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비디오산책/주연아

이예경 2014. 10. 9. 10:28

비디오 산책

  나는 영화 감상을 즐긴다.
  몇 년 전만 해도 심야 영화가 허용되어 토요일 밤늦게 느긋이 즐기는 영화 한
편은 우리 부부의 큰 오락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전력 과소비라는 이유로 심야
영화 상영이 폐지된 이후부터는 극장 가는 횟수가 줄었다. 게다가 주차, 예매 등
의 일도 번거롭고 무엇보다도 영화에 대한 취향이 날이 갈수록 남편과 달라진다
는 점 때문에 발걸음은 더욱 뜸해지기만 한다.
  가정주부인 나로서는 조조 프로를  이용하는 편이 좋지만 친구와 약속을 하다
보면 관람 후에 점심을 먹고  약간의 프리 토킹까지 곁들이게 되므로 온통 하루
가 소비된다. 요즈음  강조되는 시 테크적인 면에서 보나 빼앗긴  오락을 되찾자
는 의미에서 보나, 나는 심야 영화의 재상영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가끔은 신문 광고에서  점찍어두었던 영화를 시간 절약상  혼자 빨리 보고 오고
싶기도 하지만 혼자 갈 용기는 없다.
  나의 이러한 소심증에 용기를  준 수필이 있다. '엄마가 오십세에 영화를 보았
다'라는 제목의 글인데 오십이 된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서 조조 영
화를 보러  다니는 내용이다.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남편은  처음에는 기분
나쁘게 생각했으나, 점점 아내의 외로움을 이해하게 된다. 닫힌 세계에서 벗어나
오십세에 이르러  선퍼한 아내의 민중봉기를  격려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내 몰래 따라가 팝콘 한 봉지라도 사서,  극장 안의 청소부에게 부탁하여 전해
주고 싶었다는 그 글을 읽고 가슴이 저릿했었다.  나이를 먹게 되면 누구나 겪게
되는 근원적인 외로움이 실감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오십세에 이르러
혼자서 극장을 갈 수 있게 된다면 그날이 진정한 나의 성년식이 될 것이다.
  각설하고 요즈음 극장  출입 대신 부쩍 늘어난  비디오 문화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물론 영화관에서 보는 느낌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꿩 대신 닭이면 충
분하지 않은가. 11시  넘어서의 비디오 감상은 내가 요즈음 새로  개발한 즐거움
중의 하나다. 조금 유감이  있다면, 나의 곱배기로 영화를 즐기는 남편과는 도무
지 취향이 틀려서 같이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는  주로 성룡 시리즈나 이연걸의 무술 영화,  시체가 벌떡
일어나 뛰어 다니는  강시, 전쟁 이야기, SF영화, 무조건 때려부수는  액션 영화,
그리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악령 영화 같은 것들이다.
  반면 내 취미에 맞는  영화는 남편이 하품을 하며 지루해 한다.  나는 주로 사
랑, 그것도 요즈음 같은 인스턴드식 사랑이  아니라 몹시 고전적이고 순애보적인
그런 영화, 일전에 TV에서 재방영한 (카사블랑카), (애수)같은 영화나 스릴과 서
스펜스 넘치는 미스터리가 좋다.
  할리우드 냄새를  팍팍 풍기고 눈요기거리가  많은 에로 미스터리,  예를 들면
샤론 스톤의 뇌쇄적인 꼰 다리가 돋보인 (원초적 본능)같은 유의 영화, 조카녀석
의 말을 빌리자면 소위 "따끈한 영화"라면 더욱 좋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는 휴머니티가 넘치는 영화인데 이번 달
에 본 (작은 신의 아이들), (기쁨의 도시), (죽은 시인의 사회)가 참 좋았다.
  (작은 신의 아이들)은  농아학교 선생과 그 학교 졸업생인  귀머거리 여인과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장애인으로 자라오는 동안 생긴 피해의식 때문에  말 배
우기를 거부하고 그의 진실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여인을 남자는 안타깝게 사랑
한다.
  "당신과 내가  만날 수 있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적막하지도  않은,
그런 공간을 이 세상 어디에선가 찾아내고 싶다"라고 갈망하는 주인공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보였다. 각박한 이 현실이란 공간 속에서 더욱 더.
  같은 소재로 벙어리 여인의 삶을 다룬 칸느  영화제 수상작 (피아노)와 비교해
볼 때 나는  (작은 신의 아이들)이 더  감동적이었다. 여주인공의 뛰어난 연기와
예술적인 면에서 볼 때는 더 우수할지 모르겠지만 즐긴다는 차원에서 영화를 보
는 나에게는, (피아노)의 뒷맛은 뭔가 음산한  느낌이었다. 감동을 받아 엔돌핀이
분비되는 것이 아니라 음침한 그 분위기 때문에 아드레날린이 분비될 것만 같았
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전통과 규율을 내세워 개성을 말살하려는  학교 조직에
대항하는 교사와  그를 따르는 학생들과의  신뢰와 사랑이 주요  테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나는  가슴에 한 가닥 여운을 느꼈다. 교육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요즈음인지라 더욱 긴 여운을...
  (기쁨의 도시)는  구원과 깨달음을 찾아 인도로  온 한 미국인  의사가 캘커타
빈민가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는 내용인데 우리 영혼의  정화를 위해 한 번
볼 만한 작품이라 여겨진다. 비디오를 통해서 내  삶과 사고의 폭이 얼마나 넓어
졋는지를 알 것만 같다.
  그런데 비디오 감상을  하면서 아쉽게 느껴지는 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것은
예를 들어 (무도회의 수첩)같은  옛날 영화를 보고 싶은데도 볼 길이  없다는 것
이다. 외국에는  전문 비디오 숍이나  라이브러리가 있어 올드  무비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데 우리나라도 비디오  보급률로 보아 이제 시기가 오지 않았나 싶
다.
  다음은 어떤 영화를 보면 조언을 얻고 싶다는 이야기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서편제)의 조감독이 영화  감상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들었다. 비록 시간  관계상 단편적이기는 했으나 참유익한 내용이었다.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저 감상의 차원에서라도 영화에 대한 소개 그리고 비평이 듣고
싶다. 어떤  영화가 실험 영화인지  또는 이 시대를  휩쓰는 포스트머더니즘적인
영화인지, 휴머니즘, 센티멘틀리즘이  가득한 영화인지 사전 정보가 조금 있다면
적어도 킬링 타임의  시행착오는 없을 것 아닌가. 재킷의 설명만  으로는 부족하
다.
  얼마 전  TV에서 (비디오 산책)이란 프로를 보았는데  참 좋은 프로가 개설되
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비평가가 좋은 영화를 소개해주고  조금씩 몇 장면들을 보
여주면서 해설하였다. 여러 종류의 영화를 소개하였는데 나는 (퐁네프의 여인)이
나 (블루벨벳)같은 일종의 컬트 무비라 할 수 있는  유는 좋아하지 않지만 이 프
로의 해설을 본 후 관심을 좀 가져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요즈음 TV를 보면 드라마와 토크쇼가 부쩍 증가한 현상을 볼수 있는데 (비디
오 산책)과 같은 반 오락, 반 교양의 프로에도 시간  배당을 늘여야 하지 않을까.
쿨 미디어로서 TV는  오락적 기능 뿐 아니라 교양적  지능도 중시해야 할 것이
다. 쾌락  추구의 인간본능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 신과 이성적이며  지적인 신
아폴로와의 결합, 즉  오락과 지식의 결합이 적절히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더 이
상 TV를 바보상자라 부를 이유가 없지 않을까.
  다행히 본격적인 교육방송인 EBS에서는 이번 봄에 단행된 프로개편으로 매주
일요일 오후 1시에 (다시  보는 명화)라는 프로를 신설하였다고 한다. 주로 1920
년에서 1970년 까지의  영화를 선정해 방송하는 이  프로는 모든 영화의 대사를
자막으로 처리할 예정이라  한다. TV에서 불문율처럼 되어온 외화의  성우 더빙
은 영화의 진미를 흐려놓는 커다란 장애물이라 생각하므로 더욱 환영할 일이다.
  오늘 밤엔 어떤 비디오를 볼까?
  겨울은 막바지로 접어들어 스르르 은빛 꼬리를  감추려 하는데, 달콤한 코코아
한 잔과 더불어 '따끈한 영화' 한 편이 어떨까요, 여러분.

'명 수필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광성의 수필쓰는법  (0) 2014.10.09
자기벗기기 /주연아  (0) 2014.10.09
연인을 위한 송가 / 주연아   (0) 2014.10.09
고려장  (0) 2014.10.09
촛 * 불  (0) 2014.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