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아버지와 맏딸

이예경 2009. 8. 11. 13:55

아 버 지

이 예 경

 

어버이날을 앞두고 친정 가는 길에 올해는 유난히 어릴 적의 이런저런 일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부모님이 팔십을 넘으시니 근래에는 목소리를 높혀야 대화가 가능하고 거동도 나날이 불편해지시고 있다. 미래에는 누구나 겪을 일이겠지만 뵐 때마다 가슴 아프고 귀가 후에도 마음이 편치 않다.

내 기억에서 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은 다섯 살 때다. 어느 어스름한 저녁, 골목길 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군복 입은 키 큰 아버지에게 훌쩍 안겼었다. 그 날 찍은 가족사진을 지금도 보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육이오전쟁 피난통에 연락두절로 생사를 모르고 지내던 중, 아버지가 대구에서 이산가족 기사를 신문에 냈고, 친척이 그 신문기사를 오려들고 부산 우리 집에 전하면서 연결이 되었다. 그 난리통에 서로가 다른 도시에 살면서도 부부간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대단한 천생연분인 것 같다.

얼마 후 아버지는 직장을 부산으로 옮겨 우리는 한집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가 내 머리를 정성스럽게 꽁꽁 땋아주시기도 했지만 두 분은 금슬이 아주 좋으셔서 어린 내가 샘을 내던 기억이 난다. 피난시절 그 집에서는 밤중에는 쥐들의 천국이었다. 한밤중에 눈을 뜨면 벽에 걸린 아버지 양복을 타고 생쥐들이 오르내리곤 했는데 그때는 요정인줄 알았다. 동네 한쪽에 있던 공중화장실엔 칸막이가 없고 누구나 한쪽을 보고 앉게 되어있었다. 회충약을 먹은 날 저녁에 배가 아파서 갔다가 세 마리가 나오다가 꿈틀거리는걸 보고 울었더니 옆의 아주머니가 도와준 생각이 난다.

어느 날 초저녁 잠이 깨어보니 나는 보통 때 아끼던 구두에 코트까지 입고 있었다. 창 밖이 소란하여 내다보니 온 하늘이 새빨갛고 하얀 종이들이 새떼같이 떠다닌다. 내가 일어나자마자 아버지는 이삿짐 보따리를 짊어지면서 부산 국제시장에 큰불이 났다고 하였다. 어깨에 나를 얹고 이불보따리를 들고 아우성치는 인파 속을 헤쳐간다. 아우성치는 사람들 뒤로는 전봇대며 집이며 모두 빨갛게 달궈진 숯덩이 같았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조용한 골목길에 들어서자 어떤 구멍가게 옆에다 짐들을 내려놓고, 내게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그 위에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부모님이 가신 깜깜한 골목은 더욱더 조용한데, 얼마를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잠결에 아버지등에 업혀서 어떤 한옥으로 들어갔다. 부모님은 긴급한 상황이었을 텐데 나는 그림같이 아련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이사간 후 어머니께서 둘째를 순산하셨다. 내가 독차지하던 엄마가 항상 애기를 안고 주무시므로 아쉬운 대로 나는 엄마와 등을 붙이고 잘 수밖에 없었다. 추운 날에는 ‘유담보’라 불리는 양철물통에 끓는 물을 부어 난방기구로 사용했다. 어느 날 내가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저녁시간보다 늦게 귀가하였는데 아버지께서 방구석을 가리키며 유담보를 들고 벌을 서라고 하셨다. 저녁밥도 못 먹고 벌을 서면서 아버지의 이면에는 엄하신 데가 있는 줄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봄이 오자 아버지가 꽃모종을 구해와서 마당 한쪽에 심었다. 떡잎이 여러 가지모양이라 신기했는데 날마다 떡잎 사이에서 또 다른 잎사귀가 나오면서 하루하루 커지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팔꽃, 분꽃, 봉숭아, 가시꽃을 생각하며 아버지와 같이 날마다 물을 뿌려주었다.

아버지 직장이 서울로 이사하는 바람에 아버지도 먼저 서울로 가셨다. 내가 1학년을 마치자 어머니와 아기랑 셋이서 서울행 열차를 탔다. 아기는 차안에서 뒷자리의 가죽 쟘바 입은 아저씨를 보더니 대뜸 ‘아빠’하면서 달려갔다. 내가 아저씨라고 가르쳐도 철모르는 아기는 계속 아빠라고 부르면서 왔다갔다 혼자서 신이 났다. 어머니는 만약 아버지가 안 계셨다면 어쩔번 했느냐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 날 우리는 12시간 만에 캄캄한 서울역에 도착하여 아버지를 만났다.

나는 서울에서 초등학교 2학년으로 전학, 그때 아버지께서 ‘새벗’이라는 어린이잡지를 사다주셨고, 그 책을 상당히 오래 구독하여 많은 것을 재미있게 배웠다. ‘만화세계‘도 재미있게 본 책의 하나다. 저학년 때는 주로 어머니께서 공부를 가르쳐주셨지만, 고학년이 되어서는 저녁에 아버지께서 손수 문제풀이를 해주시며 과외공부를 가르쳐주신 적이 많았다.

6학년 때는 입시공부하다 어스름한 저녁 귀가 길에 재동 네거리에 이르면, 건널목 건너편에 맏딸을 마중오신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무거운 책가방을 받아 들으시고 다른 한손을 내밀면 나는 키 큰 아버지 손에 믿거라 매달려 걸었다. 덕분에 운 좋게도 원하는 중학교에 합격하였을 때 부모님께서 매우 기뻐하신 나머지, 평소와는 달리, 묻지도 않는데 먼저 자랑을 한 적도 있다.

여학교 시절 아버지와 낚시를 간 적이 있다. 조용한 물위에서 종일 낚싯줄을 보며 고기를 기다리다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지만, 아버지께서는 잠시나마 복잡한 일상사를 잊고 머리를 식히는 듯 했다. 나도 친구들과 학교에서 생긴 여러 가지 이야기니 장래문제를 아버지와 나누다보면 항상 내편이 되어주시는 아버지의 포근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나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나면 제일 먼저 아버지 생각이 난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정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성장하여 다른 세상 밖으로 나와 살아보니 더욱 아버지의 진가를 알게 된다. 여러 가지 일을 겪을 때마다 매번 아버지께 정답을 구하면서 살아오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내 마음의 중심 기둥이며 나의 자존심이고 사막의 오아시스 같으며 포근한 피난처이기도 하시다.

친정을 떠난 지 어느덧 삼십여 년이 지났다. 아버지와 지나간 시절을 되돌아보는 글을 쓰면서 그리움인지 나도 모르게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친정을 떠난 후에 강산이 서너번 바뀌는 세월이 지나갔는데도 내게는 결혼 전에 입력된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 그대로 들어있는지 편찮으신 아버지의 모습에 매번 충격을 받으며 눈물을 삼킨다.

나도 올 오월에는 외손주를 구월에는 손주를 한꺼번에 보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알아지는 것은 부모님이 더욱 더 존경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젠 더 자주 뵈어야겠다고 또 결심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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