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흙의 화신(化身)과 악수하다 / 김선화

이예경 2009. 8. 5. 21:34

흙의 화신(化身)과 악수하다

                                                                                   김선화





  야채 한 포기를 수확하기가 어렵다는 나라 몽골. 그 땅 밀림지대에서 움켜온 열매들이 내 집에 온지 보름쯤 지나 꽃으로 핀다. 번데기처럼 오그라져 있던 것들이 차츰 보송보송해지더니 부피를 키운다. 겹겹의 켜가 고른 간격으로 벙글며 꼴을 갖추는데, 상수리 만하던 어느 것은 아예 꽃잎을 올올히 피운 동백꽃모양이다.


  예사 꾐질에 잘 넘어가지 않는다고 여긴 내가 몽골여행은 꼬임에서 시작해 꼬임으로 막을 내렸다. 별을 볼 마음에 여행길에 나선 것이 그렇고, 꿈의 궁전 같은 야생화군락이 펼쳐진다 하여 장장 일곱 시간에 거친 산행을 한 것이 그러하다. 게릴라 과의 안내원은 틈만 나면 야생화 운운하며 싱글벙글했다. 나는 산행을 앞두고부터 일행들과 말을 아끼며 에너지소모를 막았는데, 그것이 내가 준비할 수 있는 신비의 화원에 대한 지극한 예우였다. 



 


  급경사비알


  여행 나흘째 되는 날, 급경사지대를 오른다. 돌비알이다. 멀리서 볼 땐 돌 하나가 없을 듯싶은 거대한 언덕이었다. 그저 모래나 흙으로 이루어졌을 것 같은 민둥민둥한 붉은 덩어리가 의아하게만 비쳤었다. 그곳을 한 걸음 한 걸음 디뎌가고 있다. 


  분명 산을 오르는데 한국 사람인 안내원은 ‘올’에 오른다고 말을 한다. 말꼬리를 잡고 되물을 열의도 없는 나는 그냥 지레짐작으로 산이 아마도 올인가보다 하며 따라 걷기에 바빴다. 뒤에 알아보니 산을 의미하는 ‘올’의 한자는 ‘우뚝하다’, ‘높고 위가 평평하다’, ‘돌비알이다’ 등등의 풀이가 있었다.


  안내를 맡은 H교수는 이곳에 오를 때마다 심한 바람을 만나거나 따가운 볕을 만났다고 한다. 우리가 등반하는 6월21일은 1년에 2회 정도의 좋은 날씨라 하였다. 는개가 내리는데 연중 2회에 드는 길일이란다. 하긴 더워서 숨이 턱에 차는 것보다는 서늘한 편이 훨씬 나을법하다.


  해발 2100미터의 산을 해발 1400미터 지점에서부터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약 한 뼘 키의 해당화가 피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섬마을서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도 잠시이고 급경사언덕이 일행을 맞는다. 자갈이라 하기엔 조금 크다 싶은 돌이 표면을 이루고 있다. 풀포기를 골라 디딘다. 온전한 흙이 아니어서 돌 사이로 옮기는 걸음에 무리가 쉽게 왔다.


  급경사 능선을 오르자 붕긋한 산마루에 여지없이 오보가 나타난다. 영기 어리었다 싶은 지형에 빼놓을 수 없는 오보. 땅과 하늘의 기운을 한데로 부른다는 돌탑에 청홍의 띠를 두른 장대가 꽂혀있다. 우리나라의 이쯤 구릉지대엔 여지없이 뉘의 무덤이 존재하는데, 몽골에서는 산 사람의 안녕을 기원하는 상징물이 전망 좋은 곳을 차지하고 위풍당당하다. 


  어보에서 1차 쉼을 하고 다시 길을 잡는다. 일행 중 학구파들은 선두로 오르는 안내인의 뒤를 바짝 따르고, 동화 팀과 나는 뒤로 쳐져 가방을 서로 받아주며 호흡을 맞춘다. 그러면서도 얼만치 왔는지 뒤를 돌아다보니, 아득하던 게르촌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는 행보로 내가 안개구름 속으로의 진입을 한 것이다.


  점점 숨이 가빠온다. 족히 45도의 경사길. 진작 포기했어야 옳았다. 애초 나서지 말았으면 이런 후회도 없을 것이다. 긴 여정의 행군에서 중도 탈락자가 나오면 여러 사람이 곤란을 겪을 일이기에 안내인이 그토록 다짐을 받았던가보다. 내려올 때는 다른 방향으로 길을 잡을 것이라 했다. 그래서 등반을 시작하면 완주를 해야만 한다고 했다. 하여 아침에도 기권자가 생기고, 나는 어느새 되돌아가기엔 아득한 거리에 와있다. 안내인의 말대로 날씨가 큰 부조를 하고 있었다. 는개가 몸을 적당히 적셔주니 이만하지, 만약 나무도 없는 산길에 햇볕이 내리쬐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말하나마나 일사병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이미 호텔에 남은 팀원 중엔 호흡기 곤란으로 병원에 실려 간 사람이 발생한 터이니까. 


  우리의 일행 끝선엔 몽골 대학생들이 점심요기거리와 생수를 들고 오르는 중이다. 그들은 그 무거운 것을 들고도 낯선 이국인을 비호하며 걷는다. 그것이 미안해서라도 힘을 내야만 했다. 아무리 가이드공부를 위한 실전봉사라 하지만 그들을 보기가 민망하고 애처롭다. 내 작은아들 또래의 청년들인데, 한결 순수하고 앳되어 보인다. 하지만 강인하다. 짐을 맡아 오르면서도 표정들이 밝다. 한국인 스승을 따르는 까닭에 한국이름 하나씩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더욱 사랑스러웠다. 철수, 두한, 슬기, 희경…. 구릿빛 피부가 같고 우리말을 하는 학생들이 있어, 이곳이 타국임을 깜박깜박 잊는다.  


  돌비알을 거의 올라가서야 썩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 수 있었다. 비에 삭은 까만 껍질이 손바닥에 자꾸 묻어난다. 그래도 귀하게만 여겨진다.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다는 것은 숲이 가까웠음의 암시이기도 하다. 그것을 지팡이로 삼으니 오름길이 한결 수월하다. 몇 걸음 앞선 만화가나 동화작가들이 나를 보며 웃는다. 꼭 패망한 나라의 쫓겨난 공주 같다나. 와중에도 ‘공주’라는 농담에 나는 애써 그 나마의 품위를 유지하며 따라 웃어본다. 공주행색 치고는 영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쫓겨난 공주라지. 과연 동심 속에 노는 작가들이다.


  짙은 안개 속에서 앞서온 사람들이 환호한다. 뒤로는 거대한 괴석이 버티고 있는데 괴석을 등진 사람들의 모습도 덩달아 기이해지려 한다. 거기서 또 한 차례 쉼을 하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숲으로의 진입을 한다. 금세 상쾌해진다. 자꾸만 탄성이 나오려 한다. 등반가들이 이 맛에 예까지 오르는구나 싶다.


  얼마 뒤 다시 자갈길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가슴 속까지 서늘해진다. 저만치 아래로는 좀 전에 오르던 곳과 흡사한 돌비알이 펼쳐진다. 애초 오르던 곳의 반대편이다. 능선을 넘은 것이다. 그리고 군데군데 숲도 보인다. 이젠 입을 벌려 호흡하며 자연의 바람을 마신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 쾌감을 어찌 다 문자로 표현하랴. 우리는 그 가느다란 산허리 길을 돌아서 점점 깊은 숲에 잠긴다.




  원시의 땅


  아래서 보아온 것들과는 다른 야생화가 한들한들한다. 나목들이 꺾이어 군데군데 길을 막고 있다. 어느 나무는 뿌리로 돌무더기를 옹송그려 안은 채 바닥을 보인다. 그런 곳을 한참 더 지나 원시림 속에 들었다. 쭉쭉 뻗은 아름드리 침엽수림이다. 잣나무 숲이다. 이곳도 국립공원이라 한다. 길쭉길쭉한 열매들이 떨어져 있다. 어느 것은 상수리만하고, 또 어느 것은 쪼글쪼글한 번데기 같다. 나는 그것들을 한 움큼 주워 가방에 넣었다. 한국에서 하던 버릇이다. 어딜 가면 솔방울 한 개라도 주워오는 습성이, 그 이채로운 열매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했다. 축축하여 말랑말랑하다. 


  오르막 돌산을 네 발로 기다시피 할 때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나를 느낀다. 이젠 산행을 포기하지 않길 참 잘했다며 스스로를 기특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 그러는 중에 주먹만한 분뇨덩이가 더러 눈에 띈다. 말똥이란다. 방목하는 말이 이 높고 깊은 숲에까지 자유롭게 누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나뭇가지로 막을 치고 사람이 묵어간 흔적도 있다. 잣나무 관리인이 수확물체취를 위해 묵어간 곳이라 한다. 산짐승이 나오고도 남을 숲에서 대단한 증표다. 돌이끼와 나무이끼. 그야말로 원시림 속이다. 살아있는 나무에 은은한 옥빛이끼가 생경스럽다. 바위위에도 해당화가 피고, 갖은 야생의 꽃들이 올라앉아 있다.


  우리는 안내인으로부터 배운 복식호흡법을 반복하며 깊고도 평온한 원시림지대를 지났다. 고원지대인 만큼 숨이 가쁘다. 입을 벌려 공기를 깊숙이 들이키고 호흡을 길게 하는 것이 에너지소모를 막는 방법이란다. 하늘을 찌를 듯한 숲의 기상. 전나무군락지가 넓게 이어진다. 완만하다. 거기서 또 한번 쉼을 하고 가파른 길을 올라 드디어 야생화평원을 만났다. 자유시간을 얻어 소피를 보고, 꽃 사진을 찍고, 채집도 하였다. 처음 짚어본 지팡이가 이렇게 편리하고 요긴할 줄 몰랐다.


  다시 힘을 얻어 다음 길로의 진입이다. 출발지점의 나무라곤 없던 급경사 길에 대면 숲 속의 오르막길은 아무것도 아니다. 산길 걷는 맛이 제대로 난다. 저 높은 곳에 가야만 숨겨둔 꽃 평원이 펼쳐진단다. 꿈의 궁전이며 신비의 화원이 기다리고 있단다. 는개로 시야거리가 가려진 것이 아쉬웠지만, 나는 거기서부터 초자연을 생각했다. 자연이 나를 받아 안고 내가 자연에 흡수되어 얼마만큼 가벼워질지 스스로를 맡겨보기로 한다. 벼르고 별러 육신이 가 닿은 자리, 즉 잡다한 일상이 끼어들 수 없는 높고 고요한 지점에서 정신의 곡선은 어떠한 율동을 할지가 의문이다. 




  멸(滅)과 생(生)을 만나다


  고사목이 누워 길을 막으면 내 작은 키를 늘려서 건너고, 나무뿌리가 정글이 되어 길이 사라지면 키를 낮추어 앉은걸음으로 틈서리를 빠져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물방울 매달고 함초롬한 야생화를 만나면 주춤주춤하면서…. 어느 고개 숙여 피는 꽃 앞에서는 카메라를 아예 바닥에 뉘었다. 함부로 만지기도 조심스럽고 꽃송이를 젖혀보는 것도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드디어 앞이 확 트인다. 평원이다. 복훗도산 정상에 펼쳐지는 수평의 지대…. 아름드리 숲이 밀어 올리는 넉넉한 바람. 흔흔하다. 태어나 처음 맛보는 기이한 기운에 나는 거의 무아상태가 된다. 그런데 예상 밖에 만나는 움푹움푹한 자국―폐허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를 검은 흙 웅덩이들. 낮은 지대라면 물이 고였으련만, 비가 흔치 않은 지역을 증명하듯 까만 속살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높은 고지에 드러난 마른 웅덩이의 실체는 무엇일까. 게다가 새까맣게 타버린 나무와, 일부는 타고 일부가 남아 누런 가지로 서 있는 그야말로 반은 죽고 반은 살아있는 나무들…. 드문드문 키 작은 나무들이 서 있는 풍경은 오래 전부터 동화나 신화 속에서 익혀온 삽화 바로 그것이었다. 곱디고운 꽃 평원을 만나러 온 길에 맞닥뜨리는 이 처참한 예시. 나고 죽고 나고―처음과 끝, 끝과 처음이 공존하는 분명한 증거. 저 폐허의 상흔이 어떠한 연유로 나를 이곳에 불러 이리도 많은 메시지를 안겨 주는가.


  안개구름이 산머리를 감싸며 기암괴석사이를 감돈다. 내가 알고 있는 단어의 조합에 극한 한계를 느낀다. 땅의 전령(傳令)은 이 높은 곳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오랜 세월 묵묵히 기다린 것일까. 유추컨대 저 검은 자국은 번개 맞아 생겨난 땅의 상처다. 낙뢰로 흙의 조합이 패이고, 나무가 타고, 수많은 생명들이 생을 마쳤을 아린 흔적이다. 검은 웅덩이 주변으로 고향 뒷산에서 보아온 산나물이 즐비한데, ‘산마늘’이라 하며 뿌리째 캐다가 장을 지져 밥상에 올리던 향긋한 식물(일행들은 그것을 ‘산부추’라 함)이다. 몇 가닥 우물거려본다. 알싸한 것이 옛 맛 그대로다.


  갑자기 유년기로 돌아간 듯 가슴이 일렁인다. 멸과 생을 만난다. 죽고 나는 이치를 확인한다. 죽었어도 살고 살았어도 죽은 혼령들이 휘휘 떠돌고 있는 듯한 기운에 정신을 가다듬기 바쁘다. 출산을 마친 여인의 자궁이 바로 저 폐허의 모습일까. 저렇듯 검은 빛으로 퇴락하여 점점 땅 가까이로 다가가다 아예 흙 속에 잦아드는 것일까. 그리고 오랜 세월을 돌아 다시 알토란같은 뿌리를 보유한 식물등속을 품게 되는 것일까. 어머니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할머니가 종잇장 같은 경계를 넘어 시커먼 웅덩이 속에 어린다.


  가슴이 더욱 먹먹해진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토록 검게 패여 나간 땅의 일부를 보러 온 것이로구나. 그 실체가 알록달록한 꽃을 내세워 사람을 불러올린 것이로구나. 아니, 산고를 체험하고 떠난 선대의 수많은 여인네들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게로구나. 환원의 숨결 일렁이는 이 고원지대에 폐허의 자국이 있다고는 사전에 귀띔조차 없었던 바, 나는 이 비밀스런 충격을 조용히 가무린다. 그리고는 숱한 세월동안 무수한 생명을 키워온 흙의 화신과 악수한다. 나름의 의미를 품고 호흡하는 초목들 앞에 경건해진다.


  생명체는 애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광활한 세상을 살아가며 만나는 절대고독이란 바로 이런 극점을 의미하는 것일까. 온 몸이 는개에 젖어 으슬으슬한데,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차오른다. 생의 환희에 뜨겁다. 세상에 나서 같은 시간대를 건너고 있는 무수한 생명들이 내재된 의식의 고리에 엮인다.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에 손을 잡고 서로의 기운을 나눈다. 코앞조차 분간 잘 안 되는 타국 땅 산꼭대기에서 빙글빙글 돌며 강강술래를 한다. 콧등이 시큰해진다. 생의 여정에서 만나는 고독이란 것이 외로움에서 기인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외려 내적으로 공유할 존재가 있을 때 몰려오는 은근한 파동이지 싶다.


  사람과 초목과 아직은 흙에 묻혀 발아를 기다리는 미미한 생명체들…. 그 정령들이 이루어내는 미묘한 기후를 어찌 다 표현할까. 어느 틈에 내가 그들이 되고 그들이 내가 되어 훠이훠이 춤을 춘다. ―어우러지는 품이 아늑하다.  (200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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