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추석이 또 돌아왔다. 남편이 맏이므로 전날부터 우리집 거실에는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로 떠들썩하다. 시부모님은 오랜만에 아들과 손주들에 둘러싸여 이야기꽃을 피우시며 행복해하시고, 나는 동서들과 함께 음식준비로 분주히 오가면서 덩달아 따라 웃는다. 며느리가 넷이니 ‘소’라도 잡겠다고 이웃에선 우리집을 부러워한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내게는 음악소리 같이 들린다.
전날부터 다들 모여 음식장만을 한 덕에 추석상이 제법 푸짐하여 마음이 놓인다. 그러다가 토란국을 먹으며 나는 갑자기 목이 메인다. 바쁠때는 잠시 잊고 있다가 상차림이 끝나 숨을 돌리고 나니 친정부모님 생각이 나서다. 지금쯤 차례상을 놓고 절을 하고 계실까, 마주앉아 아침을 드실까. 아이를 여섯이나 키웠어도 명절이면 썰렁하다고 하실 것같은 어머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릴적에 추석이면 딸여섯이 둘러앉아 송편을 만들었다. 예쁘게 빚어야 잘생긴 남편을 만난다는 어머니말씀에 저마다 정성을 기울여 곱게 빚으려고 애를 썼던 생각이 난다. 떡이 쪄지면 거의다 비슷한 모양이 되어버렸지만 아버지께서는 일일이 이건 누가 빚은거냐며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출가해버려 같이 명절을 지내줄 딸이 없는 것이다. 어머니는 일흔이 넘도록 혼자 시장보고 혼자 음식장만을 하신다. 아버지가 밤껍질도 베껴주시고 옆에서 거들어 주시니 옛날얘기하면서 오손도손 차례상을 준비하는 것도 남다른 재미라고 하시지만, 시댁일은 도맡아하면서도 친정어머니는 하나도 도와드리지 못하는 딸의 마음은 송구스럽기만 하다. 명절때는 특히 아들없는 적막함이 더할 것이나 두분은 이젠 그런 것을 화제삼지 않으신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 어느날, 새벽에 산파아주머니가 오셨다해서 이제나저제나하며 귀를 기울이다가 안방에서 들려오는 응애 소리에 신기해하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 이 넷째아기에 대하여 아들인지 딸인지에 대한 말을 아무도 하지않았다.
고1 때 어느 저녁에는 어머니가 병원에 같이 가자고하여 택시를 잡으려고 이리뒤고 저리뛰는데 진통이 오니 길에서 이를 악물고 계시던 일, 입원수속을 해드리고 집에오니 11시가 넘었는데 아버지께서는 통금 때문에 병원에는 못가시고 밤새 전화만하시다가, 새벽3시가 되어 전화로 딸이라는 소리에 재차 확인하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아버지는 그새벽에 주섬주섬 도구들을 챙기면서 낚시터나 다녀와야겠다고 통금해제와 함께 떠나셨다. 애처가로 소문난 아버지셨기에 나는 몸둘 바를 몰랐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을 먹자마자 동생을 데리고 어머니를 찾아갔다. 침대가 6개 있다는 병실문을 여니 웃는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어떤침대를 둘러싸고 있는데 테이블에 파인애플깡통이니 케이크가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바로옆에 빈 테이블과 눈동자가 덮이도록 부어 못알아보게 된 어머니의 얼굴이 보이자 나는 눈물이 앞을 가려 들어갈 수가 없었다. 큰언니는 화장실간다며 동생만 들여보내고 나는 복도로 나와 한참을 서있었다.
그 애기가 지금 서른이 넘어 옛날이야기가 되었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면 항상 눈이 시큰해진다. 어머니는 그뒤로도 아들을 낳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2년후에 여섯째도 낳고보니 딸이었고 42세로 단산을 하셨다.
어머니는 70고개를 넘으신 지금도 저승에 가서 시어머니뵐 낯이 없다고 한숨을 쉬신다. 뉴스에서 교통사고나 천재지변으로 죽은사람들 이름이 나오면, 아까운 남자가 많이도 죽었다고 혀를 차신다. 그러면서 자신은 죄 안짓고 남에게 해끼친 것 없이 살아왔는데 왜 아들복이 없는지 모르겠다고도 하신다. 어쩌면 전생에 아들만 여섯을 키우긴 했어도 가정에 충실치 못한 남편을 만나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내세에는 딸만 여섯이라도 좋으니 의식 걱정이 없고 애처가인 남편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는지도 모른다.
얼마전 뉴스에 전국 남녀 비율이 여자 100명당 남자가 115명이고 서울 강남의 경우에는 138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근래에는 병원에서 초음파로 성감별하는 경우에 처벌받게 된다고 하였다. 그 며칠후 텔레비젼의 다른 프로에서는 ‘아들, 꼭 있어야 하나’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그 중 한사람은 딸 셋을 낳은 뒤로, 임신하면 성감별부터 하여 번번이 낙태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수술대에 올라갈 때마다 무서워서, 집에 두고온 딸들을 위해서라도 꼭 살아서 나가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고 한다. 네 번째엔 건강이 나빠져 수술 끝에 전신마취가 잘 깨지않아 그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두려움에 떨었으나 시부모님과 남편의 바램을 알기에 포기할 수는 없더라했다. 그러다가 7년만에 아들을 얻어 황제대접을 하여 키운다고 하면서, 건강은 잃었어도 아들이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독일에서는 사내가 이세상에 태어나 할 일이란, 첫째가 책을 쓰는 일이요, 둘째가 나무를 심는 일이요, 셋째가 아들낳는 일이라 했고, 미국에서도 아들을 원하는 임신부는 아들낳은 사람과 악수를 한다고 들었다. 중국에서는 국가에서 인구억제책으로 하나낳아 잘기르기운동을 벌인 결과, 첫딸을 낳으면 몰래 내다버리는 일까지도 있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아들을 키우려 하는 소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적인 소망인가보다.
노후에 의지하는 문제,제사문제등 법적으로 남성들이 기득권을 쥐고 놓지않으려는 사회에서 딸을 키우는 것은 손해보는 일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말도 부족하고, 줄줄이 딸만 낳다가 마흔이 넘어 아들낳은 이에게도 할 말이 없고, 노력 중에 그나마도 얻지못한 우리 어머니같은 이에게도 명쾌한 위로를 드릴 수 없는 내 모습이 딱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