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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李箱(1910~1937) 한국의 근대 작가, 본명은 해경. 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 집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보(普成高普),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했다. 그림과 건축에도 재능이 있었던 그는 독특한 자기만의 문학을 탄생시켰다. 그는 세상에 즐비하게 늘어선 온갖 질서와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삶을 경영해 갔다. 평범함을 거부하는 독특한 삶의 흔적을 남겼고, 그의 작품은 언제나 낯설고 실험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쉽게 현실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세상은 언제나 냉혹함만을 안겨 주었다. 좌절을 어루만져 줄 사랑마저 그의 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병은 악화되고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에 신음해야 했다. 죽음을 바라보는 까마귀의 눈처럼 그는 아득함 속에서 절망을 목격했다. 하지만 날개 같은 희망을 갈구했다. 마지막 예술에 대한 희망을 안고 떠난 동경 길.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얻고자 향한 그곳에서 그는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만다. 혹독한 현실 속에서 자기만의 예술혼을 불사르다 먼 타향에서 새벽이슬처럼 사라져 간 것이다. 이상은 26년 7개월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뛰어난 시와 소설 그리고 수필을 남겼다.
이상 연보
1910 9월 23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출생. 본관은 강릉이며 김해경(金海卿)이 본명. 1912 부모와 헤어져, 아들이 없던 통인동 백부 밑으로 가 24세까지 성장. 5세부터 지나친 애정을 품은 백부에게 한문을 배움. 1917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신명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 그림에 재질을 보이고 부모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시작됨. 1921 신명보통학교 4년 졸업. 백부의 교육열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경영하는 동광학교(중학과정)에 입학. 1924 동광학교가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병합되어 4학년에 편입학. 교내 미술전람회에 유화 「풍경」이 입상하여 화가의 꿈을 키움. 1926 보성고보 5학년 졸업. 같은 해 동숭동에 있는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공대 전신) 건축과 1학년에 입학. 미술에 더욱 열중하여 교내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 시와 삽화를 발표. 1928 이상(李箱)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는 동기가 생김. 1929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백부의 알선으로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취직. 관방 회계과 영선계로 자리를 옮김.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각각 당선. 1930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조선』 지에 연재. 1931 시 「이상한 가역반응」,「파편의 경치(景致)」,「삼차각설계도」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 꼽추 화가인 구본웅을 만나 함께 예술과 삶에 대해 고민함. 서양화 「자화상」을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 백부의 사망. 1932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4석으로 당선. 비구라는 이름으로 시 「지도의 암실」과 처음으로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지도의 암실」, 「건축무한육면각체」를 『조선과 건축』에 발표. 1933 심한 각혈로 총독부 기수직을 그만둠. 통인동 백부의 집을 정리하여 효자동에 집을 얻음. 백모는 계동으로 이사를 하고 21년 만에 친부모, 형제들과 함께 살게 됨. 요양차 간 황해도 연안 배천온천에서 작부 금홍을 만남.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 다방 「제비’를 개업 금홍과 동거 생활 시작. 시 「이런 시」, 「꽃나무」, 「1933.6.1」, 「거울」 등을 발표. 1934 김기림과 정지용의 추천으로 <구인회(九人會)>에 가입, 본격적인 문학 활동 을 시작. 『매일신보』에 시 「보통기념」을 발표 『조선중앙일보』에 시 「오감도(烏 瞰圖)」를 발표. 「오감도」가 큰 물의를 일으키자 15회로 중단. 박태원의 신문 연재소설 「소설가 구보(仇甫) 씨의 1일(一日)」에 하융(河 戎)이라는 이름으 로 삽화를 그림. 시 「지팽이의 역사(轢死)」, 「소영위제(素榮爲題)」 등을 발표 1935 시 「지비(紙婢)」, 「정식(正式)」 발표 경영난으로 허덕이던 다방 ‘제비’를 닫고 금홍과 헤어짐. 인사동의 카페 ‘쓰루(鶴)’를 인수하여 경영. 이곳에서 두 번째 여인을 만남. 카페 ‘쓰루’와 명동의 다방 ‘무기(麥)’ 등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생활고 에 허덕임. 가족은 효자동에서 신당동 빈민촌으로 이사. 평안남도 성천 등지를 여행. 이곳에서 수필 「권태」 등의 소재를 얻음. 수필 「산촌여정」을 발표. 1936 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는 <창문사>에 취직. 창문사에서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을 편집 출간. 1집만 내고 창문사를 나옴. 폐결핵을 앓는 김유정과 친분을 쌓으며 동변상련의 아픔도 나눔. 시 「가정(家庭)」, 「지비(紙婢) 1 ? 2 ? 3」, 「역단(易斷)」 등 수필 「서망율도(西望栗島)」, 「조춘점묘(早春點描)」, 「여상」, 「추등 잡필」 등 단편소설 「지주회시」, 「날개」, 「봉별기」 등을 발표.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임. 전부터 알았던 이화여전 출신 변동림과 결혼. 요양과 새로운 재기를 위해 10월 일본 동경으로 떠남. 동경에서「공포의 기록」,「종생기(終生記)」,「권태」,「슬픈이야기」,「환시기(幻視記)」등 을 씀. 시 「위독」 수필 「행복」, 「19세기식」 등과 동화 「황소와 도깨비」를 발표. 1937 2월 중국과의 전면전을 준비하던 일본 동경에서 불온 혐의로 경찰에 체포 구금됨. 건강이 악화되어 동경제대 부속병원에 입원했지만 이미 회복될 수 없는 상태. 4월 17일 새벽 4시, 28세(만 26년 7개월)의 일기로 세상을 떠남. 변동림에 의해 유해는 화장되어 귀국.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지만 그 후 유실됨. 5월에 단편소설 「종생기」와 수필 「권태」, 「슬픈이야기」 등이 유고로 발표. 1938 단편소설 「환시기」가 유고로 발표. 1939 단편소설 「실화(失花)」,「단발(斷髮)」,「김유정(金裕貞)」과 수필「실락원」,「병상이후(病 上以後)」,「동경(東京)」,「최저낙원」을 유고로 발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