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고려장

이예경 2014. 10. 9. 10:16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일본 영화를 비디오로 보았다. 이 영화는 전해 오는 전설을 소재로 한 일본판 고려장의 이야기이다. 시대를 알 수 없는 고대의 어느 산마을에 70세가 된 노인은 깊은 산에 갖다 버리도록 한 법이 있었다. 절대 과제인 식량을 축내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 마을의 사람들은 한정된 산지를 개간하여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생산에 기여할 수 없는 나이에 이른 부모는 쓸모없는 식충이에 불과하다. 살아남아야만 하는 나머지 가족들을 위하여 노인들은 희생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모를 유기해야 하는 그 죄의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산 자를 치유하는 아름다운 명분이 있어야 했다.
그들은 그 말도 안 되는 법을 권위와 미화된 가식으로 포장을 하여 자기들을 합리화한다. 신의 이름으로, 전설의 이름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스스로를 기만한다. 나라야마 산에는 산신령이 살고 있으며 노인들은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산 위의 낙원에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의심이 가더라도 법에 저항할 수는 없다. 법을 어기면 온 가족이 생매장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 옛날, 그런 소집단에서도 처절한 생존의 율법은 그만큼 엄격했다.
맏아들인 다츠헤이는 결국 법에 맞서지 못하고 가족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어머니 오닌을 지게에 지고 나라야마 산으로 떠난다. 골짜기에 다다랐지만 그곳은 천상의 낙원이 아닌 황량하고 음습한 죽음의 계곡이었다. 아름다운 전설의 실체를 안 그는 충격을 받았지만 결국 산 자를 위한 율법에 굴복하고 만다.
이 영화의 백미는 마지막 장면이다. 오닌을 산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온 다츠헤이는 진실의 참모습을 한마디도 발설하지 못한 채 그의 아내와 며느리가 자기 어머니의 옷을 입고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일상을 맞는 모습을 보아 버린다. 그리고 화면엔 해골 더미로 가득 찬 눈 내리는 나라야마 산 위의 오닌이 합장을 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이 비친다. 즉 산 밑의 삶과 산 위의 죽음을 대비시키며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오닌의 옷을 통하여 그것들은 순환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알려 준다.
죽음을 직시하며 미화시키는 일본인의 속성에 잘 부합되는 이 작품은 주제가 무거운 것인데도 뒷맛이 비참하거나 음침하지는 않다. 왜일까. 그것은 거기서 다루고 있는 죽음이 순리의 죽음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머니의 옷을 대물림해 입는 순리는 어찌 보면 아름답기도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어머니의 장롱을 정리해 드리다가 못 보던 점퍼 두 벌이 나란히 개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빨강과 파랑의 두 점퍼, 그것은 지난해 떠나버린 남동생의 유품이었다. 결코 짧지 않은 침묵 속에서 나는 화석이 될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는 새벽 미사를 갈 때 그 옷을 입고 가면 따뜻하다며 애써 평온하려 하셨다. 얇은 한 장의 점퍼가 뭐 그리 대단한 보온력이 있으랴마는 그 점퍼를 통하여 어머니는 아들의 영혼과 교감하기를 원했고 아들의 따스한 훈기를 감촉하고 싶었으리라. 옷에는 옷의 정령이 살고 있을테니까 그 정령은 아들의 넋일 테니까. 순리의 대물림이 아름답다면 순리를 부정하는 대물림은 용인되지 못할 부조리요 비극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수의를 손수 고르셨다. 이건 아니다, 아니다를 수없이 뇌이면서 고르고 또 고르셨다. 아들이 어머니의 수의를 골라야 마땅하고 마땅하거늘. 너무나 당연하여 입에 올릴 필요조차 없는 일이거늘. 그러나 그 당연한 일이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스물 초반에 아버지를, 서른 초반에 첫아들을, 나는 그렇게 떠나보냈다. 이제 또 마흔에 동생을 보낸다. 아버지와의 이별에는 두 해가, 아들과의 이별에는 한 달의 준비 기간이 주어졌고 동생과의 이별은 단 하루, 아니 찰나만이 용납되었다.
작별의 시간이 너무 짧았던 탓일까. 나는 아직도 그의 부재를 인정할 수 없다. 어쩌면 영원히 그럴 수는 없으리라. 일찍 아버지를 여읜 동생은 은연중에 신의 묵시적 허락을 받았으리라 생각했다. 신은 마땅히 죽음에게 그의 영역에서 직경 100미터 이내의 접근을 금했으리라 착각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죽음은 결코 검은 장옷을 걸친 채 연기처럼 느릿느릿 그의 곁으로 다가서지 않았고 꽃 같은 얼굴과 화사한 베일을 쓰고는 느닷없이 등뒤에서 그의 목을 졸랐다. 예고의 총성도 울리지 않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란 괴물.
이른 별리에 대해 원한을 품어 온 나는 이제 또다시 내일을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그리고 도처에 숨어 있는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하다. 아니 절망적인 자해의 늪에 빠져 버리고 싶기도 하다. 중복의 형벌이 가혹하다고 부르짖는 우리에게 그 생각은 또 하나의 교만이라며 오히려 신은 우리를 꾸짖는다. 냉혹한 신, 누가 신의 본질을 사랑이라 정의했는가.
수많은 위로의 말들 중에서 “슬퍼하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는 신의 말씀에 로고스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러나 웬 일인가. ‘신은 죽었다’는 이 짤막한 인간의 말 쪽으로 파토스의 천칭은 자꾸만 기울어지려 한다.
순리가 상식이 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숨이 끊어져서 땅속에 묻힌다 할지라도 남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그 사람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다. 준비된 죽음이든 예기치 못한 죽음이든 그 고통이 영원히 기억된다면 아마도 살아남을 강심장은 이 세상엔 없을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낭만파 시인인 라마르틴은 그토록 사랑하던 연인이 병사한 후, 세월이 갈수록 잊혀지자 이렇게 탄식한다. 망각은 죽은이의 두번째 수의라고.
첫번째 수의는 망자에게 입혀진 물리적인 옷, 애간장이 끊어지는 참담함과 비통함이 가시며 평화가 다시 깃들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그 모든 것들을 털어 버리는 그날이 찾아올 때, 우리는 망자에게 두번째 수의를 입히게 된다.
망각, 그것은 망자에 대한 배신인가, 산 자를 위한 신의 은총인가. 영원히 기억하고 싶던 사랑도 세월이 가면 잊혀지고 치유되지 않을 것 같던 절망도 시간이 흐르면 또 잊혀지고 만다. 신은 우리에게 살을 저미는 고통을 주고는 또 망각이란 역설의 축복이자 저주를 선사하는 것이다. 잔인한 신, 그러나 또 고마운 신.
만약 하늘의 비장의 무기인 두번째 수의가 없다면 우리는 망령들에 둘러싸인 채 폐허의 삶을 살게 되리라. 통한과 비탄이 우리의 이성을 눈멀게 하고 감정만이 살아남아 고삐 풀린 파에톤의 마차처럼 날뛰고 날뛸 때 망각은 어둠의 망토처럼 우리를 감싸며 피 흐르는 상처를 어루만져 주지 않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살아남아 새로운 날들을 살아내지 않는가.
종이 한 장의 차이도 나지 않는 삶과 죽음의 세계, 내 어찌 그 속에 숨어 있는 신의 오묘한 섭리를 알까마는 생명에 관한 일은 내 몫이 아닌 신의 몫, 나에게는 나의 몫이 있는 것이다. 내게 허락된 신의 은총, 그 망각이란 나의 몫이 있기에, 그리고 삶이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유한한 것이기에 나는 주어진 날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리라. (주연아 수필가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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