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리
이삿짐을 꾸리다가 보면 부부간에 심심치 않게 다툼이 일어난다. 짐의 대부분인 책 때문인데, 남편이 버리려고 쌓아 놓은 것을 보고 내가 흥분을 하는 까닭이다. 아깝게 이런 것까지 없애려 하느냐고 책 무더기를 뒤지면서 내가 이것저것을 골라내면, 애쓰고 정리해 놓은 것을 도로아미타불을 만든다고 남편이 역정을 내면서, 평당 수 백만 원씩인 공간을 쓰레기장으로 만들 작정이냐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남의 책은 다 쓰레기로 보이냐고 하면서, 자신의 책은 그렇다 치고 내 책은 왜 맘대로 골라내느냐고 하면, 둘이서 책 상자를 들고 서로가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것이다.
남편은 외국 출장 때 빈 가방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는 책으로 채워 온다. 국내에 있을 때도, 툭하면 전공 분야의 새로운 것이라며 사들인다. 거기다가 월간지도 여러 가지가 계속적으로 모이는데, 그러면서도 자기 책장 한쪽이 여유가 있는 것은 정리를 잘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의 정리 비결이란 물론 버리는 데 있다. 나는 비싼 책을 왜 버리느냐고 하는 것인데, 그는 내용이 머릿속에 보관되어 있으므로 책꽂이에 꽂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주로 전공 서적과 바둑 책들로 채워진 남편의 책장은 커다란 것이 두 개나 된다.
그와는 달리, 여러 분야의 책을 가진 나는 사정이 좀 다르다. 하루 세끼를 책임지고 있으므로 우선 요리 책이 있고, 세 아이의 어미이니 교육, 심리학 책이 있고, 영어·일어 어학 교재들과 테이프, 음악 해설집과 악보들, 미술 서적, 수예와 양재등, 그리고 온갖 지도와 여행담, 수필집에다, 문학 전집, 시집, 소설책들과 박물관 대학 수료 후 모은 역사책 해서, 여기에 최근 부쩍 관심이 많아진 건강 서적--- 수지침에 관한 것들이다. 그리고 다 통달하기엔 아직 갈 길이 먼 분야들이니 어느 것 하나 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다가 아이들까지 셋 다 책을 좋아해서 우리집은 방이니 복도니 책으로 넘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할 수 없이 책꽂이를 또 사게 되고, 짐을 줄이기가 쉽지 않다.
이삿짐을 쌀 때가 되니 정리좀 하라는 남편 말에 동의를 안 할 수도 없어 지난번 이사할 때는 식구들의 책을 다섯 상자나 정리하여 내놓았다. 시간을 아끼는 남편은 쓰레기장에 버리고 잊어버리라고 하였지만 내 성미에 그렇게도 못해서, 아동 교육 서적은 동생네 집에, 소설책은 누구네, 수예 책은 누구네 하면서 꾸려 놓고, 임자가 가져갈 때까지 다용도실에 두게 되었다. 남편은 쓰레기를 끼고 산다고 또 핀잔을 주었지만, 임자를 찾아서 갖다주고야 정리는 끝이 났다.
이사한 지 한참 지난 어느 날, 새로 사온 책들을 꽂을 자리가 또 없다. 책장정리를 할 때가 된 것 같아 또 고민이 생겼는데, 그런 중에 묘안이 떠올랐다. 집 앞에 도서관이 있지 않은가. 책을 거기에 갖다 두고 빌려다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일도 줄어들고 집도 넓어진다. 나는 남편의 만족해 할 얼굴을 떠올리며 당장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그러자면 일단 책들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막상 책을 들어내자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건 저자가 싸인해 준 것이어서 정리하기가 그렇고, 저건 20년이나 끼고 살아 온 것이어서 치우자니 걸린다. 그 중에는 겉장만 봐도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시가 들어 있는 것도 있다. 이렇게 하루종일 만지는 중에 하루해가 다 지나가 버렸다.
왜 이럴까하고 고민에 빠져 생각하다보니, 쓸데없이 정이 많은 것이 병인가보다. 손 때 묻은 것을 못 버려서 여태까지 끼고 살아온 것이라, 책은 물론이고 그릇과 옷가지를 정리하다가 진이 빠지곤 한다. 내가 왜 이렇게 힘에 부치게 사나 반성도 해본다.
젊어서는 힘이 넘쳐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았는데 요즘은 일이 힘에 겨울 때가 많다. 책장에 먼지 터는 일 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손이 썩 나가지 않으나, 그냥은 지나칠 수가 없으니 난 정말 못 말리는 여자인가 보다.
결국 막내딸의 방부터 실행해 보기로 했다. 막내 책을 몽땅 도서관에 주고, 드나들며 책을 보게 한다면 집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책을 보게 됨은 물론, 도서관을 이용하는 습관도 들게 아닌가. 학교에 간 막내를 기다려 그 이야기를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제 방으로 갔다가 한참만에 돌아왔다.
겨우 몇 권의 책을 내밀면서, 이것만 도서관에 갖다 주고 나머지는 안된다고 한다. 못 말리는 어미에 못 말리는 딸이라고나 할까. 나는 기쁜지 서글픈지 분간하기 어려운 마음으로 넘치는 서가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책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꿈을 주고 생기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오늘도 신문에서 메모해 둔 책을 사려고 집을 나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