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아 침

이예경 2009. 8. 11. 13:52

아 침

아침이라 하면 약수터, 시원한 공기, 운동, 늦잠, 숙취, 태양, 희망 따위로, 떠오르는 단어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컨디션에 따라 아침형과 저녁형, 그리고 이상적인 종합형으로 구분 짓는다면, 이불 속에서 나오기가 힘들어 항상 10분 만이라도 더 있고 싶은 마음인 나는 저녁형인 것 같다.

겨울에는 일어나는 일이 특히 고역이다. 어릴 적에 살던 한옥은 아침에 눈을 뜨면 요 밑은 따끈따끈하고 이불 밖은 한겨울이라, 밤새 코가 얼다시피 되어 있었다. 웃목에 둔 물이 얼 정도라 머리맡의 옷은 얼음같이 차가워, 매일 떨면서 옷을 입던 생각이 난다. 그래서 다시 몸을 녹인다고 요 밑에 다리를 넣고 앉게 되는데, 그러다가 밖에서 아버지의 기척이 들리면 용수철 튀듯이 일어나 나가야했다. 온 식구가 삼청동 약수터에 다녔을 때였다. 나는 잠결에 따라가서 차디 찬 시냇물에 세수를 하고 나서야 정신이 나곤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주황과 보라로 묘한 조화를 이루는 아침노을에 매혹되어, 자연의 신비를 발견하고 그것과 더불어 호흡하는 것이 흐뭇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에 이어, 전형적인 ‘아침형’의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일상적으로 5시면 일어나서 6시가 지나자마자 출근을 한다. 일요일엔 그 시간에 등산을 하니 늦잠이 사전에 없다. 말하기엔 창피한 사실이지만, 나는 그 보다 일찍 일어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래도, 덩달아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깨우고, 도시락을 챙겨주면서 산다. 그리고 다들 나가면 혼자 음악 틀고 앉아 조간신문을 펼쳐놓고, 읽다가 졸다가 하는 것이 나의 평범한 아침이다.

그렇지만 살다보면 평범치 않은 아침도 있게 마련인가보다. 그것은 결혼 20년 후 20일 간의 여행 중에 일어났는데, 여행가기 전에는 내가 없는 동안 집을 맡기는 문제니 가방 싸는 일이니 바빠서 기대치 못한 일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집을 떠난 다음날부터, 매일 아침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뜨면 7시나 되어 있었다. 잠결에 놀라서 수화기를 들면, ‘굳 모닝 마담, 봉 쥬르 마담’ 이란 말에 뒤이어 몇개국어로 아침인사가 나오고, ‘꼬끼오-’ 하는 닭소리로 끝을 맺는다. 나는 아침식사 준비나 도시락 반찬 걱정없이, 그저 세수하고 몸단장하고 식당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멋있는 아침식사가 차려져 있는 것이다. 설거지 걱정도 없이, 즐겁게 먹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다 보니 20년간 알게 모르게 쌓인 아침 스트레스가 다 풀린 것 같다.

어느 날, 나는 고등학생 딸아이의 입시학원 등록을 위해 노량진에 가게 되었다. 경쟁이 심하니 일찍 가야한다는 아이의 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더라’는 옛말을 떠올리며, 잠도 덜 깬 새벽 4시에 집을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쌀쌀한 새벽공기에 아랑곳없이 길에는 자동차가 다니고,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왔다. 노란 옷에 긴 빗자루를 들고 낙엽을 쓸어내는 청소부, 우유니 야채생즙을 배달하는 여자들, 신문 배달하는 학생뿐 아니라 새벽기도에 가는 이웃부인까지 만났다. 내가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이 되면, 그들에겐 한창 일하는 시간이거나 끝내는 시간일 터였다. 특히 청소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면서, 내 생활을 돌이켜 보며 반성되는 점이 많았다.

성공한 소설가 한 분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언제 소설 쓸 시간이 있느냐는 물음에,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7시까지 집필하는 것이 습관이라 했다. 그러면서, 바빠서 무얼 못한다는 말은 핑계라고 한다. 그런가하면 ‘처칠’은 7시가 지나서야 일어나, 베개 옆에 산더미같이 쌓인 신문을 통독하고, 9시부터는 잠자리에서 여러 가지를 지시하며 일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그는 앉아서 할 수 있을 때 서 있는 사람도 어리석고, 누워도 좋을 때 앉아있는 것을 어리석은 일로 여겼다 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결국 그의 장수비결이었던 셈이었다 한다. 우리네들은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아침을 주제로 한 그림에, 안개 낀 산을 그리는 화가가 있는가 하면, 동해에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그리는 이도 있는 것처럼 개인차는 인정해야하지만, 합리적으로 사는 지혜가 따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어쨌던,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제는 눈이 떠지면 뭉그적거리지 않고 일어나기 위해서, 하루 계획 중에 가장 즐거운 일을 떠올려 본다. 새도 일찍 일어나는 놈이 벌레를 잘 잡는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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