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바다 장터
아파트 엘리베이터 벽보에 아나바다 장터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무슨 외국어 같지만,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쓴다는 뜻으로 알뜰 시장을 요즘은 그렇게 부르나보다. 호응도가 높다고 하니 격세지감이 든다.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옷이건 가구 건 유행만 지나면 버리고 툭하면 집수리하는게 유행이었다.
동참하는 뜻에서 살림을 정리해 옷가지와 책들을 모아보니 다섯 보따리다. 동사무소까지 혼자 들고 가기가 어려워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니 이것들이 다 돈주고 샀던 것 아니냐면서 눈이 휘둥그래진다. 아이들이 커져서 필요 없게 된 것이라고 설명을 했지만, 그는 왠지 석연치 않은 표정이다.
물론 그의 말대로 돈주고 산 것이고 정든 물건임에 틀림이 없다. 아이들 어릴 때 자장가 삼아 읽어주던 동화책들, 생일선물로 받고 아끼느라 몇 번 입어보지도 못한 말짱한 옷, 매일 끼고 자던 동물인형들. 그런가하면 백화점에서 사은품으로 받아 놓고 쓰지 않은 그릇이나 냄비도 있다. 그러나 정들었다고 끼고만 살 수는 없다
갓 결혼하여 외국에서 살던 생각이 난다. 첫아이를 가졌을 때 이웃들이 아기침대며 유모차에 보행기 등 자기들이 쓰던 것들을 모아주어서 요긴하게 잘 쓰다가 나도 이웃에게 물려주고 왔다. 그 때 고마웠던 생각이 나서 귀국 후 이웃 아기 엄마에게 쓰던 것을 세탁하여 갖다주었더니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얼굴을 붉히며 이래봬도 내 집 쓰고 사는 사람이라며 아이들용품은 다 새로 사준다는 것이다.
그 뒤로도 아이들 물건이 계속 나오지만 섣불리 남에게 주겠다는 말도 못하고, 쓰레기통에 버리기에는 아까운 물건들이라 광 한쪽에 쌓여가고 있었다. 이래서 아나바다 장터는 내겐 희소식이다.
선진국 사람들은 부자나라인데도 아이들 옷은 얻어 입히고, 안 쓰는 물건들은 모았다가 차고에 내놓고 세일을 한다. 동네 벼룩시장이 열리면 서울의 황학동 시장같이 별별 것들이 다 나오고 값이 싸다. 구입 후 가격이 떨어지는 새것과는 달리 중고품은 쓰다가 되팔아도 제값을 받을 수 있어 좋다.
그 당시 이웃집 미국인 학생 부부는 아르바이트하며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집에 놀러 가보니 램프는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쓰던 것, 설합장은 고모님이 물려주신 것, 곰인형은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것 등으로 추억 어린것이나 벼룩 시장에서 구입한 것들을 자랑삼아 보여주었다. 하도 알뜰하여 측은한 생각조차 들었는데, 알고 보니 트랙터를 여러 대 가진 대지주의 아들이었다. 미국 영화 속에서 느끼던 미국 사람의 이미지와는 달리 내가 만난 보통 사람들은 합리적인 사고에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다.
서양과는 달리 우리 조상들은 헌옷에는 입던 사람의 혼이 묻어있다고 생각했는지 죽은 사람의 옷은 태워버리고 소문 나쁜 사람의 옷은 절대로 얻어 입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출생직후에 입은 배냇저고리는 재수 좋은 것으로 여겨 입학시험 보러 가는 아이의 옷 속에 꿰매어주기도 했다. 태아가 결사적인 힘으로 넓은 세상에 나온 점을 본받으라는 뜻이었나 보다.
옛날에는 귀한 자식일수록 명이 길어지라고 헌옷을 입히고 이름도 개똥이등 일부러 천하게 붙였다는데, 요즘은 그럴수록 돋보이게 새 옷을 입혀야 기죽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나보다. 환절기가 되면 헌옷 버린 것이 동네에 넘쳐 난다. 얼마 전부터 분리 수거를 실시하면서 헌옷은 재활용 통에 담게 되었다. 멀쩡한 것들이 많아서 재활용품 통에 버리러 갔다가 다른 물건을 주워 올 때도 있다.
IMF이후 동네의 헌옷 가게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고, 초저녁에 문을 닫았던 집 앞의 구두 수선 가게도 일이 많아 저녁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다.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사람들이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지혜가 는다.
아나바다 장터가 선 시청 강당은 물건과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빈다. 낯익은 얼굴들이 많다. 넓은 강당에 가득 들어찬 물건들을 보면서, 이런 일이 물건만 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을 때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다. 물질적으로는 어려워졌지만 정서적으로는 더 풍부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기회에 이웃간에 마음의 교류가 많아져, 불평 불만의 말은 아끼고 즐거움과 위로의 말을 나누고 상대방과 입장을 바꿔 보고 다시 생각해 보는 마음의 아나 바다 교류를 기대해 본다.
지금은 내 발등의 불끄기에 바빠서 무심히 지나갈지 몰라도 우리도 선진국같이 저력을 지닌 나라를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때다.
(98.12.21 이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