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이 사

이예경 2009. 8. 11. 13:47

이 사

이예경

아침 8시에 상자랑 큰 바구니를 들고 온 이삿짐센타 직원들은 전문가답게 순식간에 짐을 꾸린다. 딸네는 결혼 3년째에 짐이 많이도 늘었다. 장정 몇 명과 아주머니가 와서 짐을 싸는데, 내가 안방에 있으면 “저리가세요” 저 방에 가도 “좀 비켜주세요” 이건 완전 개밥에 도토리 같은 취급이다. 그렇다고 같이 짐을 쌀 수도 없다. 내가 결혼 후 열네 번이나 이삿짐을 쌌던 베테랑인데도 나의 경험이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것은 자기들 방식이 다 있어서다. 그들은 2시간만에 딸네 살던 집을 빈집으로 만들어놓더니, 어느새 새집에다 뚝딱 짐을 풀어 이사온 집 같지도 않게 정돈해놓고 가버렸다. 직장에서 오후에 퇴근한 딸이 엄마 덕에 편하게 이사 잘 했다는데, 내가 뭘 해주었는지를 모르겠다.

나는 이사를 많이도 다녔다. 결혼하여 시댁에서 잠시 살다가 먼저 미국유학간 남편을 따라 갈 때는 짐이라고는 고작 책가방 하나에 옷 가방 하나였다. 새살림장만은 약간의 현금으로 현지 조달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현지에 도착해보니 남편은 기본 살림은 빌려다 놓았다며 새살림을 못 사게 했다. 어디 기댈 곳 없는 외국생활인데, 비상금이 필요하지 새살림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책도 절대 안 사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공부를 하였다. 짐도 돈도 없이 야망만으로 살던 시절이다.

그러다가 남편의 학업이 끝나 연구직을 얻어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살림 4년만에 두 아이가 생기니 짐도 많이 늘었다. 이사갈 곳까지 770마일인데 서울 부산거리의 세 배가 더된다고 했다. 이웃들은 장거리 이사인데 아이들이 너무 어리다며, 식구들은 비행기로 가고 이삿짐과 자동차는 소화물로 부치라고 조언을 해준다. 그러나 비용이 엄청나서 우리는 궁리 끝에 우리 경제 수준에 맞는 방법을 찾아냈다. 남편은 이삿짐 트럭을 운전하고, 나는 두 아이와 우리 자동차를 손수 운전하여 이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웃들이 무모한 방법이라고 말렸지만 그때는 이십대 젊음으로 일 무서운 줄 모를 때였나 보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교신을 위해 자동차의 시그널 등을 오른쪽으로 세 번 깜빡거리면 쉬어가자는 뜻이라던가 등, 몇 개의 암호를 정하고, 길을 잃고 헤어질 경우에 대비하여 전 재산을 둘로 나누어 현찰로 들고 가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고속도로에서 길을 잘못 들어 서로 헤어져 앞이 아득했던 적도 있고, 젖먹이 아들과 세 살 된 딸애가 같이 보채고 울어대며 고속도로에서 운전중인 내게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등 힘든 일이 많았다. 혼잡을 피해 운전하느라고 러시아워 사이사이와 한밤중에 주로 달렸는데 그래도 사흘이나 걸렸다. 무사히 이사가 끝이 나서 지갑을 챙겨보니 비용이 십 분의 일밖에 안 들어 애쓴 보람은 있었지만 두 번은 못할 경험이다. 어려운 살림에 아기들을 키우며 열심히 살던 때다

연구를 마치니 귀국하려고 해외이사를 하게 되었다. 쓰던 짐들은 ‘거라지 세일’을 했는데, 주로 새로 유학을 온 외국학생들이 사러 와서 헐값에 모두 정리를 하고, 남은 것은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정리는 시원하게 잘했지만, 내 손때가 묻은 물건들과 하나씩 이별할 때마다 한쪽 가슴이 싸르르해 왔다. 귀국을 일주일 앞두고는 다섯 해나 몰고 다니던 자동차를 처분했는데 그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남편과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묵묵히 있던 남편이 “새 주인이 아껴서 잘 쓸 꺼야” 하는 말에 나는 갑자기 목이 메이던 기억이 난다.

살던 아파트를 떠나는 날, 이웃들에게 둘러싸여 포옹을 하고 또 하고, 미처 못 내려온 이는 복도에서 내려다보며 모두들 손을 흔들어주었다. 귀국하는 즐거움에 앞서 떠나는 애잔함으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때의 마음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이삿짐은 다 귀국했지만 마음 한 조각은 그곳에 남기고 왔을 것이다.

우리는 비행기로 곧장 한국에 왔으나 이삿짐은 선편으로 부치고 왔기에, 짐을 기다리는 달포 동안은 야영생활 하듯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매우 불편하더니 그것도 익숙해지니까 살 만 했다. 그러다가 짐을 뭘 부쳤는지도 잊어버릴 무렵이 되어서야 짐이 인천항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 짐들을 트럭으로 날라다 준 직원은 풀어도 풀어도 책만 나오고 다른 짐이 별로 없다 싶었는지 살림은 따로 부쳤느냐고 하였다. 짐이 오고서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럭저럭 살다 보니 귀국한 지도 이십여 년이 되었다. 그동안 아이들이 커가면서 집을 옮기고 책이랑 살림이랑 늘고 또 늘었다. 이사할 때마다 짐을 싸고, 풀고, 정리를 하면서 몸살을 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데도, 욕심은 정리가 힘든가보다.

그런데 결혼 후 이사를 그렇게 많이 했어도 꿈을 꾸면 내 집은 항상 팔판동 한옥, 친정집이니 이상도 하다. 결혼한 동생들도 그렇다고 한다. 팔십노인 친정부모님은 고향 집을 떠난 지 육십 년이 지났는데도, 꿈속에선 항상 함경도 바닷가 고향집이라고 하신다. 지금 사시는 아파트는 한번도 꿈에 나온 적이 없다고 하신다. 몸 만 이사를 다니지 꿈속에선 이사를 가기가 쉽지 않나 보다.

집들이 행사로 딸네 새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남편은 덕담을 남기라는 나의 말에, 대답은 않고 한쪽켠 벽에 걸린 칠판에다 그림을 그린다. 만화인데 기어다니는 아기의 모습 같다. 설명을 청하니 집은 장만했으니 이젠 아기만 낳으면 되겠다는 뜻이라 했다. 새로운 환경으로 이사하면서 인생의 진도도 같이 나가라는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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