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회원권
이 예경
산자락에 도착하니 초가을의 무성한 숲은 단풍이 들기 시작했고 가을 벌레소리가 요란하다. 돌돌돌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우리를 반겨준다. 별일이 없는 한 우리 가족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한 주일에 두세 번씩 청계 산에 오른다.
간단하게 운동 겸 등산을 즐길 마음으로 나섰는데 이 가을에 철이 철인지라 등산로 초입부터 반짝반짝하고 제법 굵은 알밤이 내 앞에 떨어져 있다. 이럴 때는 견물생심을 어쩔 수가 없어 나는 일단 주워 들고 본다.
그런데 길동무는 산밤이 일반적으로 은행알 같이 작은데, 줍다 보면 시간만 많이 걸리고 결국 품값도 안나온다며, 그냥 지나치라고 한다. 나도 그럴까 생각했지만 두어 발짝 옮기자마자 또 제법 굵은 알밤이 떨어져 있어 안 주울 수가 없다. 마침 복장도 주머니가 많은 바지와 조끼를 입었겠다, 하나님이 내 앞에 주시는 걸 안 받으면 쓰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저기서 후드득후드득 소리가 들리고 밤이 떨어지면서 툭툭 튄다. 밤송이는 작은데 땅에 떨어지는 소리는 요란하기도 하다. 쫒아가 보면 반짝반짝 빛나는 밤톨이 보석같이 예쁘기도 하다. 그런 속에서 계속 지나칠 수가 없었는지 길동무도 결국 자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밤을 줍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욕심에 너무 빠져들지 말고 지나가는 길목에서 눈앞에 보이는 것만 줍기로 했지만, 결국 밤톨을 따라 다니다보니 길도 아닌 데로 들어서게 되었고, 서로 모습이 안보이면 야호를 외쳐가며 바쁘다. 서로 얘기도 별로 나누지 못하고 노래도 못해보고 쉴 사이도 없이 코앞의 밤을 줍느라 시간가는 줄도 모른다. 이십년이 넘도록 이 산에 다녔지만 이렇게 밤이 많은 날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추석 휴가 중이라 다녀간 인적이 드물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더 열중하여 밤을 줍는 길동무의 모습에서 그렇게 평생을 처자식을 위해 벌어다준 모습을 본다.
한참 줍다보니 슬슬 허리도 아파오고 가시 속에서 알밤을 꺼내느라 찔리기도 했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으랴 하면서 참는다. 주울 수 있는 밤이 있다는 게 행운이고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주머니마다 불룩불룩 무겁다며 산을 내려오면서 그제서야 다른 사람들이 눈에 띤다. 그 사람들도 저마다 등산로를 벗어나 밤 줍기에 여념이 없는지 고개 숙여 땅바닥만 둘러볼 뿐 지나가는 사람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자기 코앞이 바쁘면 한눈 팔 새가 없겠지.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더 지났다.
부랴부랴 약수터로 향해 발길을 돌린다. 물통을 채우는 동안에는 항상 운동을 했는데 오늘은 주머니에 가득 찬 밤 때문에 맘대로 동작을 못한다. 거꾸로 매달리기와 자전거 타기 등은 생략하고 조심스럽게 허리 돌리기와 손동작을 하면서 오늘은 정말 풍성한 밤 줍기였다는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난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심지도 않은 밤나무인데 수확만 한 것에 미안한 생각이 든다. 다람쥐들의 양식을 가로챈 것이 아닐까 해서다. 잠시 걱정을 해보지만 그런 중에도 계속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밤과 아직도 공중에 주렁주렁 달린 밤송이를 보면서 “풍성한데, 뭘” 하면서 마음을 놓는다. 이렇게 나 편한대로 생각을 한다.
집에 오자마자 쏟아 놓으니 길동무의 주머니에서 나온 밤이 내주머니 밤보다 많다. 이웃 노인 댁에도 좀 나눠 드리고 나머지는 칼집을 내어 군밤을 구웠다. 속살이 샛노랗고 고소하고 달다. 씹히는 맛이 일미 중에 일미다. 청계산 자락에 사니 심심할 새가 없다. 여름에는 산딸기 가을엔 밤송이 그리고 새소리 벌레소리 솔바람 소리…….수확의 즐거움을 맛보며 그제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친구들은 값 비싼 골프 회원권을 자랑하지만 우린 더 좋은 무료 청계산 회원권을 즐긴다. 내가 한동네에 이십년이 넘도록 사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