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내 아내는 잘라 팔 머리가 없다/ 정진권

이예경 2014. 1. 12. 16:27

내 아내는 잘라 팔 머리가 없다

 

정 진 권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스터디그룹이 하나 있다. 공부하는 내용은 수필쓰기의 이론과 실제, 구성원은 4, 50대의 여류 수필가 10여 명, 공부 시간은 오후 두시부터 네시까지 두 시간이다. 공부가 끝나면 잡담 좀 하다가 천천히 걸어서 가까운(늘 가는) 음식점으로 간다. 나는 참 영광스럽게도 이 그룹의 초빙을 받아(말하자면 선생 자격으로) 여섯 번 참여키로 했는데 오늘 그 다섯 번째를 다녀왔다.

처음 이 그룹의 초빙을 받았을 때 나는 잠깐 망설였다. 그 모이는 곳이 미아3거리 우리 집에서 너무 멀어서였다. 그런데 한 학기(여섯 번)만 맡아 달라고 해서, 그렇다면 못 갈 것도 없다 싶고, 또 어떤 사람들인가 궁금하기도 해서 그럼 그러자고 했다. 그래 가 보니 다들 글도 솜씨 있게 잘 쓰고 남의 글 보는 안목도 높아서 공부 시간이 늘 즐거웠다. 공부 끝나고 소주 한잔 하는 것도 물론 즐겁고.

그러나 두 시간을 계속 수필 이야기만 한다면 그것은 지루한 일이다. 해서 중간에 한시漢詩 한 수씩을 읽기로 했다. 이 한시들은 모두 내가 번역하고 거기다 내 독후감(말하자면 그 한시를 소재로 한 내 수필)까지 붙여서 저장해 둔 것인데 오늘 읽은 것은 조선 순조 때의 여류시인 강정일당姜靜一堂객래客來, 나그네가 찾아옴. 번역시는 중학교 국어시간처럼 구성원 모두가 소리 맞추어 함께 읽고 독후감은 한 여류가 낭랑한 목소리로 혼자 읽었다.

 

내 남편 찾아온 귀한 손 한 분,/저 멀리 북관北關서 오셨다 하네.

집안이 가난하니 이를 어쩌나./막걸리 석 잔밖에 달리 없는데.

遠人慕夫子, 云自北關來. 家貧曷飮食, 唯有酒三盃. -靜一堂遺稿

 

퍽도 가난한 아내가 한 사람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나그네가 하나 찾아왔다. 자기 남편을 사모하여 멀리 북관北關서 온 귀한 손이었다. 남편은 혹 고명한 선비였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 먼 곳에서 사람이 찾아올 리 없다. 가난한 아내는 가슴이 뿌듯했을 것 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끼니도 잇기 어려운 처지에 무엇으로 이 귀한 손을 대접할 까? 옛날의 어느 가난한 아내는 머리를 잘라 술을 사 왔다고 한다. 그럼 이 가난한 아내 는 어찌했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어떻든 이 아내도 술 몇 잔은 마련했다. 머리를 잘 랐을까, 아니면 밭이라도 매 주겠다며 돈 몇 푼 꾸었을까?

이렇게 쓰고 보니 내 아내가 생각난다. 내 아내는 잘라 팔 머리가 없다. 밭 맬 줄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 걱정이 없다. 내 아내도 가난은 하지만 그렇다고 구멍가게에 가서 소주 몇 병 살 돈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냉장고에는 돼지고기도 두어 근은 되 고 생닭도 한 마리 들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자기 남편을 사모하여 멀리 찾아오는 나 그네가 없는데 무엇이 걱정이랴.

 

여러분은 이 독후감의 둘째 문단을 다시 보시기 바란다. ‘내 아내는 잘라 팔 머리가 없다.’에 이르자 여류 제현이 일제히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낭독자도 잠시 낭독을 멈추고 함께 키득거렸다. 이 말이 재미있다는 뜻일까? 당연히 그럴 것이다. 아암, 글은 재미있게 써야지. 재미없는 글을 누가 읽나? 그런데 어쩐지 뭐가 좀 개운치가 못했다. 그들이 키득키득 웃은 것이 정말 재미있다는 뜻일까?

잘라 팔 머리가 있으면 그 머리 잘라 팔아 술 사 오라구, ㅋㅋ."

하는 뜻은 아닐까? 그래 속으로 한 마디 했다.

그러나 여류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라. 설령 내 아내에게 잘라 팔 머리가 있다 한들 엄처시하嚴妻侍下에 있는 내가 감히 바랄 일이겠는가?”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朝鮮時代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갑자기 한스러워졌다. 그때 태어났더라면 내 아내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머리를 잘라 술을 사 왔을 것이다. 순간 또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이 무슨 고명한 선비시라구, ㅋㅋ.”

3초도 안 되는 사이에 별의 별 입술 쓴 생각이 다 돌아갔다.

마침내 낭독이 이 문단 끝 부분 자기 남편을 사모하여 멀리 찾아오는 나그네가 없는데 무엇이 걱정이랴.”에 이르렀다. 여류 제현이 또 일제히 키득키득 웃었다. 무슨 뜻인가? 그렇다는 뜻인가? 그럼 나는 뭐가 되나? , . 그때 그들 중의 누구 한 사람은 당연히

선생님,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을 사모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 줄 아세요? 우선 저부터두요.”

해야 했다. 나머지도 당연히 뜨거운 수긍首肯의 눈길을 나에게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런 데 무심한 듯이 화제話題를 바꾸며 속으로는 느긋하게 위선僞善을 향락했을 것이다. 순간 또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 바랄 걸 바라셔야지, ㅋㅋ.”

얼큰하게 한잔하고 돌아오는 지하철 한 구석, 시 속의 내 남편을 배경으로 흰 수건 쓴 그 아내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생각건대 그 고명한 내 남편은 수건으로 머리 가린 자기 아내를 보고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고명한 선비 안 되길 참 잘 했어, 아암.”

그때 다음 정거장은 미아3거리역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는 고명한 선비 안 되기를 참 잘 했어, 아암을 몇 번씩 되뇌며 일어설 준비를 했다. , 내 아내가 나의 이 갸륵한 마음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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