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노래연습

이예경 2009. 8. 11. 13:42

노래연습

이예경

 

우리부부는 둘 다 합창단원이다. 해마다 정기연주회가 있고, 교회에서는 성가대원으로 매주 찬송가를 부르고 있어서 남편은 매일 노래연습을 한다. 그는 아침 식사 후 5분만 여유가 있어도 지나치는 일이 없다. 왜 아침부터 노래연습이냐고 물으면, 노래로 하루를 시작하면 종일 개운하고 기분이 좋아 자꾸만 하고 싶다고 한다. 그는 남이 노래하는 때에도 툭하면 화음을 넣어준다.

그런데 남편이 육십을 바라보게 되니 노래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다. 감기라도 걸리면 쉰 목소리로 얼마나 노래가 되는지 아침마다 소리테스트를 하는데 비극배우가 따로 없다. 목소리가 건강의 바로미터인가 보다. 노래하는 사람의 몸은 악기나 다름없는데, 그 악기가 탄력을 잃어가니 늘어진 소리가 나는가 보다.

때로는 발성연습 중에, 안나오는 목소리는 자꾸 질러줘야 한다며 높은 음에서 되풀이를 하는 적도 있는데, 옆 사람이 듣기에 그건 음악이 아니고 차라리 소음이다. 온 집안이 그의 목소리로 가득 차면, 아이들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며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꼭 닫는다. 나 역시 듣다보면 귀청이 고통스러울 때가 많지만, 그래도 음치가족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한다.

노래가 심신의 건강에 좋은 이유를 중국 3천년의 건강비법에 나온 것을 읽고 감탄을 한 적이 있다. 육기법(六氣法)으로 내장에 기(氣)를 가득 채운다 하였는데, 책상다리로 앉아서 숨을 내쉬며 '쉬-'소리를 내면 간장(肝腸)의 사기(邪氣)를 몰아내고, '허-'하면 심장, '후-'하면 비장의 사기를 몰아낸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스-'하면 허파의 사기가 나가고, '취-'하면 신장의 사기가 나간다. 쓸개는 먹은 음식물을 깨끗이 하여 피가 흐려지지 않게 하는데, 엎드려서 '시-'하고 내쉬면 그곳의 사기가 빠져나간다. 몸 상태에 따라서 반복 횟수를 다르게 해야하며, 반드시 안경, 시계 등의 장신구를 내려놓고 맨발로 해야 효과가 좋다고 하였다.

연말이 다가오니 모임에 나갈 일이 많아진다. 만찬 후에는 의례히 여흥이 있고, 여흥에는 노래를 빼놓을 수 없다. 남편은 연습을 해야겠다며 노래방에 가보자고 한다. 골라 놓은 이중창이 하나 있어서다. 부부이중창을 멋들어지게 부르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그것도 만점을 얻으려고, 정확한 박자와 음정은 물론 감정표현까지 신경을 쓰며 연습한다. 주제가 사랑 노래들이라 손잡고 마주보며 하랴 노랫말을 외우랴 앙코르곡까지 연습하면 시간이 제법 걸린다.

발성연습부터 시작을 하는데, 우리가 할 노래는 유행가 수준이지만 이중창이라 파트연습이 필요하다. 그는 비록 독수리타법이지만 열심히 건반을 눌러가며 음을 맞춰본다. 자기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내게도 "좀 빠르게, 좀 감정을 넣어서" 등 주문이 쏟아진다. 피차 아마추어 수준인데도, 그의 잔소리가 길어지면 내가 열이 오른다. 피아노 래쓴을 여러 해 받았던 나는 표현법에 다른 의견이 있어 남편에게 말해보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안 한다. 연습은 서로 맞춰가며 해야 되는데 그는 나의 표현법을 문제삼고, 나는 그의 느린 박자를 지적하면서 결국은 다투다가 연습이 중단되기도 한다.

회사일과 달리 노래는 재미로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핏대를 올리며 하다니... 더구나 사랑의 노래를 이런 분위기에서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나는 몸까지 긴장해선지 잘 넘어가던 대목도 안 나온다. 노래는 편한 자세로 즐겁게 해야 잘 나오는데, 야단을 맞으면서 노래를 계속할 이유가 없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서로 노래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처녀총각시절, 그가 야외로 놀러가자고 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챙긴 것이 노래 책이었다. 노래를 시켜보리라. 그 당시 합창단원이었던 나는 음치 남편이나 음치 자녀와 가족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속버스를 타고 가던 중, 이런 노래 아느냐며 그가 꺼내든 노래책은 내가 가져온 바로 그 노래책이 아닌가. 나는 우연의 일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작약도의 소나무 그늘에 나란히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이중창을 실컷 불렀던 생각이 난다. 그러면서 평생을 이렇게 노래하듯 화음을 맞춰 살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모임 날짜가 다가오니 남편이 노래연습을 다시 하자고 말한다. 그런데 마침 나는 시간이 없다. 그의 말에 토를 달면 또 길어질게 뻔하니, 빨리 연습을 끝내기 위해서, 그가 무슨 의견을 내든 그대로 따라주기로 했다. 그랬더니 그는 시종일관 기분 좋은 얼굴이다. 연습도 일사천리로 끝나고 지금은 가정이 아주 평온하다. 너무 평온해서 싱거운 기분이 들 정도이다.

습관처럼 이렇게 노래연습을 하다가도 신문이나 방송에서 시국이 편치 않고 어두운 소식을 접할 때는 우리가 지금 천진난만하게 노래나 할 때인가 반성을 해 볼 때가 있다. 그러나 답답할 때 속만 끓이고 있느니보다 차라리 노래라도 부르고 나면 기분전환이 되어 새로운 마음으로 문제해결이 잘 되지 않나 싶다.

연말파티에서 부를 노래는 연습부족이라며 남편이 내년으로 미루었다. 그러나 합창단에서는 성공리에 찬양발표회를 마쳤다. 앙코르가 쏟아져서 두 곡이나 더 불렀다. 지휘자는 긴장된 표정으로 경쾌하고 조용하게 시작하였고, 우리 모두는 자신만만하였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찬양하며 살리라" 합창 중간에 갑자기 종이가 구겨지듯 지휘자의 얼굴표정이 바뀌더니 눈에 물기가 반짝 어렸다. 나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합창이 끝나고 박수 속에 인사를 하면서 지휘자는 연신 손수건으로 얼굴을 문대었다. 둘러보니 단원들 중에도 눈이 붉게 된 사람이 많다. 서로의 공감대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합창단이나 성가대에서 노래연습이 잘 된 날엔 머리 속이 아름다운 화음으로 채워진다. 기분이 좋아 온 몸이 풍선처럼 둥둥 떠오르면서 집에 온다. 화음이 잘 맞을 때의 기쁨과 감동을 어디다 비길 수 있을까. 그런 성취감 때문에 계속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해도, 또 이렇게 노래하며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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