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이슬의 집/ 반숙자

이예경 2014. 1. 12. 16:37

이슬의 집/ 반숙자

 

                                                                                                                                                                                                              반숙자

 

과수원 소독을 하고 있습니다. 경운기는 바삐 돌아가고 소독대에서는 소독약 포말이 분무합니다. 가끔씩 약물을 젓는 일을 하는 틈틈 하늘을 보고 뒷산도 보며 한눈을 팝니다. 이 고약한 버릇 때문에 지난번 소독 때는 큰 호통을 들었습니다.

저 아래 언덕빼기 나무를 소독하는데 소독 줄 어딘가가 터졌던 모양입니다. 나가라는 통로로는 안 나가고 소독약은 산지사방으로 품어져 올랐습니다. 소독약을 뒤집어쓰다시피 한 남자가 경운기 발동을 끄라고 아무리 소리를 쳐대도 마이동풍, 하늘만 바라보고 있더랍니다. 소독대를 집어던지고 달려온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서 소독약보다 더 쓴 화살을 쏘아대었습니다.

이 여름 내내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나는 하늘과 산이 곁으로 다가오는 여기만 오면 멍청하고 은밀하게 내 안의 세계로 빠져버립니다. 그리고 여기 말고 어딘가 내 집이 따로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 생엔 또 어떤 집에서 살게 될까 상상도 해봅니다.

비가 오다 개여서 그런가 고추잠자리가 떼지어 납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상승과 하강을 되풀이하는 잠자리의 춤이 근사합니다. 방심한 듯 가볍게 떼를 지어 춤추는 율동은 봄바람에 나부끼는 꽃잎 같기도 하고 모닥불에 타오르는 불똥 같기도 합니다.

잠자리의 춤을 보다가 내 전생은 춤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5월 산들바람에 춤추는 미루나무의 잎새들을 보거나 오늘처럼 잠자리들의 춤을 볼 때면 ‘춤추어라, 춤추어라’ 주문처럼 외며 내 몸에도 부력이 생겨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나도 한 마리 잠자리가 되어 여한餘恨 없이 한바탕 춤을 추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춤을 추자면 먼지처럼 가벼워져야 할 텐데 내 날개는 지금 녹이 슬어 있습니다.

접때는 들깨 모를 모종하고 도랑으로 발을 씻으러 갔습니다.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세지는 않지만 모래톱을 흐르는 물이 맑아서 흙 묻은 발을 담그기가 미안했습니다. 세수를 하고 발을 씻으며 어린 시절 개구쟁이로 돌아가서 혼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도랑 가의 풀줄기에 짱구머리를 한 벌레가 붙어 있었습니다. 처음 본 이상한 형상이라 한참을 들여다보는 중에 지나가던 농부가 뭘 그렇게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여자가 꽁무니를 하늘로 치켜들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보고 있으니까요. 발을 멈추고 들여다보던 농부는 “잼재리여, 잼재리” 하고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그 흉하게 생긴 벌레가 잠자리의 유충이란 걸 확인한 것은 며칠 후의 일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유충은 물 밑바닥, 모래, 진흙 속, 물풀의 틈에서 수개월 내지 7, 8년을 살면서 열 번에서도 더 많이 불완전 변태로 탈바꿈을 한 답니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 내 머리 속은 윤회라는 단어로 가득 찼습니다.

한 마리의 잠자리가 되기 위하여 그토록 많은 탈바꿈을 해야 한다면 오늘의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윤회를 거쳐온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잠자리의 유충이 탈피를 거듭하며 그때 만났던 인연들은 또 무엇이며, 오늘 나와 인연지어진 사람들은 어느 생에 맺어진 인연일까요.

어떤 날은 인연 없이 살고 싶어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게 해주십사 발원할 때가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인연, 동기간이라는 인연, 서럽게 하는 인연, 애타게 하는 인연, 사랑함으로 아픈 인연의 꼬리에서 헤어나고 싶습니다. 그러자면 나도 레테의 강을 건너야 할 테지요. 그 강물을 마시면 과거를 깡그리 잊어먹는다는 망각의 강을 말입니다.

이 여름을 아프게 보냅니다. 어쩔 수 없는 사랑 때문임을 압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병고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가는 아픔 속에서 목숨의 유한성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봅니다. 시련이 있을 때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하셨지요?

다시 잠자리의 춤을 봅니다. 투명한 날개를 우주에 가득 뻗고 유유히 노니는 저 자유로움, 그것을 위하여 숱한 탈피를 꿈꾸어 온 것을 나는 지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더 나은 영혼으로 진화하기 위한 도정으로 이승의 삶이 허락된 것이라면 모든 것을 접어놓고 허락된 오늘만이라도 기쁨의 씨를 뿌려야 하겠지요. 비록 우리의 삶이 이슬로 지은 집이라 할지라도 힘껏 끌어안고 뜨겁게 사랑하리라 마음 다져봅니다.

지금 나는 소독약을 저으며 또 한눈을 팔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