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백설부(白雪賦) / 김진섭

이예경 2009. 7. 14. 10:56

백설부(白雪賦)    - 김진섭-


 말하기조차 어리석은 일이나 도회인으로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눈[雪]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눈을 즐겨하는 것은 비단 개와 어린이들뿐만이 아니요, 겨울에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일제히 고요한 환호성을 소리 높이 지르는 듯한 느낌이 난다. 눈 오는 날에 나는 일찌기 무기력하고 우울한 통행인을 거리에서 보지 못하였으니, 부드러운 설편(雪片)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간지를 때, 우리는 어찌된 연유(緣由)인지 부지중(不知中) 온화하게 된 마음과 인간다운 색채를 띤 눈을 가지고 이웃 사람들에게 경쾌한 목례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겨울의 모진 바람 속에 태고(太古)의 음향을 찾아 듣기를 나는 좋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敍情詩)는 백설(白雪),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 것이니, 겨울이 익어 가면 최초의 강설(强雪)에 의해서 멀고 먼 동경의 나라는 비로소 도회에까지 고요히 고요히 들어오는 것인데, 눈이 와서 도회가 잠시 문명의 구각(舊殼)을 탈(脫)하고 현란한 백의(白衣)를 갈아입을 때, 눈과 같이 온, 이 넓고 힘세고 성스러운 나라 때문에 도회는 문득 얼마나 조용해지고 자그만해지고 정숙해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때 집이란 집은 모두가 먼 꿈 속에 포근히 안기고 사람들 역시 희귀한 자연의 아들이 되어 모든 것은 일시에 원시 시대의 풍속을 탈환한 상태를 정(呈)한다.

 

 온 천하가 얼어붙어서 찬 돌과 같이도 딱딱한 겨울날의 한가운데, 대체 어디서부터 이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영혼은 아무 소리도 없이 한들한들 춤추며 내려오는 것인지 비가 겨울이 되면 얼어서 눈으로 화(化)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만일에 이 삭연(索然)한 삼동(三冬)이 불행히도 백설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의 적은 위안은 더욱이나 그 양을 줄이고야 말 것이니, 가령 우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추위를 참고, 열고 싶지 않은 창을 가만히 밀고 밖을 한 번 내다보면, 이것이 무어랴! 백설애애(白雪 )한 세계가 눈앞에 전개되어 있을 때, 그 때 우리가 마음에 느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말할 수 없는 환희 속에 우리가 느끼는 감상은 물론, 우리가 간밤에 고운 눈이 이같이 내려서 쌓이는 것도 모르고, 이 아름다운 밤을 헛되이 자버렸다는 것에 대한 후회의 정이요, 그래서 설사 우리는 어젯밤에 잘 적엔 인생의 무의미에 대해서 최후의 단안(斷案)을 내린 바 있었다 하더라도 적설(積雪)을 조망(眺望)하는 이 순간에만은 생(生)의 고요한 유열(愉悅)과 가슴의 가벼운 경악을 아울러 맛볼지니, 소리 없이 온 눈이 소리 없이 곧 가 버리지 않고, 마치 그것은 하늘이 내리어 주신 선물인거나 같이 순결하고 반가운 모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또 순화시켜 주기 위해서 아직도 얼마 사이까지는 남아 있어 준다는 것은, 흡사 우리의 애인이 우리를 가만히 몰래 습격함으로 의해서 우리의 경탄과 우리의 열락(悅樂)을 더 한층 고조하려는 그것과도 같다고나 할른지!

 

 우리의 온 밤을 행복스럽게 만들어 주기는 하나, 아침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감미한 꿈과 같이 그렇게 민속(敏速)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한 번 내린 눈은, 그러나 그다지 오랫동안은 남아 있어 주지는 않는다. 이 지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슬픈 일이나, 얼마나 단명(短命)하며, 또 얼마나 없어지기 쉬운가! 그것은 말하자면 기적같이 와서는 행복같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편연(便娟) 백설이 경쾌한 윤무(輪舞)를 가지고 공중에서 편편히 지상에 내려올 때, 이 순치(馴致)할 수 없는 고공(高空) 무용이 원거리(遠距離)에 뻗친 과감한 분란(紛亂)은, 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처연(凄然)한 심사를 가지게까지 하는데, 대체 이들 흰 생명들은 이렇게 수많이 모여선 어디로 가려는 것인고? 이는 자유의 도취 속에 부유(浮游)함을 말함인가, 혹은 그는 우리의 참여하기 어려운 열락에 탐닉하고 있음을 말함인가? 백설이여! 잠시 묻노니, 너는 지상의 누가 유혹했기에 이 곳에 내려오는 것이며, 그리고 또 너는 공중에서 무질서의 쾌락을 배운 뒤에, 이 곳에 와서 무엇을 시작하려는 것이냐? ............

 

1939년 잡지 《조광()》에 발표된 서정적 내용의 수필이다. 주로 철학적이며 사색적인 중수필을 발표한 김진섭의 대표작이다. 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순백의 아름다움으로 위안을 가져다 주는 흰눈[]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글로서, 작가 특유의 만연체 문장과 한자어를 구사하여 고풍스럽고 장중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눈이라는 자연현상을 제재로 삼아 세상의 비속함과 눈덮인 순백의 세상에서 느껴지는 주관적인 감상을 표현한 글로서, 깊은 사색과 성찰을 통해 '눈'이라는 평범한 소재가 독특한 향취로 작품 속에 용해되어 있다. 작가는 자연적인 아름다움으로서의 눈과 그 눈으로 뒤덮인 세상을 예찬하되 자신의 체험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현실과 거리를 둔 동경의 세계로서 흰눈을 예찬하였다.

 

글의 핵심 내용은 겨울에 눈이 내리면 지상의 모든 것을 덮어 한결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화시킨다는 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그러한 순백의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현실생활의 비속함에서 벗어나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관념적 세계의 아름다움과 마주하게 된다. 또 눈은 영원하지 못하므로 더욱 아름답고 세속적이지 않으며, 이같은 눈이야말로 초라한 지상의 모든 것을 성스럽게 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원성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수필은 다소 관념적이고 감상적이라는 비판과 한문투의 문장이 많고 지나치게 공허하고 현학적이라는 지적이 따르기도 하지만, 눈에 대한 작가의 자유로운 사색과 삶에 대한 통찰이 독특한 개성으로 형상화되어 수필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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