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운 전 면 허

이예경 2009. 8. 11. 13:51

운 전 면 허

딸아이가 운전 면허를 얻은지 얼마 안되어 주행 실습을 하고 싶어했다. 기회만 있으면 딸을 운전석에 앉히고 나는 조수석에 앉게 되는데, 나도 모르게 계속 나오는 잔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개구리가 올챙잇적 생각 못한다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해서다.

결혼 초의 일이다.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얼마 후에 그를 따라갔다. 어느날 유학생 가족의 식사 초대에 갔는데, 그들은 내게 신랑이 뭘 사 놓고 기다리더냐고 물었다. 언뜻 생각이 안나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누구는 초코렛을 사 놓았더라 하고 누구는 바나나를 송이 째로 받았다 하며 이야기를 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그런 것이 흔치 않아서 사실은 나도 그런 것을 더 좋아했을 때였다. 그러나 남편은 뜻밖에도 지도 한 장을 건네주었다. 그 후 외출에서 돌아오면 그것을 펼쳐 놓고서 다녀온 곳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운전을 하려면 빨리 지리를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은 슈퍼마켓이랑 건물들이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걸어다니기가 어려워 할 수 없이 남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고 했다. 자상하게 돌보아 주는 선배가 이웃에 있었지만 매번 미안했다고 한다. 자동차를 마련할 대책은 막연했으나, 운전을 배우는 것이 급선무라는 남편의 말에 이해가 갔다. 남편은 공부로 바빠서, 내가 먼저 면허를 따기로 했다.

이론부터 배우게 되었는데, 강의실에는 생김새며 색깔이 제각각인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나는 마치 외국 영화 장면 속에 들어와 앉은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신기해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영어를 웬만큼 익혀 오긴 했으나, 강사가 교과서라면서 빌려준 두터운 원서를 받아드니 걱정부터 앞섰다.

두 달이 지나 책을 떼고 나서, 교통 사고의 실제 상황을 찍은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너무나 끔찍한 장면이 많았다. 그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사고 시에 들리던 금속성의 소리가 귀에 쟁쟁하여 겁부터 났다. 실습 시간에는 핸들이 두개나 달린 안전한 자동차로 가르쳐 주었지만, 난생 처음 해보는 운전이라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파우어 핸들은 조금만 틀어도 방향이 순식간에 바뀌어 진땀이 난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배우러 다녔으나, 실습도 채 끝나지 않아서 건강 때문에 도중하차하고 면허 시험도 보지 못했다. 앞으로 식구가 늘면 자동차가 꼭 필요하다며, 남편은 자기가 먼저 면허를 따야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남편이 시험에 합격하고, 중고 폭스바겐을 샀다. 해가 바뀌면서는 첫아기를 낳고 우리들은 차를 가진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얼마 후, 나는 건강이 회복되긴 했으나 외출은 여전히 하기가 어려웠다. 자동차가 있어도 운전을 못하니 갑갑했다. 남편은 운전 학원에 갈 것이 아니라 비용도 절약할 겸 자기가 가르쳐 주겠다고 나섰다. 면허를 얻은 지는 3개월 째이지만, 자상한 성격으로 잘 가르쳐 주리라 믿었다.

둘이는 아기가 곤하게 자는 날에 교외로 나가 운전 교습을 시작했다. 하늘은 푸르고 기분도 상쾌했지만,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으니 기분과는 달리 잘되지 않았다. 까딱 잘못하면 둘 다 천당 길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아기는 어쩌나 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남편도 평소와는 다르게 운전대 앞에서 표정이 굳어진다.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할 기미가 보이면 질겁을 했다. 그리고나선‘ 풀 먹은 개’ 나무라듯 한다. 나는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내가 배우는 처지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집에 두고 온 어린것이 걱정되어 황급히 돌아오곤 하였는데, 아기가 뒤집기를 시작하고 나서는 남편이 아기를 안고서 운전을 가르치게 되었다.

잘 나가던 어느날이다. 운전 연습 중이었는데, 남편이 갑자기 화를 벌컥 냈다. 큰 소리에 내가 놀랜 것은 물론이고, 곤하게 자던 아기까지 경기를 보이며 울어댔다. 순간, 나는 운전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길 옆에다 차를 세웠다. 남편이 왜 차를 세우느냐고 언성을 또 높였지만, 나는 차에서 내려 버렸다. 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차도 안 다니는 외진 길이다. 그런 길에서 조금 비뚜로 간 것이 그렇게 역정낼 일인가 ? 그가 내게 뭔가 불만이 있고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까지 들면서, 그토록 한 치의 이해심도 없는 사람이던가 하였다. 그런 사람인 줄도 모르고 살아온 지난 날이 억울하고 분했다. 나는 갑자기 눈앞이 흐려져 앞이 보이지 않아, 발길 내키는 대로 걸었다.

집에 돌아오니 남편은 아기를 달래며 창가에 앉아 있는 나에게 운전 교습은 끝났는데 아직도 기분이 안 풀렸느냐면서 얼토당토않게 ‘公’은 ‘公’이고 ‘私’는 ‘私’라고 하였다.

부부 지간에 운전 교습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웃 선배들은, 말도 안된다며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면서, 미국에서는 운전 가르치다가 이혼하는 부부가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하였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나도 어지간히 참아 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남편은 내 심중을 헤아리려 하지 않고 운전 교습을 계속했다. 나는 몇 번인가 낙방한 끝에 시험에 합격했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것이라더니, 그 후 남편과의 싸움은 언제 했더냐 싶게 머리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나 훌쩍 흘렀다.

이제 나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상당히 익숙해진 것 같다. 운전이란 기계나 수레 따위를 움직여 굴린다는 뜻이지만, 자본이나 어떤 일 같은 것을 움직여 나아간다는 뜻도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원활하게 하는 것도 사회 속에서 자신을 운전하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운전은 얼마나 익숙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자동차 길에는 차선이 있고 인생에도 정해진 길이 있다. 속도 내기에만 급급하여 차선을 자주 바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가야 할 것을 모르고, 양보해야 할 곳도 지나친 것은 아닌지 . . . 그리고 너무 느려서 남의 길을 막히게 한 적도 있었는지 모른다. 인간과 이간사이의 운전에는 날이 갈수록 쉽지 않음을 느낀다.

딸애는 고개를 앞으로 고정시킨 채 운전에 집중해 있다. 조수 석에 앉아서 나는 뭔가 지적을 하려다가, 이번에는 참아 보려 한다. 그러나 잠깐을 못 넘기고 또 나오는 잔소리에 나 자신도 어이가 없다. ‘다 당해 봐야 안다니까. . .’ 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94.1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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