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대추나무

이예경 2009. 8. 11. 13:43

대추나무

이 예경

 

중앙공원을 질러서 새벽에 운동을 다니고 있다. 그런데 몇 해를 같은 길로 다니다 보니 이제는 나무 하나하나가 새로운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그중 한그루가 대추나무인데, 큰나무들 사이에서 죽은 듯이 있다가 초여름이나 되어야 겨우 잎을 내밀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그 나무의 정체를 몰랐다. 기온이 충분히 높아져야 순이 트기에 게으름을 피우는 옛 양반과 비유되어 ‘양반나무’라 불렸다고도 한다.

새순이 늦으니 꽃도 늦다. 게다가 한꺼번에 피지 않고 연이어 핀다. 그러다보면 벌 등의 매개곤충이 가버린 뒤라 수정이 안 되는 경우가 있어, 대추는 종자가 없는 것도 꽤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대추 꽃에는 꿀이 아주 많다니 자연의 이치가 경이롭다.

이번 단오절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대추가 많이 열리게 하려고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를 하는 풍속이 그것이다. 대추나무 가지사이마다 돌을 잔뜩 끼운다니 상징적인 음양의 이치인가보다. 끼워진 돌로 나무껍질 부분이 눌리게 되면 위에서 내려가던 탄소와 아래에서 올라오던 질소는 길이 막혀, 결국 나무 가지에 탄소가 많아지면서 열매가 잘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단옷날에는 도끼로 과일나무의 가지를 내려치기도 하고 대추나무에 가축을 메어두기도 했는데, 나무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위기의식을 느껴 종자를 남기려고 열매를 많이 매단다고 한다. 선조들의 이러한 풍습이 오늘날 생태과학으로 증명이 되고 있으니 미신 같이 들리던 말들이 알고 보니 지혜였다.

이라크의 ‘사조나무’는 건조한 황무지에서만 자라는 대추나무로, 뿌리가 수분을 찾아 30m까지 파고 내려 염분 층에 뿌리를 박고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열매는 작지만 달고, 향기도 강하며, 자양도 몇 곱절 많다고. 옛 전쟁에서 병사들은 이 대추만 먹고 석 달을 싸웠다하고, 대상(大商)들이 사막에서 길 잃고 헤매게 되면 이 사조 대추만으로도 몇 달을 버티어낸다고 한다. 고될수록 이를 이겨내서 더욱 크게 성공하는 인생을 닮은 사막대추이다.

귀여운 자식을 매로 키우라느니 객지로 내보내라느니 그런 옛말이 떠오른다. 요즘은 한집에 자녀가 한둘이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고생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다. 부모 역시 자녀들 기죽지 말라며, 자식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해주려고 애를 쓴다. 물론 장래에 성공을 이루기 위해 잘 키우려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도 견딜 수만 있다면 긴장과 고민은 많을수록 오히려 삶의 원동력이 되고, 고통은 생에 필연적이며 성숙으로 이르는 과정이라고 자연은 보여주고 있다.

해결해야할 어려운 일이 인생의 과제이며 우리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 일 게다.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사회는 보다 나아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되고, 그 결과로 미래는 현재보다 나아질 것이다. 조물주의 오묘한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대추나무가 햇빛을 잘 받지 못하면 꽃이 피었던 자리에 열매는 맺히지 않고, 대신에 자잘한 이파리들이 나오거나 가지가 여러 개 나오는 빗자루 병에 걸린다. 치료방법도 없어 미친 나무라 불리며 베어버리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한다. 인간으로 치면 암에 걸린 것이리라. 암세포를 사랑 받지 못한 세포라고 하지 않는가. 성경에서도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 하였다.

대추나무는 벼락을 맞게 되면 매우 단단해져서 도끼나 톱으로도 쪼개거나 자를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벽조목으로 불리는 그 나무로 도장을 만드는데, 악귀를 쫓아주어 사업이 번창한다며 귀하게 쓰인다고 하니 죽어서도 제몫을 다 하는 나무이다.

대추에 대해 이런저런 사실을 알고서 새삼스레 느껴지는 것은 고통이 인생에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사랑 속에서라야 완성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대추나무가 어리광을 피우는 아이로도 보이고, 때로는 사랑을 타는 여인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고통이 곧 은총이라는 말의 뜻도 이제는 알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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