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마음

그런건 제가 못참아요

이예경 2009. 10. 26. 00:58

엊저녁에 컴을 붙잡고 있다가 새벽에서야 눈을 붙였더니 늦잠을 잤다

눈을 떠보니 아침 9시...평소 아침식사시간 7:30보다 엄청 늦었다

부랴부랴 서둘렀지만 교회 시작 10:00에도 지각했다

 

2층 회당에 들어가 우선 아들네가 어디 앉았는지 둘러보았다

남편이 먼저 발견하고 나를 툭툭치며 앞쪽을 가리킨다

키큰 아들이 양팔까지 높이 들고 열심히 목청껒 찬송을 하고 있다

결혼 전에는 설교중에 툭하면 졸던 모습이 생각나서 노파신에 가끔은 유심히 보는데

요즘은 철이 들었는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듣는걸 보면 조는 것 같지는 않다

 

예배가 끝나고 1층 어린이실에 다같이 내려가 손주들을 보러갔다

남매가 즈이 아버지를 보고 환호를 하며 매달리니

아들은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양팔에 안고 나온다

안긴 채로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다리를 버둥거리며 “하라버지이-” 소리친다

 

할아버지도 질세라 “윤서야, 정우야” 부르니까

애들이 내려와 할아버지한테 매달리고 법석을 떨면서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간다

이젠 애들이 할아버지 차지다

양쪽에 앉아서 밥을 받아먹으니 할아버지는 손이 분주해졌고

아이들은 행복한 미소를 띠고 할아버지한테 아양을 떨었다

그러더니 윤서가 할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이쁘다는 뜻이니 할아버지도 기분이 아주 좋다

 

그런데 옆에 있던 윤서애비가 갑자기 윤서를 야단쳤다

“윤서야, 머리는 동생한테나 쓰다듬는 거지 할아버지께 그러면 안됏!”

윤서는 아버지 호령에 멈칫하더니 손을 내리고 샐쭉해졌다

할아버지는 꿀먹은 벙어리마냥 말씀이 없는데 이해가 안되는 표정이다

 

좀 있다 애들이 친구따라 저쪽으로 가버린 후에

할아버지가 윤서애비에게 귓속말을 했단다

“윤서가 머리 쓰다듬어줘서 난 기분이 좋던데, 그럼 안되니?“

그랬더니 애비의 단호한 대답....

“그렇게 버릇없이 구는 건 제가 못참아요”

 

그 얘기를 하면서 할아버지가 한참을 웃었다

아들이 자식들에겐 엄한 아버지 노릇을 하더라고....

 

그러고보니 아들이 36세...

품안에 있을 때가 자식이지 결혼한지 몇년인가 ...40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앞으로는 아들의 권위도 세워주고 존중해주는 데에

우리가 의식적으로 신경을 좀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태는 별로 신경쓰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계속 그러면 안되겠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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