빛을 발하는 까닭은 거짓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학에 있어서 허구는 바로 인간의 진실을 탐구하고 그것을 믿고, 그것을 찾아내는 지고지선(至高至善)을 향한 무대장치라고 봅니다.
권남희: 허구는 ‘작가의 심미적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윤오영의 ‘달밤’이란 수필이 있습니다. 원고 5매 가량의 분량인데도 매우 시적이면서 소설적인 기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자에 따라 작품에서 허구성을 느끼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하겠지요. 개인의 체험에 의해 받아들이는 정서도 다르니까요. 달밤에 낯모르는 노인을 찾아간 일, 낯선 객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일, 술을 마셔버린 일 등은 분명 허구적인 요소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달밤의 정취’라는 사실입니다. 의도적인 이러한 허구만이 달밤의 정취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허구는 진실을 더욱 갈망하게 만드는 역설적 장치라고 생각됩니다. 영국에서 걸작으로 꼽히는 찰스램의 수필 ‘꿈속의 아이들’도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찰스램이 첫사랑 시몬즈를 그리워하면서 그녀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렸다면….하는 간절한 소망을 그려본 허구였습니다.
저 역시 찰스램의 수필에서 영감을 얻어 ‘꿈속의 고모’라는 허구가 가미된 수필을 썼지요. 제게는 계시지 않던 고모의 존재를 그리워하면서 내가 만약 고모가 된다면 조카들에게 어떤 고모가 될까, 상상으로 수필을 완성했습니다. 그렇지만 엄밀히 따지면 허구에 포함된 내용의 뿌리는 모두 현실에서 간접경험으로 쌓여졌던 것들이지요.
김사연: 그렇죠. 실 가운데 허가 있고 허 가운데 실이 있어야 문학의 객관 규율에 부합한다고 생각됩니다. 요는 그 허와 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느냐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저희 대표에세이 서울지회 월례회의 때 회원의 작품을 읽으며 토론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아다다’라는 제 작품을 두고 허구로 몰아붙여 큰 상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약국 골목 안의 마스코트였던 정신박약아가 병원에 실려간 날 밤, 꿈속에서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 현실이 되고만 내용이 있는데 너무 작위적이라고 지적한 점입니다. 현실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누구나 꿈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는 것이고 문학도라면 꿈이 현실화되는 예견 능력을 갖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김선화: 수필의 문학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허구를 허용해야한다는 견해는 수필인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단면이라고 봅니다. 허구를 끌어대는 대신에 상징과 은유로 대치할 수는 없을까요? 수필쓰기에서 각종 수사법을 활용하면 수필의 문학성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수필문장의 표현을 돕는 수사법으로 은유(隱喩)를 빌면, 구태여 허구를 논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시나 소설이 수필을 넘나들 듯 수필도 타 장르를 넘나들자는 장르해체얘기도 떠도는 실정입니다. 수필에도 맘만 먹으면, 각종 수사법을 동원하여 곱절의 표현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특히 은유적 표현은 직설을 피할 수 있어, 정의 문학인 수필에 향기를 더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럴 경우 읽는 이의 지루함을 극복할 수 있어, ‘수필이 천편일률적이다’하는 문제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겠지요. 이야기의 ‘소재취택’과 ‘구성의 기법’, 그리고 ‘표현방법’ 등으로 다양하게 주제를 형상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수사적 기법에서 작가의 기량은 물론이고 작품이 한껏 돋보일 수 있겠지요.
정주환: 김선화 선생은 은유 문제를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문학이 아닌 비문학에서도 늘 사용하는 일상적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새가 하늘을 날자면 날개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수필이 문학으로써 발전하기 위해서는 문학의 요소를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새의 날개를 찢어버리고 비상(飛翔)하기를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문학의 형상은 사람들의 심미인식을 체현한 것이며, 그것은 객관 사물을 반영함과 동시에 그것을 비유하고 상징합니다. 굴원이 향초(香草)와 미인으로 현인을 비유한 것처럼 문학의 형상은 사람 생각 중의 형상이고, 사람들이 현실 물상을 인식하고 연구한 후 자신의 심미 원칙에 따라 허구를 행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문학가 장학성의 말대로 문학의 형상은 작가가 어떤 사상과 의도를 표현하는 수요에 따라 허구를 행하고 과장된 상상을 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물상을 객관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수필은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진실의 나열인 것입니다.
지연희: 창작은 반드시 진실성을 요구합니다. 시든 소설이든 현실을 반영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문학의 원초적인 요소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역사성의 진실성과는 확연히 구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묘사 사건이 모두 현실 그대로 실재하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제 생활보다도 더 집중적이고 더욱 개괄적이며 고차원적이기도 하고 아름다움의 세계로, 또 언어 밖의 세계이기 때문에 허구를 배척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구는 거짓을 사실 밖의 진실로 인식시키는 문학적 상승장치인 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권남희: 그렇습니다. 수필가 공덕룡씨는 ‘다시 허구를 논한다’에서 “역사는 있었던 사실을 기록하는 일이고 문학은 있을 법한 일을 서술하는 일이다. 따라서 상상이나 허구가 가미되지 않은 글은 마른 모래로 어떤 형상을 빚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물을 형상화하는 문학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고 볼 때 허구의 기법은 당연한 문학적 장치라고 생각됩니다. ‘옛집의 아이’를 쓴 월터 페이터가 주장한 낭만적 도덕관과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요.
정주환: 이제 화제를 바꿔 보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작가적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가정신의 치열성이란 말로 대체해도 무방하리라 생각됩니다. 앞에서 권남희 선생이 지적한 ‘수필의 다양성 부족’과 김선화 선생이 지적한 ‘어떻게 쓸 것인가’하는 문제는 수필문학 존립의 한계성이 아닌, 순전히 작가적인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작가적인 책임의 한계를 짚어보겠습니다.
김선화: 독자의 마음을 감화시킬 내용의 수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의 원초적인 곳까지 들여다보아 독자의 답답한 심중까지를 헤아릴 줄 아는 수필가, 그래서 독자의 가슴이 우물 청소를 한 것처럼 시원해지는 기능을 꾀하는 수필, 이것이 바로 수필가의 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문학은 어떠한 형태로든 그 시대를 반영한다’는 말이 있듯이 진실을 바탕으로 하는 수필에서는 더욱 이것이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수필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조명하는 정신문화사적인 글입니다. 지적 충족에서 오는 쾌락이기도 하고, 삶의 본질을 반추하는데서 맛보는 심적 정화일수도 있습니다. 수필의 이상(理想)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흐름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수필의 전통성을 훼손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미래수필의 새로움을 추구해 나가는데 게을러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필은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본질을 다룬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작가적 책임이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김사연: 우리의 고전에서 볼 수 있는 이곡의 ‘차마설’, 정포의 ‘가을의 기도’, 이규보의 ‘이와 개’, 석식 영암의 ‘국화 이야기’ 등은 우리 대표에세이에서 운동을 벌이고 있는 짧은 수필의 한 표본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자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작가들이 전혀 이런 작품을 읽지 않고 글을 쓰니 좋은 수필을 쓸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지연희: 창고가 비면 곡물을 꺼낼 수 없겠지요. 우선 취미로 쓰는 글이라는 생각에서 탈피한다면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세밀한 시선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일과 모든 사물이나 의미의 세계가 내포하고 있는 존재의미를 확인해 나가는 작업이어야 합니다. 여기로 쓰는 작업이 아닌 생명 존재의 이유로 다가갈 수 있을 때, 다소나마 모든 써야할 이유들과 소통되어 좋은 글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권남희: 다문화 시대에서의 작가활동은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 6세어린이의 정보량이 과거 60세성인보다 많을 만큼 볼거리와 정보에 노출된 시대인데, 평범한 소재 몇 가지를 감상적으로 끄적거렸다가는 외면당하기 쉽지요. 신뢰를 쌓아주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문학이 아닌 다른 분야를 접해보고 사회과학 분야의 책도 부지런히 읽어서 사고의 폭을 넓혀야겠지요. 그래야만 상투적이고 남이 이미 쓴 글, 똑같이 반복하는 뻔한 글을 쓰지 않을 확률이 높아지지요. 정통성은 중요하지만 그 정통성도 얼마나 애매한가요? 우리가 배운 문학은 맛보기식의 고전작품 몇 편과 동양인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유럽 지식인들이 발표한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에드워드 사이드 저서 ‘오리엔탈리즘’을 보면 한국의 7080세대가 아무 저항 의식 없이 유럽의 식민자적 태도와 문화적 우월감을 그들의 문학작품을 읽어주면서 받아들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서구문학에 젖어있다 보니 비서구문학인들에 대한 정보도 없을뿐더러, 단편적으로 다른 지역 작가들의 글과 만난다하더라도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그럴 때마다 절망과 무기력함을 느끼곤 합니다. 이제 우물 안 개구리식의 길들여진 문학세계에서 벗어나 독창성을 키우기 위해 적극적인 독서와 엉뚱한 글쓰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주환: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많은 책을 읽어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겠고, 다음으로 작가의 치열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여기에 동감합니다. 샤르트르의 ‘구토(嘔吐)’는 그의 최초의 작품이면서도 예술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마무리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수십 번의 개작 끝에 이루어진 작가의 집념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존재의 우연성’을 주제로 그의 실존 철학을 소설화한 이 작품은 시적인 이미지와 형이상학적인 이미지를 교묘히 혼합하여 주인공 로캉댕의 의식이 구토로 향하는 계기를 규명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처럼 문학이란 인간의 존재론적인 문제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과 치열한 작가정신이 뒤따르지 않고는 좋은 수필이 탄생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작가 정신의 치열성은 여기에서 마무리 짓고 신선한 소재로서의 수필에 대한 얘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소재가 신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면 신선한 소재를 취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견을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지연희: 작가정신이란 늘 새로움에 대한 변화모색에 있다고 봅니다. 새로움이란 것은 현재와는 다르다는 말로, 우리가 지금껏 써온 수필에서 좀더 다른 수법을 취하자는 것인데 그러자면 우선 수필작가들이 어떤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자기반성이 우선되지 않는 한 새로움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웅크린 내 안의 세계만으로는 광활한 대지가 품고 있는 역동하는 내일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미래수필 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은 기존의 것들을 파괴하고 부수어 새로운 것을 세우자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여진 것들에 대한 바탕을 지키고, 우리가 알지 못한 세계에 대한 눈뜸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과의 감미로운 화합을 꾀하는 일입니다. 감추어진 것 세상에 끌어올리기, 새로운 세상에 대한 팔 벌림이야 말로 독자의 눈을 띄우는 단초가 될 것입니다.
권남희: 그렇습니다. 멀리 내다보는 눈을 키워야겠지요. 또한 예언자적 정신으로 사회 흐름을 읽어야할 것 같습니다. 올더스 헉슬리가 미래사회를 내다보며 ‘멋진 신세계’를 발표했듯이 ‘개미’의 작가 베르베르는 과학을 통해 작품 소재를 찾고 세계인들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수필쓰기도 책임의식이 수반되는 깊은 사유의 흔적과 행동가의 실천정신이 뒷받침돼야 하지 않을까요.
김사연: 그런 점에서 작가는 전문성과 개성을 겸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는 항상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고 있기에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작가는 고행의 길을 떠나는 자세로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김선화: 참신한 소재 찾기는 모든 문학인들의 관건일 것입니다. 좋은 소재를 만났을 때 작가는 글의 반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흔히들 호소하는 ‘소재의 한계성’이란 말을 들을 때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글거리가 부족한 게 아니라 작가 스스로 사고의 폭이 크게 열려있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는 것일 테지요. 그런 점에서 작가의 의식은 항상 열려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소재를 잡는데 있어 과히 어렵지 않겠지요. 작은 씨 톨 하나에서도 무진장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번뜩이는 정신이,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수필에 있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떠한 소재를 택하든 문장의 흐름이 글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봅니다.
정주환: 신선한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하신 말씀에 대해 동감합니다. 톨스토이나 카프카, 또는 알베르, 까뮈는 항상 사물을 큰 틀에서 생각하고 그것을 분석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신선한 소재를 독자들에게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수필의 교재로 “동문선”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과연 수필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 진수(眞髓)를 맛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다양한 소재들을 만날 수가 있을 뿐 아니라 수필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전에서 볼 수 있는 이곡의 ‘차마설’, 정포의 ‘가을의 기도’, 이규보의 ‘이와 개’, 석식영암의 ‘국화 이야기’ 등은 우리 대표에세이에서 운동을 벌이고 있는 짧은 수필의 한 표본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자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작가들이 전혀 이런 작품을 읽지 않고는 좋은 수필을 쓸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지연희: 문학 작품 속의 소재는 주제가 안고 가야할 재료들입니다. 때문에 무엇을 쓰겠다는 목적의식이 우선되어져야 하고 그 재료의 어떤 선택이 글의 명암을 좌우합니다. 소재 선택의 안목은 필자의 사고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글을 쓰고 있는지, 어떤 철학을 지니고 글을 쓰고 있는지 반성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작가는 펜을 들기 전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오늘날 삼국지 같은 대 문학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작가로서 구원의 정신 내지, 시대적인 책임의 결여로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인간 인식의 한계성을 넘어서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의 가슴에 신을 멀리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권남희: 배움은 끝이 없지만 개인의 창의력 있는 수용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문학지를 보면 발행인의 의도에 따라 발표되는 작품이 선별되다보니 천편일률적인 글이 실리는 경우도 확인했습니다. 크게 성공하려면 크게 모험하라는 말도 있는데 우리 모두 대가 콤플렉스에 갇혀있는 건 사실이지요. 좋은 작품을 교재로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세는 훌륭하지만 그것이 자칫 작품 복제로 가서는 안 되겠지요. 미술 실기를 배울 때 명화를 수없이 베껴보는 훈련도 하는데 문학에서도 교재는 기초 데생을 위한 뒷받침일 뿐입니다. 현재 프랑스에서 해마다 50만부 이상씩 팔리는 책을 쓰는 신세대작가 노통브는 인터뷰에서 ‘나는 나다. 닮고 싶은 작가는 없다. 나는 단지 쓰고 또 쓰고 많은 책을 읽을 뿐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사연: 그래서 작가는 범인들과 차별화된 사상과 맑은 영혼을 간직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평범한 인생철학에서는 대중을 감동시킬 수 있는 작품이 절대로 탄생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주환: 세 분 말씀에 동감합니다. 실존주의 입장에서 쓴 카프카의 변신, 기독교입장에서 쓴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 원죄입장에서 쓴 다니엘 호오돈의 주홍글씨 등은 모두 종교와 철학에서 얻어낸 작품들이듯이 종교에 의하지 않고는 수필도 인간의 정체성을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지연희: 그렇습니다. 유태교의 편견을 다룬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 걸작이지 않습니까. 앙드레 지이드의 ‘전원교향악’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에게 신은 그 어떤 신일지라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신으로부터 생명을 유지하고, 신으로부터 죽음까지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황동규 시인의 시 ‘풍장’을 다시 읽었는데 바람 속에 놓인 알몸의 사자(死者)가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수평의 점으로 인식되고 있는 그 평온한 벌거벗음은 죽음이상의 세계를 믿는 믿음입니다. 죽음을 향해 매일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삶이 때때로 두렵기도 하고 살아간다는 정체성을 찾지 못할 때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신은 인간의 의식 속에 숨쉬는 모든 변화의 끈으로 묶여있기에 참다운 가치를 세우고 인간 본연의 삶을 그리는 수필문학의 핵이 될 수 있습니다.
권남희: 하지만 종교를 통한 수필문학은 지엽적이지 않을까요. 박애정신이 모든 인간 구원에 있고 종교에 있다는 일방적 사고는 지나치게 계몽적으로 흘러 위험하다고 봅니다. 장안의 인기였던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 역시 장자를 현대적적으로 접근한 수필이고 보면 이러한 탐색도 모색할 법합니다.
김사연: 경사류를 현대적인 입장에서 다시 조명해보는 것도 참 좋은 발상일 것 같습니다.
정주환: 동문선에 이규보의 ‘괴토실설(塊土室說)’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을 연상하게 하는 우수한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토실, 즉 굴을 만들어 놓고는 추울 때 그 속에 들어가 부인네들이 길쌈하기에 좋고 손이 얼어터지지 않아서 안성맞춤이라고 말하자, 이규보는 당장 헐라 이르고는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운 것이 하늘의 이치인데 어찌 그것을 거역하려고 드느냐”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오늘에 처한 현대인들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학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유전자 정보 해독. DNA조작이니 체세포분류니 하는 것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데 그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작가는 인간이 신이 되는 오만성을 경계하는 작품 활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수필의 신선한 소재가 된다고 보입니다.
권남희: 작가의 현실참여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위협받을까 두려워 말하지 못하는 미래사회의 운명이나 인간성 규명을 작가들은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줄기세포를 통해 인간 복제를 가능하게 한 서울대 황우석 교수를 국빈 대우하는 현실은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동양인의 유전자정보까지 해독해서 판매회사를 세운 미국의 ‘셀레라’를 모델로 한 작품도 써볼만하겠지요. 그동안 수필인의 소극적 현실참여 자세까지 다른 장르에 비교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종교 혁명 못지않은, 정보화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이 시대 작가활동은 더 험난할 것 같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정신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하겠습니다.
김사연: 자가용은 인간에게 생활의 편리한 수단의 하나인데 시간만 나면 닦고 작은 흠집에도 상심하는 등 과잉 집착을 하다보니 자가용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또 인간이 만든 로봇에 의해 인류가 지배를 당하는 경우도 있고, 새로 개발한 심장병 치료제의 부작용이 비아그라의 탄생을 부른 경우, 그리고 자연환경파괴가 인류의 종말을 재촉하는 경우 등 본의를 망각하는 예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정주환: 인간은 자기들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으로 지구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 우주에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데 인간도 그 중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새나, 기생충 내지 미생물을 보잘 것 없는 생명체로 보지만 신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인간과 대등한 존재일 것입니다. 또 그것이 인간에게 해도 주지만 유익도 주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에서 나온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생명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수필 창작이 우리 시대에 요구된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지극히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인물중심이어서 벌써 무엇을 쓸려고 하는지 알아버리는 단순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권남희: 원래 인간의 마음속에는 다양한 인물이 살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수필에서는 언제나 ‘나’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지다보니 남에게 보여지는 ‘나’를 의식하며 주변 시선에 억압을 받게 됩니다. 당연히 작품 속에서의 ‘나’는 수많은 배경을 가진 나인데도 불구하고 가식적이고 평범한 인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양심적인 소시민인 ‘나’는 글 속에서 관찰자일 뿐 행동하는 ‘나’가 없는 것입니다. 좀 더 나에 대해 정직해야 점화력 있는 글이 써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서 거리를 두고 자기도취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특성을 다각도에서 찾아보고 개성을 극대화시켜 작품 속에 등장시키는 시도도 필요합니다.
지연희: 수필의 화자는 절대적 ‘나’입니다. 만약 수필 속의 화자가 내가 아닌 타자의 목소리라면 이 글은 수필이라는 이름을 지닐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다만 일인칭의 ‘나’(화자)의 인물을 지켜나가며 화자의 개성을 살려낸다는 의미는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을 법합니다. 수필쓰기의 방법론이 되겠습니다만 그야말로 보자기 속에 싸인 ‘나’를 서서히 풀어내는 기법으로 독자를 긴장하게 하고 흥미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윤모촌 선생의 「촌모씨의 하루」라는 수필이 생각납니다. 수필 속의 화자는 객관적 시선으로 ‘촌모씨(필자)’의 하루를 들여다봅니다. 짧은, 즉 장편(掌篇)소설인 듯 착각하게 하는 이 수필은 아마도 수필의 필자를 확인하고 읽게 되는 독자의 이해로부터 유도한 수필쓰기의 변화입니다. 촌모씨라는 이름으로 시작되는 하루의 이야기는 사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독자에게 인식시켜 주지만 반면 많은 상상력을 부여합니다.
김사연: 소설과 수필의 접목은 결과적으로 독자들에게 관심을 유발시키고 문학적 감동을 가슴 깊이 심어주는 촉매가 된다고 봅니다. 또한 사물의 의인화를 통한 수필, 인간과 동․식물 혹은 자연과의 대화를 수필의 주제로 삼는 것도 미래 수필의 새로운 도전이라고 봅니다.
김선화: 수필에서 작품 속의 나는 곧 화자 자신이고, 이 화자는 자신이 그려내는 문체를 통해 그 개성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즉 화자인 ‘나’의 성격이 수동적인지 능동적인지도 문체에서 드러나고, 온유한 성품인지 강성의 소유자인지도 문체에서 어느 정도는 판가름 나는 것이지요. 화자가 작품 속에 얼마만큼 녹아드느냐의 차이에서 평면적일수도 있고 입체적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의 성격에 따라, 그리고 작가의 의도에 의하여, 동적(動的)일수도 있고 지극히 정적(靜的)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소재나 구성, 그리고 표현 등, 어느 편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글을 다루었으면 하는 게 저의 바람입니다. 새롭게 만나는 작품들마다에 맨얼굴로 다시 시작해야 글마다의 독특한 기운이 느껴지니까요. 그럴 때 작가는 작품 편 편마다에 충실할 수 있고, 독자는 문장 하나하나에 녹아든 작가를 만날 수 있겠지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글쓴이의 성향이 문장 속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웬만한 수준의 독자라면 그것을 잘 찾아 읽습니다. 하지만 타 장르와 비교할 때 노출의 한계가 따르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미래수필문학의 변화를 위해 무한한 노력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속되지 않게 자신을 드러내는 기법 등에 대해 다양하게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변화를 위해 새로운 기법을 꾀하긴 하되, 수필의 전통성을 잊지는 말자는 말씀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정주환: 미래 수필에 대한 변화에 대하여 다양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수필의 특성에서 구성의 원리, 그리고 소재의 변화에 대한 요구, 그리고 작가의 책임에까지 실로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붓 가는대로 쓰는 문학, 개성의 문학, 자기 고백의 문학이라는 기존의 수필문학의 잘못된 특질이 수정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특질이라기보다는 모든 문학이 갖는 공통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집필한 <현대수필 창작입문>이란 책에 이미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붓 가는대로’를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라는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논의는 학문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고 마무리 짓겠습니다.
1990년『날개』(이상), 『무진기행』(김승옥), 『이 황량한 역에서』(이문열) 등의 작품을 묶어서 ‘에세이소설’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세이소설이 자리 잡기는 훨씬 그 이전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마스만의『마의 산』, 무질의『특성 없는 남자』, 지드의『좁은 문』, 릴케의『말테의 수기』는 에세이적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유기』나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황순원의 『소나기』도 에세이풍의 소설로 봅니다. ‘새로운 수필’이라면 결국 과거의 탈을 벗고 좀더 참신하고 좋은 수필, 다시 말하자면 독자가 찾는 수필을 쓰는 방향으로 수필이 변화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의식에서 탈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수필이란 결국 시적이면서도 소설적이고 그러면서도 수필적인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오영 선생의 수필이나 김동필 선생의 수필을 보면 그런 요소를 쉽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필에서 극적 구성이나 시적인 분위기가 매우 요구된다고 생각됩니다. 작가의 학문적인 연구 없이 수필은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얘기하는 것도 삼가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우리들의 좌담이 한국미래 수필의 한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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