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자 매
동네 공터에 새장수가 왔다며 구경을 가자고 해서 아이들을 따라가 보았더니, 떠돌이 새장수가 방금 새장을 내려놓은 참이었다. 아이들은 재미있다며 새장 앞을 떠날 줄을 모른다. 그러다가 노래도 잘하고 키우기에도 까다롭지 않다는 십자매를 사게 되었다. 새장수는 암수를 맞춰 준다며, 거꾸로 잡고서 솜털에 덮인 꽁지 쪽을 후후 불고 들여다보더니, 두 마리를 골라 새장에 넣어주며 곧 알을 낳을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아침마다 베란다로 나가 십자매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유치원 다녀오는 길에 배추 잎과 상추 잎을 얻어 오고, 새장 바닥에 깔 모래를 퍼 오는 새로운 일거리에도 즐거워한다. 하얀 털에 밤색 얼룩이 있는 십자매는 노란 부리로 모이를 흩트리며 먹고 모래까지도 잘 먹었다. 손안에 쥐면 따뜻한 체온과 함께 심장이 톡톡 뛰는 것이 느껴진다. 하루도 빠짐없이 목욕하는 새들을 신기하다며 구경하고, 물 한 모금 입에 물면 하늘한번 보는 것을 보며 재미있어했다. 혼자 보기가 아깝다면서 친구를 데려오기도 했다.
남편은 주말이면 새들에게 운동을 시킨다면서 새장 밖으로 나오게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새들이 겁을 내며 잘 날지 않더니, 얼마 지나서는 좁은 아파트 거실에서 대각선으로 훨훨 날아다녔다. 아이들이 따라다니며 좋아했다. 우리가 새소리를 흉내 내면, 새들이 대답을 하는 양 마주 노래했다. 새들과 화초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집안에 자연을 들여다 놓은 것 같아 신선하고도 경이롭게 보였다.
십자매가 집안 식구같이 편해진 어느 날, 베란다에서 새장 청소를 하려고 문을 열다가 한 놈이 날아 나갔다. 집 앞에 있는 나무에 앉았다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며칠 후 아랫집 부인이 우리집에 왔다가 새장을 보더니, 며칠 전에 자기 집에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 애들이 잡아다가 키운다는 이야기를 한다. 따라가 보니 우리 새가 다리 한쪽이 줄에 묶인 채 방구석에서 푸드득거리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 나간 새가 왜 도로 아랫집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새장에 갇히는 것에 길들여진 까닭일까. 금세기 초 이데올로기로 세계가 동·서 양 진영으로 갈라섰으나, 그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이 드러나면서 그 사회는 자유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러나 총선거를 통해 사회주의가 다시 지지를 얻은 일이 생겨났다. 내 집에서 날아나간 십자매가 자유를 포기하고 도로 새장을 찾아 간 것을 보고, 길들여진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빚는가를 본 셈이다. 집에 돌아온 십자매는 제 식구를 만난 기쁨으로 한동안 노래를 했다.
그 후로도 놓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밖에 나온 놈이 안에 있는 놈에게 계속 짹짹거리며 신호를 보내고, 안에서도 대답을 한다. 그러더니 다시 날아와 새장 밖에 붙어 있는 것을 해질녘에 도로 넣었다. 그런데 세 번째에는 아이들이 새장을 열고 장난하다가, 한 놈이 날아갔는데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온 식구가 동네를 헤매며 찾았지만 허사였다. 그 십자매는 진정 자유를 찾은 것일까. . .
한 마리가 남아 홀로 있는 것이 애처로워, 새 짝을 채워 주기로 했다. 새장수의 짝짓기 방법이 못마땅하던 나는, 새장을 들고 십자매가 많이 있는 곳에 갖다 놓았다. 말하자면 연애결혼을 하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 놈이 첫눈에 우리 새를 향하여 유별나게 몸을 낮춰 고갯짓을 하며 수선을 떨었고, 우리 새도 거기에 화답하는 듯이 소리 높여 노래를 한다.
그렇게해서 총각이 과부댁한테 장가든 셈인데, 역시 궁합이 좋았던지 둘이는 양지바른 횃대에 나란이 앉아, 부리로 털을 빗어주고 서로 부드럽게 쪼아대며 정을 나누었다. 그러더니 데려온 지 두 달만에 알을 다섯 개 낳았다. 십자매의 모습에서 음양의 조화라는 것이 신비하고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것이 세상 모든 것의 시작이고, 거기서 만물이 생성되는 조물주의 이치가 신기하다.
작고 귀엽기만 했던 십자매는 사람과는 달리 암수가 번갈아 가며 한참씩 알을 품었다. 둥지 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먹지도 않았다. 작은 놈이 부모노릇 한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애처로웁다. 그러다가 이십일 쯤 되는 어느날, 둥지 속을 들여다보니 새하얀 알들은 보이지 않고, 대신에 투명한 살색의 새끼가 있다. 눈과 부리가 유난히 크고 목이 길다란 작은 것들이 둥지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어미가 모이를 물고 나타나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세우고, 부리를 있는 대로 크게 벌려 경쟁적으로 받아먹는다. 사람이 신생아 시절에 배고프면 시끄럽게 울다가 결사적으로 엄마젖을 빠는 모습과 흡사하다.
알몸이던 새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털이 돋아나더니 이십 여일 지나서 날개가 생겨 제 모습을 찾아갔다. 어미는 새끼에게 나는 연습도 시켰는데, 그 중에 겁 많은 놈이 둥지에서 안 나가고 엄살을 떠니까 밀어내기도 했다. 짐승이라 맹목적인 줄 알았더니 엄격하기가 이를 데 없고, 자애로울 때는 무척이나 자애롭다. 웬만한 사람이 자식 키우는 정성보다 못할 것이 없었다. 새를 키우면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짐승보다 못한 자’ 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날짐승의 지능은 인간보다 못하다지만, 새끼를 낳아 기르는 것을 보니 그렇지도 않다.
십자매는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더 알을 깠고, 나는 그때마다 키우는 재미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