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두더지잡기 철학 / 김선화

이예경 2009. 8. 5. 21:36

두더지잡기 철학

                                                                                     김선화



  간밤 꿈에 두더지를 잡았다. 들썩들썩 풀뿌리 흔들리게 땅을 가는 놈들을 앞질러 뛰어가서 단단히 막았다. 전진을 더 못하게 흙을 밟아 행로를 차단하고 ‘요놈들 어디 보자’ 하며 흙을 걷어치웠다. 그런데 난데없는 움푹한 구덩이엔 산 사람들만 그득히 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차! 실수였구나. 두더지를 잡으려면 뒤를 막는 것이지, 앞을 차단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꾸물거리는 사이 두더지는 이미 저희들이 일궈놓은 땅속 길로 재빠르게 달아나버리는 것을…. 두더지는 그렇다 치고, 텅 비었어야 할 자리에 어째 산 사람들이 그득했던 것일까. 나는 그 점 때문에 실소가 터졌다. 그럼 내가 간밤 꿈에 사람을 잡았구나. 제 꾀에 넘어간 내가 잡혔구나. 


  어린 날, 두더지는 내 식용할 고기였다. 계룡산 상봉을 중심으로 신도안을 바라다본 자리에서 서남간 끝자락에 사는 두더지들이 다 내 몫이었다. 어머니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지 마을사람들에게 아예 소문을 내어 우리 집을 두더지 집합소로 삼게 하였다.


  “어린 것이 늘 아기 업어주다 보니 뼈가 안 여물어 허리 병을 앓네요.”


  병을 소문내니 약도 따른다고, 해가 뉘엿뉘엿 기울 즈음이면 우리 집 사립문으로 두더지가 심심찮게 들어왔다. 어쩌다 아버지 손에 걸려드는 놈도 있었지만 대개가 마을사람들이 잡아온 것들이다. 이웃집 아저씨가 비료포대에 넣어올 때도 있고, 내 친구 오빠가 지푸라기로 그 통통한 배를 묶어 장난스럽게 가져올 때도 있었다. 두더지가 지푸라기에 묶여 버둥거리며 오는 날은 동네방네 개구쟁이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친구 오빠는 사립문발치에 서서 두더지가 대롱거리는 팔만 쭉 뻗을 뿐, 안마당으로는 한 발짝도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밥을 짓던 어머니는 반색을 하며 무명앞치마에 손을 문지르고, 두더지를 건네고 돌아서는 이들의 얼굴에도 빙긋하니 미소가 물려있었다. 그런 모습을 나는 동생들을 업고 놀며 다 보아두었다.


  두더지가 집에 든 날이면 저녁밥상이 들어오기 전에 내가 먼저 부엌으로 호출당해 나간다. 이어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는다. 아버지는 고무래로 숯불을 긁어내어 바싹 탄 고구마 같은 것을 궁굴리며 꺼낸다. 그리고는 부지깽이로 톡톡 두드려 재를 턴다. 그때부턴 고소한 냄새가 코로 올라온다. 미꾸라지 스무 마리를 구은 것보다 더 알진 냄새. 어느새 부뚜막엔 막소금 한 옴큼이 놓였다. 앞다리 뒷다리를 야무지게 잡아 쪽쪽 찢어주시는 것을 받아 우물거리면 한 입 가득씩 씹히지는 않아도 그건 내게 확실한 고기였다. 약탕기에 끓여서 보자기로 짜주는 일도 아버지 몫이었는데, 반 대접가량의 뽀얀 국물을 마시고 굵은 소금 한 알을 받아 물면 뱃속이 어지간히 든든하였다.


  그렇게 내가 두더지를 먹은 날, 어머니는 보리밥보다 못한 호밀밥 한 상에 푸성귀를 얹어 방에 들이고 뒤따라 물 양푼을 들고 문턱을 넘는 나는 괜스레 허둥댔다. 나중에는 동생들도 다 알게 되어 두더지는 아예 ‘누나의 약’으로 통했다.


  “두더지는 뒤를 막는 거야. 그래야 배를 뒤집고 꼼짝 못한다고.”


  사람들로부터 두더지잡기 강론을 무수히 들어두고도 나는 사실 한번도 두더지를 잡아보지 못했다. 길을 가거나 밭일을 하다가 녀석이 지나가는 기색이 느껴지면 가슴부터 마구 벌렁거렸다. 급한 마음에 번번이 앞을 막고 나면, 뒤늦게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허전함이라니…. 한때는 그것밖에 안 되는 내 순발력이 어이없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차라리 그런 내가 다행이라 여겨졌다.


  이는 어느 틈에 내 삶의 철학이 되어 나를 이끄는 추가 된다. 어떤 불의와 맞서 앞을 탁 가로막고 싶을 때 한 박자 쉴 수 있는 여유를 얻는다. 그리고는 나 자신에게 나직나직 타이른다. 막지마라, 숨 막힌다. 수상쩍게 들썩거리는 근처에서만 발을 굴러 신호를 보내어 두자. 도망쳐야 할 길을 막으면 부끄러움으로 배를 뒤집는다. 불그레한 심장부를 보이며 항복하는 모습을 어이 보려하느냐, 적당 선에서 놔둬라. 오죽하면 쥐를 모는 데에도 틈을 주라하지 않았는가.


  정면 돌파는 금기사항이다. 알아차리게만 하고 말자.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딱 거기까지만. 아니, 아무리 곧은 일이라도 그 정도로만. 어떠한 사건의 이면을 다 알아도 이쯤의 거리에서 슬쩍 눈감아주며 스스로의 양심에 두 손 들게 하자. 그것이 진정 질주의 함정을 경계하는 삶의 지혜일지니.


  고로 나는, 평생 동안 두더지 한 마리도 못 잡는 숙맥이기를 자처한다.




  원고지12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