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촛 * 불

이예경 2014. 10. 9. 10:05

촛 불



 이  주  리



하루의 뒷모습을 보는 시간이다. 일상이 낮은 한숨을 쉬며 눕는 시간,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주위는 눈동자 하나도 느낄 수 없는 어둠이다. 어둠과 홀로 대면하는 설레임, 그것은 급행열차와도 같은 일상에서 간이역에 내려 스치는 바람과 열차 자체의 속도감에 다쳤던 가슴을 다독이며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는 나만의 시간이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의 자는 시간이 늦어진 관계로 직장일과 집안일에 지친 하루를 마감하고 내 마음과 마주하는 유일한 시간이 없어져 버렸다. 아이들에게 짐짓 큰소리로 게으른 생활태도를 나무라며 억지로 재워놓고라도 난 이 시간을 즐겨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비타민이 부족해 빈혈에 걸린 내 영혼은 햇빛을 바로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바로 그 시간 초는 우연히 내 눈에 띄었다.
딸아이의 생일에 단 한번 불을 켜고 생일축하노래가 끝난 것으로 제 할 일을 다한 가느다란 초 몇 개가 무심히 식탁 위에 누워있다. 쓰레기통에 버리자니 색깔이며 모양이 예뻐서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서였을까? 반쯤 버려진 상태의 쓰다만 초에 이상하게도 연민이 인다.


 

어디 있을까? 집에 담배 피는 사람이 없으니 라이터가 없는 건 당연했다. 구석구석 성냥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에라, 모르겠다 포기하고 있을 때 전자레인지 뒤에 유황이 아기똥처럼 조금 붙어있는 케익용 성냥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마음먹어 어떤 일을 하려고 해도 바로 그 때 필요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주저앉고 마는……. 한편으론 준비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옆에 있다가 눈에 띄어 불을 밝히는 일과 같은 엄청난 우연. 살다보니 내 앞의 길이 갑자기 없어져 버리는 일도 있었고, 생각지도 않았던 새로운 길이 생기기도 하였다.


 

단 한 개 남아있는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나와 내 숨소리만 들리는 정적. 주위의 것들이 어둠에 묻혀있는 동안 희미한 조도에도 불구하고 반경 몇 미터 안의 것들만이 희열처럼 선명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단 몇 분의 고요와 평화를 마음껏 즐겼다.


 

 

흔히 촛불을 희생에 비유하곤 한다. 자신의 몸을 태워 불을 밝히는 희생은 숭고하다. 그것은 단순히 공기중의 산화라는 화학작용만은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린 촛농에 말없이 한평생의 삶을 실려보내며 침묵으로 타고 있었다. 끊일 듯 이어지는 그 희미한 생명력 앞에, 자신의 몸을 태워 불을 밝히는 숭고한 희생 앞에 왜 나는 이 시간 무릎을 꿇고 싶은 걸까?


 

그러나 나는 촛불의 그런 조용하고도 여성적인 희생정신에 짐짓 이단아가 되고 싶다.
촛불은 몸이 타는 것이 운명이므로 그 희생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희생은 촛불의 주위에 있는 것들의 관점에서 본 것일지도 모른다. 촛불 입장에서 보면 오직 타고있다는 것 자체가 그의 본성이며 그의 의무이며 그의 삶의 방식이 아닐까 하는 약간의 궤변을 가슴 안에 들여놓고 싶은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아포리즘 몇 개를 기억의 그물에서 건져본다
'불꽃은 젖어 있는 불이다.'
'불꽃은 위쪽을 향해서 흐르는 모래시계다.'
난 촛불의 희생정신보다는 내면의 에너지에 촛점을 맞추고 싶다.
인생은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소재로 하면서 빛을 얻기 위해 항상 위를 향해 타고 있는 불꽃과 같다. 모든 불의 속성은 융합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촛불만은 혼자 타기를 원한다.


 

기억속에 유년의 뜨락을 서성이는 시간즈음 불장난 하면 오줌싼다는 할머니 말씀을 귓등으로 흘리며 두개의 촛불을 합쳐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처음엔 합쳐지는것 같아 보여도 다시 거리를 두면 언제 그랬나 싶게 처음처럼 두개의 촛불은 너무도 서슬푸르게 혼자였다. 어쩌다 바람이 불게 되면 한쪽이 꺼져버리는 경우가 있어도 촛불은 융합을 좋아하지 않는듯 보였다.


 

혼자 타면서 혼자 꿈꾸는 것,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며 인생을 사는 원초적 모습 그 자체가 아닐까?
또한 바슐라르는 불꽃은 위쪽을 향해서 흐르는 모래시계라고 말했다.
모래시계는 천천히 그리고 어김없이 아래로 흐른다. 불꽃의 역동적인 에너지는 그런 당연한것을 거스르고 위로 흐르게 하는 독특하고 열정적인 에너지임을 발견한다


 

 

아, 선물용 양초를 찾았다. 크리스마스때 큰애가 내게 선물했던 향내나는 빨간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작고 연약한 케잌용 초를 쉬게 해주었다. 씽크대 찬장위에서 소주잔 하나, 냉장고속 남아있던 소주 한병을 꺼냈다. 식탁위엔 마음껏 태우지 못하고 거센 바람 앞에, 다소 거친 숨결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진 나의 생이 조용히 타고 있었다. 마음껏 분출할 수 없었던 내 에너지가 이 밤 촛불이 되어 겨우 한 촉 밝기의 조도로 졸고있다. 문득 촛불앞 말간 소주잔 안에 내 지나간 시간이 보인다.

 

"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자기와 다시 밥 먹고 같이 잠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해낼 자신이 없단 말이야. 제발 부탁이니 당분간 우리 좀 떨어져 있어보자. 내게 자기 없이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없어?"
나는 그에게 될 수 있는 한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과 함께 시작되었던 유학생활을 거쳐 귀국해서도 그는 여전히 내게 커다란 세계였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정성을 기울여 이루었던 내 한 세계가 그렇게 쓰러지고 있었다. 그동안 그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송곳이 되어 나를 찔렀다. 이상스레 화도 나지 않았다.


 

차가운 내 말에 "잘못했다고 했잖아. 얼마나 더 해야 용서해줄래. 차라리 화를 내라, 주리야. 정말 죽겠다."하는 남편의 모습도 보인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촛불이 꺼질듯 꺼질듯 하다. 불꽃의 눈동자가 의식을 잃고 가물가물하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둘이 갈라 설 때 아이들에게 애정이 더 많은 쪽보다 재력과 직장이 있는 쪽으로 친권과 양육권이 주어진다는 법을 누가 만들었을까? 아이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뒤늦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들고 다니며 싱싱한 이십대 사이에서 면접을 보던 지난날 초라한 내 모습이 보인다.


 

촛불이 지지직 낮은 소리를 낸다. 눈을 한번 깜박이면 그대로 촛불이 사그라들 것 같아 눈물이 나도록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몇년 전 낮엔 직장에서, 밤엔 학원에서 강의를 해야 했던 지친 내 모습이 보인다. 열세시간 일끝의 하루가 가까스로 닫힌 귀가 길, 문득 하늘을 보면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 검은 전선이 가르고 간 하늘 저편에 별빛이 숨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추운날 귀가 길. 내 아이들이 자고 있을 아파트.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던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는 내 모습도 보인다.
 조금 있으면 촛불의 마지막 임종을 볼 것이다. 가슴이 독한 진통제를 먹은 것처럼 쓰리다.

 

끊일 듯 타오르는 어둠의 정수리
소주잔을 기울여 벽을 바라본다
가느다란 빛을 온몸으로 껴안은 벽
제 할 일 다하고 사위는 몸
그 안타까운 포옹에 눈물이 솟는다


사는 동안 남김없이 쏟는것 욕심일까
보듬어 안은 것이 너무 무겁다


독한 회의,
서글픈 집착,
덫으로 묻힌 마음의 율법,
파닥이는 사랑의 지친 날개
다 태워 보내고
뼈를 녹이는 사그러짐.


시린 촛농에
온몸 흘려보내고
가벼운 날갯짓으로 승천한다


나도 너처럼
뼈까지 타버린 어둠의 가슴에 갇혀
깜빡이며 사위고 있다  <전문>

 

 

마지막으로 소주잔을 기울여 다시 촛불을 보았다.
말간 유리 안에 촛불이 들어와 앉아있다.
다시 노발리스의 아포리즘 몇개를 떠올려본다.

"나무는 꽃피는 불꽃, 인간은 말하는 불꽃, 동물은 떠돌아다니는 불꽃이다."
모든 생물체를 불꽃의 배설물로 보는 극단적인 그의 시각이 왜 이리 가슴에 깊이 각인되는 것일까?
나는 상처받은 채, 존재가치를 무시당한 채 오직 홀로일 자신이 없기 때문에 적당히 둥그러져서 융합되는 삶의 방식을 혐오한다.


불꽃처럼 처절히 홀로 타고 싶다. 내게 주워진 모든 사람과 사물을 조용히 비추이며 자신이 타는 동안 전력을 다해 어둠의 뼈까지 태워버리는 그 역동의 에너지로, 모래시계를 위로 흐르게 하는 힘으로 삶이란 먼 길을 가기를 원한다.


그리고는 어느 날 無의 세계로 아무렇지도 않게 뚜벅뚜벅 걸어 돌아가고 싶다. 모든 생명체는 순간순간 창조의 가치를 획득하며 촛불처럼 타고 있을 뿐이다.
 촛불은 마침내 꺼졌고 나는 어둠 속에 오래오래 앉아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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