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씨/ 김선화/ 단수필

이예경 2009. 7. 14. 10:54



  


  “세상에 씨 없는 생명체는 없다네. 꽃이나 동물이나 씨는 있는 법이제. 갖다 묻어두면 꽃을 피우고 씨를 맺을 겨.”


  한창 무르익은 봄날, 덕유산자락의 무주구천동 물가에서 풀 한포기를 떼어내는 나를 보며 어머니뻘 되는 노인이 이른 말이다. 40대에 홀로되어 굳건히 5남매를 건사했다는 노인은, 수더분한 외양과는 달리 드물게 토하는 말씨에서 삶의 철학이 묻어났다.                                              


  나는 “씨”라는 말에 가슴이 더워졌다. ‘씨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은 ‘태(胎) 없는 것은 없다’이고, 이는 곧 ‘결실 없는 것은 없다’이다. 그래서 한 가문은 물론이고, 지식을 주고받는 사제간에도 이 “씨”를 매우 중요히 여긴다. 예부터 “고놈 씨 할 놈일세”하는 말은 싹이 보인다는 말 아니던가. 그래서 여느 때 같으면 '놈'자에 노여워할 일이련만, 제자 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씨'라는 한 마디에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는 것이다.


  특히 무형문화재의 경우 재능을 전수하는 과정은 더욱 끈끈하다. 소리꾼은 소리꾼대로, 곡예사는 또 그 나름대로 실한 후계자를 고르기에 여념이 없다. 제대로 잘 골라야 두고두고 대를 이어갈 것이기에 스승의 안목은 그만큼 중요하리라. 윗대로부터 배워서 후대에 전해야할 사람들의 사명감 역시 그에 버금간다. 전하고 받고 다시 전하고……. 그 대물림은 참으로 경건한 의식이다.


  덕유산 들풀은 여름을 나는 동안 작은 화분에서 희디흰 꽃을 피웠다. 제멋대로 덩굴을 뻗어 자잘한 꽃을 밀어 올리더니 메밀처럼 생긴 깍지를 매달고서 의기양양이다. 나는 그것들의 줄기를 함지박에 대고 떨었다. 채송화 씨처럼 톨이 잘다. 풀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냥 그날의 여행에 의미를 두고 조용히 행하는 의식이었다. 


  그 후 몇 해가 지나고 대지가 얼어붙은 지난겨울날, 베란다 양지쪽에 놓인 차나무 화분에서 예의 그 하얀 꽃이 피었다. 작달막한 키지만 제법 짱짱한 게 눈길을 끈다. 긴긴날을 흙에 묻혀 지내다가 모습을 드러낸 저 놀라운 생명력.


  ―옹골찬 씨앗의 부활이다.  (2006.2.)



5매


***<현대수필> 2006.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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