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이 예 경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밖으로 눈이 간다. 건너편 먼산 위의 구름이 갑자기 부서져내려, 잿빛하늘이 차츰 옅어지는 것이 보인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가 언제 보아도 경이롭다. 이런 날이면 소나기로 생긴 일들이 떠오른다.
그리스로 단체 여행을 갔을 때였다. 서울의 남산을 오르듯 층계를 한참 올라가니 역사책에서만 보던 아크로폴리스 언덕꼭대기가 되었다. 파르테논 신전과 엘렉티온 소녀상, 나이키 신전 등이 상상했던 것보다 거대하게 보여, 기둥을 만져보고 정교한 조각상들을 감상하면서 감회에 젖었다. 그러다가 일행에게 가방을 맡기고 화장실에 간 사이, 밖에서는 갑작스런 소나기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북새통을 헤치고 겨우 일행이 있었던 장소로 나와보니, 일행은 물론 주위에 가득하던 사람들까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피할 새도 없이, 나는 아는 사람을 찾아 인파에 휩쓸려 내려갔다.
언덕 밑에는 대형버스가 길 양쪽에 꼬리를 물고 겹겹이 서있었다. 내가 탔던 파란색 줄무늬 버스를 찾았으나, 비슷한 버스가 너무 많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타고 온 버스의 번호판 숫자가 기억에 없다. 단체여행이라고 마음편하게 앞사람만 보고 따라다녔던 일이 후회막심이었다.
이러다간 일행을 놓치지하고 겁이 더럭 났다. 옷이 젖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온갖 불길한 상상들이 머리속에 밀려들었다. 일단 호텔에 가서 기다릴까 하다가, 아침에 짐을 정리해서 버스에 실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언덕에서 내려가면 점심식사를 하자마자 이집트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라던 안내원의 말이 떠올라 난감했다. 나는 화장실에 가기 전에 소지품을 일행에게 맡긴 터였다.
생각 끝에, 한국대사관에 가볼까했다. 그러나 택시기사가 북한대사관에 데려다주는 바람에 본의아니게 납북 된 사람의 일이 생각났다. 나는 길도 모르고 지갑도 여권도 없어 국제미아가 된 꼴이라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져, 다니는 사람조차 눈에 띄게 줄었다. 나는 언덕입구 매표소 앞으로 다시 돌아와, 물에 빠진 생쥐처럼 되어 가지고, 남들의 눈에 뜨이도록 길 한가운데 막연하게 서 있었다. 혹시 일행이 나를 찾으러 다닌다면, 길이나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식구들 얼굴이 떠오르며 내 걱정을 하실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리고 함께 여행온 일행들의 얼굴도 떠오르면서, 그들이 내게 붙여준 ‘똑순이’ 란 별명답지 않게, 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여행 중에 산 새옷에 신경쓰며 비를 피해 이리뛰고 저리뛰고 했던 일이 우스워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이상 젖을 것도 없다. 차겁던 빗줄기가 따뜻하게 느껴지고 포기상태로 되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갑자기 빗줄기가 약해지면서, 어디서인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때 길 건너에서 누군가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구세주 같은 안내원. 그는 앞을 가리는 빗줄기 때문에 서둘러 나서지 못해 미안하다며 웃었다.
우리 버스는 줄 맨 끝에 있었다. 차안에서 기다리던 일행은 다투어 마른 수건을 내밀며 반가워했다.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앞만 보고 뛰느라고 모두들 깜빡했다며, 물에 빠진 생쥐 신세는 자기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처녀시절, 데이트 중에 소나기를 만나면 작은 양산 속에서 비가 긋기를 기다리곤 하였다.자기 비를 만나 당황했던 때가 있었다. 남산에서 내려오던 길이었는데, 양산 밖은 온통 장대비로 둘러싸여 주위가 전혀 보이지 않아, 산길에 우리 둘 만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처음에는 서로 닿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었으나, 양산 속이 넓지도 않아서 비에 흠뻑 젖기 일수였다. 몇 번을 그러다가 결국은 손을 잡고서 발을 맞춰 간다싶으면, 비가 개이곤 하였다. 요즘 신세대 젊은이들이 우산 속에서 자연스레 허리를 감고 가는 것을 길에서 보면, 저럴 수도 있는 것이었나 하면서 옛날 일이 떠오른다.
얼마전의 일이다. 고속도로에서 대낮인데, 하늘이 순식간에 컴컴해지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려지고, 나중에는 바로 앞조차 보이지 않아 운전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니, 자동차를 때리는 빗소리만 요란할 뿐, 그 많던 자동차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잠을 깨어 큰소리로 우는데, 비는 그칠 기세가 아니고 막막하기만 했다. 빨리 집에 가려고, 방금 지나친 휴게소에 머물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그러다가 한참을 기다려 비가 갠 뒤에 보니, 바로 앞에 또 휴게소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한치 앞을 못보고 산다더니 바로 그런 꼴이었다. 소나기란 원래 지나가는 것인데, 조급증 때문에 괜히 가슴을 졸인 것이다.
요즘도 아테네에서 길 잃을 뻔 했던 얘기를 가끔 하지만, 남들은 실수했을 때의 얘기를 더 재미있게 듣는다. 살다보면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때 얼떨결에 한국 대사관엘 가던지, 고속도로에서 무리하게 달렸 더라면 일이 어떻게 꼬였을 지 모른다. 행동이 느리고 생각이 잘 안 나서 그대로 있은 것이 때로는 정답이 되기도 하는 것을 지나고야 알았다.
옛날에 우산 속에서 같이 걷던 사람과는 지금까지도 발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우산을 던져버리고 비 속을 헤멘 때도 있었지만, 서로가 상대방의 우산이 되어 주려고 애쓰면서 살아온 것 같다. 비오는 날이면 평소에 묻혀있던 지난 일들이 피어오른다.
밖은 그 새 조용해졌다.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썼던 도시의 건물과 초목들이 싱그럽다. 오랜만에, 비 개인 공기를 흠씬 들이마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