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자기벗기기 /주연아

이예경 2014. 10. 9. 10:30

제목   : 시보다 짧고 사랑보다도 긴
    작가   : 주연아
    출판사 : 문학수첩
 

      1. 자기 벗기기

    상초동이 시로 와 닿은 날
 
  오늘 밤 가로등불은 유난히도 키가 크고  혼자 않는 저녁상은 유난히도 썰렁하다. 하
루해 도심에 나가 위말리다 돌아와도 아이들은 학원 가고 없고... 나를 맞아주고 대화할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해거름이 찾아오는  것은 마치 더위에 물 한 그릇 받아들 듯 큰
사면을 받은 것 같다.
  창문 앞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니 조각보 같은 하늘이 나무가지 위에 걸려 있다. 요것
이 내몫의 하늘인가. 요만한 평화가 내 몫인가. 나뭇가지 앉은 새처럼 아이들은  날아가
고 썰물이 나간 갯벌의 오두막집처럼 나는 오도커니 남아 있다.
  그래, 나무는 바람의 집이로구나.
  그래, 나는 새들의 둥지로구나.
  풀벌레 울음소리가 하나씩 켜놓고 간  별자리를 바라본다. 가을은 서느롭고 밤하늘도
서느롭다. 귀뚜리가 귀뚤  울고 해바라기는 등물끄고 외로음은  꽃씨처럼 영글어가는데
이렇게 무로한 날 난 늘 피아노의 하얀 건반을 눌러본다.
  땅! 하고 살짝 새끼손가락으로 건드리니 그  조그만 음량에 풀끝 이슬이 맺히고  땅!
하고 인지로 때리니 어느새 아이들이 새떼처럼 날아온다.
  어느덧 엄지로 땅 땅 땅!  그리고 나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꼭 산에 올라야만 절정인
가.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드리며 나는 고개를 넘고,. 꽃도 피고 , 새도 운다.
  하룻밤 자고 나면 '나'라는 배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수평선을 향해  멀어져가고
있는데 지금의 나로서는  이 조그만 평화에 안주하는 것말고  다른  그 무엇의 포로가
될 것인가.
  "모든 것이 헛되고도  헛되도다"라고 노래한 솔로몬 왕에게 지헤를  주셨듯이 나에게
도 평화를 주소서.  너무 크고 화려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조금은 산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겸손하되 비굴하지 않도록 하여주소서.
  용광로에서 구워내지 않은 쇠는  영원히 무쇠이지 강철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깨달음
이란 쓰고 단 맛 후에 오는 것, 허무 후에 터듯하는 것이리.
  환희와 오뇌는 바로 이웃해 살지만 이 거리는 천리만리 먼 자리에 있다, 환희의 길을
몇 만 리 달려와 극치에 이르는 것이 비애, 그 비애의 길을 몇 만 리 달려가 극점에 이
른 것이 환희하면,  비애를 지불할 대로 지불한 후에야 환희의  참맛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리라.
  행복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  보다 짧고 사랑보다 긴, 내가 가꾼 이 작은 동산에서  오
늘 밤 나는 가시 돋친  이야기도 털어내고 차라리 향기조차 버린 한 포기 산꽃으로 가
만히 서고 싶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 비로자나불의 미소를 닮고 싶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명주실로  베짜는 소리, 나는 어느새 환생한  클로토 여신이 되어
운명을 짜낸다. 내 노래를 수놓는다.

  상초동
 
  하루해 도심에 나가
  진종일을 헤매다가
  한강을 넘어서면
  우리 집은 옛 상초동
  창 밖은 긴 강물이던가
  적막만 쌓여 있다.
 
  두텁고 무거운 어둠은
  시간의 커튼으로 가리우고
  창 밖에 머무는 말씀
  화두로 듣는 이 밤
  작설차 풀어논 향기
  물소리로 듣는다.

  달빛도 잠겼을까
  밀려오는 은빛 물결
  보세란 가는 잎새
  흔드리는 적막 있어
  진한 밤 고요한 향기가
  내 마음으로 흐른다.

*상초동 : 서초동의 옛 이름

 

    <나의 길을 찾아>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글을 쓰기보다는 간결하
게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글을 쓰고 싶다. 거기에 유머와 위트, 그리고 약간의  새타이
어( Sarire) 가 곁들여 잇다면 더욱 좋은 것이다. 마음에 여유를 주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땐 센티멘틀한 미사여구를 적절히 구사하면 이른바  문학소녀의
대우를 받았는데 나는 그런 글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내 적성에 맞는 글을 쓰
고 싶었고 아울러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언론은 급박해진 문학'  이라고 한 매튜
아놀드의 말을 몹시 마음에 들어가면서.
  그러나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고 나는 편한함에 길들여져갔다.  내 나이 서른넷일
때 나는 문득문득 두렵다는 생각이 찾아들곤  했다. 이대로 안주하여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다가돌 늙음, 허탈, 후회 같은  감정들을 어떻게 감당할까 싶었다. 쉰이 되고 예순
의 고개를 넘으면서 내가  증오해 마지않는 비계덩어리의 여인이 되지 말란 보장이 어
디 있는가. 생각할수록 우울한 일이었다. 내 인생을 후회없이 투자할 무엇을 찾아야  했
고 어딘가에 소속감이 필요했다.
  시작이 절반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때맞춰 기회가 닿은  시
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많은 좋은 작픔들을 대하고 습작을  하는 동안 몹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고 드디어 등단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아래와 같은 소감을 썼다.

  삼십의 중반에 들어선  지금 어느덧 나 자신은 비  내린 후 자취없이 스러진 무지개
마냥 묻혀져버리고, 세월이란  이름으로, 애정이란 이름으로, 나  아닌 무엇을 위해서만
살아온듯한 느낌이다.
  이제 나는 새로은 우주에 눈을 뜬다. 막 부화하여 눈을 뜬 어린새새끼처럼 무한한 가
능성의 세계를 향하여 비상하려 한다. 때로는  폭풍우 속에 선 겨울 문풍지처럼 파들거
리기도 하겠지만 언젠가는 저 무한한 우주 한 끝에 걸어놓을 찬란한 나의 무지개를 찾
아서 나의무지개를 찾아서 끝없는 날갯짓을 할 것이다.

  시조작가이신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우리 고유의 한과 정서가 담긴 시조에 매
료되어 나는 창작과 동시에 대학원을 가기로  결심하였다. 졸업한 지 10년 넘어 학문에
도전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끝없는 갈증과 뭔지 모를 나의 무지
개를 찾아서 끝없는 갈증과 뭔지 모를 초조함에 시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 같다.
  기초도 없는 상태에서  전과를 하여 공부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빠릿빠릿한 학생들
틈에서 아줌마 티를 내지 않고 노력해야 된다는  점, 이 두 가지가 몹시 나를 주춤거리
게 했다. 그러나 나는 의욕이 넘친 나머지  황진이가 되어 가야금을 뜯는 꿈까지 꿀 지
경이었다.
  국문과 인간 관계가 몹시  중시되는 분위기인 듯했다. 교수와 학생, 학생들끼리의  관
계, 이 모든 석이 뭔가  끈끈한 끈으로 연결된 것 같았다. 나는 시조 공부에 전념할 것
을 다짐하였다.
  집과 학교와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세 학기를 보냈다. 고전문학이란, 참고서적을  찾아
보기도 힘이 들었다. 누렇게 빛바랜 책, 거기다 퀴퀴한 냄새까지 난다. 한글보다 한문이
더 많고 횡서가  아닌 종서도 많다. 학생들은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하고 틈틈이 한문과
시조창을 들으러 다니기도 하였다.
  한자, 생각도 해도 골이 아팠다. 그뿐인가. 시조창, 요즈음은 서편제니  동편제니 하여
가슴에 울리는 그 무엇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당시 나의 수준으로 청승맞게 곡하는
소리처럼 들리기만 하였다. 시조는 점점 뒷전이 되고 현대문, 특히 산문이 좋아지기  시
작하였다. 드디어  세 학기를 마친 후 나는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나는 또 한 번의  시행착오를 한 것이다. 기사를 쓰기 위해 신문방송학과를 갔고,  글
쓰기를 위하여 국문과를 택했다. 그러나 창작과 학문적인 연구, 분석은 엄연히 다른  것
이었다. 글쓰기가 목적이라면 문예창작과를  갔어야 했다. 아니면 그 시간에 다른  작가
들의 글을 부지런히 읽든지...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이값도  못하고 도중하차라니... 특히  K교수님께 죄송,죄송
하였다. 이 늙은 아줌마에게 분에 넘치는 도움을 주셨던 고마우신 선생님, 내  수필집이
나오는 날, 반드시 찾아뵈리라,
  돌이켜보면 다시 펼친 동화책의 이야기처럼 또렷이 떠오른다.
  이어령 교수님의 기호학  강의, 마광수 교수님의 현대시  이론, 나는 당시 그  저명한
이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되어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기호학은 도대체 무슨 내용인
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마치 요즘 세계를 휩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명백히 설명
할 수 없듯이... 시험지를 받고 떨리는 가슴으로 '에라 모르겠다.'아는  것은 다써놓고 보
자'는 심사로, 문제와 관련이  있든 없든 가듯메웠더니 성의를 갸륵하게 여기셨던지  성
적이 나쁘지는 않았다.
  또 한 분, 그 유명한  마광수 교수님의 현대시 이론을 듣기 위하여 이웃의 Y대로 원
정까지 갔었다. 명성과는 달리 수업 도중엔  그렇게 진한 말씀은 별로 하지 않으셨으며
시험문제는 자유주의자답게 내셨다. 제목 : 자유, 리포트지 10장이었다. 이것 역시 괜찮
은 점수를 받았으나 정작 시조에는 영 맥을 못 추고 고개를 떨구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로써 나는 학교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비우고 나의 관심인 산문을 쓰기 시작하였
다. 수필, 아아, 나는 왜  너를 이렇게 늦게 만났던고, 지독한 산고를 겪고 아이를  분만
한 산모의 기쁨 같은 것을 느끼며 내가 낳은 글들을 읽어보는 날들이 많아졌다. 10시부
터 시작되는 나만의 시간, 이장희 노래 가사처럼  모두가 잠든 고요한 이 밤에 한 잔의
커피와 함께 시작하는 자그마한  축제,나지막한 음악 소리와 함께, 행복은 이렇게  오더
니라...
  내가 아는 어느 작가는 한밤중에 작업을  하면 감정이 고조되어 과장, 그리고 흥분의
요소를 띤 작품이 나오기가  쉬우므로 일부러 오전 한나절을 택한다고 하지만 나는 올
빼미 체질이지 꼬끼오 수탉의 체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습작을 거친 후 나는 또다시 수필로 등단을 하게 되었다. 6년 전 등단했던 그날
을 되살리며 나는 소감을 썼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불혹의 첫 달에  받은 세상에서 제일 큰 선물, 이것을  얻은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서른의 긴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나는  수필이란 커다란 창을 통해 다른 사람들
의 인생을 바라보며 심호흡하고 했다. 특히 내가 지치고 힘들 때 거기서 커다란 배움과
위안을 얻기도 했다.
  얻는 즐거움이 컸던 만큼 이제는 아울러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고 싶다. 진국의 설렁
탕과도 같이 내 모든 것이 녹아 있는 글을 함께 나누는 기쁨을 맛보고 싶다.
  글을 쓸 때는 언제나 밥상을 차리는 기분이 된다. 비록 화려하고 세련된 성찬은 아니
지만 내가 차린  이 소박한 밥상에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대접하고 싶다. 그 중에는
물론 미숙한 음식 솜씨에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나 기쁘게 동석하는 사람
도 잇지 않을까.
  지구 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다. 나에게 공감이란 대가를 지불하는 그 누군가가 있
는 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또한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하여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쓴다는 것,.결코 쉽지
않은 이 행위를 통해 무한한 갈증을 해소하고 황홀한 카타르시스를 경헙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선 소식을 들은 직후 성당으로 달려갔다. 아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보잘것없
느 저에게 이렇듯 큰 선물을 또다시 내리시다니...이제부터는 교무금을 꼬박꼬박 절대로
빠지지 않고 내겠으며 액수도 조금 더 올리겠사옵니다. 진짜진짜 감사드리옵니다. 아멘.
 
  참으로 멀고도 먼 길이었다. 이제야 나는  내 갈길을 찾았다. 불혹, 불혹은 적은 나이
는 아니지만 결코 많은 나이도 아니다. 나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의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미래를 향해 힘차게 전진할 것이다.

 

   < 자기 벗기기>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감추고 싶은 욕망과 벗기고 싶은 욕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수도원의 수녀나 수도자들처럼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안으로만 침잠하는 은자의
세계도 있겠고, 자기를 드러내고 필요에  위해서라면 과대포장을 하여서라도 세상의 인
기를 얻고 싶어하는 연예인이나 정치가의 세계도 있을 것이다.
  내부로 한없이 빠져들다 보면  극단의 경우 자페증으로 치달을 수도 있을 것이고 지
나치게 노츨을 허용하다 보면 중세 암흑기의 마녀사냥처럼 그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상
관도 업싱 상대방에  위해 재판되고 그리하여 엉뚱하게  운명이 결정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내 수필을 읽고 어떤이는  너무 벗는다고 하고, 어떤 이는 아직도 멀었다, 더  솔직해
져야 한다고 도 말한다. 사람들은 솔직한 글을 대하면 쾌감을 느낀다. 약점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진솔하게 표현한 글을 보면 가슴으로부터 오는 공감의 소리를 듣게 된다. 약
점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있는 것 이상
으로 남에게 보여주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자신에게 백 퍼센트  만족한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겟는가.  있다면 자가당착에 바진
사람일 것이다. 행복은 약간 부족한 자신을 인정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데서 온다.  모
든 불만은 자신을 보자 나은 사람과 비교하는 상대적 열등감에서 오는 것 아닐까.
  나는 최인호의 산문집 <가족>을 읽고 그의 솔직함에 감동을 받았다. 법정스님마저도
그렇게 솔직하게 노츨하면 가족들이 싫어하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할 정도로 나는 그의
글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인물들을 만났다.
  일본의 카피라이터 출신의  작가 하야시 미리코의 산문집에서도 그의 대담한  노출에
통쾌함을 느꼈다. 300만 부가 팔렸다는 그  산문집에서 독자들은 문학성을 논하기 이전
에 본능적인 통쾌함과 아울러 후련한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왜 수필을 쓰는가.
  내가 수필을 쓰는 이유는 벗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과감히 나를 벗어던짐으로써 황
홀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나르시시즘에 빠지기도 한다. 동시에 남들에게도 읽혀 내 글
에서 또 하나의 자기를 보아내는 공감대를 얻고 싶어서이다. 읽혀지지 않는 글,  독자가
없는 글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많은 독자를 얻는다면 더  좋겠지만 설사 단 한사람의
독자일지라도 그가 내 글을 읽고 공감을 해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내 수필의 의미를 찾
겠다.
  그런데 "네 글을 몇 편만 읽어보면 너에 대해 훤히 감이 잡혀. 사람이 좀 신비스러운
데가 있어야지 뭐하러 자기 자신을 그렇게 적나라하게 해부,분석,고찰을 해서  드러내놓
니. 나는 이해가  안된다"라는 언니의 말이 가끔씩 생각날  때는 갑자기 강한 수치심과
아울러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 때문에 자라처럼 목이 움츠러들기도 한다.
  그러나 벗기가 두려우면 일기를 쓰고 말 일이지 뭣하러 시간적.경제적인 낭비를 감수
하면서 출한이란 과정을 거치는가. 더구나 허구의  글이 아닌 자기 자신의 글인 수필에
서 나성이란 상당한 중시되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수필의 종류에는 생활수필, 철학수필,  관찰수필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골계
미와 장엄미를 갖춘 수필,  그리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수필이 좋다. 수필을  읽으면서
나는 해학과 풍자를 즐기고 싶고, 진한 감동을 받고 싶고, 남의 인생살이를  엿봄으로써
호기심이란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고, 동시에 나날이 급변하는 이 시대에 살아
남기 위하여 발빠른 정보를 얻고 싶기도 하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됫에서  자라나 철저한 도시인의 전형인  나는 인간 탐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편이다. 반면 사물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소위 명수필의 개념을 고향, 나무, 달빛, 귀뚜라미, 난초, 이런 등 등의 자연을
관찰하고 거시서 얻는 영감을 우리네 인생에 비유해서 메시지로 끌어내는 그런 글이라
고 말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세태수필은 명수필이 될 수 없는가. 수필의 소재 선
택에 우열이 있는가.
  지금 40대의 나는 나의 시대의 정서에  맞는 소재를 택하고 싶다. 문학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있지도 않은 정서를 쓰고 싶지 않다.   또한 나에게 감흥이 오지 않는 표현방법
과 단어를 쓸 수는 없다.  내 글이 문학성이 있는지 없는지 또는 상업성이 있을지 없을
지는 관여치 않지만 내 시대의 정서로써 내가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
다.
  이름없는 풀꽃의 애잔함은  눈물겹도록 아름답지만 장미꽃의 가시 돋친 요염함도  눈
부시도록 아름답다.  쪽찐 머리에 등 돌리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조선의 연인도 처연하
게 아름답지만 초미니 스커트에 배꼽티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오늘의 신세대도 발랄
하게 좋지 않은가.
  인간 탐구, 이것이 내가 가장 흥미를 느끼는 내 수필의 소재이다. 
  달나라를 탐험하고 별나라를 정복하는 시대이지만 인간을 탐구하는 일만큼  재미나는
일이 또 있을까.  나는 뭍에 오른 거대한 고래가 되기보다는  깊고 푸른 인간의 심저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  작은 물고기이고 싶다.  거기에는 난류가 있고 한류가  흐르며,
때로는 붉은 산호초와도 만나도 만나고 거대한 암초에 부딪치기도 할 것이다.
  내가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 속에는 수많은  유형의 인물들이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인물들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20세기 오늘의
대한민국 거리를 걸어다닌다.  나는 주변에서  또는 신문 잡지에서 그들을 만나기도 한
다.
  이삼십 년 전의 원로들의 명수필들을 보면  보릿고대, 전쟁 등 지금 우리의 정서와는
다소 맞지 않는 소재를 다룬 것들이 많다.  게다가 지루한 만연채로 씌어진 글도  많다. 
이 글들은 그때의 시대상황에는  맞았을지 모르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나는 이런 수필
을 읽다가 결국은 참지 못하고 중간에 덮어버리는 일이 왕왕 있다.
  세상은 달라졌다.
  영원한 우리의 고전인 흥부전에서도 선량하지만  한 흥부는 무능한 사람이고, 인정머
리없는 놀부가 현실적이란 재해석이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웃나라에서도 덕치의대명사인 유비가 무능한  통치자, 간응이라 일컬어졌던 조조가
카리스마가 있는 유능한 통치자로 긍정적인 재조명을 받고 있지 않은가.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흠잡히지 않을 무난한 글을 쓰고 싶지 않다. 뻔한 거짓말은 더
욱 쓰고 싶지 않다. 관념의 세계 이상향을 그리기보다는 실재로 일어나는 우리의 얘
기들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서 숨쉬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 과정을 통하여  꿀
벌이 벌통에 꿀을 담아  모으듯이 우리의 가슴속에 그날 그날 살아가는 지혜를 축적하
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고 싶다.
  그리하여 내가 쓴  수필 한 편을 읽고 세상  어느 한 모퉁이에서 인간적인 공감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띠고 있을 그 한 사람을 위하여 오늘도 나는 나를 벗는다.

   

<돌아온 탕아>
 
  한가한 어느 날 오후, 누렇게 빛바랜 앨범늘 뒤져보면 지금으로 부터 34년 전, 첫  영
성체를 받고 기념 촬영을 했던 나의 유치원 때 사진을 볼 수 있다.  오글오글 레이스의
미사보를 쓰고 하얀 롱드레스를  입고 동기생들과 찍은 그 사진을 들여다볼 때마다 하
느님 아버지께 죄송스런 마음이 솟아오른다.
  나의 친정은 4대째 내려오는 독실한 가톨린 집안이다.  친척 중에는 신부님이 한 분,
수녀님이 두 분, 사제가 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갔다가 도중에 파기한 사촌
동생도 있다. 나 역시 그토록 어린나이에  하느님의 품안으로 안겨주었다면  34년이 지
난 오늘날은 독실한 신자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 '독실함' 과
는 거리가 먼 나는 참으로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다가 간 성당에서 하품을 하며, '사람에겐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엄마는 왜  내가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지 않고 철없는  나를 가톨릭의 울타리 안으로 밀어넣었을까', '왜
나는 과자도 주고 학용품도 주는 교회에 가지 못하고 엄숙하기만 한 신부님, 그리고 재
미없는 노처녀 사감 선생님 같은 수녀님들이 오락가락하는 성당에가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불평을 하며 중고등학교를 보낸 후에도 계속 냉담자로서의 태도를 바꾸지 않
고 성당을 멀리 하였다.  다른 형제들은 엄마와 함께 열심히 성당을 나가면서 주일학교
선생님, 성가대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어릴 때부터 청개구리 기질이 농후하던  나
는 전혀 개의치 않고 독불장군처럼 외면하였다.
  결혼을 하고서 나는 처음으로,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큰 고난을 겪었다.   아이
를 잃었다.  그때  나는 울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맹세하였었다.  회개하고 열심히  열심
히 성당을 나가겠노라고.
  그러나 작심삼일, 어는 틈엔가  다시 나태해지고 성당 가는 일이 시들하여졌다.  가뭄
에 콩 나듯이 가끔 성당을 가서는 강론시간에 꾸벅꾸벅 졸면서, '왜 성당에서는  강론을
좀더 현실감각에 맞게  하지 못하는가, 개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불평을 하고,
'왜 성모 마리아는 분명 인간인데 우리는 흠숭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느님 외에는  섬기
지 말라는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가', '아담과 이브의 자손인 카인과 아벨은 도대체 누구
와 결혼을 했단  말인가, 세상에는 그들 네 사람 이외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텐
데...'.
  이런 생각을이 꼬리를 물고 떠오를 뿐 신심은 전혀 우러나지 않는 것이다.
  드디어 나는 외도를 하기 시작했다.
  설교로 유명하다는 어는 교회를 나가보았고  능인선원이란 절을 다녀도 보았다. 그뿐
인가. 삼재가 들어돈다는 해에는  서슴지 않고 점술가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명문  프린
스턴을 나와 설득력 있는 설교를 하신다는  목사님의 강론도 들었다. 마치 대학 강의를
듣는 듯 명쾌하게 들어오는 설교, 최고의  나들이 옷을 입은 멋쟁이 신자들이 인상적이
었다. 예배 끝에는 단체복을 입은 성가대원들이 합창을 했고, 어느 음대 교수가  아름다
운 성가를 기가 막힌 솔로로 불러 나는 마치 음악회에 온 착가이 들 정도였다.
  능인선원의 스님, S대  공대르르나오시고 신문기자를 하셨다는 그 스님의  설법 역시
대학 강의를 방불케 하는 유머, 재치가 곁들인 명설법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말씀은 "주부들이여, 여가 활동을 에어로빅에만 허비하지 마시오
그러면 기가 아래로만  몰려 건강에 좋지 않으며 사회전체로  보아도 바람직하지 않소.
그 시간에 부처님의 말씀이 적힌 책 한 권이라도 보는 편이 나을 것이오" 란 말씀이다.
그리고 내 짧은 지식으로는 인과응보란 진리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현세에 불행을 당
하더라도 '오, 이것도 내가 전생에  저지른 죄값이려니' 생각하면 억울한 마음도 덜하지
않겠는가. 세상의 모든 이치는  자기 책임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아주  과학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몸에 딱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으로 불편했고 나의
하느님이 노하시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이렇게  방황의 날을 보내다가 마흔을 넘어
선 어느 날 문득 나는 다시 성당을  나가고 싶어졌다. 까마귀 푸대같은 옷을 입은 수녀
들이 보고 싶어졌고 하품나게 약간은 지루했던 신부님의 강론도 그리워졌다.
  오랫동안 멀리했던 고향을 찾아가듯이 성다에를 다시  가보았다. 내 비록 어릴 적 외
웠던 주요 기도문을 군데군데 잊어버렸더라도, 내  비록 고백할 죄가 하도 많아서 고해
성사를 하지 않아 영성체를 못 모시더라도, 나는 돌아가야만 했다.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장례식날 , 집전하러 오신 이문희 주교님을 보면서  '아
이고 아까워라.저렇게 훤칠하게 잘생기신 분이 왜  고난의 사제의 길을 ...'이란 벼락 맞
아 마땅한 생각을 하질 않나,남은 재산을 통틀어 ##시에 새 성당을 짓고 가신 큰아버지
의 사진을  보면서 '참으로 존경스런 큰아버지,그러나  반만 기부하시고 자식들을  주실
일이지...'라는 방자한 생각을 하지를 않나.
  아아,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주말마다 성당을 가면서염불조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이처럼  '오늘은 무엇을 살까?
수녀님들이 만드신 달기잼? 수사님들이 직접 재배하신 무공해 버섯? 아니 멸치젓이 나
올 때가 되었는 데...'생각하며 성당마당을 두리번두리번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뿐인가.
  요즈음 내가 빠지지 않고 성당에 가는  이유는 주보를 평치자마자 나오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작가 최인호의 글과 정채봉의 <간장종지>를 읽는 맛 때문이다.
  하루라도 불참하면 전화를 하여  전도하는 교회에 비하여 내가 가든,말든, 믿고  싶으
면 믿고 말고 싶으면 말라는 식으로, 철저히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성당,  뜨뜻미
지근한 전도를 하는 성당, 그러나 나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왔다.다시 찾은 고향의  품은
얼마나 푸근한 것이던지...
  하느님 아버지,용서해주시옵소서.
  30여 년을 방황하다 이제는 주님 품안에 완벽하게 다 외우지는 못하여도 이 세상 곳
곳에는 하느님의 모습과 말씀이 아니  계신 곳은 없으며 우리가 눈을 감는 그 순간 우
리의 영혼은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로 훨훨 날아갈 것이란 사실을 의심해 본적도 없사
옵니다.
  천국이 있음을 믿고  지옥의 존재를 믿는 제가 비록  지옥 가는 것이 두려워 성당에
다시 한쪽 발을 디밀었다 하더라도 제발 귀엽게 봐주시고 벌주시지 마시옵소서.
  장례식에 가서 기도하며 앉아  있는 것이  무서워 '레지오' 봉사를 못하는 저를  용서
하여주시옵소서.
  그리고 덧붙여 제가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로 성당에 가는 이유는 게으른 탓이 아니
라 기저귀를 찬 어린아이와도 같이,있는 그대로의 순수하으로 당신을 만나고 싶기 때문
이옵니다. 아멘.

   

    <사투리 콤플렉스>

   TV앵커들의 유창한 말솜씨를  들을 때마다 부럽기도 하고 심통도 난다.  나도 사투
리 억양만 없다면 저들보다도 더 조리있고 세련되게  해낼 수도 있을 텐테...
  신문방송학과를 나온 내가 지금쯤<그것이  알고 싶다.>같은 현장감 물씬나는 프로에
서 명리포터로 명성을 드날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놈의 사투리 억양이 유죄
렷다.
  요즈음의 나는 아마도    소그룹 체질인지, 친한 이들 몇 명이  모이면 세 시간 이고
네 시간이고 누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가도 열 명 이상의 단체
가 되면 수다는커녕 얼굴이 빨개지고 말까지 더듬으며 촌스럽기가지 하다.
  이럴 때마다 나는  '제기랄, 내용이 중요하지 말이 뭐  대수냐'고 자위해보지만 내 이
병은 날이 갈수록 심해만 간다.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참새당대표를 독식하던 내가 아니던가. 그랬는
데, 그랬었는데,서울로 전학온 후로는  매끄러운 서울 말씨에 주눅이 들어 소금에  절인
배추마냥 꿀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사업 관계상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언
니와 오빠는 서울의 중고등학교에 합격을 하여,어머니는 어깨에 힘을 주며 대구를 뜨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전학 관계가 여의치 않아  잠시 가족들과 헤어져  외가에 남게 되
었다.
  어머니는 날 달래느라고 그 당시 구하기  힘들었던 미제 운동화며 잠옷과 가운, 그리
고 빨간 양털이 달린 하얀 가죽 코트를 사다 주셨는데 나는 이 뇌물성 선물에 눈이 어
두워 웃으며 가족들과 작별하였다.
  그러나 일 주일이가고 또 한 주일이 흐르자 어머니가 보고 싶어진 나는 손가락에 침
을 묻혀서 죄없는 안방  창호지 문을 퐁퐁 뚫어가며 그 당시 유행하던 <동백  아가씨>
를 청승맞게 불렀다고 한다.
  땅거미가 내려 사방은 어둑어둑한데  뚫린 문그멍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며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를 읊조리는 내 꼬락서니를 보고,
외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어머니에게 하루빨리 데리고 가라고 전화를 하신 모양이었
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여자 반장으로  뽑혀 인사말까지 마치고 나오는데 선생니께
서 부르셨다. 어머니가 오셨으니 빨리 가보란 것이었다.  어머니는 황급히   "서울 친척
집에 중국서 유명한 한의사가왔으니 돌아가기  전에 빨리 가서 진맥을 받아야 한다"  는
것이었다.
  신장염을 앓아 건강치 못햇던 나는 선생님과 급우들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서울행
기차를 탔다.  한의사 얘기는 서울로 전학하기  위한 핑계였고,막상 전학이  어려워지면
도로 대구로 데리고 올 심산으로 어머니가 거짓말을 둘러댄 것이었다.
  '맹렬 여사'인 어머니는 "빈 자리가  없어 곤란하다"는 교장선생님 말씀에,"선생님, 대
구에서도 우리 큰  애,둘째애 다 K여중,K고 등에 넣었습니다.이제 우리  셋째애를 받아
주시면 맡아놓은 한 표인데 뭘  드러십니까?"라면서 큰소리를 탕탕 치시니, 교장선생님
은 껄걸 웃으시며 의자 하나를 6학년 #반에 밀어넣어주시고야 만 것이다.
  신학기 개학한지 한 달이 거의 지난 4월초,  급히 사느라고 치수가 맞지도 않는 초미
니 스커트의 교복과 머리 윗부분만을 겨우 가리는 교모를 달랑 쓰고 학교에 갔다. 이때
부터 내 순나의 시절은 시작되어, 내가 입을 벌려 말을 하면 반 아이들이 모두 '와'하고
웃어대는 것이 아닌가. 그  중 어떤 괴짜 남자아이는 짓궂게도 나는  따라다니며 "옹냐,
옹냐(그래,그래의 사투리)" 해가며 괴롭혔는데  나는 속으로 "미친놈, 저도 사투리를 쓰
는 주제에 "(그 아이는  다른 지방 사투리를 나보다 더 심하게 쓰고 있었다.)라고  욕을
하면서도 또 놀릴까봐 겁이 나서 입 밖으로 표현하지는 못하였다.
  중학생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D 초등학교,  S  초등학교 출신들이  숫자상 단연코
유세여서 우리 반으 주름잡고 있었다.문예반에 든  나는 우리 담임이기도 한 문예반 선
생님께서 잘 보이고 싶었다. 숫자 적인 열세를 만회하고 싶었던지도 모른다. 밤을  새워
포플린에 솜을 도독이 넣어 문집 표지를 만들었다.
  첫 작품으로 '깜씨  1세'란 제목으로 작문을 지었다. 발표를  시키겠다는 선생님 말씀
에, 큰 소리로 몇 번을  읽고 또 읽어 연습을 했다. '이만하면 설마?' 기대에 부풀어  녹
음된 테이프를  들어본 직후 나는 '윽'  비명을 내지르며, 테이프를 던져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그렇게도 촌스러웠던지, 투박했던지...
  요즈음은 복고문화의 물결이 일어 투박한 질그릇을 평가해주만 그때 나는 투박한 질
그릇이기보다는 매끈하고 윤기나는 사기그릇이고 싶었다.
  그 후 꽉 다문 조개껍질처럼 다시는 발표를 하려들지 않았고 내 안의 콤플렉스는 나
를 할퀴며 서서히 여물어가고 있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사투리  콤플렉스는 어른이 되어서도 고쳐지지 않았는데 내가  끝까
지 억양을 고치지 못했던  이유를 굳이 분석해보면'우리 집 파쇼' 인 오빠 때문이  아닌
가 싶다.
  다혈질인 오빠느 대구 출신의   친구중에서 서울 말씨를 흉내내는 친구들에세  "지조
없느 얍삽한 새끼"하고 욕을 하면서  끝내 사투리를 고수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방
출신인 오빠는 서울  토박이들에 대한 아니꼬움과 속상했던 감정을 '동화'보다는  '저항'
함으로써,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나도 은연중에 세뇌를 당해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래고기'들의 말씨  흉내에 그다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표쥰말은 쓰지만 억양은 사투리여서 나는 여러 사람 앞에서 얘기하기를 무척 꺼린다.
  대학에 들어가서 영어 클럽에  잠깐 나갔는 데'  Freshman's Comer'라 하여 스피치
를 하여 되었다. 계속 피하려고 도망다니다가  내 몰골이 너무 한심하고 비겁하다는 생
각이 들어 하기로 결심하였다.
  며칠을 걸려 연습을 하고 막상 실연에  들어가니, 눈앞이 잘 안 보이고 귀에서는 '윙'
소리가 나며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대학원에서도 '세미나' 시간엔 죽을  맛이었다. 자꾸 화장실만 들락거리면서 끝나기만
을 기다렸다.
  결혼을 하고 보니 시댁도 경상도 집안이라 내 억양은 더욱 심화 되었다.
  얼마 전 나의  이런 고민을 토로하였더니 남편은  "사람 많은데서 말 잘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여자는 질색"이라면서" 그 사투리 콤플렉스 때문에  가만히 있는 줄고 모르고
내 친구들은 당신을  아주 여자답고 한국적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  사투리 덕도 보는
셈아니냐"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말이  잘나온다
는 그가 안쓰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
  요즈음 들어 부쩍 늘어난  TV토크쇼를 보면서 내가 사투리 억양을 빨리 고쳤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가 생각해 본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방송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일 아닌가.  혀가 아직 유연했던 학창시절에   나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이제는 굳어져서 되지도 않는다. 치유될 수  있는 콤플렉스라면 빨리 제거하여 삶의 걸
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 내 노년의 자화상>

  인생 초반의 얼굴은 부모를 닮았다고 하지만 40대 이후에는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나도  내가 책임질 수밖에 없는 얼굴과 표정이있고  이 표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 결접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표정의 노출로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도
움을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손해를 감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언
제니 가슴에 있는 생각의 전면 노출로 득보다는 손해를 보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다.
  요즘 나는 왠지 세상살이다 무척 힘들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성격이 조금 더 싹싹하
여 때에 따라 슬슬 비위도 잘 맞추고 적당히 타협도 하면서 매끄럽게 살아가면 좋으련
만 천성이  그렇지 못하여 남과부딪치는일이 잦다.  그리하고는 상처를 입는다.  젊었을
땐 그것을 마치 나만의  개성인 양 착각하고 살았으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것은 개성
이 아니라 처세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란 생각이든다.
  그렇다고 나에게 카멜레온적 기질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혈액형 B인 나는 지극히 명랑하고 사교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놀랄 만큼 내성적인 면
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또한 상대방이 아주 적극적인 성격인 소유자일 경우 나는 소극
적인 되어버리기도 하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내가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가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런 양면성이 공존하고 있겠지만 나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 성격은 어떤 그림으로 표현될까.
  "사랑이 모나더냐 둥글더냐"라는  노래가 있듯이 네 성격은 마름모냐  원통이냐고 묻
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눈이 올 땐 원통이요, 바람 불 땐 마름모요, 햇빛 내리쬐
는 날엔 치닫는 직선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나의 가변성 가운데에서도 꾸준히 큰 맥을 이어오는 두 줄기 선이 있는데 하
나는 직선적 그 자체인 성격이다. 기분이 나쁘면 나쁜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즉각  얼
굴에 반영된다. 싫은 말 한 마디에 당장 눈썹이 치켜올라가고 양미간에 주름이 꽉 잡혀
내가 나를 봐도 사나운 표정이 된다. 또한  즐거운 일이 있을 땐 주책없이 감추지를 못
하는 것이다. 좋게 표현하자면  솔직하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단순하여 외면 수습이  서
투른 이 성격 때문에 손해보는 일이 자연 많을 수밖에 없다.
  이제 나이에 걸맞게  마음에 없는 연기도 좀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도무지 그것이
뜻대로 안 된다. 나는  정말이지 죽었다 깨어나도 연기자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서도 남의 기분에 대해서는 다소 무감각하다. 즉, 남의 생각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특히 내가 체직적으로 못하는 것은 상대방의 면전에서 칭찬을 해주는 일인데 유난히
이것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참 신기해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얼굴에 두드러기가 날 것
같기도 하다. 면전에서는 듣기 좋은 말보다는 싫은 말을, 차라리 등뒤에서는 칭찬을  하
는 것이 나의 생리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을 나만의 개성이라 내세우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은 듯하다.
  청개구리를 삶아 먹은 적도  없는데 왜 아직도 나는 불쑥불쑥 반항적인 기질이 남아
있어 마치 철가면을 쓴 듯 흔들리지 않는 표정을 바깥으로는 숨길 수는 없을까.
  그리고 또 한가지,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는 일이다.
  마치 부나방이 불에 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불 가까이 모여들 듯, 손해볼 줄 뻔
히 알면서 내친 감정을  후퇴시키지 못하고 오기를 부린다. 그런데도 반성은커녕,  기막
히게 싹싹하고  나긋나긋한 여성을 보면 속으로  '어유,낯 간지러워. 마치 암여우  같군'
생각하며 돌아선다. 그러던 내가 이제와서는 세월의 흐름 탓인지 심경의 변화인지 연출
을 잘하는 여성을  보면 오히려 여자답고 좋아 보인다. "곰보다  여우가 낫다" 는 말도
있지 않은가. " 지는 사람이 이긴다"는 말의 의미도 되새겨보아야겠다.
  이제 불혹을 넘어섰으니 이내 나의 주제를  파악하는 지명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면
이순이란 영역에 이르게 되겠지. 그때쯤이면 화가나도 3일쯤은 참을 수 있을까.독일 사
람은 3일을 생각한 후 화를 낼지 말지 결정을 한다는 데 나는 3초를 넘기지 못하고 부
글부글 끊어오르는 양철냄비가 되고 만다.어제쯤이면 흐르는 강물처럼 부드럽고 유순하
게 지나칠 수가 있을까.
  마치 강물이 하나의 물줄기를 이루어 산굽이를 돌다가 낭떠러지를 만나 폭포도 짓고,
다시 소가 되어 한 바퀴 물줄기를 돌리듯이, 나도  휠 때는 휘고 돌 때는 돌고  낙하도
하여 부드럽게 흐르느 강물의 너넉함을 지닐  날이 어제쯤이면 올 것인지.
  내 노녀의 자화상은 어떠할까.

   

<살과의 전쟁>

 개미가 월동을 하듯 사람은 행복한  노년을 보내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 세 가지 필수요건은  건강, 경제력, 그리고 가족과 친구를 포함하여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확보해두는 일인 것 같다.
  이들 중 건강은 정신적인  건강과 육체적인 건강으로 분류할 수 있겠는데 노후의 건
강을 원한다면 우선 체중 조절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시간을 투자
하여 운동을 하고 힘겨운 노력으로 다이어트도  한다.
  나 역시 행복한 노년을  대비하여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의
가 없으나 선천적으로 운동을 좋아하지 않아  고민이 된다. 나와 닮은꼴인 우리 어머니
는 관 속으로 들어가서 차갑고  어두운 땅 밑에 누워 있을 것을 상상하면 너무 끔찍하
여 눈물을 머금고 운동을 한다고 하신다. 허나 나는 아직은 이런 생각보다는 우선 미관
상 날씬하고 싶은 욕망에서 운동과 다이어트를 한다.
  여성의 외적인 미의 기준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무척 달라졌다.옛날에는 다들 못살
아서 그랫는지  양귀비처럼 살이 통통하게  쪄야만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라며 미인으로
쳐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젠 경제가 발전한 탓인지 모두들 살이 찌면 이 세상이 마치
종말이나 온 것처럼  온통 난리들이다. 여성들은 너도나도  슈퍼모델처럼 늘씬해지기를
목표로 삼고 그 목표에서 조금이라도 초과달성이 되면 비상이 걸린다.
  물론 아직도 지구 저쪽 소말리아에는 수많은 난민들이 기아로 허덕이고 있고 소득이
만불이 넘은 우리나라에도 점심을   굶어야 하는 빈민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어 살과
의 전재이란 제목 자체에 대해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낀다. 허나 살이 찌지 않으려고
운동과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이젠 현대인들의 상식처럼 되어버렸다.
  나도 하필이면 외탁을 하여 먹으면 먹는  대로 살이찌는 불행한 체질이다. 그래서 실
컷 먹고도 신진대사가 왕성하여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의 소유자를 선망의 대상1번으로
꼽았던 적도 있다.날씬해지고 싪은 욕망이 뭔지 나도 기를 쓰고 굶어보기도 하고  달밤
의 체조도 해보고 제인 폰다의 스트레칭 체조도 따라해 보고 그 이외의 방법들도 안써
본건 아니지만 왕성한 식욕과 싸우는 일은 보통의 인내력으로 실천하기는 정말 힘들다.
이렇듯 살이 찌지 않기 위해 고생을 하는 나에게 보내는 최대의 찬사는
  "오랜만에 보니 수척하니 안됐네, 웬일이야".
이다. 그러면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 글세 그대로인데 왜 그럴까."
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얏호'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하지만
  "아유 얼굴 좋아졌네."
하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몰상식에 대해 눈을 흘겨주고 싶어진다.
  내 친구 누구는  철없던 시절 , 스테이크를 사주는 사람이  제일 좋다고 주장한 적이
있지만 나는 "수척해졌네",그리고 한마디  더 첨가하여 "네 수필 참 공감이 가더라" 라
고 말해주는 사람이 제일 좋다. 그런 사람에게는 오히려 내가 스테이크 2인분을 사주고
싶어질 정도다.
  내가 20대였을 때 어떤 남학생이 전혀 글래머 과가 아닌 나에게 글래머러스하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느 이를 갈면서
  '죽을 때까지 너를 미워해주겠다.'
라고 결심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아부성 발언이었다고 하지 않은
가. 아, 번지수를 잘못 맞힌 그 남학생의 우둔함이여!
  남들이 보기엔 "날씬하고  멋있군", 이 한마디로 가볍게  끝낼 그런 체형을 유지하기
위해 모델들이나 배우들은 얼마나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는 것일까.
  "이 체격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을 배고프게 살았어요"
라고 고백하던 어느 가수의 솔직한 말이 생각난다.
  마라톤의 황제, 칼  루이스의 달리는 모습이나 가수 휘트니  휴스턴이나 모델 나오미
캠밸의 탄탄한 몸매를 보면 과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은 조물주의 걸작품인
인간이란 생각이 절로든다. 그뿐아니라 이디오피아의 마라톤 선수들이 전지훈련을 하는
광경을 보면 마치 수십 마리의 야생마들이 떼지어 들판을 질주하는 것 같고 나는 거시
서 생생한 기를 들이마시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살이 찌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자기 관리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까. 육체와 정신이 느슨하게 널브러져 있는  것을 허용치 아니하고 팽팽히 활에 시위를
먹이듯이 언제나 긴장을 하는 것, 즉 철저한  셀프 컨트롤의 의식을 높이 사는 것일 게
다. 하나를 보년 열을 안다고 성공적인  체형의 관리는 다른 분야의 관리까지로 연결된
다는 의미일 게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여성들이 정상적인 체중을 체중 초과라고 스스로 규정짓고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무모한 다이어트를 행한다는 것이다.  각종 잡지나 TV의 광고 등에서
는 서구형의 늘씬한 미인들이 나와서 화면을  누빈다. 그 모습을 대하고는 그것이 마치
현대 여성의 표본인 양  모델로 삼아 자기의 체중을 조절하려는 생각은 얼마나 어리석
은가.
  다이어트로 인해 일어나는 희비극이 얼마나 많은지. 단언하건대 미래의 유망산업 1위
는 다이어트 산업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잘못된 다이어트는 거식증을 야기시켜 목숨을
빼앗아가기도 하고 영양의 불균형으로 치매의 원인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여성의 미를 맣할 때 흔히들 지성미, 청순미, 섹시미 등등으로 표현하지만 요즘  들어
신세대 여성들에게 보내는 최대의 찬사는 '섹시하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
가. 그것은 아마 비쩍 마른 체격보다는 건강미를 높이 산다는 얘기일 것이다.
  굶기에 치중했던 나는  이제부터 적당한 운동과 균형잡힌  식사로 체중 조절을 하려
한다. 그리하여 비쩍 바른 순두부살이  되기보다는 오동통하더라도 탱탱한 게맛살이 되
는 편이 한결 낫겠다.

 

   < 교수실과 명함 이야기>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며칠  전 옷정리를 하다가 흰 빛의 알파카  스웨터를
본 순간 저는 선생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눈빛처럼 흰 알파카 스웨터, 그리고  활기차
고 당당하시던 선생님, 4학년 겨울방학  때 선생님의 원고 교정을 도와드렸다고 눈송이
같은 스웨터를 주셨지요. 바깥 선생님의 공장에서 만들었노라면서.
  졸업을 한 지  어언 15년, 여학생은 제자로 길러봤자  헛일이다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선생인을 못 뵌 지가 10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언제이던가 미국서 돌아온 후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조금 큰 방으로 옮겼노라면서  예의 그 모란꽃 같은 웃음을 활짝웃으시며 저를 맞아
주시던 선생님, 양지바른 동쪽 한편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선생님의 방은 넓은 창문
으로 쏟아져 들어온 봄볕과 창 밖에서  깔깔거리며 웃는 학생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방
전체에 가득 자리잡고 있는 책들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커피 포드에서 보글보글 넘치는 커피 물을 따르며 선생님은 말씀하셨지요.
  "나는 이 방 한 칸을 가지기 위해 오늘날까지 살아온 것 같아."
  아아, 이 말씀이 얼마나  큰 감동을 저에게 안겨주었던지요. 물론 선생님이  말씀하시
는 방이 가지는 의미가 반드시 물리적인 것이 아닌 것은 잘 압니다.
  정문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서면서  제 긴 머리칼 위로 마구 내려꽃히는 햇살을 받
으며, 노오란 개나리숲을 지나며, 갑자기  아장희의 (봄은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시가 생
각나겠지요. 고양이가 된봅을  뒤로하고 교정을 향하여 걸어오면서,  '나도 언젠가는 꼭
나만의 방을 가지겠노라' 고 다짐하였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 지상에서의  나 혼자만의 방)에서 말합니다. 여자들 누구나가 1
년에 오백 파운드의  돈과 자기 혼자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고,  즉 오백 파운드의 돈은
여유로움을 뜻하며 방문 열쇠는  사색과 쉼터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기만의 공
화국을 의미하겠지요. 저는 소위 여권주의자는  아닙니다만 경제력과 사색과 창조의 공
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에는 100% 동조합니다.
  얼마 전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아느 기관의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
는 친구가 명함을 만들었노라면서 우리들 모두에게 한 장씩 주었습니다. 가로 8.5cm,세
로 5.5cm의 작은 종이 위에, 예쁜 그녀의 자필로 ***이라고 씌어진 그  종이는 그냥 명
함이라기보다는 그 친구가 사회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하나의 공간으로 보았습니다. 그
리고는 언젠가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방 한 칸의 공간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물론 한 장의 명함이야 선생님 방 면적의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못 되겠지요.  하지
만 그 작은 면적 위에 실려  있는 이름 석 자의 무게가 제 눈에는 경이로운 것으로 비
쳐졌습니다. 그러나 허명  무실한 이름 석 자의  명함이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명함에 실릴 술 있는 어떤 명분, 다시 말해 작더라도 좋으니 인간적인 성취, 그런  것이
부러웠단 말씀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아무리 하잘것없는 것일지라도 제각각의 자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조
약돌은 조약돌대로, 풀꽃은 풀꽃대로 말입니다. 저 역시 작아도 좋으니, 우주 속에서 나
만이 설 수 있는 위치를 매김하고 싶은 것입니다.
  선생님, 저는 지금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수필을 써서 한 권  책이 햇빛을 보는 날,
저도 그 조그마한 자랑을 네모난 명함이라는 이름의 공간 위에 싣고 누에가 고치를 짓
듯 제 나름대로의 조그만 집을 짓고 싶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선생님. 만약 제 수필집이 세상에 나와 빛을 보고, 약간의 인세
라고 생긴다면 저는 선생님께 달려가겠습니다.  김한길의(여자의 남자)는 100만부, 보통
은 10만 부가 팔려도 성공작이라고  하는데 설마 제 것이라고 해서 한 천 부쯤 팔리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한 백 부라도 말입니다.  선생님은 웃으시며 "꿈도
야무지구나"라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요만한 착각에라도 사로잡혀 살소 싶습니다.
  선생님, 생각나세요? 어느 겨울날, 제가 쓴 슬이 잡지에 실렸다면서 선생님을 찾아뵈
었을 때 방 한쪽 구석에 있는  스토브 위의 낡은 주전자에다 차를 끓여주시면서, "그래
잘했구나, 연아야, 그러나 문학이란 너무  깊이 빠지면 못쓰는 법이다. 가정생활에 지장
이 없을 정도로만 하거래이"라고 하시던 말씀.
  세월은 정말 많이도 흘렀습니다. 중년이셨던 선샌님이 정년을 몇해 앞두게 되셨고 철
없던 제가 이제 중년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저에게 중매를  서주
셨던 선생님,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늘 감사드리고 있어여.
  선생님, 제가 수필집을 들고  가는 날까지 또다시 쓰러지시지 마시고 건강하세요.  그
전까지는 지금처럼 크리스마스에  카드를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찾아뵙지 않겠어요.
선생님의 주님이 항상옆에 함께하시길 빌며 이만 줄입니다.
   제자 연아 올림

   

<인새 세미나를 마치고>
 
  올림픽이 끝나고 날 전체가 해외여행 붐으로 들뜬 분위기다. 그러더니 급기야 매스컴
에서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추태의 실례를  보도하며 외화낭비, 과소비가 거론되기 시작
했다.
  공무원 남편을 둔 덕분으로 '내 사전엔 해외여행이란 없다'고 체념한 지 오래인데  왠
지 깊숙이 걸어둔 빗장이 덜거덕 거리며 대문 밖으로 삐끔 얼굴을 내밀고 싶어진다.
  유학중이던 남편의 여름방학중에 난생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한지도 벌써 십 년이 다
되어간다.
  애꿎은 한숨만 푹푹 쉬고 있던 내가 딱해 보였던지 어머니는 가까운 일본의 큐슈 지
방 쪽으로 데려가주겠다고 하셨다.
  남편은 쾌히 승낙하였지만 시아버님께는 말씀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너무 일찍 터뜨린 샴페인  마개'란 외신을 인용하며 자제를 호소하는 뉴스를  보시다
가, "이거 큰일났다.아르헨티나의  전레를 따르려고 하는가"하며 역정을  내시는 시아버
님께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직접 말씀드리겠다는 어머니를 만류하고, 주말이 끼지 않는 4박 5일이므로 몰래 다녀
오기로 했다. 일요일 시댁  방문에 결석하지만 않는다면, 그동안 시어머님이 전화만  하
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운수에 맡길 일.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김포공항 안으로 갔다.  가슴 두근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들
어갔다.
  출국 신고를 하는데 직업과 여행의 목적을  쓰라고 한다. '무직, 관광'이라고 쓴다. 힐
끔 언니를  보더 ㄴ어머니도  '시인,세미나  참석 및 관광'이라고 쓰셨다.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따라 쓰는 내 겨드랑이 위로 간질간질 이상의 날개같은 것이, 뒤 통수에 피노키
오의 코 같은 것이 돋아나는 듯했다.
  다행히 한 사람의 지인도 만나지 않고 비행기에 올라 뱃푸로 향했다. 뱃푸는 이미 한
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너무 많이 몰려  오는 듯했고 보름 전에 오이타공항에는 KAL의
직항로까지 개설되어 있다.
  조그만 숄더백 하나만 가지고 간 우리느  편안하게 여행을 했다. 체면을 지키지 않아
도 되는 피붙이들끼리의 여행-화장을 안해도  흉보는 사람 없고  귀고리,  목걸이 , 발
걸이를 하고 시선을 어지럽히는 사람도 없었다.
  허나 온천을 하려고 입장한 우리를 순식간에 흥분시키는 일이 있었으니욕탕 앞에 서
툰 한국어로  "들어가실 때는 하체를 씻고  들어가세요', 남의 샴푸를 쓰지  마세요" 라
씌어 있었다.
  우리는 "백의 미족인 우리  한국사람을 뭘로 보고 이런 실례되는 발언을  하느가" 분
개하며 "이런 모욕적인 언사를  듣게 하는 한국인 스스로도 각성해야 마땅하다"  고 반
성했다. 다형질인 어머니는 지배인을 불러  항의한 맞춤법이 틀렸노라고 친절히 정정까
지 해 주셨다.
  이부스키를 들러 가고시마로 갔다. 가고시마  현에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과 발자
취가 곳곳에 있었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종결시키고 왕정복고를 성공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나 정한론을 자차안 것이 화근이 되어 관직에서 물어나 귀향한다.고향에
서 후진 양성에 전력하나  중앙 정부와 대립이 격화되어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
하여 자결한다.
  마침<제국의 아침>이란 역사소설에서 그의 활약을 읽은 직후인지라 그가  숨어 관군
과 격전을 벌이던 동굴과, 벽에 수없이 나 있는 총알 자국을 열심히 들여다 보았다.
  가고시마에서 배를 타고 30분을 가니 활화산의 위험이 현존하고  있느느사쿠라지마가
있었다. 지금도 비가 오면 화산재 때문에 옷이 잿빛으로 물든다고 한다.
  거기에는 그 고장이 배출한  유명한 작가 '하야고 후미코'의 기념비가 있는데  그녀의
어머니 여관 종업원이였고 의붓아버지는 생선장수였다고 한다. 기념비에는"꽃의 생명은
짧기만 하고 슬픈 일만 많다" 라는 하이쿠(단가)가 새겨져 있다.
  어머니는 감동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읽어보시더니 소액자와 화산석 하나를  기념으
로 사셨다. 기념비 앞에서 사진을 찍자는 어머니에게 언니는  "너무나 비참했던 일생이
었다면서요? 불행의 귀신이 나한테 옮아붙이면 어떻게 해요"하며 그냥 내려가버렸다.
  귀가엷은 나는 덩달아 떨떠름하여 언니를 따라 내려오고 어머니는 혼자서 몇 커트나
찍으셨다. 초록옷을 입은  어머니는 봄비 속에서 초록 나비가  팔랑거리는 것처럼 보였
다.
  명색이 교수인  언니는 문학얘기가 나오면  하품을 한다. 이과  계통이라서 그런지
"글재이란 자고로 밥 먹고 할 일 없어 고민을 만들어 하는 사람들"정도로 생각한다. 이
런 언니가 밉다. 글재이 작가느 세상을 뜨겁게 사는 사람이란 것을 모르니까.
  내려오는 길에 바다에 접해  있는 노천 온천에 들러 '나무꾼과 선녀'나 된 것처럼  목
욕을 했다.. '가제노  구치스케(바람의 입맞춤)'란 찻집을 지나쳐  어머니는 서점에 들어
책을 사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독특한 상품을 보면 약간 흥분한 나머지 땀을 흘리며 눈에 생기가 돌아 쟁반만
해지는 버릇이 있는데  전혀 흥분할 기회가 없는 여행이었다.  우리나라 상품의 수준이
너무 높아 쇼핑은 관심 밖이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골라온 책들  중 한 권을 독파한 어머니는 들어보라고 하며 읽어주
신다. 78세의 일본여류작가가 쓴 수필인데 "떨어지는 석양도 태양은 태양이며 늙어가는
인생도 인생은 인생이다. 살아  있는 목숨은 누구나가 다 현역이다. 지는 해가 더  붉듯
이 늙어가는 날의 하루가 더 소중한 것이 인생의 길이라는 것도 알아야  하리" 라는 내
용이었다.
  그렇다. 우리 세모녀는  적극적인 '인생 세미나'에 참여하고 돌아온 셈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단순한 관광이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제각기 가슴속에 붉은 감동 하나씩을 담
고 돌아왔다.
  며느리는 이렇게 4박 5일 일본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죄송합니다.아버님....

   

 <우주비행기>

  다시 가을은  온다.40대로의 진입을 눈앞에 둔  강박감,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해야만
된다는 초조함에 조금씩 조금씩 가슴앓이를   한다. 혼탁한 서울을 벗어난 먼 바닷바람
과 마주서고 싶다. 한여름 오후의 인파가 썰물을 벗어나 먼 바닷바람과 마주서고  싶다.
한여름 오후의 인파가 썰물처럽 밀려가고, 끼룩끼룩 목쉰 물개들의 울음소리만 파도 위
에 떠돌고 있던 페블 비치(Pebble Beach), 바다는 늘 내게 추억으로 있었다. 바다 안의
그 무엇이 깊은 상실감으로 고통스러운 나를 위무해주는 것일까.
가자. 바다로 가자. 바닷가를 거니며 내 안의 내재된 나를 만나보리라.
인천 앞바다로라도 가보기로 했다. 두 아이와  조카를 데리고 먼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
의 마음으로.
두 시간이나 걸려  인천에 다다랐으나 십여 년 만에  와보는 인천 시내는 낯설고 탁해
보였다. 교통순경에게 딱지까지 선물받다 보니 전조가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터처럼 시끌벅적한 선착장에 이르고 보니, 배표를 사려고 기다리는 인파에 기겁을 하
고 말았다. 신문지를 깔고 앉아 도시락까지 먹으며 기다리는 여자, 백팩을 둘러메고  왁
자지껄 떠들어대는 대학생들, 오징어 다리를  뜯으며 소주를 들이켜는 늙수그레한 남자
들, 화투판을 벌이고 열을 내는  청년들, 그 앞에 버티고 선 거대한 각종 놀이기구들 -
우주비행기, 회전그네, 미니열차, 문어다리...... . 바닷가 선착장에 웬 놀이기구인가. 어울
리지 않는 그림이라 생각되나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인 것 같다.
 그렇다. 영화 제목은 잊어버렸으나 주인공이 강간, 살해된 애인의 복수를 바로 이런곳
에서 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타고서.
영화를 보며 바닷가의 놀이기구가 생소하다고  생각했었다. 인적이 끊긴 밤바다에 혼자
서 돌아가고 있던 회전목마가 왠지 아름다워 보이지가 않고 그러테스크한 느낌을 준다
고 생각했다.
 옆에는 간이 전자오락실도 있다. 막연한 그리움에 떨면서 예까지 왔는데 모든 것이 어
긋나 보인다. 서너 시간을 기다려서 섬으로 가볼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망설이
는데 아이들은 "야호, 꺅꺅" 난리다. 바다와 섬에는  턱끝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아
들녀석은 전자오락을 30분만  하게 해달라고 조르고,딸아이와 조카는  우주비행기를 꼭
타봐야겠다고 아우성이다.
 섬행을 포기하고 자유시간을 주기로 하였다. 햄버거를  하나씩 손에 들고 아이들은 제
각기 목표무롤  찾아간다. 즐비한 횟집과 다방들  사이로 혼자 걷는다. 뻥튀기,  솜사탕,
번데기와 다슬기를 팔고 있는 수레가 눈에 띈다. 요즈음 어디서 번데기 수레를 볼수 있
을 것인가.
 오빠는 번데기를 좋아했었다. 삼십 년 전에는 유달리 특별난 간식이 없었으니까. 산수
문제를 가르쳐달라고 하면 "야, 맨입으로  되냐? 번데기 한봉지, 알았지?"라고 한다. 그
러나 뇌물을 진상하면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오빠는 혼자만
질금즐금 씹어먹으며 "이것도  모르냐? 꿀밤 세대인데 번데기 값으로  한 대 감해준다.
"고 선심을 쓰며 계속 꿀밤을때렸다. 
 그 시절은 어머니의 전성기였다. 아버지의 커다란 우산 아래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
을 위하여'라는 명분으로 치맛바람만  휘날리고 다니면 되었다. 지금은 도레미도 칠  줄
모르는 오빠에게 세비로 양복을  입혀 시민회관 홀의 피아노 콘서트 무대에 서게 했는
가 하면, 초등학교 꼬맹이의 일기를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 내  유년은 어느틈에 레테의 강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것인가. 지금 이  순간도 내일이면 돌이키지 못하는 과거에 묻혀버리겠지.  삼십여
년 후, 인천 바닷가를 거닐며 그때를 그리워하고 애틋해 할 줄 그 누가 상상했으리.  다
시 또 십여 년 후 나는 어디에서 오늘 이 부둣가의 하루를 추억하고 있을 것인가.
 테레사 수녀는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라 했다. 그렇다.  모든 인간사
는 하룻밤의 꿈에  불과한 것. 우리는 찰나를  살다가 영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탄 이 우주비행기는 지금 어디쯤 날고 있는 것일까.
 번데기를 한 입  깨무는 순간 고소하고 짭짜름한 바다의 향수가  돈다. 핑하니 눈물이
돌아, 혓속으로 좀더 진하게  짭짜름한 맛이 돌고 있다. 모두들 가나하던  시절이었지만
넉넉하고 풍성한 사랑이 있던 때가 아니었던가.
 다슬기 하나를 까본다. 살이 말라붙었다. 또 하나를 까본다. 역시 마찬가지다. 그  옛날
우리는 '고딩이'라고 부르며  탱자나무 가시로 하나씩 까먹곤  했었지. 수북하게 쌓였던
다슬기의 껍질, 껍질들...... .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그때의 '탱자나무  가시'가 '위생요
지'로 바뀐 것 외엔. 요즈음 인심도 다슬기를 닮아가는 것일까.
 "엄마, 야호." 아이들이 부른다. 눈을 뜬다. 미국, 서독, 일본, 프랑스행의 우주비행기가
돌아간다. '하나의 원' 이라는 우주의 영원 속으로.
 눈을 크게 뜨고 찾는다. 1950년, 1960년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순을 들어 1950년호를  탄다. 아아, 빙글빙글 돌아간다. 담쟁이로  뒤엎인 대구시 삼덕
동, 두 대문 깊숙한 기와집으로. 회색 바깥 철문이 보인다. 자갈길도 보인다.  한 단발머
리 '깜씨' 계집아이가 눈깔사탕을 입에 물고  철문 앞에 얌전히 앉아 있다. 커다란 검정
소가 삐그덕 삐그덕 달구지를 끌며 지나간다. 계집아이는 종알거린다.
 "저 소는 나보다 깜다"고...... .

      2. 페페와 남편과 화살의 노래

    흰 것을 검다 해도

  요즈음 언론에서는 대가족제도  붕괴와 그 결과 로  빚어지는 노인들의 비극적 삶의
실태를 보도하고, 구미와 이웃 나라 일본의  유료 양로원을 소개하며 이제 한국도 이런
제도의 도입이 요청되는 시기가 오지 않았는가,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기사를 접할  때
마다  나는 "양로원은 가시  싫은데...멀쩡한 짓ㄱ을 놔두고 왜 양로원을 가" 라며 분개
해 마지않는다.
  내 나이 스무세 살 때  시어머님은 연봘 바탕에 짙은 보랏빛 난초가 수놓인 모시 한
복을 곱게 차려입고 우리 집에 청혼하러  오셨다. 그 옷은 동양화가인 어머님의 작품으
로 수놓아진 옷인데 니는 그옷의 맵시보다는 어머님의 '문화'에 호감이 갔다.
  시어머님과 친정 어머니는 여고 선후배 시이였는데 평소 동창회에서 두 분이 만나면
시어머님은  "아우님은  한송이 모란꽃 같으셔. 활짝 핀  해바라기 같아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환해져" 하며 어머니를 좋아했다고 한다.
    인 나도  새끼 모란이나 해바라기 쯤  되리라 생각하셨던 모양으로  "외아들이지만
절대 시집살이는 시키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어떻게 하면 아우님이 믿어줄까? 내 마음
을 버선목처럼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하셨다던가.
  외양은 어머니를 닮았을지 모르되 속은 다른  점도 있는 법, 난느 해바라기나 모란같
이 송이 큰꼿은 좋아하지 않는다. 난초, 창포 같은 함초롬한 꽃을 선호한는데  시어머님
은' 모전여전'이란 단어를  과신하셨던가 보다. 친정어머닌느 '너 같은 천둥  벌거숭이는
저렇게 예의범저 ㄹ다지며 까다롭기로  소문난 집에 갔다가는 한 달도 못 가 좇겨나고
말 것"이라며 고개를 흔드셨다.
  그러나 지금의 남편인 당사를 보고마음의 결정을  내린 난 "걱정 마시라, 이 딸을 어
떻게 보고  하시는 말씀이냐.  적당한 젤제와 기강은 전통적인 가저의 필요조건"이라며
주장하여, 인연의 고리는 엮어졌다. 시어머님은 "우리  집의 모란꽃이 되어달라"시며 백
모란 한 점을 그려 주셨다.
  모시고 살 각오를 했지만  시아버님은 약속대로 시댁 바로 옆골목에 집을 마련해 주
셨다. 사실인즉 분가를 한셈이 되겼으나그것은  욱신의 분가였지 정신의 분가가지는 이
르지 못했다.
  남편과 시아버님의 관계가  대학교수와 제자 사이나 군대의 상하관계보다 더  심하다
고 생각되었고 매일 아침 문안  전화에 나중에는 드릴  말씀이 없어서 "그냥 걸었어요"
하며 우물쭈물하던 나였다.
  결혼 직후 시어머님은  "하나를  생각하면 열을 표현하고, 어른이 흰색을 검은색이라
하더라도 예, 알겠습니다.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하셨다. 열을  마음에ㅔ 품으면
하나를 표현하는 나는 '그건 가식이잖아요 어머님, 민주국가에서는 어론, 표현의 자유가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는데요'라고 마음곳으로만 중얼거리기도 했다.
  저녁식사 때면 나이에 따라 정해지는 지정석에ㅐ 앉아 정치,경제,사회 ,이념,  등의 형
이상학적인 주제들이 논해지는 엄숙한 분위기에  나는 늘 외로웠다. 자유롭게 둘어앉아
"엄마, 일곱시부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한다는데  가볼래?" 하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그
립기도 했었다. "나도 옛날엔 발랄했었다구.결혼 17년 동안  19세기 여자처럼, 로봇처럼,
예.알겠습니다. 이외에 더 해본 말있어? 나도 정말  등신 나도 정말 등신 다 됐어. 이렇
게 살 줄은 몰랐다구"하며  억울해 하던 나.
  주말에 사정이 생기면 금요일에 미리 앞당겨 찾아뵈야지 늦추어 월요일에 갔다가 꾸
중을 듣고 울던 일, 한마디 변명도  못하던 남편이 좀스럽게 보이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지나간다. 요즈음은 주말에 가끔  여행도 가는 언필칭 출세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은 어머님이 마음에 걸려 여행도 가도 편치를 않아 한ㄷ.
  때로는 "내 하나 며느리가 최고"하는 낯 간지러운(?) 칭찬도 들었고 "말띠라서 세다"
며 흉봤다는 시누이 애기도 바람결에 양념으로  들었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는데 요즈
음 젊은 부부의 세태 한토막에 쓴 웃음짓게 된다. 밑빈찬을 만들어 아파트로 가지고 오
는 시어머니는 50점, 경비실에  밑기고만 가는 시어머니는 80점, 아예 갖다주지도  않고
전화도 하지 않는 시어머니는 만점이란다.
  간섭은 절대 사절이고 자유방임의 상태가  최상급이란 얘기인데, 시세의 조류가 과민
하게 반영된 표현이겠지만 입맛이 씁쓸하기만 하다. 어느덧 시어머니  입자에서 분개하
는  나에게도 모르는 사이에 연륜의 나이테가 샇여가기 때문일까.
  돌이켜보면 우리 세대는 과도기가 아닌가 싶다. 결혼생활17년 도안 비가 오나 눈이오
나 일요일에는 어김없이 시댁에 등교(?)하는 기쁨(?)을  누리는 우리 부부와 아이들, 그
리고 또 그들의  아이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질 이 혈연의 끈-그것의  강도는 '은근과 끈
기의 나라' 인'코레아'가 지구촌에서 으뜸이 아닐는지,
  양로원이 웬말인가. 아파트에 산다면  아래 위층에서, 단독주택에 살게 된다면 한  집
걸러 옆 집에서,극 한 그릇이 식지 않는 거리에서 아들 내외와 더불어 오순도순 늙어가
리라.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가까이 사는 기븜을 누리는 만큼 어른노릇을 하는 일도 노력
과 고충이 뒤따르겠지만  '궁즉통'
이란 말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며느리의 자리에서 시어머니의 위상으로 서서히
수직이동을 하게 될 우리 과도기 세대들을   위하여, 경상도 시어머니들이 모여서 얘기
한다던 '신종 얌체며느리 퇴치법'을 소개한다.
  " 뛰는 놈위에 나는 놈이 있느니라. 시도 때도 없이 손주 봐달라고 맡기는 얌체 며느
리에 노련하게 대응하려면, 그림책을 읽어주시면서 가위는 가시게, 강아지는 강세이, 여
우는 야시 같은 사투리로 가르쳐주라. 귀여운  내 새끼라며 자꾸 입맞춰주고 밥알을 씹
어 손주의 입에 넣어주라. 이것이 바로 새로 개발된 21세기 손자병법이니라."

    누룽지에 관한 명상
 
  남들은 우리  아버님을 TK 마피아의  대부라고 부른다. 168cm의  크지 않는 체구에
'나무꾼과 도끼'에 나오는 산신령처럼, 하얀 백발의  노신사. 168 cm 이라면 중고등학교
시절, 분명 앞  번호를 오르내렸을 크지 않은  키임이 틀림없을진대, 나는 왜  아버님이
태산처럼 크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나는 20대 중반에서 친정 아버지를 여의였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사십을 넘은 지
금에도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정을 잊을수가 없다. 결혼 초반에 친정 아버지를 잃은 탓
인지 결혼을 한 수 오늘에 이르기가지, 아버님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정이 친정 아버지
의 몫까지 겹쳐서 아버님에게 미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나 그뿐인가. 아버님이 당신의 따님인  시누이들에세 드리우는 곡진한 사랑을 옆에
서 볼 적마다 나는머언 하늘 나라에 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무한히 부러운 뭄길로 이
정경을 바라보곤 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 봄바람이 부는  듯한 그 자애로움말고라도, 남편인 당신으 아들에게  드리운
맵고 준엄한 채직질도 기실은 봄을 재촉하는 겨울 바람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싶어 그
깊고 먼 사랑까지도 지금은 조금 알아지는 듯하다.
  외아들인 남편은 어릴 적부터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왜 이렇게 나한테 심하게 하시
나, 생긴것도 별로 닮지  않은 것을 보니 나는 혹시 주어온 자식이 아닐까'라고  생각하
며 고민하기도 했다는  것이다.철이 들면서 남편은 호랑이 새끼를  낳으면 절벽 위에서
떨어뜨려 살아남은 놈만 키운다는 애기를 위안으로 삼고 스스로를 달랬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그 시절 , 내 어린 생각으로는 불만을 누를 수가 없었다. 예말에  사위사
랑은 장모,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데 워낙 표현이 없으시고 엄격하기만 하신 아버
님, 심지어 의심스러웠다.
  그럼 며칠 후 아버님과  고등학교 동기 동창인 친정 큰아버님이 오셨다.  "연아야, 얼
마 전에 너거 시아버지 만났는데 말이다. 저 먼데서부터 나를 쫓아오시면서 어이,  우리
연아가 임신을 했네, 라며 굉장히 좋아하더라. 허참, 그사람, 손자 볼 생각하니  되게 좋
았던 모양이제?"하시는 것이다.
  나는"어머나 , 내  이름을 아시긴 아시네"하며 웃으니  남편은 옆에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한다.
  첫 아이를 가진 지 몇  달 후 친정 아버지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촌각을 다
투는 상황이 되었다.집안은 갈피잡을 수 없는 혼돈 속에 빠졌고 나는 다리가 떨리고 가
심이 울렁거려 도저히 서있기 조차 힘들었다. 자칫하면 유산이라는 위경에 까지 이를까
우려하신 어른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쉬라고  하셨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고 머리를 틀며 억지로 잡 속으로  나는 밀어넣었다. 몇 시간을 자고 일어마
보니 아버님이 막내 시누이와 함께  오셨다 가셨다는 것이었다. "친정 아버지도 아버지
지만 이제는 나도 아버지다.  깨우지마라. 얼마나 놀랐겠느냐"시며 깰 때 까지 몇  시간
을 기다리다 가셨다는 것 아닌가. 그동안의 불평 불만이 눈녹 듯 사라지고 겉으로 표현
은 안하시지만 속은 깊으신 아버님의  따뜻한 사랑에 가슴이 저려왔다.
  그리고 얼마 후 일이었다.  저녁상을 차리는 데 닭국이 두 그릇 분량밖에 없었다.  아
버님, 아버님만 드리고 나는  물누룽지를 먹었다. 마침 입덧중이라 물누룽지가 더  좋았
다. 그러나 나를 흘깃  보신 아버님은 "너는 왜 닭국을 암  먹느냐?" 하셨다. "저는누룽
지가 더 좋아요" 했더니  아버님은 닭국을 옆으로 슬며시 밀어 놓으시며  "나도 누룽지
다오, 닭국 가져가고"하시는 게 아닌가.
  오늘 내일 하시는 친정 아버지를 보면서,  친정 어머니의 한없이 좁아진 어깨를 보며
무척 슲프고 두려웠던 때였다, 경기가 끝난   텅 빈 운동장에 혼자 우두커니 남아 있는
관람객이 된듯한 기분,  배서운 삭풍에 흔들리는 겨울 나무처럼  그렇게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핑 도는 눈물과 함께 누룽지를 꿀꺽 삼켰다. 그러나 가슴
밑바닥무터 잔잔히 고여오는 온기는 내 눈물을 감추기에 충분히 따뜻하였다. 다시는 불
평 같은 것은 하지 않으리라.
  세월은 흘러 심여년이 지났다. 아버님 칠순날이었다. 나는 아버님께 마음깊이  우러나
는 가장 기쁜 선물을  해드리고 싶었다. 십여년 전 너녁 일이 생각났다. 내게  드리워주
신 햇솜 같은 따스한 정을 생각하며, 그날 목이 메며  삼켰던 물누룽지를 생각하며,  시
조 한수를 지었다.

  사부곡

  그 어느 늦가을밤
  친정 아버지 잃던 그 밤

  "나도 아버지다"라시며
  잡아주신 자상한 손길

  지금도 제 가슴속엔
  큰 눈물로 고입니다.

  제가 입덧을 하느라고
  누룽지를 먹던 그날

  "나도 누룽지 다오"
  하시던 당신 말씀

  이제와 생각을 하니
  그게 큰 사랑이었던 것을

  하늘이 높고 높아
  해와 달이 밝다 했고

  때이 두텁고 두터워
  초목이 자란다지요

  아버님 높푸른 사랑
  저도 받아 강 되리다


  진실로 조금만 이야기가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는 사연으로 우리 가슴에 채색되는 것
이던가. 어머님은 언젠가 집안의 경사날에 일생 딱  한 번, "당신은 살아있는 천사요"한
한마디로 평생을 위로받고  살아오셨다는데 어쩔 수없이 나도 "닭국말고  무룽지 다오"
이 한마디로 그 모든 표현을 대신한 것으로 위안하며 살아야 하는가 보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로서 가히 천연기념물적인 우리 아버님, 만수무강하소서.

    아버지 , 늘 푸른 소나무처럼
 
  아버지, 당신이 떠나신 지  벌서 13년이 지났습니다. 빈자리가 커보인다는 말이  해가
바뀔수록 더욱 절실히 느껴지느 요즈음입니다. 양지바른 사직골, 용달샘이 솟아나듯  웃
음이 끊이지 않던 그해 11월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유학중인 언니의  아들을 첫 손자라고 애지중지 키우시며 돌잔치를  차려주
엇던 날 밤이었습니다. 기분이  흐뭇해지신 아버지는 친척들이 돌아간 후, 세상에서  제
일 존경했다는 장모님이신 우리 외할머니에게 "저는 고통받지 않고 잠자는  둣 가고 싶
습니다."라고 하셨지요.
  마로 그 이튿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신다며 화장실로 들어가신 아버지가 나오지 않
자, 기다리다 못해  들어가보신 어머니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고  쓰러져 계신 아버지를
병원 응급실로 옮긴 그날 이 후 당신은 2년이란 긴 세월을 병상에 누우신 채 식물인간
으로 보내셧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강 건너 남의 일이거니 하면서 살아온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가 있
구나.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떨떨해서 우왕좌왕하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묵주
를 놓치지 않고 꽉 잡고  있는 일만이 아버지의 생명줄을 잡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손
바닥 살이 파이도록 잡고 계셨습니다.
  뇌출혈-시각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국의 오빠와 언니에게 다급히 연락을 취
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이자 주치의인 이 박사님은 응급실의 깨어진 창문
옆에서 몇 올 남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쥐어뜯듯 괴로워하셨지요.
  그날부터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면서 호스를 통해 유동식 음식을  섭취하고
말씀은 물론, 보지도 듣지도 못하셨습니다 우리가족들에게는 혹 기쁜 일이 생겨도 웃음
자체가 죄스러워 웃지도 못하는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루 두 번씩 허용되는  면회시간마다 차례로 다녀가면서 "아버지, 아버지"하고 흔들
어보아도 꼼짝도 않하시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애타는 목소리 앞에서는 가끔씩 눈물방
울을 주르르 흘히시는 것을 보며, 우리는  비록 말씀은 못하시지만 듣기는 하신다는 것
을 억지로라도 확신하기도 했었지요.
  의 식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를 보고 비록 이런  상태에서라도 몇 년 더 아니  시\ㅂ
년, 이십 년이라도  살아만 계신다면... 우리에게 기적은 끝까지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얼마나 갈망하고 소원했던지요. 그러나 끝내 당신은 영원한 안식의 나라, 저 높은  곳으
로 떠나 버리셨고 강산이 한번하고도 반이나 변할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삶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지요.
  저희 가족의 슬픔을 가슴 밑바닥부터 이해하고 위로해주시며, 아버지를 치료해주시던
이 박사님 내외분가지도 당신이 떠나신 지 석달 후 연탄가스 중독으로 한날 한시에 세
상을 뜨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언니의 시아버님, 병문안을 오셔서 "어덯게 도와드렸으면
좋을지 모르겠다"시던 그토록 건강하시던 그분이, 다녀가신지 며칠 후 고혈압으로 스러
져, 사돈이 나란히 중환자실 옆침대에  누워계시다가 아버지보다도 먼저 세상을 뜨시고
만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  지내던 이웃들의 죽음을 접하면서  저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 엄청난
힘, 운명일까요?숙명일까요?절대자의 실존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청주에서 연수를 받던 남편과  저는 운명하실 것 같다는 기별을 받고 올라갔으나 생
각했던것보다 상황이 나아져서 다시 내려왔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뜨시던 날 새벽, 아침잠이 많은 제가 이상한 예감에 일찍 눈이 뜨여져
바깥을 서성이고 있을 때 다급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미친 듯이 서울을 향애 달렷으
나 사직동 골목 어귀에 내리는 순간 저는 '朱상가'하는 조등을 보고 말았습니다. 저만이
당신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가톨릭 교우들의 성가가  조용히 흐르는 가운데 당신은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셨습니
다. 꼭 끼는 하얀 버선을 신은 채 자는 듯이 조용히 눈을 감고 계시는 당신을 보며, 난
생처음 죽음의 실체를  대하면서, 저는 왜 갑자기 아버지의  맨발을 만져보고 싶었을까
요.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게가 유일하게 당신을 닮은 것, 까무잡잡한 피부, 그  까무
잡잡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그날은 그렇게 희게만 보였을까요.
  보수적인 경상도 남자의  전형인 당신은 기분이 좋다는  표시를 흠흠 헛기침을 하고
뒷짐을 지며, 마음과는 달리 한마디 통을 주고는 방으로 들어가시는 것으로 대신하셨지
요. 우리가 뒤다라 들어오기를 기다리시며...
  사돈끼리 모여 식사를 한  후 아내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마당을 걸어나가시는 언니
의 시아버님을 보고   "안사돈이 혹시 허리  디스크 아이가?왜 저렇게 부축을 받고  가
노?"하고 하여 우리 모두를 박장대소하게 만드셨던 아버지.
  출판업에서 시작하여 금융, 원양회사를 설립하시면서도 특히 문화사업인 출판업에 커
다란 긍지와  사명감을 갖고  계시던  아버지, 중고등학교 교과서였던 <유니언  잉글리
쉬>는아버지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1977년 검인정교과서  파동으로 충격을 받으신 당신은  쓰러지고 마셨습니다.
집안은 쑥밭이 되고 병상에  누운 채 결혼 적령기의 저를 염려하시는 당신께 "저  시집
안 가요 아버지" 하는 제 손을 잡으시며  "그러면 내가 니한테 미안하잖나"라며 안쓰러
워하시던 아버지.
  그 후 퇴원하고 상황이 나아져 기뻐했지만 1년 후 결국 또다시 쓰러지실 줄 누가 알
았겠습니까.
  당신으 무덤가에 처음  갔던 날, 저는 백일홍 가지 드리워진  그 속에서 노랑나비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늦가을 저녁 청솔가지 태워  밥 짓는 연기가 매캐한 마을 어귀에서
서성이다가, 우리들 발걸음  소리를 듣고 날아오신 아버지 - 저는  아무에게도 말은 하
지 않았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혼령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하얀 소복의 뒷모습
을 보고 저는 처음으로 어머니가 아직은  갓쉰 살, 여생이라기엔 젊디젊은 연령의 여인
이라는 점에 생가이 미쳤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생각이 느리고 둔한지요.
  아버지, 당신이 미처 짝짓지 못하시고 눈을  감으셧지만 동생들도 이제 다 결혼을 하
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막내의 결혼식날 아버지 대신 큰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그애를 보고 우리느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지요. 둘째 아이를 가졌던 저는 그 다음날 우
산이 되어 버리고 말았씁니다. 그러나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저의 아들을 아버지
가 보신다면 "그놈 참 남자답고 씩씩하구나. 마음에 들어"하실 것입니다.
  어머니- 당신의 철없던 아내, 어머니는 또 얼마나 달라지셨던지요. '키다리 아저씨'처
럼 무조건으 ㅣ사랑을 베풀던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귀여운 여인이었습니다. 안톤 체호
프의 <귀여운 여인>올렌카처럼 말입니다.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면 두통과 치통이 
생겨서 입이 부르트고 끈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묶고 누워버리는 어머니를 보면, 아버지
는 허허 웃으며 사주시지 않고는 못 배겼지요. 제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 쪽이 손해네"
싶을 정도로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셨지요.
  그러던 어머니가 시조시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해 그토록 방
황하시던 어머니가 이제는 편안해진 모습으로 안경을 쓰고 책을 가까이 하십니다 인생
의 반전, 역전의 드라마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는지요
  얼마 전에는 한국  여인의 귀감- 신사임당상까지 수상하셨답니다. 경복궁  근정전 층
계 맨 ndl에서 활옷을 입고 계시던 어머니, 그 옆에 계시던 외할아버지를 뵙는 순간 왜
그렇게되 아버지가 원망스럽던지요.
  경사스러운 날 눈물을  흘림녀 방정맞을 것 같아  눈을 깜빡이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은 왜 그렇게도 높고 푸르기만 하던지요. 십  년 전 저희 시어머님께서 이 상을 수
상하실 때, 남편으로서 인사말씀을 하시던 시아버님을 바라보며 부러워하시던 어머니의
그 절절하던 눈빛을 아직도 저는 잊지 못합니다.
  당신의 자리를 대신하여 어머니의 스승이신 구상 선생님께서 인사말을 해주셨습니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셨을 아버지, 기특하다는 듯 흐뭇하게 웃고 계셨을까요.
  아버지, 사직골에서는 다시 웃음꽃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이제는 저희들도, 산도 너
무 높은 산은 부담스럽고  사람도 너무 화려한 사람은 피해가는 그럼 나이가 되어갑니
다. 지상의 악기라는 청춘도다 지나가고 이제는  천상의 악기를 타는 듯이 연륜을 가꾸
어야 할 나이입니다.
  사직골 흰 눈밭 위에 송백으로 서 계실 아버지, 세월이 깊을수록 푸르옵소서.

    남편이여, 미안하오

  오늘도 남편의 귀가시간이 늦어지는 것 같다. 기다림에 지치다보니 새로운 재미가 생
겼다. 시계추가  뎅뎅, 자정을 울린 지가  한참이고 귀뚜라미 울음소리조차  멀어져가는
깊은 밤, 깊을 대로 깊어가느 태고의 정적 속에서 낡은 편지묶음을 들춰보는일이다.  먼
지가 푸석푸석하게 쌓여 있는 보관함에서 카드와 편지를 뒤적여본다. 한족 구석의 가늘
고 긴 카드 위에 자리잡고 있는 빨간 하트표 리본, 'Especially For You' 라고 쓴 금빛
글씨가 눈에 띄어 열어본다. 남편으로부터였다.

  여보, 마누라!
  그동안 사무관 마누라 하느라고  직성에 안 차서 혼났겠지, 그저 둘레에는사장님,  회
장님 '싸모님'들인데 말이야 .그러나 그것이야다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것 아니냐.  난 내
힘으로  과장이  된 거야. 적어도 우리 과  직원은 사모님 할 거야 이제는.  야! 나중에
충분히 목에 힘주게 해줄게 ! 알았지?
                                                                             -
남 편 -
  계면쩍어하며 싱긋 웃는 남편의 하얀이가 떠오르고, 그의 따스함이 전해져오는 것 같
아 혼자 웃고 또 웃었다.
  결혼할 당시 남편의 직업은 무직이었다. 동사무소 근무의 까까머리 방위병,  결혼식도
가발을 쓰고 할  지경이었다.  이제는 그를 매우 사랑하며  몹시 의지하는 친정 엄마는
그 당시에는 시체말로 수슨 '합격증'을 따놓았든가. 학위를 위해 어느 대학원 입학 허가
서를 받아놓았든가 원가 확실한 비전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 나이 차가 좀  있는'이
미 완성되 신랑감'이  더 낫다면서 만류하였다.남편과 나는 동갑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 엄마는 신랑감이라면 얼굴색이  희고 학처럼 후리후리한 사람을 좋아한다.
이 점에 있어 너무 취향이 틀리므로 나는 엄마에게 결혼은 내가 하는것이니 내가 결정
하겠노라고 하였다. 얼굴색이 까맣고 쌍꺼풀이 없는 사람이 내 적성에 맞다. 키가  작은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작은 고추가 맵다 "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인간성이 좋
고 능력이 있으면 그만이지 외양이 뭐 그리 중요한가 하느 것이 내 마음의 항변이었다.
  남편은 학처럼 후리후리하지도  않았고 얼굴빛고 까맷으며 (원래도 그랬지만  훈련중
이라 더욱) 더구나 소위 그 무슨 '쯩'도 없었으며 게다가 외아들이었다.
  나는 그의 싱긋 웃는 웃음과 굵은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으므로 결혼을 결심했다. 그
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날,  명동으로 나갔다. 집에 있는 모든 구두를 가지고 나가서  굽
을 반으로 잘라버린 것이다.   그롸 키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몽당 잘려나간 구두이  굽
꼴을 본 엄마는 어이가 없었던지 입을 삐죽하였다.
  그후 그가 두 번째로 우리집에 온 날, 엄마는 저녁 상을 내면서 비장해두었던 과실주
한 병을 꺼내놓았다., "이 술을 자네가  마시게 될 줄은 몰랐는 데... "순간 그의 얼굴은
약깐 당황한 빛이  스쳐지나가더니 예의 그 뻔뻔스러움으로  "이거 죄송합니다. 장모님
엉뚱한 놈이 시음을 하게 되어서요"하였고 엄마는'우하하'웃고 말았다.
  그때 남편은 방위병이었지만 제대 후에는 고시를  볼 것이라고 했다. 나는 원래 공적
인 일에 종사하는 직업을  원했으므로 고시를 봐야 한다는 계획에는 별다른 이의를 제
기하지 않았으나 합격의 확실한  보장이 없는 불안한 세월을 결혼 초부터 보내야 한다
는 사실만이 약간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믿었다. 절대로 실망깁지
않을 것이라고.
  불확실성의 1년이 흐른 후 남편은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나와는 달리 나이차가
조금 지게,소위 '이미 완성된 자'에게 시집을 간 친구들은 푸짐하게 생활의 혜택을 누리
고 있었으나 우리는 연수를  받으러 곧바로 시골로 이사를 가야 했으며 딸아이는 이미
아장거리며 다리고 있었고 시어머님은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게다가 시아버님은 'ooo'
이란 별명이 충분히 어울리도록 호랑이 아버님이 아니신가. 더욱 결정적인 사실은 도대
체가 월급이 '쥐꼬리'란 사실이었다.
  물론 양가에서 도움을 받았으나 나는 끊임없는 불평을 하였다. 아아, 불쌍한 남편, 얼
마나 골치가  아팠을까, 남편이여, 미안하요.그렇다고  내가 무슨 '재개발  딱지' 라든가
'복권 당첨'을 하여  재산ㅇ르 불려놓은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처음에 '딱지'라는 말을
듣고 나는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얘기를  하는 줄 알았다. 주위에는 소위 '환골탈태'하여
거듭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공무원에게 재산공개가 실시된 요즘 나에게는
아무런 감각이없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이제 결혼한 지도 16년 , 강산이 한 번 반은 바뀌었다. 아이들은 자라 스스로들 할 일
을 다하고 있다. 남편은 일이 바빠 늦게 귀가하는 날이 잦다 . 일반인들은 생각한다.  '6
시 땡' 하면 공무원들은 귀가하니좋겠노라고,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요즈음은 세월이
좋아 '시간외수당'도 있지 않은 가. '시간외수당'이란 단어가 있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살
아가는 그들- 일 년에 한 번 있는 지도 모르며,  일요일조차도 툭하면 출근하는- 을 볼
때마다 억울한 생각과 아울러 건강이 걱정된다.
  밤늦게 나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수필을 쓰기 시작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대에게  쓰는 편지처럼, 혹은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
으로 수필은 언제나 끊임없이 나와의 대화를 계속한다.그는 나를 지겨워하지도  않고,내
숭을 떨지고 않으며, 끝까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준다. 내가 나로 돌아가는 이  시간만
은 참으로 안락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니 딸아이가  말했다.
  "어떤 남자가 주연아 선생님을 찾았어요,  누구냐고 물으니까 그냥 잘 아는 사람이래
요"
  '선샌임?' 오, 이 얼마나 생소한 이름이더냐,  아줌마,  oo엄마, oo에미, 이외의 호칭을
듣는 친구도 있는 모양이나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
  선생님, 참으로 황홀한 호칭이 아닌가.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상상을  했다. 과연
나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를 자가 그  누구인지를.행복한 저녁시간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이었다.
  "여보세요, 주연아 선생님  계십니까"."네 전데요." "아, 안녕하세요, 저  다름이아니라
oo신문사의 ooo지가 이번에 구독 만료인데요, 1년만 더 연장하시라고요".
  그럼 그렇지, 나는 쓴웃음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사 내용이 어려워 그만  보려
고 했지만 책을 팔기  위한 수단일지라도 선생님이라고 불러준 호칭값으로 6개월의 연
장을 하고 말았다.
  남편이여, 마안하오.
  그동안 긁은 바가지에 대하여 잊어버려주기 바라오. 그러나 한가지 분여히 해둘 사실
은 나는 사모님이란 호칭을 몇 천 배 더 좋아한답니다. 다시 말해 그 누구를 등에 업은
큰 식민지가 되기보다는  작은 공화국의 주인으로 서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무척 노력을 해야겠지요. 또한 적극 밀어 주는 그대의 배려,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내 첫 수필집이  나오는 날, "'당근과 채찍을 번가랑 주시던 엄마와 남편에게
이 책을 헌정합니다."라고  쓰겠어요, 물론 채찍이 엄마.  당근이 그대의 몫임을 밝힙니
다.
  그럼 이 깊은 밤,  그 어디서 포장마차를 기웃거리고 있을 그대, 빨리빨리 귀가를  하
여 다음날의 출근에 대한 글을 쓰면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총총

    외할아버지는 예술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지도 벌써 7년이 다 되어간다.  이제 며칠 후면 할머니의 기일이
다. 엄마는 제사를 모시러 송광사를 가신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시인 외할아버지와 사업가 외할머니는 참으로 환상적인 커플이었다. 대구
의 '서'부잣집 장녀인 외할머니는 그당시 월반을 두 번 하여 신문에도 났다.는 2살 연하
의 외할아버지를 만나 시집을 갔다. 엄밀히 말하자면 외가에서 는 똑똑한 데다,  외모가
출중하다고 소문난 외할아버지를 택하여 결혼시켰던  거이다. 꿈을 먹고 사는 문학도인
할아버지는 평생을 집안의 걱정은 접어둔 채 시작에만 몰두하셨다.
  우리는 어릴 때 외가 옆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아스라이 기억이 난다.<>사항
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로 유명하니 유치환 선생님, 그리고 그이 연인이라고도  했던
이영도 선생님(희미하게  떠오르는 그분의 머리 모양은  참 특이하여서 언제나  머리를
땋아 얹고 다니셨다.)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이 할아버ㅗ지  댁을 드나들며 교류하였
다. 떠한 <마돈나, 나의 침실로>의 시인 이상화 선생님은 할아버지의 집안 형님이었다.
  할아버지의 방은 사방이 책으로 둘어싸여 있었는데  그 중의 아무 책이나 뽑아도 '이
설주님께...'라고 쓰인 작가의 사인이 들어 있었다.  그 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모두
아주 유명한 분들의 사인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하루종일 커튼을 치시고 스탠드를 켜놓고 책을 보셧는데 하늘에 있는 해
를 방안에 불러들일 생각이었을까.  가끔은 리시버를 꽂고 라디오를 듣기도 하셨다,  우
리집의 문학소녀였던 나는 할아버지의 좋은 친구였다.
  중2때의 일이다. 나도 장래 작가가 되어 보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소설이랍시고 대학
노트 삼분의 일 분량에  '끝없는 동공'이란 제목으로 글을 서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절대 비밀로 하고  혼자만 보셔야 한다고 약속을  하고 말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석민,
그리고 수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말도 안 되는  소설(?)을 끝까지 읽으시고 얼마나 한심하셨을까마는 , 할아버지는
오히려 다정하 ㄴ미소를 띠시며  "잘 썼다. 앞으로 계속 써봐라. 희망있다."라고 해주셨
다. 그때 만약 할아버지가 "이걸 글이라고 썼냐?  정신차려, 이친구야"라고 하셨다면 나
는 다시는 원고지를 곁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대구에서 가장 큰 서점인 할머니의  문화서점으로 갔다. 거기서
공짜로, 내 마음대로 무수히 많을 동화책을 갖다 읽었으며, 할머니와 같이 근처의  양식
집에 가서 소위  런치 A, 런치B같은 고급 음식을  실컷 먹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할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 서재를 뒤져 김내서의  <실락원의 별>을 비롯하여  학생의
정도를 정도를 조금 뛰어넘는 약간 야스러운 책도 읽곤 했다.
  그 당시엔 어려서  잘 몰랐지만 할아버지는 연애에도  소질이 많으셔서 걸 프렌드가
많으셨던 모양이엇다. 엄마는 회상하기를  "만경관극장에 갔더니 너희 할아버지가 어떤
미모의 젊은 여자와 함께  영화를 보러 오셨는데 들킬까봐 냐가 오히려 가슴이 떨려서
혼났다."고 하시며 이제는 웃는 여유까지 보이신다.
  평생을 남편 섬기는  일과 사업에만 저념하시던 할머니느 말년에 사업에  실패하시고
서울로 이사를 오셨지만 돌아가시는 날까지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단 한마디도 없으
셨다. 이런 할머니를 보고  엄마는 화가나서 "바보같이...밀고 당길 줄도 모르고 ..."라며
속상해 하셨다.
  일평생 모든 생활적인  일은 할머니께 밑기고 신선같이 시작업에만 몰두하신  할아버
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별로 애통해 않으셨다.(?)
  할머니를 묻고 내려오시면서도 너무나 담담하지  않으셨나 생각된다. 나는 내 뇌리에
박혀 있는 한창 때의 할머니-금테 안경과 쪽머리, 그리고 옥색 모시 저고리의 품위, 카
리스마-를 생각하며 울었다. 일흔에 이르러 그 큰  한옥과 사업을 다 날릭 아주 조그만
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하신 것이 너무 애달파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유언 조차 무의식
중에서 남편의 저녁상을 걱정하시던 할머니가 불쌍하여 밥을 먹을수가 없었다.
  "나중에 합장을 하시도록 하면 어떨까?"라고  조심스럽게 묻느 외삼촌에게 "쓸데없는
소리, 쯧"하는 무정한 할아버지를 뭐가 좋다고 할머니는 짝사랑하셨던  것일까. 나는 혹
시나 할아버지가 좀더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지 못했음을 뉘우치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
시지 않을까? 기대하며 슬쩍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밥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러나 할아버지- 평소에는 결벽증이  있어 상가에서는 식사를 절대 안하시는 분이-
그날따라 점심을 한 그릇 반이나 뚝딱 맛나게 잡수시고 과일까지 드셨다.
  나는 진한 배반감을  느끼면서도, 혹시 할아버지가 홀로 먼산을  바라보시며 눈 속에
글성글썽 물이랑이라도  고이시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저나  팔짜을
끼고 먼산을 바라보시던 할아버지의 뒷 모습,  그 가슴속에 얼마나 많은 만감이 교차하
였을지 나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탈사이 끝난 후 <달맞이꽃>이란 시집을 또 한 권 펴내셨다. 그
런데 실망하고 도 실망하였다.  그 책은 한 여인에 대한 사랑, 그리고 회한과  그리움이
엇가리는 인간적 고뇌를 담은 책이었기 때문이다.뿐만아니라'달맞이꽃'이란 제목으로 영
화화하겠다는 교섭까지 왓다고 했다. 삭막한 현대사회에서 보기드문 노시인의 순애보가
아니었겠는가.

  <서시>를 보면

  1957년
  스물여섯에
  나는 쉰
  형극이 사랑은
  눈물의 잔을 들었다.
  스승과 제자

  하루 기어이
  꼿샘바람이 불어오더라
  천지는 꺼져버렸지

  어느 곳에 너 있어
  밤을 찢느 소쩍새
  굽이굽이 피울음이야

  저문 산 쉬어
  절벽을 기대 서서
  구름 스쳐 안 가는구나

  라고 되어 있는 데 젊은 시절의 연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할머니 돌아가셨다고 이제 마음놓고  연애시를 쓰시네, 이제 겨우 탈상이 지났
는데,망려이 나셨나. 정말 양심에 털난 할아버지시네"하며 마구 성토하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흐르고  예술의 문턱을 서성이는 나는 이제야 외할아버지의  시심
을, 삶을,그리고 예술을 알 것 같다.
  할아버지는 오직 예술가이시다. 예술가는 영감이 필요한 법, 그렇다고 우리  할아버지
가 이중 살림을 하였다든가  외도를 하여 자식을 낳았다든가 하는 일은 절대 않으셨지
않은가. '예술가이기 때문에'란 말로써 모든 것이 덮어진다.
  시집을 30권 이상이나 내신 근사한 외할아버지,
  국민훈장 은관과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하신 존경스런 외할아버지,
  그리고 늘 검소하신 외할아버지,
  나는 로맨티시스트인 외할아버지를 이해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친구야, 우리 서로 보약이나 지어주자

  매달 마지막 토요일인 12시면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방송작가로 일하는 C, 동시통역
사인J,그리고 나, 우리는 한동네에서 살다가 지금은 각자 다른  동네로 이사갔기 때문에
한달에 한번씩 만나기로 한 것이다.
  C의 어머니와 J의 이모,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여고  동상생으로 절친한 사이여서 우
리도 대르 이은 세교인 것이다.
  여고 시절의 공통 역사를 받침목으로 하여,  우리의 젊은 새댁 시절엔 살금살금 시댁
흉도 보다가 이제는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어 시집살이의 고충쯤은 다 초월하는 여유를
보이며 화제가 180도 바뀌었다.
  구태의연한 토픽에서 벗어나 뭔가 좀 발전해보자는 불문율을 만들었다.
  "요새 뭐 해먹니?"우리 아들은 성적이 팍팍  떨어져서 죽을 지경이야." ."어느 백화점
에서 60% 파격 세일 한다더라."등등.
  C는 언제나  신선한 얘깃거리를 제공해 주고  우리는 넋을 빼고 듣는다.  방송작가인
탓에 연예계의 소식은  꼭 잡고 있어 우리는  연예계의 동정을 월간지나 주간지보다도
미리 안다.또한 우리는  그 동안 시청했던 C의 드라마인<연인>과  <애인>을 비평하기
도 한다. "그 남자는 그  역할에 안어울려." , "o와o는 꼭 결혼시켜야 돼 안시켜면 재미
없어." 등등.
  때로는 우리는 심각하게  말하기도 한다. "지나가는 행인으로  우리를 출연시켜줄 수
없냐"고 구러면 c는 웃으며  말한다. "여러분들을 그런 단역으로야 쓸 수  있느냐, 차라
리 장소 헌팅 스태프에 이름을  넣어줄까"냐고 , 나는 <연인>에 나오는 데이트 장소인
'에스콰이어 클럽','힐 하우스','항아리'를 추천한  바 있다.곳이 방영 되는 날에는 두근거
리느 가슴으로 시청한다.
  c는 수필도 쓰고 싶고, 출판사에서  수필집을 내자고 계약하자는 의뢰까지 왔으나 단
념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수필을 위한 수필은 쓰고 싶지  않고 뭔가 화끈한 수필을
써야겠는데 그렇게 되면 주위에서  묵사발이 되는 사람들이 생길 것 같아서"라고  하였
다.
  또한 c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직업을 의사로 할 경우에는 J의 남편의 모델로  하는 것
을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얼마  전 인기 있었던 <오 박사네 사람들> 처럼, 그러면  그
것은 곧 간접 선전이 되어 환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게 될는지 누가 알겠느냐고 했다.
뿐만 아니라 기회가 있으면 내 친정 회사에서 나오는 참치 통조림을 소품으로 갖다 놓
겠다고도 해주었다. 정말 의리있느 친구다.
  j는 자기도 창작을 하고 싶다는 의욕을 보인다. 시간강사이며 동시통역사인 J는 학기
초에는 일어에 대해 백지이던 학생들이 학기말이 되면 떠듬떠듬이나마 책을 읽게 되는
데 그것을 보면  보람을 느끼기는커녕 샘이 난다고 하엿다.  "학생들이 뭔가 얻고 잇는
동안에 나는 얻지는 못하고 내 것을 고갈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가? 하고, 우리는 "너는
천상 선생 체질이 아니니 빠리 다른  길을 모색해보라, 원하던 추리소설을 공부하는 편
이 낫겠다."고 권유하였다.
  J는 추리 소설에 관한 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안 읽은 책이 없을 정도이며 구성이
나 전개에 있어서도  치밀하게 할 자신이 있으나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순수문학이 아닌 추리소설에는  일반적으로 성적인 묘사가 상당히 나오
는 데 자기는 죽었으면 죽었지 못 쓴다고 한숨지었다.
  우리는 말햇ㅆ다. 90년대 지구촌 최고의 베스트셀러 메이커인 존그리샴의 작픔들에는
그런 묘사에는 전무하니 걱정 말라고 .C의 통역 공부에 자극을 받아, 곧바로 통역 공부
를 시작했던 J는 이제  다시 우리의 격려에 힘입어 KBS문화센터의 추리소설반에 등록
하였다.
  나는 그동안 써두었던 수필을 들고 가서 c와 J에게 보여주는 데 그들은  나의 충실한
모니터 요원들이다. "여기는 좀..."하고 주저하는  하에게 ,"무슨 소리, 괜찮아"라고 용기
를 주기도 하고 좀더 솔직하게 쓰기를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난 "영화를 보아도 완
전히 벌거벗은 여자보다는  시스루의 옷을 입은 여자가  훨씬 섹스어필하다."는 노리로
"최소한의 가릴 것은 가려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느 서로 요즈음 읽은 책, 가령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라든가, 루
스 베네딕트의 <국화의 길>등, 책들이  정보를 교환하기도 한다. 또한 괜찮은 영화, 리
처드 기어의  <서머스 비> ,<파리대왕>같은 영화들이  감명깊었다고 얘기하며 토론도
곁들이다.
  우리 어머니는 C  와J가 일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불타는 라이벌의식을  갖고,
"너도 어서열심히 써서 책을 내라"고  채직질하신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책을 더 맣이
안 읽느다고 야단맞는 사람은 나뿐 아닌가 싶다.
  요즈음 들어 나는 모임에 나가는 일을 많이 줄였다. 예전의 나는 소위  '사교'또는 '친
교'를 좋아하여 사람 만나는  일을 즐겼으나 요즈음은 혼자있는 시간이 즐겁다.  더구나
의레적인 모임, 즉 알매이  없는 대확 오가는 모임에는 나가기가 싫다. 다시 말해  내숭
을 떨면서 교양있게 행동해야만 하는 잘느 ㄴ피곤하여 가기가 싫다.그런 자리에서 돌아
오는 길에는 마음이 몹시 허하여 집에  와서는 저녁을 곱빼기로 먹는다. 헛헛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내가 외로울 내가 절실할 때. 한걸음에 쫓아와주는 친구가 필요하다.
  엄마는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밤늦게가지 잠 모 이루다가, 문득  사람이
그리워져서 전화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친구는 많으나 늦은 밤 오랜 시간 송두리째 토
해내기 위하여 전화할 친구는 그리 많지 않음을 그대 느꼈다고 했다.
  로마인들은 친구를' 근심을 함께하는 자'하고 풀이하고, 인디언 말로도 친구란 단순히
프렌드란 뜻이 아니고 나의 슬픔을 자기 등에 업고 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과연 몇  명의 진실한 친구를 가지고 있는 가 나의
슬픔을 진정 등에 업고 가줄 친구가 있는가.
  참딘 벗이 없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비참한 고독이고 그런 고독을 즐기는 자는 야수
가 아니면 신이란 말도 있는데, 나는 야수도  신도 아니기 때문에 참된 벗이 없는 동토
에서의 슬픔을 진정 등에 없고 가줄 친구가 있는가.
  이제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는 살아온 날들이 화실히 많은 것  같은 우리들, 나 혼자
아흔이 되고 뱃  살이 될 때까지 살면 뭐하겠는가.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다. 역사의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이 사라진 세상,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우리들은 말한다. 늙어가면서 보약이나 챙겨주자고.
  친구야, 우리 서로 보야깅나 챙겨주자. 응?

    귀마개와 마우스피스

  임신년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면, 남편은 마흔의 문턱을 넘어서게  된다.다리미로
다려 놓은 것 같이 잔주름 하나 없는 얼굴에 , 흰 머리카락 몇 개 없는 남편은 무척 동
안이다.
  동갑인 나는 유적적 요인인지  뭔지 몰라도 이미 염색까지 한차례 하고 눈 주변에는
방사선 모양의 잔주름까지 서너 개 보이는 데 말이다.
  남편한테서 흰 머리털을 하나 더 발견한 날엔 '와' 환호하며 뽑아주려고 덤빈다. 명분
은 "흉하니 뽑하주겠다"이지만  속셈은 "뽑힌 그 자리에서는 흰 머리털이  두 개 난다"
는 속설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흰 머리칼은 "용용  죽겠지"하고 마치 약을 올리는
것처럼 도무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를 않는 것이다.
  동갑 부부인 친구들은 동병상련이라고  "얘, 너도 신경좀 더 써. 우리  이러다가 누나
소리 들을까 겁난다. 그지?"한다.
  그런데 사십을 바라보는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은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은 남편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잠이 드는 날이 많은 데, 어느 날 그의 코고는 소리에 잠이 깼다.
  "코골이는 늙은 징조라는데 그럼 그렇지, 자기라고 별 수 있어?"
  하고 희심의 미소를 짓다가 "저런,우리 먹여 살리느라고 힘들어서 저런가 보다" 싶어
측은해 하기도 하다가 그날은 새벽 다섯시까지 잠을 설쳤다.
  그날 이후 코골이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나는 급기야 베개를 들고 안방을 탈출하고
말았다. 아이들 방으로, 거실로 전전해보았으나 임시방평일 뿐 근본적인 치유방법을  아
니어서 드디어 남편을 구박하기에 이르렀다.
  "스므드한 코골이라면 또  참겠는데 갑자기 뚝 하고  멈추며 숨을 쉬지 않아  기겁을
하고 흔들어보면 그때서야 다시 크아 하고 시작하니 간 떨어져 모 살겠다"면서...
  승강이를 하며 몇 달이 흘렀는데 우연히 백화점 수영복 코녀에서 귀마개를 발견했다.
  "부드러운 실리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귓구멍으로 쏙  들어가 100% 방수가 된다"
는 판매원 아가씨의 말이었다. "오라,  저 귀마개는 나를 위한 것이구나, 방수용이 아니
라 소음방지용이긴 하지만...어떠랴. 응용하는 것도 능력이지, 살았다.  "하고 당장 한 벌
을 샀다. "오늘부터는 귀마개도 준비해뒀겠다, 남편에게 좀더 관대해지리라"다지했다.
  그날따라 남편은 일찍 들어왔다. 저녁을 먹은 후 잠옷으로 갈아 입은 그의 입 언저리
가 두툼한 것이 이상했다. 입 속에 교정틀 같은 허연 물체를 끼우고 있는 것이다.
  깜빡 놀라면서 '이  나이에 웬 이빨 교정이에요?"  묻는 나에게 남편은   "아니, 이거
권투선수들이 시합할  때 끼는 마우스  피스인데... 코골이 방지에 도움이  된다고 하길
래..."하며 멋쩍어하는 것이 아닌가.
  한 편의 코미디였다. 부부를  묘사할 때 일심동체, 이심전심이란 단어가 빈번히  등장
하는 이유를 파악한 우리는 약속을 했다.  "더 늙어서 남편의 코골이가 수위를 넘어 봇
물 터지듯 온 집안에  넘쳐 흘러도, 혹 내가 새오리 이갈기를 시작하더라도, 절대로  서
로 구박하지 않기"로 말이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방불케 한 이 사건 이후 내게는 새로운 고민이  생
겼다. 귀마개의 성능이  너무 좋아 알람 시계의  벨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아침이
또 늦었다고 불평하는 아이들에게 "이젠 한국도 많이 발전했다. 100%완벽한 제품 생산
이 가능하니 말이야..." 동문서답한다.
  귀마개 덕분으로 평화의  휴전협정이 조인된 지 몇 달 후인  어느 날, 갑자기 오른쪽
귀가 멍멍하고 소리가 잘들리지 않아 병원을 찾았더니 고막에 바이러스 균이 감염되었
다는 것이다. 며칠만 늦게왔어도 귀가 먹을 뻔했다는 것 아닌가.
  귀마개를 너무 애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보관을 잘못하여 바이러스가 귓속으로  침
투한 것이다, 코골이에서 잠시 해방되였다가 영원히 보청기를 낄 뻔한 것이다. 눈을  흘
기며 투덜거리는 나에게 남편은  "하늘 같은 낭군님을 구박한 벌 "이라며  슬며시 웃었
으나 한가닥 자책이 얼굴 위로 얼핏 스쳐감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 어느 날 그의 코고는  소리가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해조음 소리로 둔갑할  날이 오지 않을 까. 그러면 내  귀는 소라껍질이 되어 부웅부웅
뱃고동 소리 울리는 기나긴 꿈의 항해를 떠나리라.
 
    페페에게
 
  50여 년 만의 더위라더니 올 여름은  정말이지 끔찍한 더위였다. 축축 늘어지는 이런
날씨엔 보신탕이 제격이라며 남동생은 앞장을 섰다.
  평소라면 눈길조차도 주지 않고 지나쳤을 사철탕집이겠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요즈음은 내 몸이 지쳐 있고 이제는 정신까지 몽롱해지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평창동 어느 경치 좋은 가정집이었다. 나는 어쩐지 덧떳한 일을 하는 것 같지가 않아
서 쭈뻣거리며 들어섰다. 손님들은 만원이었고  아주머니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수육과
찌개를 나르기 바빳다.
  설마 여기서 개를 때려잡지는 않겠지, 혹시 사철당집 종업원들이 인상은 어딘지 잔인
한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가하며 두리번거려보니 생각과는 달리 둥글둥글 복스러
운 인상의 아주버니들뿐이었다.
  우리도 탕과 수육을  시켰는데 난생처음 본 개고기는  마치 육개장 속의 고깃살처럼
보였다. 나는 차마 젓가락을  대지 못하고 계속 야채만 집어먹가다, 마지막 순간 두  눈
질끈 감고 귀퉁이 떨어져나간 고기 한 점을  집었다. 입 속으로 들어간 순간 야릇한 느
낌에 진저리를 치며 꿀꺽 삼켜버렸다. 차마 씹을 수가 없었다. 죽은 개의 생령이 깽  하
고 짖어댈 것만 같아 얼굴을 찡그리는 데 동생은 맛있게 식사를 끝내고 소화제로 준비
된 살구씨까지 먹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따라 나선 것이 잘못이었다. 도살장에서  뚝뚝 흘리는 피가 연상이 되어 쇠
고기도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이 사철탕이 웬말인가. 학창 시절  다른 학생들이 다 하는
청개구리 해부도 나만 못하지 않았던가.
  중1 생물시간이었다. 청개구리에  마취제를 놓은후 사지에 핀을 꽂는다. 가위로  배를
잘라 해부를 하는 것이다. 나는 부들부들 떪녀서 다리 하나에 핀을 꽂는 순간에 들리는
야릇한 소리에 진저리를  쳤다. 울면서 도저히 이 실험은  못하겠다고 뛰쳐나갔던 일이
생각난다.
  얼마전 TV에서 보았던 사회 고발 프로그램도  떠오른다. 무허가 개 도살 장면이었는
데 험상긎은 사나이가 마치 무슨 물체를 깨뜨리듯 개의 두 개골을 철퇴로 퍽하고 치는
순간 개는 픽  쓰러졌다. 그 화면을 본 날 나는  인간의 잔인성이 여기에까지 이르는가
싶어 혐오감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오뉴월 개 패듯이"한 말도 있듯이 몽둥이로 맞
아 죽은 개일수록 맛이 좋다지만  설마 그런 이유 때문에 이렇듯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인간에게도 사주팔자가 있다지만 개에게도 개  나름의 타고난 수명이 있는가 싶어싿.
어떤 개는 부잣집 애완용으로 일생을 호강에 받쳐 살며 사랑까지 듬뿍 받는다. 조금 더
팔자가 좋은 개는 그렇게 한  십 년 살다가 죽은을 맞이하면 개전용 관에 누워 지극한
애도 속에서 작별을 한다. 주인에 따라선 비석을 세워주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먹힌 개는 얼마나 팔자가 사나운 개가. 어디서 길을 잃고 헤
매다가 몹쓸 사람처럼 남이 볼세라 어색하게 사철탕집을 나섰다.
  그날 밤 나는 기분이 계속 언짢았고 특히 옆자리에 누운 딸아이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까닭인즉 지난날  강아지 한 마리가 딸아이에게 큰  슬픔을 안겨준 일이있었기
때문이었다.
  페페, 요크셔 테리어,
  정이 들 대로 든 아이는 이 애완견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밥 먹을때도 한자리에, 공
부할 때도 옆자리에 , 잠잘 때도 한 이불 속에서, 지극한 정성을 솓아부었다. 날이 갈수
록 더해가는 아이의 사랑은 걱정이 될 정도였고 똥, 오줌을 전혀 가리지 못하는 페페는
점점 키우기가 힘들어졌다.
  드디어 결단을 내려 아이에게는 의논도 없이 남의 집에 보내기로 결심하였다.집에 페
페가 없자 아이는 식음을 전폐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잇었고 그로부커 받은 상처가 회
복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 듯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아이의 비밀 책상서랍에는 강아
지, 사진,카드, 책갈피꽂이 등등 수십 마리의 강아지가 오글거리며 살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년 후 강아지가 이사가 있는 그 집에서 집을 나가버렸다는 소
식을 들었다. 죄책감에 어쩔 줄 모르는데 그날  따라 아이가 학교에서 불쑥 내 앞에 책
을 내밀었다. 글짓기 대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운 얼굴'이란 제목의 이 글은  페페
의 이야기를 쓴 글이 아닌가.
 
  그리운 얼굴

  누구에게나 눈 감으면  꿈같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보고 싶은  얼굴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내게도  역시 밤에 침대에 누워  온통 그믐달 하늘빛인 천장을  멍하니 바라볼
때, 꼭 그같은 눈빛을  가졌던 얼굴 하나가 아른거린다. 바로 우리 강아지 페페의  얼굴
이다.
 (중략)

  이렇게 시작되는 이 글엔 페페에 대한 사랑이 그득히 담겨 이었다. 나는 충격과 죄책
감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페페가 떠난후  나는 의식적으로 강아지 얘기는 화제로 삼지
않았는데 이 아이는 아직도 페페를 잊지  못하고 있었던가, 나는 정말이지 아이에게 못
할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페페는 집을 나갔다고 한다. 벌을 받은  것
같았다. 페페는 도대체  어디를 갔는지... 혹시나 하고 기다려봐도아직도 페페는  돌아오
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나는 비록 씹지도 못하고 꿀꺽 삼켜버린 한 점이긴 했지만 그리고 무슨
쓴약을 먹듯이 꿀꺽 살키고 돌아오긴 했지만  개고기를 먹었다. 이 사실을 아이가 안다
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페페의 원망스런 듯한 눈이 나를 보는 것만 같아 괴롭다.
  불교의 인연설에 의하면 모든 생명은 죽어서 다시 환생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페페
야. 너는 다시 태어나거라, 너는 다시 태어날 때 절대 견공으로 태어나지 말고 좋은  집
에 귀동자로 태어나거라.나는 숨길 수 없는 내 속마음을 기도하듯 중얼거려본다.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하고 업을 쌓아  내세에 좋게 태어나기를 기원한다. 개들은 어떻
게 업을 쌓아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밤늦게 이웃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마치 내세엔  인간을 태어나기를 호소하는 듯 들린다.
  본의 아니게 사철탕집에 가기는 했으나 그  후유증에서 나는 괴롭다. 설사 내년에 올
해보다도 더 더운 여름이 온다 하더라도 내 다시는 사철탕집에는 가지 않으리라.

    '거울 앞에 선 누님같은 국화꽃'외할머니

  며칠 전 어느 인기 아나운서의 <애첩기징, 본처기질>이란 수필집을 읽으면서 돌아가
신 외할머니를 생각했다.
  현실적인 감각과는 거리가 먼 예술가,   물질에 초연을 자랑으로 아시는 시인 남편을
모시고 사시느라고 평생을 남정네 처럼  살아오신 분, 그러면서도 불평은커녕 할아버지
앞에서는 숨도 한 번 크게 쉬시지 못하고 지내오신 분이다.
  구십을 바라보시는 우리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오늘에도  주무
실 때는 꼭 손결에 주름살이 덜 가라고 , 하얀 목장갑을 끼고 주무실 만큼 외모에 신경
을 쓰시는 분이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일본 대학 문학부를 나오셔서 교편을 잡으셨다. 할아버지는 타
고나신 훤칠한 체격과 수려한  용모르 간직하기 위하여 늘 신경을 썼던 분으로서 사교
계에서도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셨다고 한다.
  산아 제한이 없던 그 무렵이었는데도 젊은 날을 훌쩍 만주로 떠나버리신 할아버지였
기 때문에 할머니는  두 남매박에 두시지 못하였고  든든한 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쪽 같은 자존심 하나로 평생을 홀로 버티어오셨던 분이셨다.
  지금의 세월에서야 여성이 일을 가지면 '능력있는 여성' , '커리어 우먼'으로서 인정을
받지만, 그 당시만 해도 오히려 '팔자 세다"느 소리까지  들으시면서 여성으로서는 여성
으로서는 드물게 서점과 출판사를 경영하셨다.
  그러면서 교직을  사퇴하시고 대낮에도 검은  색안경을 끼시고 시상에만 몰두하시는
두 살 아래인 할아버지를 무슨 군주처럼 떠받들어 모셨던 할머니셨다.
  어린 시절 나는 학교가 파하기가 무섭게 할머니가 계시는 서점으로 달려갔었다. 할머
니의 서점은 30여 년 전 대구에서는 보기 드문 큰 서점이었다. 건물 전체가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장식이 되어 있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반듯한 쪽찐 머리에, 옥색 세모시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시고 금테 안경이 썩 잘 어울
리시는 할머니는 언제 뵈어도 여인으로서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으셨으며, 근엄한 의지
를 지닌 한국의 전통적인 부녀상을 보는 듯하였다. 그러나 손주들에겐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어운 분이셨다.
  내가 "할머니-" 하고 찾아드라치면 "그래, 내 새끼 왔나?"하시며 속품에 꼭 안아주시
던 체온이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우리 집은 한 울타리  안에 나란히 외갓집과 붙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하루에도열두
번씩 외갓집을 드나들었다. 놀다가 지쳐  잠이 든 나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
른 아침 할머니의  낭랑한 불경 외시는 소리에 잠이 깨곤  하였다. 몸이 약했던 나에게
할머니는 철마다 한약을  달여주셨는데 나는 이 입데 쓴  약이 먹기 싫어 방안에 있는
화분에다 슬쩍 솓아붓기도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용케 알아채시고 "이 철없는것아. 한 번만 더 그러면 니 에미한테
당장 일러줄게다. 니  덕에 이 화초만 살이 통통  찌겠구나"하   머리를 쥐어박곤 하셨
다.
  그러던 다정한 할머니셨는데 말년에 사업을  다 실패하시고 울적하게 지내셨다. 팔순
이 훨씬 지난 8월 한더위 어느날 유일한 낙이시던 노인정에서 돌아오시던 길에 뇌출혈
로 쓰러지셨던 것이다.
  우리들은 불시에 의식불명의  상태인 할머니를 뵈면서 할머니에 대한 애정에  정비례
하여, 생활이 짐만  잔뜩 안겨주시고 사랑은 주실 줄 모르시던  할아버지에  대한 비난
아닌 원망의 화살을 돌리기도 했다.
  이 막막한 눈물의 와중에서도 우리들의 가슴을 쳤던 할머니의 마지막 말씀이 계셨으
니 그것은 임종에다다라 무의식중에서도 마지막 모기 소리만큼 남긴  한마디가 "할아버
지 진지상 차려드렸나?"하신 말씀이었다.
  이 얼마나 만고에 불변하는 한국 여인의 지아비를 위한 상심이자 사랑이었던가?하는
생각이다.
  "다시 태어나면 남자의 사랑을 기다리는  여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여인을 사랑할 수
있는 남자로 태어날 수 있도록 마지막 가는 길에는 장부의  옷을 입혀달라"고 말씀하시
곤 하시던 우리 할머니!
  오직 조강지처 하나의 길로만 살아오셨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언제나 큰 치마폭으로 감싸주셨던, 차라리 누님같았던 할머니.
  이제 서러웠던 일 다 가시고 내세에서는 애교도 부릴 줄 아는 여이느 더러는 앙탈도
부릴 줄 알고 바가지도 긁을 줄 아는 여인, 사랑을 준 만큼 받기도 하는 그런 여인으로
태어나서 온전한 생애를 누리소서.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국화꽃"이  되지 마시고
5월 태양 아래 스스로 목숨을 불태울 줄 아는 정열의 꽃, 장미꽃이 되어보소서!

    화살과 노래

  미국 ooㅇ에 사는 친구   k 한테서 오랜만에 편지가 왔다. 대학 시절  4년 동안을 함
께 붙어다녔던 k  나의 대학생활을 회상하라면 k  가 없는페이지가 거의 없다.  사실은
소극적인 성격의 나와  몹시  적극적이던 k 성격적으로 무척  다른 우리가 친할 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 반대되는 점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서로 상반된 성격의 소
유자들이 잘 어룰릴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사람이란 누구나 완전무결할 수 없는 존재여서 자기에게서 모자라는 그 무엇을 바깥
에서 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  누구에게나 있는 것, 나에게서 모자라던 적극성을 나
는  k에서도 보았고, 보다 내성적이고 사색적인 것이 부족했던  k 는 내게서 그것을 구
했기 때문일까.
  언제였던가 그녀와 나는  함께 장난삼아 당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말죽거리에
있다는 유명한 당사주 할머니 집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우리는 찌그러져가는 한옥을
찾아냈다. 할머니의 집은 울긋불굿한 천에 알 수 없는 그림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
었고 , 한참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그림이 그려져 있는 사주책을 펴 보이며서 하
던 할머니의 얘기 중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그 기억은  넓은 바다에 돛단배가 떠 있고 한 여자가 그 배를
타고 가는 그림이었다.  할머니 k에게 "학생은 우리나라를 떠서  장차는 외국으로 가서
결혼 생활 을 할 사주구먼"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철저히 한국적이며 외국 생활은 털
끝만치도 생각해 본적이 없던 k  는 입을 삐죽거리며 할머니는 엉터리다 라고 했고 나
역시 황당무계한 점괘하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할머니는 나에게는 학생의 전새은 고대 인도의 어느 공주님의 시녀라고 하였다.
나는 김이 새서 "체, 하필이면  후진국인 인도이며 왜 하필이면 시녀야" 하고 툴툴거렸
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러나 그 후 k 는 정말로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생활을 시작했고 이제는 아주 안정
이 된 상태다. 내가  k에게서 받은 놀라움은  평생 직장하고는 담을 쌓을 것 같았고 살
림만 정열적으로 할  줄 알았던  k 가 이제는  완벽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며 가끔은
미국의 한 지방의 신문광고에도 그녀의 사진과 이름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끔씩 k는 그러한 자기의 변신이  몹시 자랑스러운 듯 자신의 사진이 찍힌 각종 메
모지, 신문 공고, 명함 등을 편지와 함께 소포로 보내왔다. 그런가 하면 느닷없이 밤 12
시에 전화를 하여 잠을 깨워놓기도 하는  k  나는 내 삶의 후반부도 그녀와 함께 지지
고 볶으며 보낼 것이라고  생각햇는데 이제 그녀는 생각과는 달리 나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편지를 유달리 쓰기 싫어하는  k  신혼인 내 작은 집이 파수꾼으로 하얗고 자그마한
발바리를 선물로 품에 앉고 왔던 그녀 , 해마다 여름이면 고국을 방문하던 그녀가 향수
마저 잃어버렸는지 이제는 나오고 싶지 않다고 한다.
  나는 지난 주 밤늦게 불현 듯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애교나 부드러움과는 거
리가 먼 목소리, 낮고 무뚝뚝한 남자 같은  그 목소리가 불시에 듣고 싶었느지 나도 잘
모르겠다. 통롸가 길어지자 전화값이 많이 나온다고 일단 끊은 후 자기가 금방 다시 전
화를 걸겟다고까지 하던 그녀. 언제이던가 친구지간에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아이의 이름
을 대신 부르던 어느 친구얘기를 해주면서 듣기 거북하다는 내 말에, 이름을 수도 없이
불러주던 그녀였었는데...
 k의 편지는 그녀의 사무실 주소가  박힌 편지지에 그나마 종이의 반은 여백으로 남겨
둔 채 큼직큼직한 글씨로 씌어 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낯익은 소박하고 대담한 필체이
다.

  연아야,
  참으로 오랜만에 써보는 편지다..
  거진 10년 만인 것 같다. 워낙 쓰는 것,읽는 것을 싫어하고 그저 움직이지 않으면  성
에 안 차는 전형적인 말띠 그 자체지?
  내가 봐도 내 자신을 너무 많이 변하게  한 것 같다. 그렇지만 한결 만족스럽고 자랑
스럽단다. 그저  무능하기만 했던 처녀시절은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럽기조차 핟.  비록
심신이 피곤한 미국생활이지만 지난 16년,정말 아깝지 않았던 시간인 것 같다.
  연아야 , 우리 나이가 참으로 힘든 나인 것 같지?
  아직 여자이기를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고 남들은  이미 가버린 나이로 치고...    참
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단다. 미국 사람들고 우리 나이 또래에 에이지 크라이시스를 겪
는 단다. 남자들이 대로는 걸맞지도  않는  빨간 스포츠 카를 사기도 하고 바람도 피우
고 한단다. 그것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인 것 닽다. 차라리 남자였다면 걸 프렌드를  만
들거나 일에 미치거나 할 텐데...
  그리하여 내린 결론이 결국은 좋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라스트웨이라는 것이다. 허
나 성격상 왜 이리도 세싱에 한쪽 발은 걸치고 싶은지...
  나는 여새 내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사업 관계로 많은 시간을 떨어져 잇으니 처음엔 혼란이 오더라.
그리하여 내린 결론이 더 늙기 전에 일에  미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거야,
연애를 하겠니?초이스가 없잖니?
  연아야, 마음 편히 먹고 한순간 한순간 성실히 재미었게 지내라,
  지금 나이도 곧 부러워할 때가 올 테니까.
  연아야, 답장 기다릴꺠. 안녕.

  마흔을 넘기며 겪었던 나의 갈등처럼 그녀도  많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가
까이 있었더라면 서로를 등 두드려 주며  용기를 줬을 텐데. 그리하여 나이쯤이야 개의
치 않고 발랄하게 서울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을 텐데...
  왜 사람은 만남과   헤어짐을 되풀이하며 영원한  숙제처럼 그리움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정말로 인간에게는  그 당사주의  점괘처럼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일까.  요
즈음 나는 운며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낟. 운명과 숙명과 운세. 그 중에서 바꿀 수 없
는 확고부동한 것은 숙명이라고 했다. 우리들에게 진정코 숙명이라고 했다.  우리들에게
진정코 숙며이란게 있다면  k의 말대로 라스트 웨이는 신에게 순명하는 길인지도 모른
다.
  삶이란 어차피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이제  우리 모두는 글 어느 때인가 반드시
다가울 아름다운 이별을 서서히 준비하며 사실상 나머지의 삶을 채워가는 것인지도 모
른다.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멀어진다는 말을 부정하며 , 이제  세계는 지구촌이라는 말을
긍정하며, 지난날의 어느  한순간에 나를 머루르게 하는 그녀의  편지를 새삼 되새겨본
다,
  오늘같이 별이 총총한 밤엔 젊은  날 우리가 쏘아올린 그 화살과 노래가 잡힐 듯 들
릴 듯 다가오겠지.

  ......오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한 참나무에
  나는 화살을 찾았네, 아직 꺾이지 않은 채로
  그리고 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의 가슴속에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네.               
                                  -헨리W.롱펠로의 <화살과 노래>중에서


 
    재산목록 2호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 마음으로 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갖는 것이 재산
목록 2호쯤 된다고  한다. 나는 언제나 그와의 만남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 친
구가 한 사람있다.
  얼마 전 TV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니시리즈 <질투>의 작가 C가 바
로 그 친구다 , 우리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으나 결혼 후에도 무슨 인
연인지 같이 여의도에 살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야 모두들 똑같은 교복을 입었지만 대학에 와서는 각각 개성에 맞
게 옷을  입엇는데 그녀는 언제나  반듯한 앞가리마의 쪽머리,  무채색 옷에다가
검정구두 커다란 검은  책가방을 들고 다녔다. 그 속에는 각종  문학책과 원서가
잔뜩 들어 있었음에 틀림없었으리라.
  '금값'이란 대학 1년 만끽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두세권의 책만
을 옆구리에 끼고 모양내기에  급급했던 우리들 사회에서 그녀는 분명 이질적인
존재였었다.
   C는 영문과르 ㄹ졸업하고  한극일보사 기자로 취직을 하였다. 신문사에 취직
한 C는 그녀의 앞에 펼쳐진 청춘과 일을 마음껏 사랑하다가 같이 기자로 근무하
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열렬한 연애 결혼을 했다.
  나도 결혼을 한후 후암동 시댁 근처에서 살다가 여의도로 이사를 갔는데 공작
아파트에 살던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졸업  후 다시 만난 그녀는 옛날의 c
가 아니였다. 나는 그녀가 결혼 후에도 계속  직장생활을 할 줄 알았는데 직장을
그만두고 매일 수영장이나 다니면서 손톱을 길게 길러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르
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남아돌아 죽겠다는 듯 알록달록한 긴  홈웨어를 입고
유모차에 아이를 싣고  어슬렁어슬렁 아파트 주변을 돌아다니곤  했었다. 이것은
정녕C에게는 어울리는 그림이 아니었는데...
  우리는 매일같이 만나 낄낄거리고 수다를 떨었다.  마치 하루하고 만나지 않으
면 출석부에 결석도자이라도 찍히는 것처럼 매일매일  수다를 떨었다. 수다의 최
장기록이 7시간을 갈 때도 있었다.
    나는 신문방송학과를 나왔는데 나의  희망도 신문기자였다. 나는 무식하게도
신문방송학과에서는 신문기사  작성법을 가르치는  곳인지 알았다. 막상  졸업할 
때가 되니까 취직을  희망하는 동창이 20%정도가 되었는데 대부분 기자나  아나
운서 시험을 본다고 하였다. 나도 속마음으로는 신문사에  시험 한 번 보고 싶었
으나. 자신이 없었다.  특히 한자시험에서 무식이 들통날 것 같았다.   게다가 전
형적이 경상도 남자인  아버지는 "여자가 취직을 하다니... 이  무슨 쪽박 깨지는
소리냐?" 하시는 분이었다.
  나는 나의 자신없음을 집안의 엄한  가풍 때문인 양 위장을 하고 대학원에 진
학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신문기자는 나의 꿈이여 이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C에게서 얻어듣는 신문사  애기로는 무료한 일상에서의 탈출구
였다. 사회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특히 머리털 나고 한 번도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나는 ,C가  첫월급 받았을
때의 기분이 어땠느냐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취재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자막ㄴ ,
밥짓고 반찬 만들고 , 시댁 가고, 친정 나들이하고, 아이 돌보고 하는 일뿐, 우리
들의 최고의 외출은 기껏 동네 수영장이었다.
  나는  C에게 진심으로  충고하였다. "너에게는 이런 생활이 맞지 않는다고  더
늙기 전에 반란을 도모해보라도 ."
  C도 "진작부터 고민해왔다며 도잇통역 대학원을 가겠다"고 하였다
  C는 통역대학원을  가고, 나는 유학  가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떠났다. 2년
후, 귀구해보니 C는  상당한 보수의 당당한 자아를 찾은  통역사, 그리고 대학에
출강하는 강사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너한테 어울리는  그림을 찾았구나." 축하
해 주며 나는 C를 부러워했다. 축  늘어져 있던 C의 얼굴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둣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후 나는 또  다시 강남으로 이사를 와서 우리는 예
전같이 자주 만나지는 못하였다.
  나는 시조 공부를  시작하신 어머니를 따라 같이 공부를 하였다.  어머니는 아
버지가 돌아가신 후 충격과 허망함을  메울 길이 없어 시조 공부에 영혼을 불사
르기로 작정하신  분이었다. 어머니는 무척  다혈질인 성경르로 한  번 빠져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셨다. "사람이 한 번 칼을 뽑았다면 끝장을, 하다못해
호박이라도 찔러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C의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는 고등학교 1년 선후배 사이였다. 그러나   C의 어
머니는 같은 학년하고는 잘 놀지 않으시고 1년 선배인 우리 어머니와 그 친구들
과 매우 친하게 지내셨다. C으 ㅣ어머니도 우리 어머니도 왕년에는 모두 문예반
출신의 문학소녀들이엇던 모양이다. 법대를 희망했던C의 어머니는 매우 근엄, 엄
격한 성격으로 친구들  사이에서의 말다툼이나 분쟁을 조정, 심판,해결하는 정의
의 해결사격이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는 몹시  정열적인 성격으로 아직도 소녀 같으신 분,  꽃으로 말하
자면 만개한 모란꽃 같으신 분이다.
  이분들은 이제 연세가  드셔셔 체면, 염치, 내숭,  이런 단어에서 자유스러워지
신 지 오래여서 ,  같이 여행을 가면 밥을 새워  서로의 첫사랑  얘기를 먼저 하
겟다고 아우성이란다.
  우리 어머니는 무척  인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일직
시집을 갔기 때문에 모두들 고백할 때 얘기할 거리가 없어서 몹시 분해 하신다.
  C는 통역사를 하다가 또다시 180도로 변신, 방송 드라마 작가가 되었다. "나이
사십이 넘어서 남의 보조역활하려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나의 이름으 ㄹ걸고 크
리에이트브한 직업을 택하고 싶어서"하고 하였다.
  C는 제 1회 방송 드라마  신인상을 수상하고 아침드라마를 시작으로 성공적인
방송작가의 길을  걸었다. 그녀가 쓴<질투>란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얼마나 웃엇는지 모른다.
  우리가 무료하고 심심했던 그 시절, '이상적인 남자','이상적인 결혼'에  대해 나
누었던 대화들이 드라마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
가! 딸아이가 와서 같이 보자는 것도 거절하였다.나  혼자만의 은밀한 시간, 우리
의 흘러간 젊은 추억을 더듬기 위하여  ...
  주인고 친구의 대사 중 '고무신의 껌'이라는 대사가 나오는 C 왈 "네가 10여년
전, 시어머니가 아들옆에 붙어 있는 며느리를 표현  할 때 일반적으로 쓰는 말이
라고 하면서'고무신의 껌' 이라고 햇을  때 얼마나 유머러스하고 신선햇던지... 아
직도 그말이 생각이 나서 이번에 좀 써먹었다."하고 하여 우리는 배를 잡고 웃었
다.
  내가 C 를 부럽다고 할 때마다 어머니는 "니는 뭐하노?밥만 묵고 집에서 노는
사람은 니밖에 업ㄱ제?"하며 약을 올리신다. 그러면서 "외할아버지,  어머니에 뒤
이어 꼭 열심히 글을 써야 된다"하고 윽박지르신다. 나는 "아무래도 소질이 없어
서 사양하겠다"고 하면 "무슨  소리, 우리집에서는 그래도 니가 제일 소질  있다.
내가 소장하는 책은다 니 줄게"하며 꼬드기신다.
  내가 킬킬 웃으며 "책은 필요없고 쓰시던 패물이나 주시면 더  고맙겠다"고 하
면 어머니는 가자미 눈을 하고 흘겨보신다.
  이제 나도 불혹을  눈앞에 바라본다. 여자에게 있어서  '불혹의 나이'란 무엇인
가? '하나의 고갯마루'아닌가?
  이유 없이 공허를  느끼는 요즈음 그래도 나에게는 C 와  갗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재산목록 2호 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가 , 나의 노후보장은 든든한 편이
아닌가?고 자위도 해보는 것이다.

      3. 보기와 보여주기

    보기와 보여주기

  여성이 몸단장을 하는 까닭은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타인에게 보
여주기 위한  것일까, 그 타인이란주로 이성을  의미할까. 동성도 포함되고 있는
것일까.
  X세대의 후속으로 등장하는 C세대(컴퓨터  세대)의 가치관으로는 미의 추구가
최선의 가치라 한다.그런데  그 미의 기준이란 것이 젊은 시절엔  눈이 쌍꺼풀인
가 외꺼풀인가. 입술이 도톰하여 섹시한 느낌을 주는가 아니가, 슈퍼모델처럼 늘
씬한 팔등신인가 아닌가. 이런 육신의 조건들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점들은 선천적으로 타고 난 유전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어서 다소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허나 중년을 넘어서면 이목구비의 생김생김은  별  의미가 없다. 우선 그 사람
의 전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그 분위기란 육신의  관리가 적당한
비율로 이루어져 외적인  미와 내면의 미가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한다. 내면의
미가 향기로 번져나와야 한다. 분위기가 좋다는  내면뜻과 등식이 성립되므로 중
년 이후의 미는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할 수있다.
  조선시대에는 훌륭한 인물을 꼽는  조건을 말할 때 신언서판이 갖추어져야 한
다고 했는데 그것을 보면 우리 선조들도 외면과 내면의 조화로운 미를 최상으로
쳤던 모양이다. 맑고  깨끗한 집에는 아름다운 주인이 산다는 말이  있듯이 정제
된 육신 속에 향기나는 영혼이 살지 안겠는가.
  춤의 명인인  이사도라 덩컨처럼 조각 같은 외형의 미애 줄려 내면의 미가 과
소평가되는 듯한 경우도  있으나. 철하자 소크라테스처럼 외형과  내면이 차이가
조금만 더 좁혀졌더라면 그는 악처가 아닌 양처와 더불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다.
  나는 배부른 돼지보다는 고뇌하는 소크라테스에게 더 매력을 느끼는 편이지만
아무리 천하의  소크라테스라 할지라도 외양이 정도  이상으로 단정치 못하다면
그 내면의 미를 보여줄 기회조차 상실할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내면의 미를 교양과 지성, 그리고 마음의  수양을 닦음으로써 얻어지겠는데 이
는 끊임없는 절제와  노력을 요한다. 그 집으로 들어서는 길목은  너무나도 좁고
가팔라 실로 많은 희생과 고독을 벗삼아야 한다.
  그러면 외형적인 미를 가꾸른 일은 쉬운가. 절대 그렇지 않다.
  미국의 유명한 앵커우먼인  바바라 윌터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해보았지
만 헤어스타일, 특히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은 첫인상의 삼분의  일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여기에 피부 관리와 화장술, 그리고 체
형 관리까지 덧붙이고 싶다.
  나이에 맞도록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주며, 나날이  잡티가 생기는 피부를 관리
하는 일, 고도의 화장술을 습득하는 일도 만만찮지만  체형의 유지 역시 쉬운 문
제가 아니다.
  대학가에서 나돈다는 "여자의과거는 용서해도 뚱뚱한 것은 용서 못한다."는 우
스갯소리 때문인지 아름다움이 최선이란 의식의 변화 때문인지 수많은 다이어트
비법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 비법들도 궁극에는  식욕의 억제를 필수조건으로 한
다. 인간의 본능 중의  하나인 이 식욕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일은 결코 간단
한 일이 아니다. 허나 고통 뒤의 환희를 만끽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남성들의 주름과 흰머리는 관록의 상징으로 간주되나 여성들의 주름과 흰머리
는 한물간 노화의  징표로 간주된다. 나이에 걸맞는 우아함 등등의  표현도 말장
난에 불과한 흰소리다.  바람직하진 않은 현상이지만 대기업의  신입사원 면접점
수에는 외모의 점수가 상당부분을 차지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고상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백조도 물 위에서의 그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기 위
한 물 밑의 처절한 발놀림이 있듯이, 이처럼  여성들의 미를 유지하는 데도 발빠
른 정보, 그리고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뒤따른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화장하기도 싫고  옷에 대한 투자도 하기 싫어진 나는 이
쯤에서 문득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도 한다. 왜  여성들만이 귀찮은
화장을 반드시 해야 하며 끊임없는 몸단장을 해야만 하는가.
  그러면 남성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언제 우리가  화장하기를 강요라도
했느냐고, 햄릿은 백분칠을 한 오필리오를 이렇게 질책한다. 신이 만들어준 얼굴
을 너희 여자들은 화장이란 속임수로 딴 얼굴을 만들고 있다고...
  이렇듯 속임수의 한 방법으로까지  매도되는 화장이란 것을 도대체 누가 개발
했는가. 나귀  젖으로 목욕하기 위해 100마리의  나귀를 몰고 여행을  했을 만큼
화장광이었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화살을 돌려본다.  그녀는 자기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안토니우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였을까.
  파키스탄의 부토 총리나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가 아이라니을 살짝 칠하
고 새빨간 루주를 바르고 사진을 찍은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당대의 여걸도 여자
는 여자구나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일전에 TV 화면에서 미국이  여성해방론자들이 노브라 운동을 펼치면서 백악
관 앞에 가득  쌓인 브래지어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며  프리덤, 프리덤이라고
소리치며 환호하던 것을 보신 시아버님이 "참 별일이다. 누가 저들보고 브래지어
를 하라고 했나. 자기들이 불편하니까 해놓고 남자들이  강요해서 한 것 처럼 왜
야단이고"하셔서 한바탕 웃은 일이 있다.
  내 친구 중에는 화장과 몸단장에  있어서 가히 프로의 정신을 가진 이가 있는
데 오랜 세월을 사귀어왔지만 나는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15년 전 어느  날이었다. 다방에 앉아 같이 커피를 마시는데  라디오 방송에서
비상을 외치며 "전쟁입니다.  북한의 남침 도발입니다. 빨리 대피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가상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다급한 아나운서의 말에 혼비백산한 우리들은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향했는데
한 시간 후 그 사건은 오보였음이 밝혀졌다.  얼마후 친구들이 다시 만나 방송을
듣는 순간 모두  어떤 생각들을 했는가에 대해 얘기했다. 모두들  급붙이를 챙기
고 먹을 것을 챙기고...  하느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빨리 가서  온 식구들을 외
출복으로 갈아입히고 나도 화장을 고치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아니, 연탄재라도 구해서 얼굴에 발라야지 웬 화장? 누
구 보이려고? 기쁨조로 끌려가면 어쩔려구?" 하면서도 저 친구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화장이 아니구나  자기의 만족을 위한 몸단장이구나. 저쯤 되면  가히 프로
의 경지이구나 생각했다.
  그 후 그 친구가 갑자기 급성 간염에 걸렸다고 하여 병문안을 가면서 설마 이
번에는 화장을 않고 있겠지 생각했다가 또 한  번 쇼크를 받았다. 마스카라와 아
이라인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화장을  하고 귀고리까지 달랑달랑 한 그 친구는
침대 위에 누워  쌕쌕 자고 있지 않은가. 나는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고 "아아,
졌다. 졌어, 너는 정말 프로이구나"라고 말해주었다.
  반면 내가 하는  화장과 몸단장에는 다분히 남을 의식하는 비율이  높다. 나는
약속이 없는 날은 화장도 않고  옷도 대충 입소서는 "아, 오늘 하루는 벌었구나"
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어쩌다 화장을 않고  나섰을 땐 마치 수배중인 죄인
처럼 고개를 숙이고 제발  아는 사람 만나지 않기를 빈다. 그런데  그런 날은 꼭
누구를 만난다.  화장을 마스카라까지 완벽하게  한 날은 자신있게  가슴을 펴고
걸음도 당당히, 누구 아는 사람 안 만나나 둘러본다.
  뿐만 아니라 부부  동반 모임이라도 있는 날은  세수 다시 하고 화장하느라고
바쁘다.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은 "나한테 잘 보여야지 외간남자한테 잘 보이면 뭐
해? 내가 나오랄 땐 부스스해서 나타나면서 부부 동반만 있다면 갑자기 온 집이
시끄럽네"라고 핀잔을 준다.
  그렇다고 나의 화장이 이성을 의식해서인가. 그것은 아니다. 동성끼리 만날 때
는 더 신경을 쓰니까 말이다. 결국 나의  화장과 몸단장은 타인을 의식하는 의미
가 크가는 얘기로 결론이 난다.
  다시 말해 어느 날  내가 무인도가 되고 싶은 날은 맨얼굴로,  남과 더불어 지
내고 싶은 날은 곱게 화장을 한다.  그리하여 '나'라는 무인도에 탐방객이 와준다
는 사실을 즐기고 기쁨을 느껴왔다고나 할까.
  여성이 화장을 않고  편히 널부러져 있을 때 그것이 하나의  낙서라면, 단정한
차림으로 엷은 화장까지 한 모습은 해서라고하겠다.  거기에 성장을 하고 귀고리
와 완벽한 화장까지 했다면 초서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단조로운 삶을 사는
데 있어 낙서와 해서, 그리고 초서 이 모두는 다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나는 요즈음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마나님같이 차려입으면 마나님 같
은 행동을 하고 망나니같이 차려입으면 행동도  망나니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몸단장이 단정치 않은 날은 하루도 단정치 않게 대충 가버린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내가 나를 보는 것이 더욱 중요
하다. 요즘 들어 이른  아침에 내가 거울 앞에 서는 이유는  프로의 주부로서 내
가정에 출근하기 위해서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다스
리기 위해서이다. 

    21세기 재산 관리 기법

  연일 떨어지는 주가로  인해 온통 난리들이다. 그 사회가 처한  상황을 민감하
게 반응하는 것이 주가라고 하는데 어제는 드디어 770선이 무너졌다.
  주식이 재산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주가가 하한가로 내려오면 살맛
이 나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부동산이 재산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거
품경제의 거품이 꺼져버리면 살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근래의 재산 관리 기법은  포트폴리오 기법이라고 하여 안정성과 수익성을 동
시에 염두에  두고 골고루 배분하여 투자들을  한다. 부동산과 주식, 유가증권도
없으며 저축예금이란 것도 없던 고대의 그 시절에는 과연 어떤 포트폴리오 매니
지먼트의 기법을 쓰는 것이 현명했을까. 투자에는  무형적인 투자와 유형적인 투
자가 있는데 무형적인 투자는 사람에 대한  투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가.
  그 당시 사람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던  맹상군은 식객들이 늘어나는 것을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 가를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까지 생가한다. 식객
들에게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면서고 많은 것을 구했던 그는 결국 식객들의 도움
으로 위기일발의 생명을 구하고  계명구도라는 유명한 고사를 남기며 천하의 민
심을 얻게 된다.
  전국시대를 종결시킨 진나라는 어떤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제국을 이룩한 진시황을 탄생시킨 상인불위는 좋은
일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찌  했든 사람에 대한 투자로 성공하여 일개 상인에
서 나라  전체를 좌우하는 국부, 승상보다도  한층 더 높은 상국의  위치에 까지
올랐다.
  오늘날은 예금 거래가 PC동신으로 이루어지고  포트폴리오 학과목까지 대학의
정규 과목으로등장하고 있다. 1년에도  두  차례씩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다는 이
시대에 많고 많은 다양한 형태의  재산 투자 기법이 출현하고 있지만 우리는 과
연 인간이란 소중한 재산에 대해 얼마나 투자를 하고 있는가.
  구체적인 형태의 물질에 대한  투자보다는 무형적인 가치에 대한 투자를 하기
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투자는 언제 어디서 효력을 발생할지 모른다. 컴퓨터로
계산할 수 없는 절대의 가치로서 돌연 나타날 수도 있다.
  멀리서 생각할  것도 없다. 몇 천  년의 지혜가 쌓여져 내려온  역사가 증명한
그 지혜를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몇 천  년이나 몇 백 년 전이 너
무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좋다. 현대를 살펴보자. 인근의 예를 들어보자,
  등소평이 없는 중국은  상상할 수 없지만 그  천하의 등소평은 아무런 군벌도
재력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이 70이 되어서도  소장파로서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젊은이들에게  꾸준히 자기의 사상과  철학을 설파
하고 인재들을 길러 왔기 때문에 모택동 사후에 그는 중국을 장악하게 된다.
  몇 번의  고비는 있었으나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나 중국을 좌지우지했던
등소평은 그의 사후에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 지지자들은 중국을  지배하며 그
가 뿌린 씨앗을 대를 이어 풍성한 수확을 계속 거둘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를 봐도 그렇다 .
  하나회의 인맥을 결성하고 그  조직에 노력을 투자해왔던 사람은 대통령이 되
었다. 결국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을 언도받기는  했지만 어쨌든 일세를 풍미하였
다. 그리고 그 인맥으로 정권이 창출되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투자가 포트폴리오 기법의 제 1번이 될
까. 가정은 작은 국가이고  국가는 큰 가정이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절대권력자
들의 예만 들 것이 아니라  가정에도 이 법칙이 통용된다.
  어떤 사람이 포트폴리오 매니지먼트를 성공적으로 한 사람일까.
  올바르게 자라나 사회에서 제  몫을 분명히 해내는 자식들을 가진 이들., 그런
사람들이 포트폴리오 매니지먼트를 훌륭히 한 사람들이  아닐까. 그 중에서도 특
히 스태드 업  가이를 가진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
까.
평소에 친하던 열 사람보다 정작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깃발
을 들어줄 사람, 단 한 명의 스탠드 업  가이를 가지고 있다면 세상에 그 무엇이
두렵겠는가. 다시 정치 얘기를 해서 안 됐지만  모시던 윗분을 위하여 세 번이나
감옥을 갔다 오면서도 "각하,  휴가 가서 푹 쉬고 잘 다녀왔습니다."라고  했다는
모씨는 그 의리 때문에 한때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하기도 했다.
 21세기에 이르러 경영학이  좀더 발달하게 되면 물질적 포트포릴오 매니지먼트
기법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투자를 주용 투자의 한항목으로서 다루는 강좌가 생
겨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진짜 자기가 필여할  때를 대비하여 스탠드 업 가
이를 만드는 그런 기법도 대학  에서 가프쳐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학문
이나 기술상의 기법에만  의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형의 플러스  알파가 뒤따
라야 할 게다 , 우리가 쉬운 말로 부르는 소위, '인덕', 그것은 그 만큼 덕을 베풀
고 그만큼 자기 희생이 뒤따라야 찾아오는 것일게다.

    시보다도 짧은 문학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를 알고 돈을 버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분야를 연구하는 경영학과는 상당한  인기가 있다. 경영학에는 회계학
, 재무관리학, 조직행태학 등 여러 가지 세부적인 파트가 있지만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케팅이라 한다.
  그러면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마케팅이란 것은 소프트웨어이든  하드웨어이든 간에 제품이나 물건을 시장에
내어놓을 때 어떤  이미지로서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것인가.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그  마케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네이밍이고  그것이 결
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한다.
  샴푸의 이름이나 전자제품의 이름, 옷의 브랜드  네임은 고사하고 심지어는 청
산리 벽계수나 김삿갓과 같은 소주의 이름까지도 이름이 그 상품의 성패를 결정
짓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한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책이나 영화의 제목도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하며 까페나 레스토랑을 갈 때도 우선 멋진 이름에 솔깃해지지
않는가. 어떤 영화의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제목이  좋지 않으면 손님이 들지 않
으며 <젖소부인 바람났네>와  같이 내용은 별로일지라도 제목이 특이하면 우선
호기심에 이꿀리는 사람이 많다.
  사람도 예외일 수는 없어  사람이 괜찮아도 이름이 촌스러우면 점수가 감점되
고 이름도 멋있으면 금상첨화로 가산점이 붙는다.  우리 어머니 세대의 이름들을
살펴보면 영자나 순희 또는 아들이 아니라 섭섭하다고  섭섭, 딸은 이제 그만 사
양하겠다는 의미에서 말자등 요즈음 감각과 조금 거리가 있는 이름들이 많다.
  70년대의 대히트작인 <별들의  고향>의주인공 경아의 영항인지 나의 뒷 세대
에는 영아, 미아, 진아 등 '아'자 시리즈의 이름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요즈음에
는 아들은 지훈, 동현, 현우, 딸은 민지, 지은, 수진과 같은 세련된 이름으로 진일
보하였다.
  나는 다복하게도 이름이  세 개나  있는데 그  모두에 대해 약간의 불만이 있
다. 우리 세대에서  내 이름은 특이한 편에 속하는데 이름은  시인이신 외할아버
지가 문학전인 감을  살려 지어주신 것이다. 내 불만의 이유는  이름의 한자뜻에
너무 곱고 예쁘거라라는 뜻만 들어 있어 그렇게까지 곱고 예쁘기만을 기원할 필
요가 있을까. 너무 여자 냄새를 짙게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 있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이담에 내가 늙어 할머니가 되었을 때 연아옹 은 어째 감
이 좀 어색한 것 같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이름은  성당의 본명인 안젤라이다. 그런데 그 어휘에서  오는 느낌이
어째 시골 소녀의  능금같이  빨갛고 통통한 뺨이 연상되는 것같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코스모스같이 하늘하늘 가냘픈  이미지를 주는 본명을 붙여
줄 것이지 하고 원망해보았으나 기차는 이미 떠난후이고...
  세 번째의 이름은 붓글씨를 쑬 때 낙관을 찍기  위한 호가 있는데 비단 錦(금)
집  堂(당)자,  금당이다. 이것 역시 외할아버지가 지어 주셨는데  어째 고리타분
항 조선 시대의 여인의 이미지를 풍기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늑대와 춤을 >이란 영화를  보면 '발로 차는새' ,'주먹 쥐고 일어서','머릿속에
바람'등 여러 가지 인디언 이름들이 나온다. 나는 이 영화를 세계적 스타인 캐빈
코스트너가 주인공이란 점과 제목이 호기심을 끈다는 점 때문에 보았다.
  그런데 그 제목이 황당무계하게도 인디언으로서의 주인공이란 것을 알았을 때
참 희한도 하고 신기도 하여  우리나라도 획일적인 두 자 이름으로 한정지을 것
이 아니라 좀더 다양성을 도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자식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런데 이름에 있
어서는 개성을  사리지 않고 하나같이  몰개성화시키는 것 같아  아쉽다, 이름도
이제부터는 마케팅의 개념이 도입되어야 할 것같다.
  한데 오늘 아침 보도를 보니 순한글의 개성있는 이름들이 많이 지어진다고 한
다. 국민소득이 높아져서 그러지 요즈음은 색다르고  개성잇는 이름들이 부쩍 늘
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황금독수리 온 세상에 이름을 날리다'
  '김햇님달님 별님보다 더 사랑스러우리'
  '윤하늘빛 따사로운 온 누리에'
와 같은 이름을 대하니  이제 바야흐로 우리나라도 개성시대가 도래했구나 싶어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뿐아니라 카페나 레스토랑의 상호들도 상당히 다양해져 획일적인 한두 단어
에서부터 긴 문구에 이르기 까지 멋진이름들이 많아졌다. 예를 들어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여기서 우리의 사랑을 이야기하자'
  '내릴 수 없는 깃발을 위하여'
  와같은 이름들은 주로 우리의  정감에 호소하는 내용의 문구로서 도시를 떠나
고 싶지만 막상 그렇게  하지는 못하는 현대인의 욕구를 대리만족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같다.
  이러한 현상은 칵테일에도 바람을 불어놓어 얼마 전 동숭동 카페를 갔더니 싱
가포르 슬랭이나  카카오를 '무정한 마음','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등으로
개명을 하여 부르고 있었다. 해서 한결 새로운 느낌으로 , 한결 로맨틱한 느낌으
로 한 모금씩 음미를 하였다.
  이처럼 이름이란 사람의  인상을 결정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동양의 성명학에 의하면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개명하기란  행적적인 절차에서 너무  복잡한 것
같다. 철든 후 자기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고 ,  '김벌레','나
대지' 와 같이 놀림감이 되는  이름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초등
학교 아이들에  한하여 개명할 기회를  일률적으로 준적은 환영할  일이다. 이름
때문에 '이지메'를 당하는 아이들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에게는  다행히도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다. 나는  나를 마케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름인 필명을 갖고 싶다.  만약 나의 글을 사랑하는 그 누군
가가 나에게 '주 바람  부는 바다','주 안개되어 날 적시고','주 톡톡 튀는  개성'과
같은 멋진 필명을 추천해준다면 나는  그 이름으로 글을 스고 그리고 나의 세계
를 가꾸어나갈 텐데...
  시보다도 짧은 문학인 이 필명에  내 글의 빛깔과 향기를 담고서 이를 불러줄
그 누구의 가슴 한가운데,  일월의 청아한 향내 풍기는 한 떨기   배화로 피어나
고 싶다. 김춘수의 <꽃>의 한 구절처럼 누가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그
런 이름을 부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는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사뮈엘 울만의 봄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왔고 개나리 진다래도 다시 피었다. 사람들은  왜 봄을
맞아 들뜨고,  연인들의 사랑은 깊어만 지고,  시들었던 40대의 가슴에도 설렘은
오는가.
  책이나 신문에서 어떤 운치있는 장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면 내 마음은 벌써
길을 떠난다. 3월  하순 어느 날 장흥  가는 길에는 블루스 음악과도  같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조각공원을  둘러보고 그 위쪽에 자리잡은
오솔길까지 산책을 한후 찻집 '너와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천장이 돔식으로 되어 있는 그 찻집은 여러 가지로 내 마음에 꼭 들었는데 그
중 주렁주렁 천자에 매단 종이쪽지들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많고 많은 그 하얀
쪽지들 위에는 모두 어떤 연인들의 사랑 애기가 적혀 있을까.
  중앙에 자리잡은 페치카의 타오르는 장작불 주위에는 일련의 대학생들이 둘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뒤에 있는  통나무 의자에 걸터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남녀 대학생들은 그들만의 특권인 양 푸른  산 정기
를 마구 내뿜으며 젊음의 향기가 요동을 치며 발산되는 듯 싶었다.
  구석진 자리에 앉은  한 앳된 여학생이 눈에 들어온다. 연인인  듯한 남학생의
말에 얼굴을 붉힌는 그녀는 아마도 부끄럽고, 숨기고 싶고 , 헤어지면 보고 싶어
지는 , 목하 풋사랑을 진행중인가 보다. 그  푸르렀던 날, 갓 잡아올린 은빛 물고
기의 비늘처럼 싱싱했던, 날들이 나에게도 있었던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다.
  아련한 회상에 젖어 있는 내 귀에 문득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카
메라의 셔터  소리와 함께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나를 일깨운다. 한  무리 퍼머
부대의 아주머니들이 야외  나들이를 나온 모양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젊
음만이 입장이 허락될 뿐 도무지  늙음이란 침투조차 할 수 없어 보이는 이곳의
분위기에는 어쩐지 어울리지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도  오히려 저 퍼머 부대에 후러씬 가깝지  않은가. 저
기 앉아 있는 푸른  비늘의 대학생들과 나, 어찌 보면 너무나도  멀리 달려와 잇
어 돌이킬 수 없는 강... 나는 부러운 눈으로 저들을 바라보지만, 저 대학생 무리
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내가 이십대엿을 땐 사십이 넘은 아주머니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대체 무슨
희망으로 살아갈까 생각햇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벌써 그  문제의 아주머
니가 되다니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반드시  슬픈 일만은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위축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완숙에의 길로 가는 것이라 생
각해본다. 젊었던 날들을 ' 여자'로서 살아온 나는 이제 한 '인간'으로서 일어서야
한다. 젊은  날의 윤기를 안으로 간직해야  한다. 사라져버린 청춘을 아쉬워만은
말자.
  달콤한 미래만을 꿈꾸었던 청춘은  사라지고 아픔이 뭔지도 이젠 알게 되었지
만 , 계절은 봄이어도 나는  더 이상 청춘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꿈을
좇는 내게 또다시 찾아드는 자연의 섭리... 봄은 한 줄기 소망인 것이다.
  내가 오늘 40대의  여인이 되어 저 꿈꾸는 청춘들을 바라보지만,  그들이 꾸는
꿈과 내가 꾸는 꿈이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아직도 뜨거운 이  소망의 불이 없
다면 어찌 진달래 개나리가 아름답게  보이고 비 온 뒤의 거리가 청량하게 느껴
질까.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리라는 소망이  없다면 오늘을 희생해야  할 아무런
동기가 없다.
  사뮈엘 울만도 노래했듯이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그 마음가짐
인 것이다. 세월의  흐름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나 꿈과 소망의  상실은 영혼의
주름살을 늘린다. 나에게 꿈이 있고 열정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는 정말이지 여
든에도 청춘을 지닐 수 있으리라.
  청춘, 그 얼마나 매혹전인 말인가.방황과 낭만,  그리고 도전과 꿈이 새겨 있는
청춘! 고맙게도 40대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온다. 울만의 그 청춘의 봄 말이다.

    마지막 대사

  관뚜껑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람의 일생을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말기암
환자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봉사자들의  말에 의하면 좀더 베풀걸, 좀더 참을걸 ,
좀더 재미나게 살걸, 하고 후회하며 떠나는 사람들이 무수히 있다고 한다.
  수많은 형태의 죽음 앞에서 인간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들 중 가장 아름
다움 말은 무엇일까,"후회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아닐까
  이 말은 부나 권세,  또는 명성을 누려서 후회없다는 의미는 아닐게다, 대통령
을 했다고 , 재벌의 지위를 누였다고 해서 이런 말을 누구나 할 수 있을까.
  지난 금요일 가톨릭 문우회에서는 1박 2일 예정으로 순교 성지인 해미 고을과
안면도를 찾았다. 해미 고을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이 대량으로 처형당한 곳이다.
  순교 유적으로는  손발과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리어 고문을 당하던
호야나무와 죄수들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을  하던 돌다리,
서녘 들판 아무곳에나 큰 구덩이를 파고 산 사람들을 매장했던 진둠벙이 있다,
  이 끔직한 역사를 지닌  유적들 주위에는 찬란한 6월의 햇살과 푸르른 녹음이
어우러져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오늘의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순교자의 유해 일부는 머리  위로 흙이 쏟아져내려 생매장을 당했음에도 불구
하고 ,뼈가 일직선상 세로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죽음을 맞이한 그
순간에도 조금도 동요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오히려 더욱
강한 믿음을 가슴에 지니고 떠난 분들, 그분들의  값진 죽음을 거름으로 하여 오
늘 이곳의 녹음은  더욱 푸르고 꽃들은 저리도아름다운 것일까. 그렇다면  이 순
교자들은 가슴에 사랑이란 씨앗을 여글게  하고 한 생을 마친 꽃과 같은 순교자
가 아니었을까.
  우리들은 생각의 화살을  가슴에 맞은 듯 참으로  숙연한 마음이 되어 버스로
돌아왔다. 이제 성지 순례는 끝나고 안면도로 가는 것이다.
  사방은 적요하고 냉랭한 밤기운  속에 안면도 백사장에선 모닥불의 향연이 있
었다. 수많은  별들이 총총한 하늘과  비릿한 바닷바람 그리고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나는 문득  죽어간 이들의 은밀한 숨소리를 듣는다. 어쩌면  모든 죽어간
넋들의 간절한 염원이 바람이되고 별이  되고 불길이 되어 우리들 앞에 이런 평
화로운 밤을 베푸는 것인지도 모른다.
  별의 시인, 김광섭 선생의 <저녁에>가 생각난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서 별 하나가 나는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점점 사위어져가는 불꽃을 바라보는 내 문득  아드하게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5년이 될지 6년이 될지 ..."
  그 목소리는 모르는 사이에 빠져든  감상 속에 나를 싸늘한 삶과 죽음의 현실
로 몰아온다. 갑자기 발끝이 저려온다. 인생의 유한성에 순종해야만 하는 사실이
슬프고 죽음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은 그 누구도 없다는 엄숙한 명제 앞에서 갑
자기 또 숙연해진다.
  역사를 오락이라고 보는 시오노  나나미는 인생을 가장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
은  '별의 시간'을  가졌던 사람이며 역사 속의 위인들이 그러하다고 한다. '별의
시간'이란 자신의 일생 중에서 완전 연소시켜버리는  시간을 가졌다는 의미일 게
다.
  호야나무에 매달려 그리고 진둠벙에 묻혀 죽어간  사람들도 그렇지만, 역사 속
에 나오는 수많은 위인들이  족적도 현실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별의 시간'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가졌
을 것이고 사람은 갓어도 우리들  마음에 살아 있다면 그것은 진정 영원히 살아
있는것일 게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하게 태어나고 죽은 예수도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 가슴속에 광망으로 면면히 살아 있지 않은가.
  밤하늘에 빛나는 유성은 자기의 몸을 불살라 찬연히 빛을 밝힌 후 소멸해버림
다. 나도 내가 지정으로  원하는 그 무엇을 찾아내고 그것을 위하여  나의 온 영
혼과 정열을 불사르는 그런 별의 시간을 갖고 싶다.
  그리고서 그  언젠가 내가 인생이란 한판  연극의 무대에서 내려 올  때 '별의
시간'을 가졌던 것에  감사하고 "후회없어요 하느님,댕큐"라는 마지막 대사를  말
하며 환하게 미소짓고 싶다.
 
    새로운 시각의 영웅 창조를..
 
  근간 우리  독서계에서 눈에  띄는 현상은  <동의 보감>,<목민심서>,<토정비
결> 등 역사 속에 인물들을 그린 소설들이 많이 출간된다는  것이다. 역사를 돌
이켜봄으로써 과거 인물들을  긍정적으로 복원해내고 나아가서 긍정적인 시선으
로 역사의 실체를 음미하고자하는 것일 게다. 또한  역사 곳 인물들의 행적은 복
잡한 우리 현대인들의 삶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기 때문에 작가들은 일
종의 사명의식까지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인생사는 거시적으로   지구 전체에서, 미시적으로 일개  가정사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의  반복일 뿐, "지구는 지금도  돌고 있다."고 부르잦은  가릴레이의
말처럼 역사는 지금 이 순간도 반복되고 있는 것 아닐까.
  단군신화에서 시작하여 고려,  조선,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인물들
을 가지고 있다.  이들 중 캐릭터를 설정하고 형상화하는 기법들은  각각의 작가
들 인식에 따른 일이겠지만 우리 독자들의 감상태도에도 좀더 여유가 있어야 하
지 않을까.
 일본이나 중국의 역사소설을  읽으면서 부러웠던 점은 그들은 수많은 영웅들을
창조하는 작업에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최대의 명군으로 부릴는 당태종
이세민도 실상은  형과 아우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는 '정관의 치'로, 그의 치적이 과에 묻혀 평가절하되고 있지 않다.
  <대망>이란 일본 역사소설을  보면 작가는 세 사람의  인물을 설정한다. 새를
울게 하기 위해 끝없이  기다린다는  도구가와 이에야스, '울라'고 명령하고 듣지
않으면 카로  베어버린다는 오다 노부나가,  무슨 수를 쓰더라고  울게 만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 '작가는 이에야스에 초점을 맞춰 저개해 나가지만, 나는 오
다 노부나가에 매료되었다.  결국 도쿠가와 막부를 이룩하는  이에야스뿐만 아니
라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 모두는 영웅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단조애사를 그릴 땐 세조를  왕위찬탈 을 꾀하는 대역무도한 악인으로 묘사된
다.세조의 치적에 초점이  맞춰질 때는 단종은 극히 나약하고 무능한  인물이 되
낟. 왕위 찬탈의 당위성이 합법화되는 것이다. 결과의 성패에 관계없이 과정에서
의 인물들은 각각의 개성과장점이 있는 것  아닐까. 상투적인 흑백논리가 여기서
도 적용이 되어야하는가.
  완벽한 인간이란 실제하지  않는다.조상들의 허물은 되도록 덮고  장점만을 확
대부각시켜 수많은 영웅 창조에 성공한 일본에 비해 우리는 과거라면 일단 부정
의 눈으로 보고 매도한다.
  그것은 우리의 보편적인 민족성이라기  보다는 일제 치하의 비극적 잔재인 듯
싶다. 암울한 시대의 민족  지도자들, 그들의 역할이란 일본 정부에 항거하고 비
판하는 일이었다.  일제가 끝나고 독재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엘리트들에겐 시
대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비판과 감시의 역할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왔다.
  세계는 이미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무너졌고 ,  우리나라도 정통성을 확보한 정
부가 들어섰으며 민주사회로의  이행이 순조롭다, 비판만이 정의인  양 오인되어
서는 안된다.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역사  속의 영웅 창조의 작업이 필요
하다.
  미래의 주역이 될  신세대의 사고에는 많은 변화가 온 듯하다.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가치관은 달라진  것 같다. 과정에서의 성취감보다는  결과로 생기는경
제적 여유를 통해 인생을 즐기는 형태의 의식구조가 자리잡은 것이다.
 그들은 오롄지족이니  낑깡족이니 하는 생경한  신조어를 만들어  낸다. 규범이
없는 무중력의 아노미  상태에서 유영하고 있는 그들, 물질만능 풍조에  젖어 있
는 젊은 세대를 보면서 우리 모두는 더듭나야 함을 느낀다.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은 1인당 국민소득 만 불의 경제 성장과 공해 추
방, 자연보호운동으로 이루어 내는 아름다운  강산뿐만이 아니다. 민족의 자존심,
이것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유산이 아니겠는가. 이제  이 정신적 유산을 씨 뿌리
고 가꾸어야 하는 일은 우리 기성 세대의 몫이다.
  한 방면에서의 대단한 성취를 이룬  사람의 뒤에는 그 성취를 위한 희생과 인
간적인 약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 약점만을 확대 조명해서는 이  나라의 장래는
어둡지 않은겠는가. 이제는  비판하는 사람보다는 정확히 판단하는  사람이 필요
한  시대이다. 후손들의 그 정확한 판단을  위해 모범이 될 인간성을 제시해주어
야 한지 않을까.
  부정적인 시선에서 긍정적인  시각으로의 방향 전환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비
판만이 최선이란   오류를 또다시 범해서는 안 된다. 구시대의  잔재는 청산하고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한 시기이다. 후손들에게 물려 줄  정신적 유산을  위해 인
물들의 재조명 그리고 영웅 창조의 과업이  진실로 요망되는 시기이다. 대국적인
정서가 아쉽다.

    가라오케 신드롬

  가라오케란 무슨 뜻인가. 가라오케란  일본 말로 가라. 즉 빌 공(空)자, 오케란
오케스트라의 줄임말 ,  즉 빈 오케스트라이다. 그러면 나마오케란  무슨 뜻인가.
나마오케란 나마, 즉  살아 있다는 생(生)자, 즉 사람이 나와서  연주하는 살아있
는 오케스트라라는 뜻이다.
  국민소득 만  불을 돌파한 오늘날,  가라오케의 열풍은 우리  한반도를 휩쓸고
있다. 가라오케는 우리나라말로  노래방이라 번역되는 데 술을 함께 마실  수 있
는 업소는 가라오케, 간단한 음료만을 들 수  있는 곳은 노래방이라 구분짓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의 놀이 문화에서  저녁 회식후 2차로 가라오케를 가서 한곡조 꽝
불러젖히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남성들만의 전유문화가 아니다.
  친목 모임의 점심식사를 끝낸 주부들이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역시 한 곡조
꽝하는 것도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그뿐인가. 학생들고 나름대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가끔씩 노래방을
찾아 이제 모래방 문화는 우리의 새로운 가족놀이 문화로 정착된 듯하다.
  노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한  민족의 오래된 역사이며  풍습이다. 예로부터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우리 백두 민족은 음주와 가무를 즐기던 멋쟁이 민족
이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거문고를 뜯고 한시를 읊으며 가야금의 풍류를 즐기던
우리 조상들, 그리고 푸르른 벌판을 말 달리며  큰활 쏘던 우리 배달의 조상들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흥 따라 멋따라 풍류를 음미하던, 진정  세련된 민족이었
다.
  풍류를 아는 기마민족의 후예인 나도 가끔씩  노래방을 찾는다. 주부성 스트레
스가 두 개골을 눌러올 땐  아악 하고 소리라도 질러보면 좀 풀릴 것 같은데 그
럴 때는 친구들과 같이 노래방을 간다.
  마음 같아서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기도 하고  한 잔 술에 취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술을  마실 줄도 모르고 혼자 여행을  떠날 용기도 없는 나는 꿩
대신 닭을 찾는 기분으로 노래방 문화를 즐긴다.
  노래방을 가면 커다란  화면에 박자 맞춰 노래  가사가 나오고 끝에는 점수가
나온다. 그 기계에  맞춰 노래를 하다 보면  재미는 있느나 왠지 생동감이 없다.
다시 말해 야채를 먹는 기분이 아니라 소금에 절인 야채를 먹는 기분이 된다.
  기계가 요구하는 대로  똑같이 부르는 노래, 거기서 멋을 내거나  개성을 찾는
만용을 부리다간 형편없는  점수로 떨어진다. 감정일랑 접어두고  박자와 음저을
정확하게 맞춰 부르면 "명가수 탄생"하고  팡파르를 울려준다. 심지어는 그 곡을
직접 부른 가수도 "70점-좀더 노력하세요"를 받았다고 한다.
  우리의 문화는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문화이며 자유의  문화이다. 흥겹기는
하지만 매몰되는 개성, 그것은 족쇄이지 예술이 아니다. 개성은 무시되고 셋업된
반주에 맞춰서 그리고 색깔 변하는 가사에 따라  똑같이 부르는 노래, 그것은 단
체의 문화이고  집단의 문화이다. 그것은  모든 국민을 거대한  조직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전체주의의 문화, 즉 일본의 문화이다.
  우리의 국민가수로  추앙받는 이미자나 조용필도 무대에  나와서 노래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똑같이 부르지 않는다. 그때 그  느낌으로, 그 박자로 살아 있는
노래를 부른다. 그 살아  있는 노래를 부르거나 들을 때 비로소  가슴 한 자락이
풀어지며 명치끝이 아릿해져 온다.
  얼마 전 치러냇던 '88올림픽 개막식에서도 전세계에  감동을 주었던 우리의 환
상적인 강강수월래요 장구춤이었다.
  가라오케는 글자 그대로 빌 공자, 죽어 있는 음악이다. 우리의 문화는 가슴 밑
바닥을 흔들어대는 한바탕 흥취의 문화이지 규격화된  제품의 문화가 아니다. 일
송정 푸른 솔의 말 달리던 선구자인 우리가 왜 죽어 있는 문화에 물들어가야 하
는가.
  우리 고유의 문화를 재생해내기보다는  남의 문화에 빨리 물들어 가는 이세대
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해학이 있고 서양엔 파티 문화가 있지만  우리에겐 한바
탕 어루러지는 춤마당의 문화가 있다.
  좁은 공간에서 정확한 틀에  맞춰진 안으로의 문화에 젖기보다는 넓은 벌판에
서 좀 삐뚤어지고 들쭉나쭉하여도 자연 그대로의 문화에 젖고 싶다.
  매몰된 개성, 틀에 맞춘 집단의 문화, 이것은 과연 가치있는 문화인가.
  우리는 진정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배나무는 배나무, 사과 나무는 사과나무로

  이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들이 있다. 대별하자면  내가 싫어하는 분야,.   그저
그런 분야, 몹시 선망하는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볼 때마다 무척 부
럽기도 하고 갈  등을 느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작가.  신문기자. 방송 관계자들
이 내가 무척 동경하는 직업이다.
  내가 가령 낙관주의자라면 유명 작가들의 출판기념회나 전람회를 갔을 때 '아,
저런 좋은 작품들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
인가.'하고 생각하겟지만  나는 오히려 비관주의자에  가까운 성격이다. '나는 놰
저렇게 되지 못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열심히 노력할걸...' 마치 막차 떠난 뒤
손 흔드는 사람처럼 부질없는 생각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어린 시절 노래를 잘한다는 어른들의 칭찬에 우쭐하여 성악가가 되
려고 꿈도 꾸어 보았으며  지금도 '가곡의 밤'을 가보거나 외국의 유명한 성악가
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미리부터 가슴이 설렌다. 또한 우리  집안에는 문학의
핏줄이 흐르고 있다는 엄마의 세뇌공작으로 글도 끼적거려보았다.
  특히 멋있는 신문기자들이나 방송 관계자들, 예를  들며 장명수씨 같은 여기자
의 칼럼을 읽거나, 코니  정과 같은 유명 앵커들을 보면서, 데스크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 나를 꿈꾸어 보기도 햇으나 신문기자나 방송관계자가 되지 못한 것
은 나의 건강을 위해서 는 차라리 다행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같이 소심하고, 완벽을  기하려는 성격의 소유자는 마감  시간이 닥쳤는데도
기사를 끝내지 못한다면 기절해버리거나 , 심장병으로  병원에 실려 가거나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느 직장이거나  시간에 구속되는 직업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가슴에 와 닿은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나는 그 연기자 를 흠모하면서
어느덧 내가 그  주인공이 되어 버리기도 하는데, 연기인에 매력을  느끼는 까닭
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수많은 인생을 대역해 살아보기 때문이리라.
  이제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가 커지고 광고시장이 넓어지면서 연기자들의 위상
이 무척 높아졌다. 그들의 경제력이 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CF 한편당 몇 억
을 받았다는 모 탤런트의  기사를 보고 나는 정말이지 아연한 적이  있었다.  이
제 우리나라도 배우가배고팠던 시절은 지나갔고 오히려 그 영향력이 헐리우드연
기자들처럼 정치의 일서에도 부상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같다.
  요즈음 신세대들의 취업 인기도를 살펴보면 우리 시대에 상위권에 들던 '사'자
즉 박사, 검사, 의사가, '서'자, 즉  프리랜서에게 밀려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것은 그들이 구속당하지 않고 개성과 여유를 즐기는 삶은 지향한다는 얘기가 된
다. 나는  신세대는 아닌지만 그들의 사고에  동조하는 편이다. 시대는 달라지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졌다. 자기가 원하여 선택한  직업이라면 그것이 곧 최선인
것이다.
  나는 그런대로 내가 좋아하는 문필 중의 한  장르인 수필가가 되었다. 이제 나
는 수필가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수필이란 예술을  생활에 도입하기 위하여
일상의 생활을  타성으로 이끌어나갈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으로 바꾸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해보고 그 경험을 살려  한 편의 수필로
엮어나가보리라 생각하고 있다.
  하나의 예로, 호기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진작 이루어보지 못했던, 남을 가르친
다는 직업을 경험해보기로 했다. 무슨 얘기안고  하니 아들아이의 학교에서 기별
이 왔기에 명예교사라는 직책에 응하기로 했던  것이다. 비록 초등학교 꼬맹이들
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지만 약간이 긴장과 두려움이 앞선다. 이  일에 봉사해
온 지도 1년, 이제는 그것이 좋은 수필감이  되어 나를 즐겁게 하기도 하는 것이
다.
  이제 나는 비관주의자에서  낙관주의자로의 전환을 하려 한다.  왜냐하면 나는
수필가란 자유업을, 그리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직업아닌 직업을  늦게나마 찾
아 나섰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부모의 권유로, 혹은 생활고로, 또 다른 이유로 자기가 원치 않는 길
을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과연 살아가는 보람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남이 봐서는 대수롭지 않은 직업이라 할지라
도 그 일에  심취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이라면 그 사람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세상은 달라져서 이제 배나무는  배나무 , 사과나무는 사과나무로 키
워주는 지혜가 무엇보다도 소요되는 개성의 시대가 온 것이다.

    가늘게 라도 길게

  인간은 습관적으로 산다고 했던가, 습관은 몸으로 익힌 버릇이 아닐까. 나에게
는 나쁜 습관이 있다.  지나간 일 중에서 기분 나빴던 일들을  가끔식 떠올려 반
추하고, 미래에 대해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근심하는 일, 바로 그것이다.
  그래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아 손톱을 뜯고, 입술을 뜯으며, 이마를 찡그리고 인
상을 쓰고 있다. 언니는 이런 나를  보고 "너는 소처럼 되새김위를 가졌니? 심심
하면 걱정거리를 만들어  고민하고 좀 쉬었다가 다시 고민하고, 정말  별일이다."
한다.
  그렇다고 내가 뭐 특별히 비관주의자라는 것은 아니고 다만 매사에 안달을 떠
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오른쪽  검지 손톱이 스트레스용으로 집중적으로
물어뜯겨 조각작품같이 추상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특히 병에 대해서는 노이로제에 가까운 소심증이  발휘된다. 병에 대한 노이로
제, 이것으로부터 해방이 올해의 중대 과제이다.
  결혼 직후, 뇌출혈로  쓰러진 친정 아버지가 식물인간으로 2년을  병상에 누워
계시는 것을 보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6개월 후 시어머님 뇌졸중으로 쓰러
져 18년의 긴 세월 동안 투병하시는 것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일까
  아무튼 병에 대한  이 공포심은 요즈음 자못 증세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릴 때 신장염을 앓은 경험도 있는 나의  단골 레퍼토리는 극심한 편두통, 도를
넘는 저혈압, 화날 때 숨이 가빠지는 것 등이다.
  이 중 편두통은  춥거나 배고프거나 기분이 나쁠  때는 어김없이 나를 방문한
다. 추운 것이야 옷을  재빨리 끼어 입으면 되고 배고플 때는  역시 음식을 듬뿍
넣어주면 그만이지만 , 울화통이 터질 때는 속수무책이다.
  통증이 오면  눈앞이 캄캄하고 속이  메스꺼우며 심할 때는  쓰러져버린다. 몇
년 전에는 응급실로 실려가  모형 우주선같이 생긴 통 속으로 들어가서 CT촬영
까지 했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편두통이 찾아들면 왼쪽 이마  옆에 호랑이
기름을 잔뜩 바른다. 이것을 애용한 결과 살껍질이 몇 겹 벗겨지기도 했다. 내가
젊은 새댁이었을 땐 소창으로  만든 딸아이의 기저귀로부터 시작해서 남편의 헌
넥타이, 지금의 낡은 시폰 머플러에 이르기까지 끈에도 패션의 변천사가 있었다.
  머플러로 머리를 질끈 묶고 반쯤만 뜬 상태에서 허리를 구부정하게 펴지도 못
한 채 거울 앞에 서면  영락없는 할멈이다. 거울 속의 나를 보며, "듣기 싫은 말
을 참고  들어야만 하는 경우. 대학  때 미팅하던 일이나 로맨틱한  영화 장면을
떠올리며, 당신 혼자 실컷 떠드시우."생각하라던 친구의 말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요즈음은 한달 이상  잠잠한 상태이지만 언제 들이닥칠지 두렵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인가 새로운 공포가 추가되었다. 암에 대한 공포, 바로 그
것이다. 좋아했던 여배우의  유방암 사망 소식이 나를  잠 못 이루게 했다. 그런
애기를 들은 며칠 후 겨드랑이 이리저리 만져보는  데 좁쌀 같은 것이 만져졌다.
가슴이 철렁 내렸앉으며 '과잉공포증'이 시작되었다.
  처형인 나에게 '강박관념의 여인'이란 별명을 붙여주고 무조건 '신경성'으로  결
론짓는 의사인 제부, 그를 찾아가면서 나는 눈물도  몇 방울 흘리고 머릿속에 오
락가락 아이들,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했다. 또 엄살인가 의심하는 제부 앞
에서 나는 영락없이 '늑대와  양치는 소년' 꼴이 되어  "이번에는 진짜일지도 모
른다."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후 "비지샘 같다" 며 가만  놔두면 저절
로 없어질 수도 있다는 그의 동료의 진단에 제부는" 또  쇼하셨잖아요"하며 투덜
거렸다.
  잠잠했던 몇 달후, 다시  설알 얘기를 듣고 나니 뜨겁고 매운  것을 전혀 먹지
못하고 불에 덴 것  처럼 혀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 심리상태를  잘 아는 친구
S의 남편에게 얘기를 하니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표피가 닳아서 그런  것
일 뿐 별것 아니란 이비인후과 의사의 진단에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며 "밝은 창
가로 오셔서 혀를 내밀어보세요.  제가 한번 볼 테니"하더니 "괜찮은데요 뭘,  정
심심하면 스케일링이나 한번 해보시죠 뭐"하며 피식 웃었다.
  이제는 내가 아프다고 하소연해도 아무도 심각하게  듣지 않는다. 언니는 귀를
막으며 "또 시작이다. 너 혹시 나누어  줄 물건 있으면 미리미리 나눠다고" 하여
내 혈압을 올리고, 내 친구  하나는 "대충 살다 죽는 거지, 너 혼자만 질기게  오
래 살려고 하니?" 하며 핀잔을 준다.
  그럴 대마다 나는 아주 조그맣게 대답해준다.'굵고 짮게'보다 '가늘게라도 길게'
가 낫지 않냐고 .
  왜 이렇게도  쓸데없는 걱정이 많을까. 그것은  마음의 탓이다. 의지가 약하고
귀가 엾기 때문이다. 허황되고  속된 욕망으로 가득 오염되어, 한 줄기 서느러운
바람이 스며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마음을 비우자고 더 엄청난 소원을 가져본다. 매일 아침마다 "마음을
비우자"고 염송을 하자. 그러면  마음을 비운 것이 나이고, 나다운 것이 될 테니
까, 그것만이 내 버릇을 고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돌팔매 맞는 개구리, 우리 아이들

  고3 학생의 얼굴은 물기  말라 비틀어진 행주처럼 누르끼리하고 고3엄마의 얼
굴은 애간장이 다 타서 얼룩덜룩 녹이  슨 유기그릇처럼 검푸르다. 고3학생은 죄
인이고 부모는 용의자인가.
  일명 고3탕이라 하는 총명탕을 아이만 달여먹고 총명해질 일이 아니라 어머니
도 같이 먹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판이다.  1년이 멀다하고  어머니도 같이
먹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판이다. 1년이 멀다하고 바뀌는  이 입시제도 에서
살아남으려면 정신을 키워야 한다.
  얼마 전 딸아이의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졸업 5년 만에 회보를 만든다며 기재
할 원고 청탁이 왔다.  이제 모두 입시를 눈앞에 둔 아이들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는지, 애끓는 심정으로 나는 이렇게 썼다.
 
 과정에서 최선을...

  아침을 흔드는 새소리가  오월의 창문을 엽니다. 북아현동의 좁다란 고갯길이,
삽상하던 바람이, 그리고 그 바람에 실려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문득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시간은 빨리도 흘러 졸업한 지 벌써 5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여러분 모두는  대학입시라는 커다란 관문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힘
들고 괴롭겠지요  피하고 싶기도 하겠지요 ,  그러나 이것은 기나긴 인생길에서,
자의식이 확립된 후 첫번째로 맞게 되는 시험대입니다.
  첫번째로 마주하는 이  관문에서 여러분들은 최선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그리
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평생 후회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기회가 있고 때가 있는  법입니다. 물론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며 그 후에도 기회는 있겠지요.
  그러나 평생을 달고  다녀야 할 최종 학력을 판가름하는 것이고,  인생에 있어
서는 첫 도전이되는 것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선의 노력으로 최대한 활
용하여, 당연히 얻을 수  있는 것을 얻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우리 기
성 세대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짧지 않은  세월을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여러분들을 바라보는
부모님들의 심정도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하여 얻
게 되는 성취감과 자신감은 또 얼마나 고귀한 것일까요.
  과정에서의 후회없는 최선을 바라는 것이지 그 이상의 결과를 원하는 것은 절
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에게 기대치를 올리며 그 이상의  결과를 요
구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은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자긍심을! 무한한 잠재력을!  그리고 기회
를 잡을 줄 아는 현명한 지혜를!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두 손 모아 합장하여  불공을 드리고 삼천배를 오릴고
또는 새벽 미사를 드리고 철야기도를 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TV화면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 광경을 보면  공연히 가슴이 뭉클해지면서도 한편  약간 민망한
기분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입장 바꿔 생각해봐"하 노래의 가사처럼 입장이 달
라지니 삼천 배나 철야기도 아니라 더한 것도 감내 할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
다.
  나는 오래 전부터  한 가지 의문을 가져왔다. 우리나라처럼 교육열이  높고 우
수한 인재들이 많아 인적 자원이 풍부한 나라에서 다른 모든 분야에서는 세계화
를 지향하여 겁나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데 반해 백년지대계가 되어야 할 교육
분야에서는 왜 이리도 갈팡질팡 엉망진창이냐 하는 문제이다.
  나는 '특목고'를 다니는  고3 아이를 둔 학부모로서 첫째,  일관성이 없는 교육
정책에 대해 불만이 많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개선을 위한 시행착오의 과
정에서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즉 입시제도와  연때가 맞으려면 입시의 사주팔
자가 좋아야 한다는 팔자타령이 나오게 마련이다. 옛말에 "사람은 장난삼아 돌을
던지지만 그 돌에 맞은 개구리는 죽고 만다."는 얘기가 있다. 시험삼아 행해보는
정책때문에 개구리가  되는 아이들은 희생타가  되고 만다.이  '시험삼아 정책'이
그들의 성격 형성에 커다란 악 영향을 끼치는 장래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치명
적인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 아이들은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아니다.
  적어도 입학 당시에  국가에서 했던 약속은 입시  당시엔 보장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졸속 행정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정책을 도입할  때 적어도 3
년이란 유예기간은 필수적인 것이 아닌가,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소급입
법 금지의 헌법정신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둘째, 소수 집단의 권익은 무시되어도 좋은가. 모든 사람이 100%  만족하는 정
책을 세우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면 기본 원칙이 공정성에 두어야 한다. 공정하
다는 것이지 특정 집단의 아이들에게 현저한 불이익을 주고 다른 집단의 아이들
에게 상대적으로 이익을 주는 등  그 타깃을 대중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다. 선진국에서는 영재교육에  집중 투자도 한다는 데 우리는 오  하향 평준화에
초점을 맞추는지 이해가 안된다.
  어구나 그 희생양이 되는 집단이 일반적인 개념으로 보아 우수한 집단이라 때 
이제 너희도 좀 손해를 보라는  식으로 소리없는 공감을 한다면 어찌 그 사회가
민주적인 사회라 할  수 있는가. 이소수는 우수해지기 위해 많은  희생과 극기를
수반하는 피나는 노력을 한 것이다. 땅바닥에  드러누워 절로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린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는 엄연한 민주국가이다,
  민주국가의 기본 원리는 남의 자유를 짓밟는 데 근거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제
지를 받아야 할  자유 아닌 방종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다수의  권익 보호와
함께 소수의 권익도  마땅히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설사 그  소수가 기득권
을 가진 집단이라 할지라도 집단이기주의란 말로써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다수
와 함께 소수도 민주국가를 구성하는 엄연한 양대 기둥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사람을 죽인 살인범일지라도 법원의 판결이나기 전까지는
용의자로서 그권익이  최대한 보장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진정한  정신일진대
소수 집단의 권익이 무시되어도  괜찮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택한 우리의 헌법정
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현재의 종생부제도에서는 특목고와 지방의 비평준화 지역의 우수 학생들이 엄
청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이런 상황을 두고 "그러기에 그런  학교를 왜 갑니까."
라고 말했다는 정책 담당자는 그런  학교의 설립 인가를 바로 그런 담당자가 도
장을 찍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모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셋째,  내신이란 제도가 과연 우리 나라에 적합한 제도인가 의문스럽다.
  어린 나이에 철이 늦게 들어서 고학년에  제아무리 공부를 잘한다하더라도 1,2
학년 때의 성적이 전과의 기록처럼,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붙어다닌다. 철이 늦게
든 죄 하나로 영원히 복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니
겠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처럼 치맛자락이 끔찍한 나라에서 내신에 과연 100%의 신뢰를  보
낼 수 있겠는가 싶다.  객관적인 평가에 절대적인 신뢰를 줄 수  있는 구미의 신
용사회와 우리는 정서가  다르다. 봉사점수가 도입된 후 부모가 대신  봉사를 하
고 도장을 받아오는 눈물겨운  풍경이 벌어지는가 하면 정말인지 아닌지는 몰라
도 미국의 모 대학 교수들의 집에는 한국의 자개농과 청자 항아리들이 즐비하다
는 말도 들었을 정도로 우리의 치맛자락은 거세다.
  그리고 그뿐인가. 그놈의 내신 때문에 아이들은  학원, 시험, 숙제에 치여 병든
약병아리같이 시들시들해지고 가족끼리 둘러앉아  식사 한 번 제대로 하기도 힘
든 세상이 되어벼렸다. 인성교육은커녕, 모두들  점수의 노예들이 되어간다. 바야
흐로 평화시대는 가고 비상이 걸리고 전시체제이다.  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 하
나로 우리의 미풍양속은 깨어지고 가정은 하숙집의  역할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내신이 이제 중학교에까지 적용된다고 하니 아이 잡고 어른까지 잡는 꼴이다.
  얼굴만 보면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부모가 미운  나머지 "늙으면 산에 갖다
버릴 거야"라고 제반 친구에게 고백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러다간 한국의
수많은 어머니가 고려장김이 아니겠는가. 나 역시 은근히 불안해진다.
  넷째, 너무나도 암기 위주의 죽은 공부,  게다가 수많은 과목들, 입시만 치르면
그날로 다 잊어버릴 저 수많은 학과목 때문에 저러다가 어느 날 한계에 달한 풍
선처럼 펑 하고 소리를 내며 아이들의 머리가 터져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이와 같은 많은 부조리 때문에 실제로 조기 유학을 결심하는 학부모와 아이들
이 많다. 물론 다가오는 국제화 시대에 영어도  익히고 자립심도 키우는 등 장점
들도 많은 동시에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단점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왜 우리 교육 책임자들이 교육행정을 잘 행함으로써 다른
데서 외화 획득을 강구 말고 이 유학 인구를 흡수하여 외화 손실을 막지 못하는
가 안타깝다. 국민소득이 만 불이 넘었다고는 하나  하늘로 비상하는 용이 될 것
인지 추락하는 용이 되어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인지 그것은 우리가 선택해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는 지독한 학벌사회이다.
  자식을 일류 대학에 입학시킨  어머니는 성공한 인생의 표본인양 어깨도 당당
히 고개를 쳐들고 주위릐 선망과 칭송을 한몸에 받는다. 그 반대의 경우, 아들의
머리는 모계를 닮는다는  이상한 XY염색체설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그
러나 이제 우리는  세계와 발맞추어 학벌보다는 능력, 실력 위주의  평가를 받는
그런 사회로 달려가고 있다.
  종생부의 취지는 좋지만 인성의  문제를 점수와 결부시키는 것은 현실적인 문
제에서 해악이 뒤따른다. 나는 대학별로 문제를  출제하고 학생들은 자기가 원하
는 대학에 시험을 치러서 실력대로 평가를 받았던 과거 우리 세대들의 입시방법
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입학한  후에는 융통성을 두어 전과제도의 복
수전공을 허용하고 학부보다는  대학원 위주의 교육제도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다.
  프랑스에서 선착순 합격이란  기상천외의 방법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무조건
선진국의 제도를 도입하여 부작용을 빚지 말고 우리의 실정과 정서에 맞는 좀더
합리적인 한국적 입시제도를 고안해야 할 것이다.
  오늘도 우리 아이들은  노란 탱자같이 찌든 얼굴로 책걸상의 포로가  된다. 조
석으로 흔들리는 입시정책에 강제로 승차되어 처분만을 기다리는 승객의 운명을
한탄하면서...

      4. 수인 협궤선에 지워진 사랑

    그해 겨울

  심각한 연애  한 번 못해보고 대학  4년을 허공에 날려버린  나로서는, 로맨스
어페어에 대한 테마는 늘 아쉬움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설사 있다손  이처라도 아직은 사십대 초반, 활자화된 글을  남들이 읽
을 텐데, 혹시라도 당사자가  본다면, 등 등의 걱정으로 망설이기도 했지만 원고
청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 낡은 뉴스 영화의 릴처럼 내 희미한 추억의 필름을 덜
거덕 덜거덕 덜거덕 돌려보기로 했다.
  4학년의 가을 바람은 스산했고 나는 쓸쓸하였다.
  청바지를 벗어던지고 투피스 차림의  정장을 하고서, '은근히'에서 '노골적'으로
애인 있음을 과시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어쩐지 아니꼽기도 하고 억울한  것 같
기도 하여 괜스레 심란하던 무렵이었다.
  이제 6개월 후면 내 청춘은 애드벌룬이 되어 공중으로 날아가버리고 집에서는
결혼을 서두를  것이 아닌가. 친구들은  소개를 받아 잘도  사귀건만 인위적으로
소개를 받아 사람을 사귄다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허락
지 않았다. 영화나 소설에서  보았던 우연한 만남, 좀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운명
적인 만남같은 것을 학수고대했던 것이다.
  (폴링 인 러브)의 로버트 드 니로와 메릴 스트립처럼 지하철에서, 혹은 불혹이
된 오늘날까지도 나를  사로잡고 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와
스칼렛 오하라의 만남 (물론 응접실에서 꽃병을 던지는 불상사를  꿈꾸었던 것은
아니지만)같이 말이다.
  십분 후퇴하여  진한 사랑이 아니더라도 연애  연습이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했
다. 이대로 졸업을  하고 나면 나중에 후회가  될 것 같았고, 못다한 아쉬움에서
늦바람이라도 나면  어쩌겠는가 말이다.  노년을 위해서라도 추억거리  하나쯤은
남겨둬야 할 일이었다.
  그러넫 때맞춰  어느 날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시간을  내달라는 거였다. 그는 군대를 마치고 유학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란 것이다. 인적사항을  듣고 보니 몇 년 전 그의  형님과 내 사촌언니
가 우리 집에서 맞선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숨을  죽이고 방문 틈으로
말로만 듣던 맞선 광경을 훔쳐보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니가 결혼을 한  후 집을 떠나면서 "사진 클럽에 서 마음에 꼭
드는 남자를 발견했는데 혹시  나중에 인연이 닿으면 만나보라"며 열을 내던 바
로 그 사람이 아닌가, 물론 언이와 나는 취향이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누구의 소개로 사람을  만나기는 싫었지만 이 두  가지 사실 때문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마음이 흔들리는 찰나 마침 친구는 더욱 기발한 제안을 전했다.
  상대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나 좀더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 친구와 내가
만나고 있을 때  우연을 가장하여 그의 친구와 함께 나타나겠다는  거였다. 그의
친구와 내 친구는 집안끼리 가까워 잘 아는 사이였다.
  결론인즉슨 나에게 비밀로 하고 접선을 시켜달라는 얘기이다.
  친구는 끝까지 비밀로  하려다가, 기분에 따라서 잔뜩 치장을 하기도  하고 귀
신 꼴로 나타나기도 하는 내 기벽이 걱정이 되어 이실직고를 한다는 것이었다.
  학수고대한 로맨스 영화 같지는  않지만 탐정 추리소설의 접선 장면쯤은 되는
것 같아 오케이하고 말았다.
  친구와 나는 R호텔 커피숖에서 만났다.
  10분쯤 있으니 문 쪽에서 아이보리색 싱글을 차려입은 남자가 나타나 우리 쪽
으로 걸어왔다.
  맙소사.
  예나 지금이나 나는 멋부리는 남자는 별 취미가 없다.
  멋과는 담을 쌓은  남자 형제들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한껏 모양을 낸 남자를
보면 어쩐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남자들끼리  몰려다니며 여자를 보기를 돌같이
하는 남자 (이런 남자가 정말 남자) 터프 가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남자가 웬 아이보리 싱글!
  그는 외모에 상당한 자신을 가진 듯했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밀며 트리플 엑
스를 그었다.
  일 주일 후였다.
  친구들의 집들이 초대를 갔다.  그 자리에 그와 그의 친구들이 와있었다. 그리
고 다시 얼마 후 내가 출품한 꽃꽂이 전시회에도 돌연 그가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였다. 서서히, 어쩌면  이것이 인연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계속 만나보기로
하였다.
  나는 내 장기인 무안 주고  즐기기, 비꼬기, 톡쏘기 등의 행위는 일절 삼간 채
점잖게 대화하였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들은 만남의 진전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사실쯤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만남은 계속되었고 어느덧 겨울이 왔다.
  공교롭게도 그해 겨울, 그의 집은 이사를 했고 집들이 파티를 한다고 했다. 크
리스마스 캐럴과  세모의 분위기는 23세의  나를 충분히 들뜨게  만들었고, 그의
부모님께 인사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으로 참석하였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
는 강변로에는 자욱이 물안개가 끼어 있었고 짙은 안개의 막을 헤집고 탱자빛으
로 익은 가로 등불이 차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며칠 후 E대 강당에서는 폴모리 악단의 공연이 있었다.
  신촌 다리 밑을 지나는 그 유명한 기차의 기적 소리를 덤으로 얹은 채 교문을
나섰을 때  세상은 온통 은빛이었다. 찬바람이  살갗속을 찌르는 듯했고, 흰눈이
펑펑 쏟아져 마치 하늘 위에서 수만개의 은종이 부서져내리는 듯하였다.
  학교 앞의 맥주집을 들렀다.
  그의 친구 커플과 마주앉아 맥주를  마시는데 그가 갑자기 팔을 뻗쳐 내 의자
뒤에서 걸쳐놓는 것이  아닌가. 나는 움찔하여, 순간  앞에 앉은 그의 친구 눈에
이런 행동이 어떻게 비쳐졌을까. 이미 어깨동무쯤은  한 사이라고 여기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화가 나기 시작하였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여자는 안기고 싶어진다는데, 어깨는커녕  의자 등받
이 위에 손을 얹은 것이 유죄가 되는 것을 보면 이 만남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
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문을 모른채로 도대체 갑자기 그러는  이유가 뭔지
알기나 하자는 그에게 나는 차마 그 이유를 밝히지 못한 채 우리의 만남은 끝이
났다.
  그 후 그가 보내온 편지와 그의 어머니의 중환 소식은 한동안 내 마음을 무겁
게 했으며 추리소설에서 로맨스  소설로의 결말이 불가능해진 내 23세의 겨울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6년 후 미국 어느 도시에서였다.
  남편의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친구 부부의 안내로 그들
이 다니고 있는 대학을 둘러보았다. 20일 이상  계속되는 여행으로 나는 지칠 대
로 지쳐 있었고, 생후 7개월밖에 되지 않는  갓난아이와 5 살배기 딸아이의 치다
꺼리에 구경이고 뭐고 다 귀찮은 판국이었다.
  그때 멀리서 한국인  같아 보이는 한 남자가  걸어오면서 친구 부부와 반갑게
악수를 하였다. 친구  부부는 옆에 있는 남편에게도 소개를 하여  그들은 통성명
을 하였다.
  그런데 가만, 맙소사, 그였다. 이역만리 이 낯선 땅에서.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내 꼬락서니를 살펴보았다. 아직 산후  살이 빠
지지 않아 물에  불린 해삼처럼 부푼 몸매에,  등뒤에는 기저귀 가방, 한 손에는
우유 보따리, 다른 손에는 스트롤러, 아기는 빽빽거리며 울고 있었다. 아, 그러나
하나님이 보우하사 색이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 역시 등뒤에 공부 가
방을 멘, 애 아버지 냄새를 물씬 풍기는 학생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혼자 그해 겨울을 생각하며 고소지었다. 그  역시 그때를
떠올리며 "이젠 영락없는 아줌마로군"하며 웃지 않았을까.
  만난 지 며칠 만에 손을 잡고 스스럼없이 어깨동무한다는 요즈음 세대를 생각
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문득 뒤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희마한 가로등불로 서 있어 가운데 내 젊은
날의 긴 그림자를 비쳐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판 레트 버틀러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랑은 문학의 영원불멸한  테마일 것이며 여성이라면 누
구나 근사한  사랑의 고백을 듣기 원할  것이다. 나 역시 꿈과  현실이 뒤범벅이
되어 미로를 헤매던 젊은 시절, 곧잘 환상의 나래를 펴보기도 했었다. 나는 어떤
사랑을 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떤 프로포즈를 받게 될 것인가.
  내 공상  속의 모범답안은 언제나  레트 버틀러와 스칼렛의  사랑이었다. 사실
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때문에  망한 사람이라할 수 있겠다. 레트 같은 남
자만을 찾다가 청춘이 끝나버렸으니까.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당신의 애쉴리에 대한 그 어리석은 사랑 때문에 닳고
없어졌다오. 변한 것이  아니라 닳아 없어졌단 말이오."  이와 같은 그의 독백에
나는 한숨을 쉬면서 얼마나 가슴저려 했던가.
  여자들 중에는  여러 타입이 있다고  한다. 나는 모성애를  발휘하여 자애로운
손길로 남자를 위해 봉사하는 타입이 되기는 싫었다. 내가 기댈 수 있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남자가 좋다.  강한 남자, 그러나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 그러나  가슴 한구석에는 야성의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남
자,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강신재의 소설,  (젊은 느티나무)의 주인공처럼 신선한
비누 냄새가 풍기는 남자.
  이런 나를 보고 여권  운동가들은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고 비난할지
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스물네 살이
되던 해 하는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레트 버틀러는 많은 여자들의 오로지
환상 속에 존재하는 남자일 뿐이며 동시에 나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란 명언을 좀더 빨리 떠올려야 했을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 됐건  나는 돈 안 드는 공상  속에서 충분히 즐거웠고 상상 속의
화면은 주로 이런  것이었다. 가벼운 눈발이 날리는  겨울 저녁, 나는 긴 머리를
날리며 고요한 강가를  걷고 있고 미지의 그는  중간쯤 되는 바리톤의 목소리로
속삭일 것이었다. 또는  석양이 붉게 물든 어스름녘, '바람의  노래' 혹은 '바람의
키스' 같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로 구성된  이름의 카페에서, 그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었다. 유리로 만든 부스 안의 DJ는 헬렌 레
디의를 들려줄 것이고...
  그의 고백은 반드시 직접화법이 아닌 간접화법이어야  할 것이었다. 우리는 동
방예의지국의 후예가 아니더냐.  빛나는 태양보다는 은근한 달빛의  정서에 더욱
이끌리는 피가 흐르고 있을 터였다. 교양있는 처녀로서  단번에 OK해서는 안 될
일, 적당한 선에서 사인을 주어야 할 것이었다. "열 번 찍어 넘어지지 않는 나무
는 없다."는 말도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지가 오래인 이 시점에서열 번을 세었다
간 그는 분명 달아나고  말 일, 그렇다고 열한번째에는 꼭 넘어갈  테니 힘을 내
라고 응원박수를 칠 수도 없는 것이 아니겠나.
  이렇게 환상 속을  넘나들고  있던 무렵, 입춘이 지났으나  아직은 쌀쌀했던 3
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혼자서 우리 집을 방문하였다. 약속시간은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뜨뜻한 온돌에 엎드리고 있던 나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고 일어나 거
울을 보니 얼굴에 줄이  두 개 생겨 있었다. 그는 늦어서  미안하다면서 가발 손
질이 끝나지 않아 그렇게 됐노라고 하였다.
  매처럼 찢어진 눈에서 나오는 강한  빛과 작은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굵은 목
소리가 인상적이었던 그 방위병은  시종일관 무슨 얘기를 했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말은 자기의 현실적인  출세나 성공에 지향하기보다는 인간의 영혼을 구제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한  말이다. 그 때 나는 속으로 '이런 비현실적인 사
람과 결혼했다가는  밥 굶기 딱 알맞겠군'이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좋게 말
하자면 당당함, 나쁘게 말하면 조금 뻔뻔스러운 그가 매력이 없지는 않았다.
  지금도 아스라이 기억이 난다.  그 옛날, 낭만이 가득했던 명동에는 '두주발'이
라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그곳은 고즈넉하고 고전적인  장소를 좋아하는 내 취향
에 어느 정도 근접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이었다.
  오월 어느 저녁날,  두주발에서 그는 말했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 보면서. 테
이블 위에는 조그맣고 빠알간 램프가  놓여 있었고 흐릿한 조명 아래 적당한 정
적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일렁이는 긴장감까지도...
   Would you marry me? If you don't want to, say no, If you do, just smile.
  이런 것이 아닌데...  어떤 은유법으로 프로포즈를 할 것인가를  잔뜩 기대했던
나는 약이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음 속의 대답은 Yes였으니  No할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스마일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체신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무표정의 포커 페이스를 할 수도 없었다. 나의 영어 실력을 의
심받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참으로 난감하였다. 약간의  고민 후 나는 어쩔 수
없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의 아이디어가 적중한 것이었다.
  내 피식웃음을 본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수고스럽게 뭐 멀리서 레트 버틀러
를 찾을 필요  있습니까. 여기 이렇게 한국판  레트버틀러를 두고 말입니다." 그
순간 나는 너무 기가 막혀서 아니 코까지 막혀서 "레즈 버틀러는커녕 그의 가방
모찌나 하면 어울리겠다"고 쏘아주고 나니 속이 조금 후련하였다.
  훗날 나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직접화법보다는 간접화법을, W.B.예이
츠의 (방랑의 노래)에서처럼 '황금사과(태양)보다는  은사과(달)'를 더 좋아하노라
고 말해주었다. 그는 그  따위 흐리멍텅한 달보다는 강렬한 태양의 신, 아폴로가
자기 스타일이라고 했다. 그는 덧붙여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라고 하였다.
  데이트 때 무드를 살리기 위하여 꽃다발을 사들고 간 자기에게 인상을 쓰면서
"돈 아깝게 이런 꽃다발을 뭐라고 사가지고 왔느냐"던 여자가 엉뚱하게  무슨 황
금사과니 은사과 운운할  자격이 있느냐, 자기는 그때 벌써 다  알아봤노라고 하
였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내게는 양극의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으니까. 극단적으로
현실적인 면, 그리고 감성적인  면이 어우러져 있다. 지금도 소설 속에서 로맨틱
한 장면이 나오면 내 반쪽은 머리를 쳐든다.  아직도 젊은 기운이 남았는지 가슴
이 두근거리기도 한다.
  자기를 한국판 레트로 생각하라는 남자.
  쭉 찢어진 눈에 담배를 하도 피워 거무틱틱하게 바랜 입술을 오히려 섹시하다
고 주장하는 남자, 넓지 않은 어깨에 짜리몽땅한 키, 귀 하나 빼놓고는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아 미남과는  거리가 먼 남자, 남들이 들으면 그렇게  숏다리인 레크
도 있내면서 코방귀를 뀔 노릇이겠으나 이럴 때 사용할 적절한 문구가 있다. "제
눈에 안경."
  이리하여 버틀러는 타임머신을 타고 20세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날아와 지
금 내 앞에 있다.
  사랑, 이것이  무엇인지 여자는 이순이  되어도 사랑에 대한  환상을 지닌다고
한다. 소녀 적 꿈꾸었던 열꽃  같은 환상은 사라졌다. 이제 불혹의 나이에 든 내
가 꿈꾸는  사랑은 물 같은  사랑이다. 나이들어가는 상대편을  기엾어하며 서로
위해주는 노부부를 볼 때 그들의 담담한 모습에 편안함을 느낀다.
  톡 쏘는  콜라 같은 사랑보다는 맹물  같은 사랑, 맛도 냄새도  없으나 영원한
사랑, 이것이 요즈음 내가 꿈꾸는 새로운 사랑인 것 같다.
 
    느릅나무 다리 너머의 사랑

  애틀란타 올림픽 소식이 한창인 요즈음 미국은 외화 획득의 부푼 기대에 들떠
있다. 역사가 짧아  문화의 유적이 많지 않은  미국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 된 마가렛  미첼의 집을 애틀랜타 제일의 명소로 삼았다고  한다. 이처럼
문학작품이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연이나 장소는 훌륭한 관광자원이 된다.
  얼마 전 세계의 여성  독자들을 강타했던 아이오와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도
얼마나 상품성이  있었던지. 영화 수입뿐 아니라  그 다리를 응용한  티셔츠, 컵,
액세서리... 게다가 아이오와를 방문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로즈먼 다리를 찾
아온다고 한다.
  나는 상상 속에서 그리던 그  다리를 영화 속에서 보고 기대와는 달리 얼마나
실망했던지, 지붕 덮인  로즈먼 다리가 어찌 그리도  볼품이 없던지... 그런데 그
별 것 아닌 작은 다리에서  그렇게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소설이 만들어졌
던가. 
  파리의 센  강만 해도 그렇다.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센 강과  미라보 다리를
노래했던가. 그런데  막상 가보니 우리 한강만도  못한, 별것도 아닌 시시하다면
시시한 다리였을 뿐이었다.
  신라시대 서라벌의  전성기 때, 원효와  요석 공주의 로맨스의  현장이 되었던
남천의 느릅나무 다리가 복원된다고  한다. 참으로 반가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신라 태종 때 원효대사는 혼자가  된 요석 공주에게 보내는 구애의 노래를 참요
에 실어 널리 퍼뜨린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나에게 주리오,  내가 자루를 박아 하늘기둥을 받치리
오"라는 노래 속의 자루  빠진 도끼와 도끼자루는 남성과 여성의 성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듣기에 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는 이 참요의 진원지를 캐던 태종 무열왕은 원
효의 속마음을  짐작하고 계산된 우연을  연출한다. 대사를 요석궁  근처에 있는
느릅나무 다리를  건너가게 하면서 일부러  물에 빠지게 한다.  때마침 지나가던
관원들이 물에 빠진대사를  건져내어 인근 요석궁에 업고 간다. 요석은  그 연극
을 알고도 모르는 체 그날 밤 도끼자루와 자루 없는 도끼는 합방을 하고 하늘을
받칠 만한 기둥의 씨앗, 즉 설총이 잉태된다.
  이 얼마나  정겨운 낭만과 해학이  곁들여 잇는 로맨스인가.  강렬한 아폴로의
사랑이 아닌 다이애나의 사랑,  직격포의 사랑이 아닌 돌아 돌아 한  바퀴 더 돌
리는 우회적인 사랑..., 현대의 매스미디어격인 참요를 이용하여 여론을 형성하고
복차지계, 즉 마차 안의 요인을 죽이려면  마차를 뒤집으라는 손자병법을 십분활
용하여 태종을 원격조종한 원효의  솜씨는 가히 로맨스의 정수를 보여주는 일품
이라 하겠다.  또한 이 계교를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그 그물에  걸려든 태종도
당대의 로맨티스트라 아니할 수 없으리라. 결국  태종과 원효, 그리고 요석 공주,
이 세 사람의 넉넉한 사랑의 품이 세기의 사랑을 창출해낸 것이 아니겠는가.
  "흰 나방이 날갯짓할 때 저녁식사 하고  싶으면 오세요." 지붕 달린 로즈면 다
리에 붙여놓았던 프란체스카의  쪽지 편지... 이런 노골적인 유혹의  전언은 우리
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
  요즈음의 네오 X세대쯤 되면  몰라도, 허나 신세대들이 아폴로식 사랑만을 지
향하고 있는 세태를  보면 나는 안타깝기조차 하다. '야타족(고급차를 가진  오렌
지족들이 길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면 야,  차에 타,라고 한다는 데서 생긴
말)'이란 기상천외한 단어조차도 등장하고  있는 시대이지만 그래도 사랑이란 젓
갈을 담그듯이  곰삭을 대로 곰삭아야 제  맛이 우러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동판매기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볼 때, "애들아, 그래도 진짜 사랑이란  누룽지
처럼 구수한 사랑이란다. 뜸들이는 시간도  필요한 법이란다"라고 말해주고 싶은
나는 이제 '쉰세대'일까.
  이런 차에 우리 고유의 사랑관의 향기가 실린 느릅나무 다리가 복원된다니 반
가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목교가 복원된다면 그까짓 인스턴트  시멘트 다리
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색창연한 로맨스의 현장이 재현되는 것이다.  눈을 감
고 프란체스카와 요석을 그려본다. 나흘간의 사랑을  안고 여생을 견뎌갔던 프란
체스카와 하룻밤의  사랑을 품고 일생을  살아갔던 요석, 비록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해로를 하지 못했을지언정 양보단 질적인  사랑, 즉 지극히 동양적인
로맨스를 택했던 사람달이다.
  왜 많은 서양의 독자들이 프란체스카의 사랑에  열렬히 찬사를 보내는가. 그것
은 사랑을 하게 되면 직접  고백을 하고 담판을 짓고 뒤에 남게 될 가족들의 상
처보다는 내  사랑의 쟁취가 우선이  되는 서양적인 사랑관에  식상한 독자들이,
죄없는 가족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자기의  사랑을 희생하고 참고 기다리는
프란체스카의 동양적인 사랑관을 신비로움을 느껴서였으리라.
  영원한 사랑의 고전  속의 주인공인 스칼렛을 봐도 그렇다. 남의  가정이야 파
과가 되든 말든 내 사랑의 쟁취가 중요하다. 포기나 희생이란 없다. 내가 원하는
사랑을 갖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할 뿐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진정한  사랑인 레
트를 잃어버리지만 "내일의  태양은 내일 또다시 뜨리라"며 지극히 현실적인  생
각을 취하는 그녀의 강인한 모습은 전형적인 사랑의 쟁취를 보여주는 서양식 사
랑관인 것이다.
  반면 동양식 사랑관은 어떤가. 영화 (은행나무 침대)의 미단 공주와 궁중 악사
의 사랑, 천 년을 기다려온 그 사랑을 영원히  지키기 위해 한 줄기 불길로 타오
르는 미단의 영혼,  그것은 자기 희생의 미학을 압축한 동양적  사랑관의 표출이
다.
  또한 이외수의 (벽오금학도)  - 전생의 이루어지지 못한 인연에 대한  한과 그
속죄의 일념으로 300년을  기다려온 무선랑과 강은백의 사랑, 그리고  중국 청나
라 때의 선비인  심복의 (부생육시) -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아내인 운을  잊지
못해 그 애틋한 추억을 노래한  이 소설 모두는 우리 동양권의 정서인 다이애나
적인 사랑관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강인한 스칼렛의 사랑에도 우리는  감동을 받지만 애절하고 은근한 미단과 무
선랑, 그리고 운의 사랑에도 우리는 뭉클하고 신비로운 감동을 받는 것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문화에  대한 향수에 빠질 것이다. (전설의 고향)
같은 TV프로를 보면 수많은 기기묘묘한 사연들이 전설  뒤에 숨어있다. 이 얼마
나 멋진 스프트웨어인다.
  온 세계를 강타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보다도 훨씬 아름답고  정신적인 가
치가 고매한 사랑관이  담긴 소재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이 무한한 자원을  잘 가꾸고 보듬어 영화나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켜 온 세상에
감동을 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야말로 극소투자, 극대가치를 창출해내게 될 우
리의 귀한 정신적인 유산이 아닐까 싶다.
 
    수인 협궤선에 지워진 사랑

  "바람이 몹시  불거나 눈비가 칠 때  정인을 찾아가듯" 떠올리고 싶은  풍경이
있다.
  수언선 협궤열차를 아는가.
  새우파시로 유명한 소래포구에서 출발하여 달월,  군자, 안산, 중앙, 한대 앞,사
리, 야목, 어천역을  지나 수원으로 가는 열차, 10년 전까지만  해도 쌀, 소금, 생
선, 야채들을 실어나르며 활기 가득했던 열차, 문명의 발달로 인해 머잖은 날 사
라져갈 운명의 이 열차와  폐역이 될 목조 역사들, 그리고 철길  위의 무성한 개
망초 풀들.
  윤후명의 소설, (협궤열차)는 황량하고 삭막한 신흥 공업도시인 안산을 배경으
로 40대 중반의 '나'와 '류'라는 여인의  우연한 재회와 사랑, 그리고 이별을 그린
일인칭 소설이다.
  작가는 현대라는 삭막한 사회를  폐허가 되어 모랫바람 날리는 황량한 사막으
로 형상화했으며 그 속에서 부초와도 같이 흔들이며 허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들의 마치 현대  속의 공룡들처럼 소멸된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대상을
찾아 사막을 헤매는 존재로 묘사했다.
  폐허화된 것에서 강한 애정과 감동을 느낀 작가는 총체적 역사안에서 고대 중
앙아시아의 초원과 고비 사막의 이미지를 관념적인 서울의 사막에로까지 연결시
켰다. 이는 작가에게 있어 과거는 단순히 과거로  끝나지 않고 현실을 낳는 씨가
되며 필연적으로 미래에까지 이어진다고 사고되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나'는 어느 날 '류'와  함께 스키타이 황금전을 보게된다. 박물관 진
열창 안에서  눈을 번득이는 황금새,  아득한 옛날 중앙아시아  초원을 주름잡던
스키타이 인들의 수호신의 상징-황금을 지킨다는  상상 속의 괴조- 이었던 그리
핀을 보면서 소멸과 허무의 깊은 의미를  깨닫는다. '류' 는 떠나가도 '나'는 허무
에 침착하지 않고 소멸된 것들에서 새로운 생성의 미학을 깨닫게 된다.
  진정 외로움에 지친 우리  현대인들은 낡고 뒤뚱거리는 이 수인선 협궤열차에
몸을 싣고,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영원한 그리움과 이 지상에서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사랑'을 찾아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
  내가 이 소설을 읽은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지난 주, 문학작품들의 배경을 찾
아 문학기행을 떠나는 클래스가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갔더니 등록 희망자가 한
명밖에 안 되어  강좌가 취소되었다고 했다. 무척 실망하여 돌아오는  길에 책방
을 들러 책을  훑어보는데 (협궤열차)란 제목이 눈에  띄었다. 제목을 읽는 순간
가슴에 전해 오는 어떤 여운, 아련하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한 그리움의 조각 같
은 것이 느껴져서 그 책을 무턱대고 잡고  집에 왔다. 생각의 시간을 가져다주는
여행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여행을 꿈꾸면서 막상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는 정신의 즐거
움을 누리는  대신 육체적인 안전이  보장될까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었다. 겁이
무척 많은 나는 서울 시내에서조차도 혼자 식당을 들어가거나 영화를 보러 가지
못한다.
  언젠가 어느 책을  보니 그 이유는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
물들을 보라. 코끼리,  얼룩말, 들소 등이 떼지어 다니는 대신  동물의 왕인 사자
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은 혼자 다니지 않는가. 그것은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쓰인 것을 보고 식은땀을 흘리며 혼자서 음식점에 들어가는 것을 시도해본
적도 있다.
  혹자는 육체적인 안전이란 말에  웃을지도 모른다. 그 나이에 웬 걱정, 이제는
인신매매단의 표적에도 자격 미달이 될 텐데... 라고.
  그러나 어찌 됐건  믿음직한 선생님과 안전한 차량, 그리고 사전에  그 배경에
얽힌 작품  속의 이야기까지 곁들인다는  것은 상당한  유혹이었는데... 아쉽기만
했다.
  특히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은 고창 선운사의 동백숲과 제주도 산굼부리의 억새
풀숲, 그리고 철새떼로  유명한 을숙도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고 선운사의 동백숲을  후보 1번지로, 가을 한 모퉁이에 서서  바람이 불면 금
빛으로 서걱대는 억새풀숲이 광활하게 퍼져 있다는  제주도 산굼부리, 그리고 을
숙도의 철새떼를 2, 3번지로 생각해두었다.
  인간 관계의 연속인 아는 사람끼리의 왁자지껄한  여행이 아니라, 안전이 보장
됨과 동시에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듯 익명성이  보장된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
리하여 그 도정에서 이름없는 풀꽃들의 나지막한  속삭임을 듣고, 그윽한 산그림
자 품에 안긴 천년묵은  전설과 마주하고 싶다. 버스나 열차으 맨  뒤에 앉아 차
창밖의 야산과 꼬불꼬불 이어지는  논밭들을 바라보면서 또 하나의 나와도 마주
하고 싶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가 아닌가.
  철저하게 혼자 태어나서 혼자서 죽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외로
움을 잊기 위하여, 외롭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같이 있기를 원한다. '더불어'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혼자이고 싶은 이이율배반적인 마음,  나 역시 작품 속의 '나'
처럼 외로움의 바윗덩어리를  밀어올리면서 끝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운명인 '시
지프스의 신화'를 닮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혼자이고 싶을 때  떠올릴 작은 풍경하나를 얻었
다. "바람이 몹시  불거나 눈비가 칠 때  정이을 찾아가듯" 떠올릴 풍경이  있다.
달랑 두 량만을 달고 가는 협궤열차, 이 고대  열차를 타고 선연한 붉은 빛의 나
문재 군락을 지나 황량한 갯벌도  지나면서 나 역시 어쩌지 못하는 외로움과 그
리움을 소리없이 치유하리라.
 
    가깝고도 먼 푸른 섬 
 
  서울에서 산 지가 벌써 삼십 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고궁이 있다.
비원을 아직 못  가봤다는 내 말에 남편은  깜짝 놀라며 "비원은 데이트의 기본
코스이며 특히 키스하기에 안성맞춤인장소로,  친구 K는 이곳에서 첫 키스를 하
였노라"고 회상하였다. 그리고는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면서 "귀여운 짜아식" 하
며 으히힛 웃었다.
  그러면 "자기는 어디서 첫 키스를 했느냐"는 내 물음에 "흠... 연애를 못해봤다
더니 과연 그렇긴 그런 모양이군, 비원을 못 가본 것을 보면"이란 대답으로 본인
의 경험담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였다.
  마흔이 넘으면 사고의  전환이 오는지, 무심히 바라보았던 고추잠자리, 갈대잎
의 이슬 한 방울,  바람에 흔들리는 연잎 같은 것들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다
가오는 요즈음,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숲이 울창하여  산 속 같은 데가 있다
는 비원으로의 유혹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말뚝에 매인 소처럼, 매너리즘에 빠진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함과 무기
력증을 탄식하며 저 하늘 바깓의  만리 먼 이국들이 아니라 지척의 비원을 그리
는 나는 청마(유치환) 선생을 닮았을까. 어느 언덕빼기에 올라 한 그루 낙락장송
밑에 서서, 솔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천지에 운행 그리고  사계절의 순환에
대한 상상적인 여행을  했다는 선새의 시구가 문득 생각킨다. 그러면서  이 시인
은 현실이 하나의 질주라면 시는 오솔길을 산책하는 것이라고 했다던가.
  아무려나 나는 가까운 시일 내에 비원을 꼭  가보고 싶다. 거기를 가면 울창한
숲, 우짓는 새, 깔아놓은  잔디밭만 있는 것인 아니라 시간을 잊어버린 청춘들이
팔짱을 끼고 거닐 것 같고, 그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의 지난날을 되돌려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미기의 세계로의 발걸음, 비원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공연히 뭔가 은밀한  추억이 있어야만 어울릴 것 같다. "가슴  속의 비밀이 많은
사람이야말로 재산이 많은 사람"이라고 천재 시인 이상은 말했다지만 나는  비밀
도 없건마는 공연히  은밀해진다. 억지로 비밀 아닌 비밀을 찾아보자면  비원 근
처에는 '가든  타워'라는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곳에서 생각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돌연 청혼을 받던 일이다. 그를 놔둔 채 혼자 나와서는, 달빛이 교교
히 내려꽂히는 길 건너편 비원의 긴 담장을 끼고 걸었었다.
  길게 늘이며 따라오는 내 그림자와 더불어  팔짱을 끼고서, 터벅터벅 걸어갔던
집까지의 밤길은 왜 그렇게 멀고 발길은 무거웠던지.  그때 나는 불현 듯 혼자서
비원을 들어가보고 싶었덧 것이다.
  나는 언제나 비원을 가보게 될까.
  집에서 한 시간의 거리, 뜻만  내면 지금이라도 훌쩍 가볼 수 있는 곳. 그러면
서도 문득 망설여지는 것은 미처  가보지 목한 서울 한복판의 비원을 머언 미지
의 땅, 남극이거나  북극 또 아니면 지도상에는 없는 아름다운  나라쯤으로 가슴
속에 간직해두고 싶은 또하나의 동경이 내 가슴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금아(피천득) 선생은 꽃피는 오월이면 꾀꼬리  소리를 들으러 비원을 가겠다고
했는데 나는 언제쯤 갈지 아직 계획이 없다.
  비원, 이름 그대로 뭔가  내밀한 역사가 곳곳에 묻혀 있을 것만  같은 도시 안
의 푸른 섬, 어쩐지 이곳은 오다가다 들러서는  안 될듯한 소중하고 은밀한 영혼
의 처녀지 아니면 무인도가 아닐는지.
  어느 때 내가 비원을 찾는 날은 꾀꼬리  우는 봄날도 아니요, 녹음이 흐드러지
게 피어오른 여름날도 아니요, 그렇다고 단풍 붉게 물든 가을날도 아닐 것이다.
  함박눈 내리는 동짓날 오후, 내 좋아하는 오탁번의 (첫눈)을 읊조리며 긴 목도
리 하나 목에 두른 채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향할 것이다.
 
    딸아이 방에서

  딸아이의 책상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책상 위의 수첩을 보게 되었다.  별 생각
없이 뒤적이는데 눈길이 머무는 곳이 있다.
  "나는 너하고 정말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막상 네 앞에 가면 말이 잘 나오
지가 않고 서먹서먹해진다. 너는 너무 완벽하여... 중략."
  지난 여름 캠프에 함께 참가했던 남학생이 쓴 것인 모양인데 왜 이렇게 내 가
슴이 두근두근 떨리는지...  사실 중 2인 딸아이는 너무  모범생에다 심지어 청교
도적인 정신까지 가지고  있는 아이인지라 "아이구, 쟤  엄마 노릇하기도 피곤하
네"라고 말하면 길 건너 사는 언니는 "너 누구 악올리니?  배부른 소리 하니 마"
라며 눈을 흘긴다.
  딸아이는 요즈음 유행하는  '게스' 청바지를 사주겠다고 해도 "학생이 뭘  그런
걸 입어요. 평화시장 가서 사다 주세요"라고 하여 김을 빼놓고 '사랑의 손길회'라
는 모임을  만들어 일 년에 두  차례 방학식날엔 꼭 양로원을  방문한다. 그동안
모은 용돈을 다 털고 나한테 응원까지 청해서 간다.
  나는 속으로 '얘한테는 사춘기도  안 오나. 모범생도 좋지만 딸 키우는 재미도
없네'라고 투덜댄다. 딸아이가  알면 나는 졸지에 무지몽매하고 교양없는 엄가가
되고 말 일이지만...
  대학생이 된 딸이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거나 하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 근 반 세 근 반 된다는  사촌 올케의 말이, 몇 년 후면 나한
테도 해당사항이  되겠구나, 이제 시작인가 보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나는 딸아이에게 남녀공학인 학교를 추천하고  싶다. 여자친구뿐 아니라 남학
생 친구들과도 교류가 있는 그런 학창 시절을  권유하고 싶다. 풋풋한 사랑도 해
보고 남학생과의 우정도 경험해보면서 자연스러운 인간 관계를 터득하고 폭넓은
대학생활을 보내라고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경험과 추억들은  나이들어 어쩔
수 없이 메말라가는 우리의 삶을 적셔주는  단비처럼, 때로는 영양실조로 노래지
는 우리의 혈색을 발그레 채색해주는 영양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남녀공학인 학교를 다녀보지 못했고 그런 분위기에 전혀 익숙지
가 않았기 때문에,  남학생이라면 무조건 내외를 하여 말을 하지  않거나 접근하
는 남학생이 있어도 무지막지하게  '흥, 쳇'으로 일관하기 일쑤였다. 그것은 일부
러 콧대를 높이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지금 생각하면 대인 관계의 미숙에서 온
태도가 아니었나 싶다. 남학생이라고  뭐 특별난 인간인가. 똑같은 '사람의 자식'
이관테 왜 그렇게 촌닭같이 굴었던지.
  기가 막히게 보수적인 오라비의 "연애하면 소문나서 시집도  못하고 끝장이다"
라는 협박에 나 자신을 스스로 옭아매어  고스란히 날려버린 대학생활이었다. 어
쩌다가 참여한 미팅하나 데이트에서 좀 늦어도 집 앞 골목 어귀에서 씩씩거리며
서 있었고 언니가 혼자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먹던 밥숟가락을 내던지며 "그
럼 내가 안 가고 말겠다"고 하던 오빠였다.  덕분에 나는 억울하게도 연에 한 번
못해보고 말았다.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의 아들이자  내 유일한 남자친구였던 W는 초등학교 코
흘리던 시절부터 같이 자라와서  중고등학교 때는 눈썹 위까지 여드름이 울룩불
룩 나서는 방학책을 빌려달라고 오기도  하고 대학 때는 축제 파트너 소개 담당
보좌관 노릇도 하기도 했었는데...
  남편하고 친한 그가 결혼  후, 남편과 같이 왔길래 "어머머, W왔니? 늦었으니
자고 가라, 얘"라며  붙들었을 때 남편은 "어른이 되었으면 존대를  해야지, 애들
처럼 반말이 뭐냐?고  면박을 주었고 W는 갑자기 존대를  하며 "제수씨, 아닙니
다. 그만 가봐야죠"하고 일어섰을 때 나는 참 섭섭했다. 결혼한 여자는 허물없는
남자친구도 멀리 해야 하는가.
  물론 모든 것이 감사하고 자족한 요즈음이지만 며칠 전 친구의 시어머니가 돌
아가시지 전, "얘, 난 열렬한 연애 한 번 못해본 것이 후회가  된다"고 했다는 말
에, 속으로 "할머니가 주책이셔"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했던 요즈음이
기도 하다. 유안진의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  언급된 "저녁을 먹은 후 고
무신을 끌면서,  김치 냄새가 나기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그런 친구." - 그것은 꼭 동성에게만 한정시켜야 하는 것인가.
  나는 내  딸아이가 싱그러운 청춘의 숲  속에서 4년을 보내면서,  내가 해보지
못했던 경험들을  다양하게 누려보기를 원한다.  우정 그리고 사랑까지도... 각종
연극, 등산, 종교 등의 서클들을 통해 건전한 만남들을 조우하기 바란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에게 찾아갈 것이니"라고 괴테는 말하지 않았던가.

    연극, 수필 그리고 송엽차

  십여 년 만이었다.  결혼 후 사느라고 바빠 연극을 제대로  보지못하다가 대학
로에 있는 한 극장에서 셰익스피어 원작, (한여름밤으 꿈)을 보았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놈과 그 친구녀석은 제일  아래 계단에 앉아 있다가
뭔가 장난을 칠  기회가 없을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여주인공 '허
미아' 역할의 배우가 쓰러져  잠이 들었다. 옆에는 그녀의 연인 라이산더가 같이
잠이 들어 있었고 장난꾸러기 요정 퍼크는 자줏빛 꽃들을 짜서 라이산더의 눈에
바르고 있었다. 이 아이들 앞에서였다.
  아뿔싸.
  녀석들은 그녀의 우아한 긴  드레스르 살짝 들치고는 간질간질 간지럼을 태우
는 것이 아닌가.
  관객들은 '와'하고 웃고 그녀는 심각하게 연기중이라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하였
다. 우리 두  엄마는 맨 위 계단에서 '저놈들'하면서 발을  구르고 있었으나 속수
무책이었다. 연극이 끝난 뒤 아니들을 호되게 야단을 치고 벌을 씌웠다.
  벌을 받은 뒤 두 녀석은  "히히, 우리 똥꼬 간지럼 태웠다. 그지?"했다. 반성의
기미가 부족한 이 녀석들에게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연극 관람 금지의 벌이 가
중되었다.
  그 후 다시 연극을  볼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얼마 전  신문에서 (북회귀선)의
광고를 보았다.
  헨리 밀러의 파리  바랑 시절의 이야기, 외설 작품이란 오명을  쓰고 오랫동안
출판 금지되어온, 그의 자전적 소설인 (북회귀선) 을 읽은 후의 느낌은 한마디로
불가해하고 혼란스러워 뭘  읽었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소설의  특성인 플롯
이 없어 소설인지 뭔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 뒷맛이 개운치 않았는데 연극 공연이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소설 (북회귀선)과는 제목만 같을 뿐 내용은 달랐다.
아나이스 닌의  일기를 토대로 한 헨리  밀러와 그의 아내 준,  그리고 여류작가
아나이스 닌, 이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헨리 밀러를 이해
하는 데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게다가 여기엔 몹시 적나라하고 화끈
한 장면이 곁들여 있다는데..., 라는 다소 음흉한 저의가 숨어 있는 두 가지 목적
때문에 꼭 보려고  했다가 아직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오랜만에  명동으로 나
가 엘칸토 극장을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동행을 구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친구들은 저마다 "너무  멀어.", "애들 올시간이야." 핑계도  가지가지, 별 흥미가
없어 보였다.
  사실 명동에 한 번 나가는 일은 여간 마음을 다잡아먹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그런데 강남에 연극 공연장이 생겼다고 한다.
  나산문화센터의 (빨간 피터의 고백).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연극을 꼭 보려고 생각했었다.
  그 이유는 연극배우  박정자씨가 쓴 (우리들의 광대 추송웅)이란  추모특집 수
필을 읽고 난 후부터였다.
  거기엔 인간 세계에 귀화한 원숭이  한 마리가 최고의 지성인이 모여 있는 아
카데미 회원에게 보고하는 추송웅  초연의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에 대
한 얘기가 나오는데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20년 전 명동에 있던 '까페떼아뜨르'
란 찻집을 떠올렸다.
  참 희한하게도 생긴, 그러나 매력있는 추송웅씨와  까만 턱시도를 입을 인텔리
원숭이, 커피 향기,  젊음, 지나간 이 모든 것이  그립고, 더욱이 그 글의 내용이
가슴 저려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용은 전혀 눈물 나오게  슬픈 것은 아
닝었는데도 불고하고, 오히려  편지 형태의 농담처럼 씌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가슴이 아릿했던지.
  함현진, 추송웅, 박정자가 만들어낸 작품  잊지 않았겠지. 단막극 (우정)말이야,
그때 우리가 한 말 기억할 거야.
  우리들 환갑 때 서로 돌아가며 이 공연을 하자고.
  우리 셋의  우정이 영원히 변치  않기를 바라면서 약속했었지.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나만 남았잖아.
  함현진, 추송웅 둘이 다 가면 난 누구하고 (우정)하니.
  나쁜 남자들, 의리없고 야속한 남자야.
  추송웅씨, 난 자기가 죽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다만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없을 뿐,  사실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일  년내 한
번도 제대로 못 만나는 게 우리들이잖아. 그리고  또 이민가서 못 만나는 경우도
있어. 그냥 서로 헤어졌을 뿐이야.
  이 부분에서 나는 흑흑거리며 울고 말았다.
  사실 나는 이런 이별이 두려워 강아지조차 키우지 못한다.
  제발 애완용 강아지를  키우게 해달라고 소원하는 딸에게 똥, 오줌  때문에 귀
찮아서 안 된다고 딱 자르지만, 사실은 그것은 주된 요인이 아니다.
  몇 번 강아지를  키워보았는데 가출, 병사 등으로 헤어질 때마다  그 후유증이
몹시 컸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런 이별의 경험을 접하기가 싫다.
  박정자, 그녀가 대학의 같은 과 선배라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다. 내 비록 그
녀와 직접  대면은 못해봤어도, 언제나 그녀의  열렬한 팬이다. 그녀의 후원회인
'꽃봉지회'의 회원으로 가입이라도 할까보다. 얼마 전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
어났나?)란 연극을 보았을 땐 그녀의 탁월한 연기에 오싹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나는 레즈비어적인 기질이  있는지 멋진 여성에게 잘 반하는 경향이  있다. 연
극배우 중에는 박정자를  비롯하여 손숙, 윤소정, 김금지를 좋아하는데 김금자의
(가정 이야기), 그리고 앞의  3인방들의 고동 수필집, (무엇이 이토록 나를)을 읽
고 나서 그들이 더욱 좋아 졌다.
  김금자씨는 대단한 유머와  위트의 소유자라 느껴졌으며, 손숙씨, 그녀의 어머
니 얘기는 그  시대 여인의 운명에 대해 깊은  성찰을 요하는 가슴 아픈 얘기였
다. 책 뒤의 서평에서 박정자씨의 20년지기  남자친구인 시인 김영태씨는 이렇게
썼다.
  정자의 노래를 들으면  허허벌판이 나타나고, 허허벌판에 비바람으로 반쯤, 죽
다시피 흔들리는 나무들도 보인다.
  정자는 내 키가 점점 줄어드는  것, 내 피부가 점점 부식되는 것, 목소리가 기
러들어가는 것을 보고 가지만 우리 우정은 변함없는 진행형이다.
  정자, 화내지 마, 화내면 내 속이 쓰리니까, 알겠지...
  아아, 내가 이담에 책을 낼 때도.
  연아, 화내지 마, 화내면 내 속이 쓰리니까, 알겠지..., 라고 써줄 남자친구를 미
리 물색해둬야겠다.
  나는 연극을 하는 배우들을 보면 참 용기있는 대단한 사람들이라 생각된다.
  관객들 앞에서 추호의 거짓이 없는 - 비록 연기라 할지언정 자기의 모습이 드
러나게 마련아닌가 - 자기를 내보여야 하는 행위.
  나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식은땀이 난다. 영화나  TV 드라마는 얼마든지 뒤
에서 재편집이 가능하지 않은가.
  내가 대학 4년을 보내면서  크게 아쉬워하는 일들 중의 하나는 연극을 못해봤
다는 것이다. 연극을  해볼 기회는 있었으나 나는  성격상 겁이 많고, 남을 많이
의식하며, 사투리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제 이미
마흔줄에 들어선 나는 틀린 일이고  딸아이의 뒤나 적극 밀어 꼭 연극을 해보도
록 해주어야겠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연극 감상일 것이다. 그런 의
미에서 집 가까운 곳에 연극 공연장이 생겼다는 사실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이담에 나는 60대가 되면 이루고 싶은 소망이 하나 있다.
  자그마한 공연장이 딸린 서점을 운영하는 일이다.
  공간이 돈이 되는 요즈음 세상에서 그 많은 종류의 책들을 다 취급할 수는 없
는 일, 세분하여 수필만을 취급하는 서점을 하고 싶다. 옆에는 작은 공연장이 있
어 1년 내내 연극  공연, 시낭송회, 언플르그드 뮤직 공연 등을  할 것이다. 관객
의 나이는 40대 이상, 티켓 값은 아름다운 이야기 한 자루이면 된다.
  수필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  슬픈 웃음, 가슴저미는 추억 한
가지, 영원히 높은 곳에 계시는 그분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이 다 합격권 안에
든다.
  그러면 나는 찾아오신 연극과  수필 애호가들에게 청아한 백자잔에 담은 향기
높은 송엽차를 대접하겠다.  어느 시인은 시를 작설차,  통속소설은 커피, 수필은
송엽차에 비유했는데 참 적절한 표현이라 여겨진다.
  연극과 수필, 그리고 송엽차가  함께하는 60대, 상상만 해도 솔잎 향내나는 미
래가 아닌가.

     세월을 뛰어넘는 그곳

 고향이란 단어를 대하면  흔히 시골 어는 토담집, 자식의  금의환향을 기다리며
초롱불 아래 기도하는   홀어머니의 모습이라든가 어느 두메산골의 음메,  소 우
는 소리, 저녁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느는  마을 어귀 같은 것을 떠올리
게 된다.
 지친 몸을 이끌고 하시라도 돌아가면 기다려줄 부모가 있고 변함없는 친구들이
있는, 바람소리 물소리  정겨운 그런 정경을 연상하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세대들 중 그런 고향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을까.
 이제 대부분의 젋은  사람들은 도시엥서 태어나고 도시엥서 자란다.  시나 소설
에서 묘사하는 그런  고향이 아니다. 시골도 이제는 재개발이 되고  발전이 되어
빠른 속도로 변화해 간다. 나도 도시인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책에
서 보았던 그런 고향은  가지 못했다.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냈
건만 고향을  생각하면 언제나 잔잔한 그리움이  몰려들고 파문처럼 번져나가는
행복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모든 것이 변해버려 실존하지 않는 고향,   관념 속의 고향이 왜 이렇게 소중한
가. 그것은 세상 물정 모르고 때묻지 않은  순수와 꿈과 희망이 있던 시절이었기
때운일까. 지금  내 나이가 되면서 겪어왔던  고통과 사랑과 증오 같은  세 속의
때가 전혀  묻지 않았던, 오로지 무한한  가능성만이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일까.
어른이 되어 그곳에 살았다면  이런 감동이 올 것 같지는 않다.  내 어린 시절의
꿈과 열정과 성장이 그곳에선 아직도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할머니의 서점, 좁다란 골목  끝에 자리했던 삼강 하드 아이스크림집, 지금은
흔해빠진 아이스크림이지만 그때는 왜 그리도 맛이  있었던지. 그리고 늘 들어가
지 못해 애태웠던 아카데미 극장,  나 살던 자갈 깔린 깊숙한 골목 속의 이와집,
밤이 이슥하도록 공부하고  있을 때 창 너머에서 들려오는  "영덕대기요, 영덕대
기 사려여" 하는 소리 - 게장수는  환한 촛불을  꽂은 나무수레에 가득 게를 싣
고 있었다. 간장과 식초와 마늘을 썰어넣어 찍어먹던 게.
 나는 영덕대기와 스팸 킬러(killer)였다. 지금도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때부터
이미 잘 먹어대댔던가  보았다. 고집이 세었던 나는 꾸중을 들으면  울다가 쉬었
다가 다시 울고  하여 하루종일을 울었다는데, 하루는 울고 있던  아이가 없어져
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경찰에 신고하고 모두들 찾아 나섰다는데  밤늦게 다락
문을 열어보니  그 속에서  쿨쿨  자고 있더란 것이었다. 옆에는  생달걀 깨먹은
껍질이 수북이 쌓여  있고 눈물 콧물이 말라붙은 채  세상 모르게 자고 있어 그
뒤로 내 별명은 '먹구잽이' 가 되었다.
 지금은 고급  음식으로 쳐주지도 않지만 그  당시 스팸은 무척  인기가 있었다.
저녁식사 때 둥그렇게 둘러앉아 스팸  째개를 먹을 땐 다섯 형제의 성격이 그대
로 드러났었다. 나는 밥  속으로 스팸을 잔뜩 묻어놓고 시침 떼며  냄비 안의 것
을 계속 먹었는가 하면 원래  식탐이 없는 언니는 점잖게 굴다가 결국 몇 개 집
어먹고 만다. 남동생은 제 접시에 잔뜩 덜어놓고  그 위에 에취에취 나오지도 않
는 재채기를 억지로  해놓고는 공동냄비 안의 것에만 계속 젓가락을  대었다. 여
동생은 너무 어려 끼지도 못하고  오빠는 "이제 손대지 마" 버럭 소리를 지르며
냄비 안에 퉤퉤 침뱉는 흉내를 내어 우리를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다.
 이 다음에 고향을 찾게 되면 나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00초등학교, 중학
생이 되어  찾아가보았던 초등학교  교장실에는 그때까지도  2학년 때  내가 쓴
<파랑새>라는 동시  액자가 벽에 걸려 있었다.  새장 속의 파랑새  그림이 있던
이 동시는 경상북도 주최 00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박아 교장실에 걸렸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수필을 쓰게 된 근원이 여기서부텨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복도엔 내 동생이  그린 '고구마를 먹는 쥐' 가 걸려  있어지. 쥐라기보단 쥐의
이름을 빌린 돼지 한 마리가 액자 속에 갇혀 있었다고하 할까.
 친구들과 나는 운동장에서  땅따먹기도 하고 고무줄 놀이도  했었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해 만이냐."  씩씩하게 노래 부르며 열실히 고무줄을 타고 놀았다. 운
동징 한 구석에 서  있던 아름드리 나무. 우리는 그 그늘  밑에 주저앉아 공기놀
이도 하곤 했었지. 요즈음  들어 자꾸 초등학교 친구들    을  만나고 싶은 생각
이 드는 것은 웬일일까.  과거를 돌이켜볼 나이가 되었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유
년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편안함 때문일까.
  사람이 미래지향적이어야지 과거지향적이  되면 늙는 징조라는데......  내 비록
마흔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투리 콤플렉스가 남아  있지만 이따금 듣는 '가시나
야, 문디야(문둥이)' 같은 사투리는 점점 더 정겹고도 푸근하게 들리기만 한다.
 라일락 향기가 날개를 달고 한껏 펴져가는 5월  어느 날, 약속도 없고 한가해진
나는 마당에 앉아 무심코 하늘을 본다. 가볍고  흰 새털구름이 바람부는 대로 흘
러가고 있고 나는 그 구름을 따라 내  마음의 고향으로 달려간다. 아지랑이 가물
가물 피어오르는 저기  먼 그곳엔 내가 있다. 단발머리 나폴거리며  고무줄 놀이
하는 내 친구가 있다.  "연아야아, 노올자아.". 세월을 뛰어넘어 아스라이 들리는
저 소리-. 어렸을 적  나는 미래만을 꿈꾸었으며, 지금 나는 미래를 꿈꾸며 동시
에 과거를 되돌아본다. 내가 살 만큼 살아 미래를  꿈꿀 수 없는 나이가 되면 고
향의 추억은 더욱 그립고도 소중한  것이 되리가. 어릴 때 꿈꾸었던 그 모든 것,
다시 한 번 그것을 성취하고 싶은 열정을 솟구치게 하는 그곳에선 내 모든 것이
수용하고 감싸진다. 어머니의 품속 같은 곳, 고향은 그래서 소중한 것 같다.

    코타키나발루의 낮과 밤

 여기는 코타키나발루의 탄중아루 비치, 신으로부터 천혜의 자연을 선물받은 곳.
시멘트로 덮인  도시로부터 탈출해온 이곳에선 모든  시간이 정지되어버리고 내
오관은 기지개를 켠다.  눈 앞에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 나지막이 눌러앉아 너그
러워 보이는 산들과 에메랄드빛   인도양 바다 위에 드문드문 수놓아진 하얀 배
들이 평화롭고, 야자수  사이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이름 모를  꽃들과 극락
조가 아름답다.
 펼쳐진 감미로운 남국의 밤은 혀에 달고,  스쳐가는 바람에선 햇미역 냄새가 난
다. 창조주의  위대한 손길을 트끼지 않을  수 없는 이곳은 정녕  자연이 인간을
품어 안아주는 패러다이스-.
 밤은 점점 깊어가지만  시간을 우리 안에 가둬든 채 나는  바다앞에 앉아 있다.
보내논 사람도 없는데 언제나 바다 앞에서는 누군가 기다려지고 먼 물길이 열리
기를 또 기다린다. 지금은  조개껍질에 물무뉘가 감기는 시간, 나는 어느덧 물새
다리가 되고-. 바다의 벌거숭이 이야기를 발자국에
찍고 가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새벽 바다는 또다시 지워질까.
  탄중아루에 취해  하룻밤을 설친 우리는 다음날  캄풍아이르(물의마을) 지역의
시장과 수상 가옥촌을 갔다. 마침 그날은 마켓데이로 흥청대는 분위기였다. 우리
나라의 1950년대를 연상시키는  그 시장터는 쥐덫, 나프탈렌,  싸구려 옷, 고무줄
등과 목을 비틀어 죽인 생닭, 시든 야채, 파리가 들끓는 생선들로 가득하였고 나
는 잠시 현기증이 일었다. 한  도시 안에 지옥과 천국이 공존하였다. 한 도시 안
에 밤과 낮이 있었다.
 맨발이 신발이 되어   너덜거리는  물갈퀴발의 사람들, 이  사람들은 신발이 있
어도 불편해서 신지  않는다고 한다. 겨우 발견해낸 어느 국수가게의  의자는 다
리가 아파서 앉고 싶어도 혹시 나쁜 균이 묻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망설이게 될
정도였다. 국수집의 위층에는 산부인과가 있어 연이어  아이들이 그 땅에서 태어
나고 있었다. 생명의  경이로움에 찬사가 나와야 할 텐데 의미가  불투명한 한숨
이 자꾸만 새어나오고 있었다.
 수레바퀴 위의  카세트 테이프들로부터 장터에  울려퍼지는 그  요란한 팝뮤직,
코카콜라병, 그리고 아르마니  프린팅 티셔츠, 이것들만이 우리를 90년대로 이어
지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다음에 들린 곳은 수상 가옥촌, 서울에서  주거환경 운운하던 글귀가 마낭 죄수
럽게만 느껴지
이곳에서 저 가이드의  기분은 어떠할까. 이곳도 과연  관광자원이라고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 들까.
 썩어서 부러질 것 같은 나무기둥  네 개 의의 그 집에는 그래도 꽃무늬 알록달
록한  커튼이 걸려 있어 눈물겨웠고 어린아이들의 손흔드는 모습은 더욱 애처롭
게만 보였다. "헬로 기브미 추잉겁" 하며 손을 흔드는, 영화 속의 50년대 우리나
라 아이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어온다.
 다시 우리는 천국으로 귀대하였다. 야누스의 도시, 두 얼굴의 이도시-.
 나는 이곳에서 코타카나발루의 낮과 밤을 보았다.  지난밤 나는  문명의 흔적이
전혀 없는,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고  얼마나 황홀하였던가. 그러나 오늘
비문명화된 세계를 보았고  아름다움 뒤의 그체적인 실상도 같이 보았다.   문명
의 힘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문명자들의 영광과 권위, 그리고 문명에서 뒤
진 자들의 슬픔과 비참함이 엄연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인공의 힘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을 보존하기 위해서 문명의 이
기를 다 포기하는 일도 있을  수 없지만 시멘트로 뒤덮인 인공의 세상이 되어서
ㅓ도 안 될 것이다. 자연과 인간문명의 조화는  이 지구상에서 얼마나 절실한 것
인가. 디들 중 어느 하나에 치우쳤을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진정한 행
복은 신이 베풀어준 자연 속에서 인간이 만든 문명을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하는
것일 게다. 여기에 우리 지구촌의 미래가 달려 있을 것이다. 자연을 파괴해서 얻
는 문명이라면 그것은 분명코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일 게다. 그렇다고 우리는 인
류문명의 발전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의 당면한 과제는  단순히 배부르
고 편하기 위한  경제개발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연과 더불어
생명의 푸르름을 향유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따로 있는 이분법의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이 곧  자연이  라는  
하나의 귀의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항아리'에서의 그날 오후

  이상스런 일이다.
  사춘기 소녀들의 젖가슴이  봉긋이 솟아오르듯, 소년들의 턱  밑으로 삐죽삐죽
수염이 삐져 나오듯, 서른아홉 내 가슴 한구석에서도 젖가슴 같은 것이, 수염 같
은 것이  봉긋봉긋 삐죽삐죽 솟아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사춘기 바람
같은 것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포도  위를 적시던 11월의  어느날, 친구들과
함께 비 젖은 경춘가도를 달려  청평호 산자락에 낙엽깔고 앉아 있다는 어느 작
은 찻집을 찾기로  했다. 그들도 제2사춘기에 침공을  당한 듯, 가슴 언저리에서
솔솔 갈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은행나무, 플라타너스는 어느새 낙엽이 되어 길가를 뒹굴고 있고,"이브 몽탕의
1주기를 기념하여  보내드린다"는 멘트가 있은 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샹송
<고엽>은 그날의 분위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부제들이었다.
  북한강에  접해 있는 자그마한 찻집 '항아리' - 들어서는 순간 들려오는 비틀
즈의 < 에스터데이>. 활활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는 페치카, 창 밖으로 내다보이
는 하얀 배, 그리고 황금색 산뱇은 우리들의 외출을 이해한다는 듯, 조용한 강물
을 찻집 안으로도 흘리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고향같이 푸른한 S,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고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태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해 화병이 나기 직전인 K, 세련된 도화
의 멋을 풍기는 M, 화가의 아내답게  모딜리아의  작품 속의 여자를 연상시키는
Y, 우리는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며 제작기 다른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S는 "극치의 아름다움은 슬픔을  만들어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우리들은 소
리없는 긍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없이 와인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분위기
가 조금 가라앉는 기미가 보이자 Y는"놀리지 말라"고 전제한 다음,  어제 있었던
에피소드 한가지 - 저녁 내내 혼자 웃었다던  얘기를 소개하였다. 혼자서 지하철
을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데 웬 남자가  접근해와서 느닷없이 하는말이, "무척 매
력적으로 보입니다. 차 한  잔 같이할 수 없을까요?"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거절은 했지만  너무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대사인지라 은근히 싫지  않아, 저녁
내내 남로르게 웃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지하철을 타고 다니라"는
것 아니가.
  작품으로 보이는 찻잔과  스푼, 60년, 70년대의 올드 팝송, 한  잔의 와인과 타
오르는 창작불, 유리창  너머로 흐르는 잔잔한 물결의 북한강이   편안하게 자리
한 능선처럼 의자에 몸을 기대게 만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현실주의를 표방하던
나에게 이런 감상적인 면이 있었다니-.
  이런 감성이야 찬란했던 20대 초반에  한 줄기 미풍으로 다가와 우리 곁을 스
치듯 지나가지 않았던가.
  문득 눈을 들어 벽면을 보니 소박한 액자  하나가 비스듬히 걸려 있다. 그리고
액자 속에 떨어져 누운 고엽 같은 시 한 편 -

  늘 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키피 향기에
  젊은 날의 그림자를 기대고
  끊임없이 꿈꾸는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런 시간이면 문득 누군가를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싶어진다
  그곳의 커피 향기에
  젊은 날의 시간을 담고
  우리는 그곳에서 처음 만나고
  사랑하고 추억한다.
  우리 시대의 사랑과 그리움의
  자리 한켠에는
  늘 한 잔의 커피가
  고즈넉이 놓여 있다.
    (중략)
  이 시는 이곳을 들렀다 간  어느 여대생이 써서 액자로 만들어 우편으로 보내
주었다는 것이다. 이름 모를 그녀의 체취가 와인 잔에 고여 녹아내리고 있다.
  돌아오는 길은, 비가 더욱  세차게 내렸고 M과 Y는 5시까지는 서울에 도착해
야 애들을 데리러 간다면서 어느새 현실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급해진 K가 액셀
러데이터를 밟은 순간 '펑' 소리가 났다.
  손을 들어 지나가는 차를 세워 도움을 청해야 할 순서인데 모두들 쭈빗쭈빗하
고 있다. 지나가는 차는 많았으나 서로들  손들기를 꺼려, Y에게 "매력있다는 소
리를 어제 들은 네가 바로 그 매력을 확인해볼 찬스"라며 손들기를 부추겼다.
  얼마를 기다린 뒤 차  한 대가 앞에 와서 멈춰주었다. 선한  인상의 젊은이 두
사람이 내려,  쏟아지는 빗속임에도 불고하고  스페어 타이어로 갈아끼워주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Y는 어제 들었던 찬사가 헛소리가 아닌 것을 증명해 보인 셈이 되었다.
  이제 우리들이 갈바람은 훈풍으로  바뀌어 온 집안을 구석구석 따뜻하게 덥힐
것이며, 아름다웠던 그날 하루는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될 것이다.
  그렇다. 늙은 날의  행복은, 젊어 추억 만들기에 있다고 한다.  나는 내 풍요로
운 노년을 위해 산과 들과 강과 바다로 부지런히 추억 사냥을 떠날 것이다.
  그리하여 먼 훗날,  내 입가에 오글오글 복주머니  같은 주름이 잡힐 때, 마음
한구석에 감추어둔 추억의  항아리 뚜껑을 열고서, 한 조각 두  조각씩 끄집어내
어 야금야금 음미할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5. 길 밖에서 길 안에서

    귀고리에서 묵주 반지까지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을 가야 한다"는 영화 제목에 이끌려,  꽃샘바람 부
는 어느 날  압구정동을 가보았다. 이십여 년  전 우리 시대, 낭만의 대명사였던
명동 거리가 그  빛나던 영광을 이제는 압구정동에서 내어주었다. 명동이  더 이
상 신세대들의 주요  무대가 아닌 것처럼, 중년으로 변모한 나에게는  왠지 압구
정동 거리가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다.
  170cm를 육박하는  늘씬한 키에 초미니  스커트, 무스 발라 세운머리,  그리고
각설이처럼 겹겹이 내려 입는다는 레이어드 룩, 이  모든 것이 이제 나와는 거리
가 멀다. 그 낯선  풍경 가운데서도 특히 내 시선을 끄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X세대는 액세서리를 즐긴다는 사실이다.
  마흔이 넘어 외모에 자신이  없어지면서 그 허탈함을 내면적인 충족감으로 다
스리지 못할 때 여딘들은 각종 장식을 함으로써 상실감을 보상받으려 한다는 어
느 여루시인의 장식론이 생각난다.
  귀고리, 그리고 겹겹이 목걸이, 심지어는 치렁치렁 발찌까지 하고 다니는 소위
'신인류'라 칭해지는  저들에게도 튀어오르는 젊음으로 메울  수 없는 허무한 그
무엇이 있다는 뜻일까. 이런 세태로 나가다간  인도 여인들처럼 코걸이가 등장하
고 턱걸이조차 하고 다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렵다.
  나는 액세서리하는  것을 원래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장식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자신이 있어서는 아니며, 그렇다고  내면의 성숙에 자부심을 느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단 하나 예외적으로 내가  참고 착용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귀고리가 되겠다.
  이 귀고리조차도 내가 무슨 미적인 효과를  노려서가 아니라 내 귓밥이 '복귀',
즉 부처님의  축 늘어진 듯한 귓밥이  아니라 소위 '칼귀'이기  때문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는 우리 어머니의 나에 대한 애정의 말씀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결혼한 지도 이제 오래되었고 하여 귀고리를 때고 다닌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어간다. 귀찮은  귀고리에도 해방된 것은 마치 적당히 이파리를  떨구고 섰
는 가을 나무처럼 홀가분해서 좋기도 했었다.
  그런데 요즈음음 어찌 된 영문인지 귀고리를 안하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 귀고
리를 떼고  다니는 내가 오히려 이질감을  느끼기도 하자만, 남이 다  긴 머리를
하고 다닐 때 쇼트 커트를 한 것처럼 나만의 개성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도 변화는오고 말았다. 갈무리해두었던  귀고리를 꺼내
보기도 하고 새로이 사보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외모에 자신이 없어졌다거나
정신적인 결핍감을 느껴서만은  아니다. 엉뚱하게도 중년에 들어서자  내 심경에
조그마한 심리적인 흔들림이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흔이 넘어가자 내 생활의 주변에서 기슴을 무겁게 하는 일들이 자꾸
만 생겨난다. 어제  같이 만났던 친구의 남편이 해나가던 친지의  화사가 하루아
침에 부도가 나질 않나, 정말이지 세상살이가 살얼음을  딛는 기분이 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막연한 강박관념에 조금씩은  시달리고 있
고 원인 모를 불안감이 내 생각의 주위에서 늘 맴돌고 있다.
  그러던 중에 요즘  들어 그 옛날 들었던  점술가의 이야기가 새삼떠오르게 된
것이다. 내 사주팔자에는 쇠붙이가  몸에 닿아 있어야 좋다는 이야기 말이다. 까
마득히 잊고  있던 그 말들이 이제  와서 자꾸만 고개를 들고  조금씩 살아난다.
때문에 오랫동안 갈무리해두었던 귀고리를 꺼내고 길을 가다가도 액세서리 진열
장 위로 절로 눈길이 가게 되는 것이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사람도 세월 따라  조금씩 소심해지는 것일까. 10년
전에 들었던  얘기가 애벌레처럼 머릿속에서 곰실곰실  기어나오고 있으니 말이
다. 요즈음은 심약한 마음이  더욱 심해졌다. 가령 전자파가 암을 유발하는 원인
이 되며 선인장이  그 유해파를 흡수한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당장 선인장을 몇
개씩이나 사오질 않나 회색빛 옷이  나에게 좋다는 말을 듣고 난 후부터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옷장을 회색빛 옷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 인간은 약한 존재가 아닌
가. 나이가 들고 중년이 되고  집 그늘이 앞마당에 내릴 때쯤 되면, 지난날 그렇
게 시시하게만  듣던 점술가의 얘기들도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살아나기도 하는
것이다. 부적을  써붙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액세서리를 부적으로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식의 대학  입학을 위하여 교문에  엿을 붙이는
어머니의 심정을 꼭 미신이라고 나무랄 수만은 없지 않을까.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빈  방이 있어야 나그네가 자러 들어오
듯이 가슴을 비워야  인간에게도 예지가 찾아들어온다고 하던가.  녹은 쇠붙이에
서 나와서 쇠를 먹고 욕심은 사람에게서 나와서 사람을 먹는다고 했으니 앞으로
집착하는 마음을 다스려봐야겠다.
  이제 내가 마음 비우는 연습을  수없이 하고 나면 더 이상의 액세서리는 필요
없을 것이다. 꼭 하나, 성모님께  매일 장미꽃 한 송이를 바치는 대신 묵주알 하
나씩을 만지며 기도드린다는 의미의 묵주 반지 이외에는.
  그리하여 먼 훗날  나의 뜰에 까투리빛 노을이  찾아들면 그때 나는 귀고리도
버리고 소심도 버리고... 한 그루 겨울  나무처럼 속으로 속으로 심지를 돋우면서
기도하겠지. 그리고서 어느 날 또 하나의 세상으로 이삿짐을 꾸리게 될 그날, 내
못생긴 검지손가락에 꼭 하나 묵주 반질 얹고 가겠지. 이렇게 노래하면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의 (귀천)중에서-

    눈물의 미학

  어느 날 하느님이  세 천사들에게 숙제를 내셨다.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 가장
아름다운 것의 모습을 담아 오라고. 이른 아침  이슬을 머금고 활짝 피어난 아름
다운 장미,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의 천진난만한 미소,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드리는 어느 노인의  모습, 이들 중 하느님은 회개의 눈물을  으뜸으로 치셨
다.
  사람이 돌이나 화초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회개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바로 그 점  때문에 인간의 본성
을 구분하는 성선설과 선악설 중에서 나는 성선설  쪽에 서고 싶다. 사람은 슬픈
때문에, 기쁨 때문에  혹은 감격에 겨워서도 눈물을 흘리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값진 눈물은 역시 회개의 눈물이리라.
  생성과 소멸의 법칙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해가고 시들어가지만 나의 눈물샘은
거꾸로 나이를 먹는 것 같다. 이십대, 삼십대에서도 왜 눈물 흘릴 일이 없었겠지
만은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남들 앞에서는 죽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요즘 나는  정말 구제불능이 지경에 이르렀다. 다른 사람이  있든 없든
가리지도 않는다. 얼마 전에 반영한 (인생)이란 치매 노인의 얘기를 다룬 드라마
를 보면서도 며느리의 입장에 서서  그저 한숨만 푹푹 쉬었을 텐데 지금은 며느
리 입장에서 한숨을 쉬다가, 딸이 되어 친정 어머니 상상하며 울고, 후반부에 가
서는 내가 치매 노인이 되어 울었다. 일인 삼역을 바쁘게 오가면서...
  그러나 이렇듯 가슴 뭉클한 장면을 보고 흘리고 눈물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
와는 달리 축복의  전당이 되어야 할 결혼식장에서까지  눈물이 나올 때는 정말
대책이 없다. 웨딩마치가 울려퍼지며 숙연한 아버지의  팔을 끼고 입장하는 아름
다운 신부의 모습을 보면 왜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일까. 저렇듯 고운 신
부도 수많은 고개, 고개를 넘어야 할 텐데..., 라는 괜스런 기우 때문일까.
  눈물 중에 나를  당혹하게 만드는 눈물이 또 있는데  직접 뵌 적도 없는 분의
장례식장에서 주책없이 흘리는  눈물이다. 노인이 돌아가시면 그  자식들과의 연
고 때문에 조문을 가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분의 사진을
보면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왜냐하면 영정 속의 검은 리본을 두르고 앉아 있는 고인의 표정이 이상하게도
슬퍼 보이기 때문이다.  살아생전의 즐거운 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을진대  그 사
진을 영안실로 옮겨놓기만  하면 왜 그렇게 하나같이  슬퍼 보이기만 하는 것일
까. 가장 축복해야  할 장소에서도 눈물, 슬퍼해야 할 장소에서도  눈물, 이 무슨
이율배반적인 행동인가.
  그런데 얼마 전에 우리 성당에서 시작한 성가대 봉사와 성경 공부를 하면서도
흘리는 눈물이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찬송가를 부르는데 어느 순간  목이 메어
오면서 눈물이 났다. 지휘자 선생님이 보면 어쩌나, 옆사람이 눈치채고 사연있는
여자로 알면 어쩌나  걱정을 해가면서도 눈물을 종종 나온다. 성가의  은사를 받
는 것이라고 생각하라지만 내  신앙이 그렇게 굳건하지도 못하는데 그리고 노랫
말이 그리 슬픈 것도 아닌데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다.
  며칠 전 성경 공부를  하면서 나는 또 한 번 울었다.  성경 공부에서는 봉사자
와 함께 열 명이  넘는 자매님들이 둘러앉아 진솔하게 얘기를 한다.  그 중 제일
밝은 표정으로 자매님이 사실은 장애인인 남편과 두 아이 그리고 친정 어머니의
생계를 책임지고 살아온 얘기를 담담히  하는 것을 듣고 우리 모두는 숙연한 마
음으로 많이 울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제각각의 십자기를 짊어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  자매님은 자기의 십자가에 순종하면서,  더 무거운 십자가가 주어지지
않은 은총에 오히려  감사하면서 저토록 밝게 살아간다. 지금 이  십자가에서 벗
어난다. 해도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며 미
소짓는다. 시련을 자기에게 찾아온 예수닙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하라 한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나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원망하며 살아왔던지, 나는 얼마
나 마음속에 터무니없이 높은  교만의 바벨탑을 쌓아왔던지 회개하는 죄인이 눈
물에서는 진정한 삶의 의미가 매어 있다.
  왜 인간은 매번  잘못을 저기르고 나서야 그런  뒤에 뉘우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왜  하느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회개하는  자의 눈물
이라 하셨을까. 그렇다면  왜 하느님은 애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잘못을 저지
르지 않도록 완벽하게 만들지 않으셨을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의지를  주셨다. 21세기에 들어서면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이  개발된다고 한다.  인간의 기능만을  단순하게 대행하도록  개발된 
로봇은 많으나 스스로 학습하고  거기에 판단력까지 갖춘 로봇을 개발하려는 것
이 과학기술의 최고봉이라한다.  왜 인간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산업  로봇에 만
족하지 않고 인공지능의  로봇을 원하는 것일까. 시키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 사랑이 가지 않는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자기를 그대로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첨단의 인공지능
을 선물로 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매번 잘못하고 또 뉘우치면서  진실을 깨달아
간다. 거기서  얻는 깨달음을, 그래서 홀리는  회개의 눈물을 하느님께서는 가장
보배로운 것이라 여기신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세제는 회개의 눈물이리라.
  나에게 짊어지워진 십자가에 좌절하지  않고 여기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면 시
련은 은총으로 바뀌게 된다. 나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적어도 일 주일
에 한 차례씩  성당 가는 날만이라도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이라
새벽빛 밟으며 걸어가리라.
 
    달 속에 숨은 달
  가을의 깊은 탓인지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아졌다. 어느 날  밤 거실로 나와
이 책 저 책 뒤적여본다.
  (꿈동산), 딸아이의 초등학교  교지를 모아둔 더미 속에서  내 글이 실려 있는
몇 권을 끄집어내었다. 딸아이가  입학을 한 후, 내 아이가 1회 졸업생이었던 나
의 후배가 되었고 내가 배우던  선생님께 다시 배우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감
격스러워 아마 다음과 같은 글들을 쓴  모양이다. 그 글 중의 하나인 (사건을 소
중하게 쓰자)를 여기 소개해 본다.

  시간을 소중하게 쓰자
  북아현동 고갯길의 햇살이 유난히도 따스한 날 오후 나는 아이를 데리러 **교
문을 들어섰습니다. 교정을 향하는 계단을 밟아 으로며  나는 어느덧 내 어린 날
의 추억을 풀어 놓은 아스라한 샛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린 날의 추억은  봄날의 아련한 아지랑이와 같아도 그립고 정다
운 것이라고 하지만, 오늘 오후 20여 년 전  그날의 바람과 하늘을 다시 만난 사
람에게는 더욱 애틋합니다.
  당시 **는 K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L선생님,  N선생님 등 여러 선생님들, 그
리고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인 청소부  아주머니, 그리고 모든 학생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고고한 첫 울음을 터뜨리며 희망찬 항해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자, 이제 **학교는 스물두  살의 청년이 되었으며, 개교와 더불어 첫발을 내디
뎠던 단발머리  소녀들은 어느덧 흰머리가 돋아나기  시작하는 중년이 되었습니
다.
  세월의 덧없음, 그날의 학생들이 오늘의 학부모가 되아, 이제 우리 어린것들의
손을 잡고 학교를 찾으니 그 감회가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이란 시간은 지나가면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먼 훗날 지난날을 뒤
돌아보았을 때 후회스럽지 않은 오늘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부터 시간을 소
중하게 써야겠습니다. 우리는  빛나는 우리의 꿈나무들을 꽃피우기 위해, 지난날
을 되새기고 잎으로의  나날들을 설계하며, 한 걸음 힘찬 발걸음을  내디뎌야 하
겠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6년이란 시간이 흘러 딸아이는  졸업을 하게 되었다. 나는 또다
시 학교 교지에 (중학교 입학을 눈앞에 둔 딸에게)란 제목의 글을 썼다.

  중학교 입학을 눈앞에 둔 딸에게

  창 밖에  부는 찬바람이 눈발과 더불어  겨울 속을 향해 달리고,  넌ㄴ 어느덧
초등학교 학생을 지나 중학생으로...
  뭔가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듯 새로이  인생의 좌표를 설정하고 새로운
삶을 지작해야만 하는 듯한 의무감에 사로잡혔던 시절, 초등학교 6학년 졸업!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나서 되돌아보면 별달리 큰 변화가 없었던 시절이기도 했
다. 한 생을 사는  동안 큰 제약 없이 꿈만을 키울 수 있는  시절이 이렇게 흘러
가고 있다는 아무런 인식 없이 보내버렸던 철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얼마나 철없고 크나큰 꿈들,  참으로 소박
한 꿈들에 의해 발전해왔던가.
  혜린아, 꿈을 키워라.  미래를 꿈꾸어라. 그리하여 앞날에 무한한  영광과 발전
을 기약하는 주춧돌이 되거라.
  이 글을 쓴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딸아이는 중학교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
다.
  시간은 정말 무섭게도 빨리 흐른다. 10대는 시속 10km, 20대는 20 km, 30대는
30km, 40대는  40km라고 하지 않더냐. 나는  40km, 딸아이는 10km의  속력으로
뛰어가고 있다. 요즈음 들어 부쩍 키가 자란 딸아이를 보면서 상상해본다.
  다시 7년이 흐르면 딸아이는 대학을 졸업할  것이다. 그리고는 곧 결혼을 하게
되겠지. 7년 후면 사위를 보게 되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
지만 시집을 안 가도 그 또한 골칫거리가 아니겠는가. 내 마음은 아직도, 누군지
는 모르나 미래의 그 귀여운 사위와 어울려  같이 놀아도 될 것 같은데... 그래서
는 안 되겠지. 체신을 지키며,  '음, 그랬는가? 자네 어서 오게" 등 등의 말로  고
상하게, 품위있게 행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슬프다. 그리고는 곧 나는 할머니 대열로 들어서겠지. 손자의 기저귀를 갈아주
고 우유병도 물려주어야겠지. 핵가족시대가  도래하고 '며느리살이'란 신조어조차
생겨난 현실이지만 딸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자존심을 꺾어라."
  이러는 나를  보고 전근대적인 여자라느니,  시대를 거꾸로 산다느니  욕을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점이기 때문이다.
  결혼 전 지상 10km이던 내  콧대는 결혼 후 지하 100m로 곤두박질쳤다. 정확
하게 말하자면 결혼  1년 후부터, 막 결혼을 해서는 여전히  천방지축의 티가 남
아 있어 호호홋 소리내어 웃기도  하고 내 의견을 가끔 내세워보기도 했으나 살
아가면서 슬슬 눈치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들, 딸들, 사위들, 그리고 모든 친척들 사이에서 아버님은 황제, 어머님은 여
제 - 예를 들면 측천무후나 서태후 같은 - 의절대적인 위치로 군림하고  계셨다.
더구나 남편은 책어서도  찾아보기 힘든 효자였다. 시대가  달라졌으나 망정이지
지금이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쯤 되었더라면 남편은 여지없이 손가락 몇 개쯤이나
궁둥이살 정도는 듬썩 베어드렸을 것이다. 부모님의 병 구완을 위해.
  뿐만 아니라 한겨울에 천도복숭아를 구하기  위해 기약할 수 없는 먼 길을 분
명코 떠났을 사람이다. 그렇게도 한 마리 순한  양이 되어 당신들 가슴에서 뛰노
는 것인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고  민주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아버지이..."하고  매달리
며 뽀뽀 몇 번쯤 하고  나면 만사형통이었으며 특히 차녀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
휘하였다.
 하기 싫은 일을 시킬 때는 얼굴을 찡그리며 "아이구, 머리야, 나는 저혈압이  있
어서 그런 일은 못해"라든지 "아이, 난 그런 거 할줄 몰라서 못해"하고 드러누우
면 문제는 해결되었다.
  장녀인 언니는 싫더라도 소처럼 꾸역꾸역 해낸다.  그리고 부모님 말씀에 순종
한다. 맏딸 콤플렉스, 바로 그것이다.
  요즈음 방영중인ㅍ(엄마의 바다)란 드라마를 보면  장녀와 차녀의 성격이 극명
하게 대비가  되는데, 극중인물인 차녀 경서를  보면 나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나는 전형적인 차녀의  스타일이었다. 언니가 새로 맞춰 걸어논 옷을 몰
래 첫마수를 하고 들켜도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래"란 터무니없는 억지를  쓰기
도 했으니 언니는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여하튼 잔병치레가 잦았던  나는 억지
와 어리광, 그리고 '골 아프다'는 핑계로 모든 귀찮은 일에서 면제되었다.
  이러던 나는 이른바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되었다.
  양쪽 가정의 분위기가 너무나 달라 나는 점점  말을 잃어갔다. 내가 제일 고통
스러웠던 점은 '언론  표현의 자유'가 없었던 점이었다.  더구나 나는 신문기자를
꿈꾸어왔던 사람 아니던가.
  내 의견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저 "네,  그렇습니다"한마디면 족햇던 분위기였
다. 어머님은 명령, 나는  받들어 복종, 이유가 필요없었다. 아무리 내 딴에는 타
당한 이유일망정 한마디라도  이의를 제기했다가는 그것은 곧 '불경죄'로 간주된
다. 하명과 복종, 이간결한 일방적인 관계가 곧 시어머님과 며느리의 관계였다.
  얼마나 자조님이 꺾였으며 얼마나 울기도 많이 했던가.
  그럴 때마다 마음이 넓고 자상한 남편은 큰  힘이 되어주었다. 나는 나의 경험
을 되살려 딸아이에게는 무척 엄하게 한다. 기를  살려 키웠다가 혹시 나중에 자
존심을 꺾지   못하는 일이 있을까 싶어서이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졌다고는 하
지만 결혼 후부터의  여자란 역시 '며느리'란 위치의  테두리는 벗어나지 못한다.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장님 삼 년이란 옛날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 아래에서는 잎을 꼭 다물고 있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비로소 꽃잎을 두고
시집살이하는 며느리를 비유한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나는 물론 딸아이가  전업주부가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내  지금의 심정으로
는 아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공부를 시켜줄 용의가 있으며 공부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손자까지도  맡아 키워줄 용의가 있다. 우리 엄마가  언니의 아이
를 키워준 것처럼.
  그러나 나는 딸아이가 새로운 분위기를 쉽게 동화하여 고통없이 살아갈 수 있
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란 속담을 실천하고
있다. 즉, 매우 엄격하게 교육시킨다.
  고이 잠든 딸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내가 걸어왔던 '여자의 길'을 또다시
걸어가야 할 아이의 앞날을 그려본다,
  여성해방운동이 고조되고 새로운  스타일의 페미니즘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실이다. 여자들의  권리가 강화되고 발언권이  세어졌다. 전업주부로 만족하지
않고 프로페셔널이 되기를  희망하는 여성들이 많아지는 추세이다.  이른바 독신
주의자는 단어도 유행한다. 그러나  여자란 역시 자기의 자리를 잘 지켜서 '없는
듯하면서도 있고' '있는 듯하면서도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 나는 그런
철학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다시 말해 내가 소녀 시절이었을 땐 나도  실존할 달이었다. 그래서 남들 앞에
빛을 뽐내며 자신을  과시해보고 싶은 그런 달로 달아왔었다. 허나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는 '달 속에 숨은  달', 다시 말해 없는 듯하면서도, 실존하는 달을 뒤에
서 만들어주는 달,  바꾸어 말하면 허실생백이랄까 빈 방에서 흰  빛이 번져나온
다는 장자의 말처럼 유보다도 더 근원이 되는 무의 자리에서 오늘까지를 살아왔
다.
  내 딸아,  아무리 가치관의 변화가 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자는 뭐니뭐니
해도 남편 그늘 아래가 행복한 것이니라.

    중년의 바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해 있어라도 삶에 대한 시각을 한순간  달리만 한다면,
마음의 평정을 얻고  나아가서 그 평정이 감사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때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외적 상황에 대해 몹시 불만이었던 적이 있었
다. 내가 가진 많은 것들에  대해서는, 마땅히 가져야만 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이 내 목을 죄어오는 듯해 질식할 것만  같았다. 모근 것이 불만족스러웠고 따라
서 끝없이 불행했으며 내 인생이 실패처럼만 생각되었다.
  '왜 나만'이란  억울한 심사 때문에 아무런  의욕도 없었으며 사람들도 만나기
싫었다.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편히 사는 사람
들 쪽으로만 눈길이  갔다. 그러자니 절로 표정은 굳어가도 온종일  찡그리고 있
어 양미간에는 선명한  주름까지 패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평 불만이
끊임없이 터져나왔고 그렇듯 자제력을 상실한 내가 또한 혐오스럽기도 했었다.
  나는 내가 스스로 만든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하루하루를 포기하듯
이 살았다. 심지어 어느 날은  잠자리에 들며, 눈 떠서 맞는 아침이 다시는 찾아
오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머리를 내리누르는 압박감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열기가 뻗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얼굴이 달아올랐다 식었다 했다.
  병원을 찾아가도 신경성이라는 진단밖엔 나오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한의원
순례를 시작했다. 갱년기  증상이 빨리 왔다고 했다. 40대  초에 갱년기라니... 터
덜터덜 걸어나오는 내  앞을 한의원의 커다란 철문이 가로막고 있다.  그 유리창
에 비치는 한  중년 여자의 우울한 모습,  낯설다. 내가 상상했던 중년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또다시  정첼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울컥 솟아올랐다. 아
니다. 이렇게 자포자기하듯 무의미하게 살지 말자. 왜 내가 어느 틈에 자학을 즐
기기까지 하게 되었는가. 변화가 필요하다.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주체는 나 자
신뿐이다. 여행을 생각하자.
  철 지난 바다, 늦가을 밤바다는 검은 빛으로  그을어 있었고 먼 수평선 너머로
명멸하는 어선들이 불빛이  쓸쓸해 보였다. 흰 파도는 철썩이며 밤의  정적을 깨
고 해변으로 밀려든다.  타고르의 (바닷가에)가 떠오른다. 정말  바다는 깔깔거리
며 소스라쳐 부서지고 기슭은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듯하다. 똑같은 풍
경을 보고 이렇듯 영혼의 종을 울리는 표현을 할 수 있다니...
  검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2층 카페로 올라갔다.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창 밖을 내다본다.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온 몸으로 바위를 껴안으며 격
렬하게 깨어지는  야성의 바다는 아니었지만 이렇듯  잔잔하게 밀려오는 바다도
좋다. 따끈한 커피도 좋고 그  앞에 놓인 너울거리는 촛불도 좋다. 제 몸을 태워
환하게 주위를 밝히고  붉은 촛농을 한 방울  두 방울 떨어뜨리며 소멸되어가는
촛불이 그렇게 거룩해 보일 수가 없다. 마치  구도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순교자
와 같이...
  커피 한 잔의 바다, 그 바다 속에 내 반생이 실려 있다. 한 잔의 커피와 저 앞
바다와 타오르는 촛불과 나,  거역할 수 없는 운명 속에 서로  화음을 이루는 하
모니. 이제는 나도 소용돌이치는 바다가 아니라  잔잔하게 가라앉는 중년의 바다
가 되어야겠지. 그런 생각속에 나는 일순을 몰입하고 있었다.
  테라스에 나와  앉아 바라보는 산 속의  이른 아침, 냉기가 와싹  온몸을 훑고
지나가지만 더없이 삽상한 가을 날씨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들은 엄숙하고, 완만
한 능선이 펼치는 곡선이 멋지다. 바다는 도전의  용기를 주지만 산은 늘 체념하
느 지혜를 가르쳐준다.
  눈앞에는 삼각분지 모양으로 금빛  잔디가 펼쳐져 있고 알프스산장을 닮은 빌
라 지붕 위에서는 은빛 바람개비가 바삐 돌아가고  있다. 가는 전선줄이 길게 목
을 늘여 그 앞을 지나고 한 조각 흰천이  그 위에 걸려 나풀거리고 있다. 세상은
저 바람개비처럼 바삐 돌아가고 있고 나는 줄 위에 걸려 곡예를 하고 있구나.
  청량한 하늘에 뭉게구름이 흐른다. 은회색, 잿빛,  흰색 구름이 바람에 쓸려 몸
을 섞고 있다. 풀리고 뭉치며 산마루를 넘는 구름  아래 하늘 푸른 빛이 더욱 신
선하다. 조물주께서는 지금 극치의 행위 예술을 보여주고 계시는 거다.
  조물주의 커다란  손바닥 같은 저 뭉게구름,  우리의 인생살이도 저런 것이야.
지금은 잿빛만이  가득할지라도 언젠가는 내  좋아하는 은회색, 흰  빛의 구름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조금도 조급해  보이지 않는 저 구름, 내 뭉친 마음도 저렇
게 풀어서 바람부는 대로 흘러 보내자.
  누구나 한 생을 살면서 나름대로의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본인이 생각하기엔 억울하고 이유없는 고통을 당하고 살 수 있
다.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는 부조리, 절망감,  그리고 한계성 등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명이라 생각하고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체
념과 적응을 배워나갈 것이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이런 상태에서 염세, 패패,
허무주의로 흐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이 때로 견딜 수 없어질  때 성경의 (용기)를 펴서 읽어본
다. 그리고 어느 수녀님이 말씀하셨듯이  "고통은 아홉번째의 축복"이란 말을 떠
올려본다. 그렇다. 우리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고통을 축복으로 승화시켜 풀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연히 접하게 된  어느 선승의 시가 생각난다. 마음 다스리기에  더없이 좋은
벗이다.

  가난을 스승으로 청빈을 배우고
  질병을 친구로 탐욕을 버렸네
  고독을 빌려 나를 찾았거니
  천지가 더불어 나를 짝하누나
  산은 절로 높고 물은 스스로 흐르네
  한가한 구름에 잠시 나를 실어본다
  바람이 부는 대로 맡길 일이지
  어디로 흐르든 상관할 것 없네
  있는 것만을 찾아서 즐길 뿐
  없는 것을 애써 찾지 않나니
  다만 얽매이지 않으므로 언제나 즐겁구나

  내 마음의 주인은  바로 나인데, 행복은 산  너머에 있지 않은데, 나는 얼마나
많은 일에 감사해야 하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인가. 마음의 평화를 잃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는 눈을  들어 저 멀리 구름을 쳐다보자. 그리고  나지막이 이 시구
를 읊조려보자.

    라면과 함께 명상을

  어느 모임에서의  일이었다. 적령기의 딸을  둔 한 자모가  사윗감을 구한다고
공식 선포를 하면서 하는 말이다.
  "사돈을 볼 때  나는 공무원 집은 절대 피하겠어. 가진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잘난 척만 하고, 쓸데없이 법도만 찾고 골치 아파."
  사업가 집에서 자라나 공무원 집으로 시집온 죄로 나는 가슴이 철렁 내여앉으
며 에쿠, 이를  어쩌나. 우리 애들 시집 장가는  다 보냈네, 하고 걱정했다. 만약
20년 전의 나였다면 한말씀 더 보태서 "맞아요. 쫀쫀하게 따지거나 하고,. 어깨에
힘이나 주고,,, 웃긴다 니까"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입장이 달라진 나는 이
런 말을 들으면 괴롭기만 하다.
  어구나 공직자 재산 등록이  시행되고 난 후로부터 뇌물과 정치자금의 틈바구
니 속에서 은행장,  장관, 차관, 전직 대통령들까지  줄줄이 구속되고 토사구팽이
라는 고사성어의 뜻까지 알게 된 지금 나는 더욱 심란하다.
  사람들은 모두들 색안경을  끼고 의혹의 눈초리로 공무원을  바라본다. 쥐뿔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지만 도둑놈 취급을 당하는 것은 더욱 기막히
다.
  신문에 발표된 등록 재산의 목록을 보고
  "뒤에 숨겨논 것이 있겠지, 설마  다 신고했을라구." 또는 "왜 이렇게 많아, 뇌
물 받아 부동산 투기했구먼..."
  심지어 어떤 무지막지한 사람은 나에게 직접 대놓고 말하기도 한다.
  "너희도 많이 숨겨놓았겠지? 그렇다는 소문도 있던데?"
  이럴 경우 가슴에 지퍼가 달려  있다면 좍 열어라도 보일 텐데 아아, 웃자. 웃
어. 웃고 말자.
  처음에 나는 얼굴까지 빨개지며 화를 내고 극구 부인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부
자로 봐줘서 고맙다는 말로 끝내버린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실제로 있기나 하면
억울하지는 않지"라고 말했다가 설왕설래 끝에 '결혼'이란 드라마를  조기 종영할
뻔했던 경험도 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녀석은 열을 받아 달아오른 내 심사에 부채질 까지 한다.
  도대체 아빠는 돈도 잘 못 벌고 툭하면 동네 북만 되는 공무원을 뭐하러 하느
냐고, 아빠의 능력으로 돈을 벌었다면 지금쯤은 큰 부자가 되었을 텐데... 라고.
  어쩌다가 공무원에 대한 시선이 이토록 부정적인  것이 되었을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왜 공무원은 동네 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명예롭지 못한 사건이 터
지면 언제나 책임은  공무원에게로 돌아온다. 매스컴에서도, 거리를 오가는 사람
들에게서도 언제나 두드려맞기만 한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나  자신도 분노를 금치 못한 사건들
이 많이도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부분을 보고 전체를 매도하는  우를 범해
서야 되겠는가.
  해외여행의 바람에 휩쓸려 온통  나라가 몸살을 앓는 요즈음에도 가까운 용평
구경도 한  번 못해본 공무원들도 얼마든지  많다. 아파트가 몇 채니  뭐니 말들
하지만 임대 아파트도 만족하고  눈물겹게 성실히 살아가는 공무원도 얼마나 많
은데... 부정사건을 보도한  기사를 보고 분노와 충격 속에  괴로워하는 공무원들
도 얼마나 많은데... 얼마나 얼마나 눈물겨운 사연들도 많기만 한데...
  엄연한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개인의 부를  축적하는 현실성을 따르지
않고 긍지와 사면감 하나에 인생을 거는 그들을 시대를 역행하는 실속없는 사람
들이라고 우습게 보아야 할 것이다.
  흙탕물을 흐려놓는 소수의 미꾸라지 같은 공무원들을 제외하고 수많은 공무원
들은 현실적인 생활에 미치지 못하는 월급을  받고도 개미처럼 일한다. 남들은 6
시 땡하면 퇴근하는 줄 알지만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12시가 넘는 일도, 토요일
격주 휴무는커녕, 일요일까지  출근을 하는 일이 허다하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휴가를 반납하는 일들은 이젠 익숙해진 지가  오래다. 시간외수당이란 말은 들어
본 기억조차도 없다.
  40대 과로사가 뉴스의  초점으로 등장하는 일이 많기도 한 요즈음,  과중한 업
무의 인사 적체 현상, 그 무엇보다도 사회의 차갑고도 부정적인 시선, 긍지의 상
실, 흔들리는 가치관 등의 스트레스로 술, 담배가 늘어가는 남편을 볼 때마다 마
음이 아프고 걱정이 앞선다. 내가 젊었던 시절엔 술, 담배를 못하는 남자란 재고
의 여지가 없이 좀스럽게 보이기도 했으나 입장이 달라지니 그것이 부럽기도 하
다. 이 점이 아내와 애인의 현격한 차이점이 되는가 보다.
  또 한 가지, 내가 하는 사랑은 로맨스이고  남이 하는 사랑은 스캔들이란 논리
를 여기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내가 하면 현명한  재테크가 되고
공무원이 하면 부동산  투기라는 논리를 함부로 적용해서야 되겠는가? 객관적인
평가에 의해 재산이 수준이상으로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심판과 징계
를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기도 있을 것이고  장가를 잘 가서(?) 재산이  생긴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테크를 잘한다는 것은 엄연한
능력으로 평가가  될지언정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리라  믿는다. 이렇듯
일괄적으로 마녀재판을  해버린다면 부잣집 아들은 공부원을  해서는 안 된다는
황당한 결론도 나오게 될  것 아닌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나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욕을 먹어야 할까.
  이웃 나라 싱가포르는  부정 부패가 없는 천국이라 한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
는 공무원의  봉급이 일반적으로 대기업의 화사원보다  높다는 사실과 애시당초
부정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공무원에 대한 주택의 무산 공급 등 현실적인 문제를
거의 해결해놓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공무원이란 직업은 나날이  취업의 선호도에서 인기가 허락하고  있다. 자질이
있어서 우수한 공무원으로 뽐힌 사람들을 등으로 치고 메로 치기만 해서야 되겠
는가. 매서운  질책도 물론 필요하지만  보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줄 필요가 있진 않을까.
  한말로 복지부동이라고 욕하는 일은 쉽다. 그러면  용기와 격려를 해주는 일은
어려울까. 자본주의 시대를 역행한다는 그 사람들을  좀더 따뜻한 애정으로 감까
주어 보다 나은 공직자가  될 수 있게 해줄 수는 없을까.  이렇게 가다가는 우수
한 인재들이 공무원이란 직업에서 하나 둘 멀어질 날이 올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진정  그들이 원하는 것은  월급의 인상이란 현실적인  문제보다도, 다른
어떤 처우의  개선보다도 우선 자부심의  회복이 아닐까. 부정적인  시선을 대할
때마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이 고생인
가" 싶기도 하다.
  물론 선진국으로  나아가고 나라의 규모가 커지면  정부가 축소되고 공무원의
역할도 줄어들겠지. 역시 평생을 공직자의  길을 걸어오셨던 시아버님께서 "그래
도 그때는 자부심 하나로 일했지. 그리고  낭만도 있었어"라고 하시던 말씀이 어
째 가슴 아리게 되살아 난다.
  공직의 길을 천직으로  알고 건강을 좀먹어가며 맡은 일에 매진하는  남편, 전
체의 향상은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의 이익이나 개인의 영광보다도 중요하며 아
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을 때 비로소 두려움이 사라지고 의도한 것을 자유롭게
성취할 수 있다고 하던 그 말을 떠올려본다.
  가진 것은 쥐뿔  정도이며, 잘난 척은커녕 잔뜩 움츠러드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렸고, 법도는 기본선에서만 찾는 나는 이번  여름에도 휴가를 반납하고 오늘도
12시를 넘기며 사무실에서 대충 먹은 저녁이 신통찮다는 남편을 위해 라면을 끓
이고 있다.

    한 마리 다람쥐가 되게 하여주소서
 
  이대로! 요즈음 유행하는 건배 인사말이다.
  한동안 회자했던 '위하여, 지화자, 개나발(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등 많
은 건배의 인사말이 있지만 그 중 '이대로'가 제일 가슴에 와 닿는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같이 반복되는 날들이 하도 따분하여서 만약 나에게
도깨비 방망이라도 생긴다면  "금 나와라 뚝딱"이 아리나 "화끈한 일  좀 생겨라
뚝딱" 하고 두드리고 싶었다.
  그러면 그 화끈한 일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될까.
  남편이 직장에서 초고속 승진을 하여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모님이 되었다고
하자. 그것도 일  년이면 익숙해져서 시들해질 터이고 너무 아름답고  좋은 것은
불길함의 징조라는 노자의 말처럼, 초고 속의 승진  뒤에는 초고 속의 퇴진이 버
티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공부를 썩 잘새서 소의 S대를 그것도 수석 입학이라도  한다고 치자.
한 턱 두 턱을 내느라고 흥분 속에서 화끈한 날들이 계속되겠지만 그것도 삼 개
월이면 시들해질 터이고...
  또 무슨 화끈한 일이 있을까.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주인공인 킨케이드와  프란체스카처럼 어느 날 돌연
히 사랑이 해일처럼  밀어닥친아고 하자. 그런 공상을 해보지 않은  바는 아니지
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상으로 막을 내릴  일, 이 나이에 찾아오는  사랑은 그
아무리 황홀한 사랑일지라도 해피 엔딩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사랑일 것이다.
  사랑이 찾아올 때  돌연하고도 은밀히,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묘미
가 있는 것이고,  비록 실패한 사랑일지라도 시작도 않은 것보다는  낫다고들 말
하지만 나는 낭만이 부족해서인지 언해피엔딩의 사랑은 싫다.
  이렇듯 변화없는  생활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화끈해지는  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상이 되겠다. 요즈음  일본에서 대히트친 (뇌내혁명)이란 책을 보면 베타
엔돌핀을 많이 나오게 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 명상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 한다.
  그래서 나는 건강해지기 위해 필수조건이 명상을 공상과 섞어 열심히 하는 편
인데 그것도 싫증이  나면 영화란 매개체를 통한 공상도 즐긴다.  극기를 중시하
고 지극히 보수적인  동시에 쾌락을 추상도 즐긴다. 극기를 중시하고  지극히 보
수적인 동시에 쾌락을  추구하기도 하는 나는 너무  심각한 영화보다는 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영상을  선호하였으나 요즈음은 철이 들어선지 심각한 영화
를 주로 본다.
  며칠 전 장예모 감독의 (인생)이란 영화를 비디오로 보았다. 시대의 슬픔을 대
표하는 소시민의  인생 이야기다. 1940년대 중국,  주인공 부귀는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경제적 풍요와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부러울 것 없는 남자였다. 그러나
도박에 빠져 집을 잃고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사망한다.
  부귀에게 남은 것은  인형극 장수에게 도박으로 뺏긴  집 대신에 받은 인형극
상자뿐이었다. 그는 단원들을 모아 공연길에 오르는데  공연 도중 국민당군이 쳐
들어와 그의 동료 춘생과 함께 전쟁터에 끌려간다.  집 대신 받은 인형극이 삭막
한 군인들을 즐겁게 해주는 유일한 오락이었던  덕분에 그는 운좋게 살아남는다.
부귀는 간신히 집으로 돌아오고 춘생은 운전병으로 남게 된다.
  그동안 아내는 물배달을 하여  연명해왔으나 딸은 병으로 벙어리가 되어 있었
다. 부귀는 물배달을  거들며 밤마다 인형극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 밖에
없는 똑똑한 아들이 춘생의 차에 치여 죽는다.  세상이 뒤집혀 춘생은 공산당 간
부가 되어 있다.
  실성한 듯 비탄에 잠긴 그들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행운은 그들을 외면하지
만을 않는다. 다리는 절지만  인간됨이 훌륭한 사위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도 잠깐, 벙어리 딸은 아이를 낳다가 죽어버린다. 가혹한 운명에 몸부림치던
부귀와 아내, 사위와 손자, 이렇게 남은 자들은 죽은 아이들의 무덤에 떼를 덮고
슬픔도 함께 덮으며 또다시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주어진 인생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이 짧은 (인생)이란 한 편의  영화 속에서 가장 처절한 절망의 순간도, 행복의
절정도 들어 있다. 이 양자는  모두 지나고 보면 인생의 한 부분인 것이다. 영화
속의 사람들은 차마 살아내지도 못할 슬픔을 겪고 그러나 그것을 덮으며 또다시
미래에 대한 희맘을 갖고 살아간다.
  우리들의 인생에서도 사고로  하루아침에 전신마비가 되어버린 아들을 눈앞에
둔 어느 어머니가 있고, 아침에 웃으며 나간  남편이 저녁에 차가운 시신이 되어
돌아온 이웃의 얘기도 있다.
  남의 불행을 보고 나의 행복을  확인한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지만 지금 이 상
태가 이대로 무사하게  유지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사람들은  행복을 누
리고 있을 때는  모르다가 그것이 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변화에 어
찌 좋은 의미만이  있을까. 중년이 지난 우리에게 변화가 생긴다면  기존의 질서
를 깨고 긴 시간의 고통을 수반하는 변화가 될 확률이 높다.
  내가 정신적으로  핍박받고 불운 속에서 허덕인다면  현재 상황을 극복하기도
힘들 터인데 무슨 마음의 여유로 어찌  화끈하기를 바라랴. 사고나 불행이야말로
예고없이 느닷없이 찾아오는데,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만도 감사해야 하는
데, 화끈한 쾌락을 기대한다는 것은 얼마나  호사로운 마음인지. 이대로, 마냥 이
대로 저물어가는 모습을 맞고 싶다.
  주님, 돌개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대한 저에게 벌을 주지 마시옵소서.
  쳇바퀴가 부서지거나 철장을 뛰쳐나가는 화끈한 변화  없이, 제발 오늘도 이대
로 무사히 뱅글뱅글 쳇바퀴 도는 한 마리 다람쥐가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

    그림과 미술 사이

  맑은 가을 하늘  아래 과천의 거리를 함께  걸었다는 그 자체마능로도 즐거운
하루였다. M과K, 그리고 나, 우리는 오랜만에 만났다.
  아이들의 엄마로 시작된 인연이 영글어 이제는 가장 자주 만나는 친구의 사이
로 발전하였다. 나보다 두세 살이 위인  그들이지만, 또한 분야는 다르지만, 예술
에 대한 관심과 동경어린 공통분모  때문인지 대화가 잘 통해 서로 가까운 친구
가 된 것이다.
  그녀들과 만났을 때 느끼는 이 편안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서
로들 솔직하다는 점', 다시 말해 마지막 보루 정도만을 남겨 놓은 대화가 가능하
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예전의 나는 내숭을  꽤 떨었던 편이었다. 다른  사람 욕할 것도 없이.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나 스스로도 몹시 솔직해지
려고 노력하고,  동시에 편안하고 솔직한 상대가  좋아지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동시에 만나는 사람들의  폭을 줄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나 솔직해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상대방은 내숭과 교양으로  위장을 하고 있는데 나  혼자만 무장해제를 한 채
마음놓고 얘기하다가는 푼수 소리를 듣기 십상  아니겠는가. 사람을 봐가면서 솔
직할 일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원리와 같이 '솔직에는 솔직, 내숭에는  내
숭'으로 대처할  일이다. 무방비상태로 임해도  문제없는 상대,  서로를 이해해줄
줄 아는 상대와의 만남이 즐겁다. 비록 폭이 좁아질망정 깊이는 있게.
  이러한 의미에서 석류알 익어가는  이 계절에, M과 K와의 만남은 1000킬로그
램의 무게가 실려 있다.
  가을볕이 따가운 어느 날  오후, 우리는 과천 미술관으로 갔다. 백남준씨가 유
치했다는 '휘트니 비엘날레 전'을 보기 위하여,  미술대학 출신인 M과 K에 반해,
미술에 문외한인 나는  큰 흥미는 없었으나 '문화적'이  되어보기 위하여, 그리고
사실은 아직은 남아 있는 초록과 박하향나는 바람을 만나기 위하여 따라갔던 것
이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씨의 (장례식  광경)을 위시하여 검정 물감
에 머리카락을 담가 그림을 그린 행위예술, 속눈썹에  물감을 묻혀 종이 위에 깜
빡깜빡함으로써 그림 한  장을 완성한 작품, TV  모니터에 의해 보여지는, 희랍
신화 속의 반인반수의 괴물인 새터로  분장한 두 사람의 행위를 통한 인간 본성
을ㄹ 그린 작품 등등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현대 미술전이었다. 미
술품이하면 우선 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아닌가.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물었다. 그대들은 이해와  동시에 큰 감동을 받았느냐고.
그들은 말하기를 "21세기의 미술은 단순히 미를 추구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철학
을 추구하는 미술이 되어야 한다. 작가의 철학이  보이지 않는 작품은 가치가 없
거니와 철학이 없는 작가는 작품활동도 불가능할 것"이라 했다.
  나는 용감하게 발언했다. 모니터를 통해 본 그 작가 -  검정 물감에 길다란 머
리카락을 담가,  그 머기카락으로 뱀처럼  온 방을 기어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던
그녀 - 에게 "여보시오, 정신차리시오"라고 말해주고 싶었노라고.
  그리고 천경자의 여인, 뱀, 아프리카 원주민이  나오는 그림, 또는 황염수의 장
미, 조금 더 발전하여  이우환의 바람 시리즈 정도의 추상화라면 몰라도, 눈썹에
검정 물감 묻혀 깜빡인 그림을 사서 걸어 놓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노라고.
  그녀들은 아무 말 없이 귀엽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웃기만 했다. 평온이 숨쉬
는 잔디밭을 따라 미술관을  걸어내려오면서 이번 전시회에 공이 크다는 백남준
씨를 생각했다.
  내가 그의  (장례식 광경)이란 작품을 이해하든  못하든, 속으로 '아이구, 맙소
사, 감도은커녕 귀신 나올까 무섭다'라는 비교양적인  생각을 했든 말든, 그는 20
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예술가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의 "예술은 고등사기
이다. 그리고 어떤 하극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재미없는 세상에 양념을 치
기 위하여 예술활동을 한다"라는 말에서 그만의 독특한 철학을 엿볼 수 있기 때
문에.
  어느 정크 아티스트(폐물 이용 조형미술가)의 말도 생각이 난다. 일전에 TV에
서 그의 설치미술 현장을 본 적이 있다.  방청객들이 가지고 있는 소지품들을 있
는 대로 그물망에다  붙여놓고 정크 아트라고 했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으나 작가는 사명감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다.
  "아방가르드적 미술일수록  사실은 시민생활과 더욱 밀접하다.  우리는 기성의
권위와 전통을  부정하고 척후병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미술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는 일반인들을 더욱  쉽게 미술에 접근시키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보이
겠다. 여러분들이 현재 지니고 있는 모든 소지품 - 만년필, 손수건, 머리린, 안경
어느 것도 좋다 - 들을 이 그물 위에다 달아보라. 모두들 동참하시오. 이것도 곧
바로 예술적 행위이다." 그 역시 그 나름대로의 철학을 지닌 작가인가 보다.
  이런 대가들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미술품'하면 벽에 거는 그
림, 잘 다듬어진 조각,  정교한 항아리 같은 것만을 연상하는 나의 고정관념부터
깨버려야 할 것 같다.
  나는 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허나 이해하지 못한들 어떠리. 구름 한 점
없는 과천의 청명한 하늘과 잎사귀들을 헤집고 불어오는 가을 바람을 맞으며 오
랜만에 만난 정다운 친구들의 우정과도 악수했다.  게다가 덤으로 미술전까지 감
상하는 기쁨을 누리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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