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날개 / 김선화

이예경 2009. 8. 5. 21:38

날개

                                                                                  김선화 



 


  산 어귀 무덤가에서 한 남자의 가슴이 허영허영 젖네요. 종이에 불을 댕겨 연기를 피워 올리며 ‘날아라, 날아라, 날아가 보오’ 합니다. 


  배움에의 갈증에 가슴 옥죄여하다 일찍 꺾인 여인이 있답니다. 가까스로 인생의 산 하나를 넘었다며 해맑게 웃었는데 40중반에 그만 깃을 접었습니다. 날개 얻기를 그토록 소망하더니, 작은 날개 한 쌍 얻어 겨우 몇 번 파닥이다 세상 저편에 들었습니다. 광활한 세상 빛을 이제야 만났는데, 살맛나는 세상을 향해 간신히 가슴이 펴졌는데, 더 높은 고지에 오르지 못하고 그만 병을 만났다는군요.


  그렇게 여인을 보내고 일주기가 되던 날, 아내 생존시에 이래저래 몹쓸 짓을 했다는 남자가 입시학원 문을 밀고 들어섰습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대학입학자격 증서를 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남의 이름자리에 아내의 이름을 적어 넣은 사본이나마 불살라줘야겠다 하더군요. 갸륵한 발상이지요. 하지만 당사자가 없는 마당에 그러한 허영이 무슨 소용일까요. 그러나 맘씨 넉넉한 도반들은 이미 철들어버린 고인의 자녀들을 생각해서라도 선선히 응해주었습니다.


  그녀를 떠나보내며 저는 통한의 눈물만 삼킬 뿐 그 어떤 고별인사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혼자서 속으로 맹세했지요. 훗날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후미진 그늘에 숨어 우는 이들의 심중을 어루만지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이지요. 이는 누구라도 해야 할 일이 아닐는지요. 세상 이치라는 것이 서광이 비치는 양지가 있는가하면 음지의 서늘함도 존재하는 것을요. 여기서 ‘음지’라 함은 교육받을 시기를 놓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사람들의 세계를 일컬음이랍니다. 단단히 여미지 않으면 시시때때 솟구치는 의식의 닻을 어찌 감당했을까요. 하여 그 망아지 같던 기운을 일정기간 동안 잡아매어두던 공간을 이르는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고 나서 강산이 몇 번 변할 시간이 흘렀습니다. 헌데도 저는 그 여인이 잊혀지지 않는군요. 아직도 날지 못하는 숱한 새들을 날려볼 요량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답니다. 제 가슴 어느 자리에 이리도 많은 새들이 깃들었는지 저도 잘 모를 때가 있지요.


  실은 그게 아니에요. 모른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입니다. 다 알아요. 알고말고요. 스스로가 제 무게에 겨워 둘러대는 것이지요.


  “이 다음에 너를 여류문교부장관 시켜줄게. 또 여류소설가 만들어줄게.”


  어려서부터 제가 하는 짓을 눈여겨보던 오빠가 내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르던 말이랍니다. 열 살짜리 계집아이에게 ‘여류’라는 말이 어찌나 멋있게 들렸는지 아시겠어요? 서울 간 오빠의 한 마디에 힘을 얻은 저는 현실파악도 못한 채 꿈을 크게 품었답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장관은 못되어도 작가는 될 듯싶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똑똑하고 핸섬하기로 소문난 오빠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예삿말은 아니리라 여겨 철석같이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어길 것을 염두에 둔 약속은 아니었겠지만 오빠의 군 입대로 일은 빗나가고……. 제 어깨엔 감당키 어려운 짐이 얹혀졌답니다. 누가 딱히 강요한 것도 아닌데 가족구성원이라는 멍에가 저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태의 흐름을 일찍 파악한 사람이 행동도 빠르지요. 어떤 길이든 자신이 선택하여 걷기 마련 아니던가요?


  그때 남동생을 일곱이나 둔 누이 된 자의 행로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내면에서는 무한히 날고자 퍼덕이나 번번이 현실의 벽에 치어 의식의 닻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그 무렵의 열정은 거센 파도나 다름없었던 게지요. 그래도 힘차게 비상할 날을 그려보며 가슴 흔흔해지던 순간순간이 있었으니, 지금 와 돌이켜보면 죄다 그리움입니다. 그리고 젊은 날의 순수를 값지게 안을 수 있어 참 다행입니다. 생각할수록 작은 몸뚱이 안에 무엇이 그리도 가득 차 있었는지 의아하답니다.    


  이후 저는 주경야독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헤쳐 온 이들을 만나 취재한 일이 있습니다. 전쟁 중에 북에서 내려와 물지게질로 연명했다는 남자는 어엿한 의사가 되어 온화하게 늙어가고, 뼈가 여물기 전부터 가장노릇을 했다는 작달막한 남자는 수입품선박의 방역을 담당하는 사업체를 꾸려가며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어느 여인은 아주 덕성스런 변호사가 되어있고, 또 누군가는 가식 없이 한들거리는 들꽃 자체였습니다. 


  옛 고생은 이미 세월 저 너머의 이야기이련만, 당시를 회억하며 상기된 기색을 보일 때는 풋풋했던 청소년기의 모습을 연상케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인생의 장벽에 승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멋지게 비상한 새들입니다. 기존의 날개에다 숨겨둔 날개 하나씩을 더 보유한 사람들인 것만 같습니다. 


  음지와 양지의 변은 과거의 단면만이 아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순환이랍니다. 물밀듯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경제’라는 고리에 물린 수레바퀴는 마냥 고른 소리를 내지는 못하니까요. 기우뚱기우뚱 부대끼며 서서히 삶의 구석구석을 핥고 지나간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가리려한다 하여 가려지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생의 절박한 자리에서 서성여본 사람이 희망가도 잘 부르지요. 이제 아시겠는지요. 음지에서 양지로의 꿈을 꾸던 이들이 지난 세월 동안 무수히 존재했다는 것을요. 아울러 음지와 양지사이에서 우리들의 날개는 느린 템포로 조금씩 자라난답니다. 그런 고로 이 날개는 아무 곳에서나 함부로 펴는 것이 아니랍니다. 강약의 세기도 잘 조절해야 멋진 비행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쉬운 이치를 저는 이제야 어렴풋이 알겠어요. 제가 참 무지했지요?  (2009. 1.) 




  14매


 <<계절문학>> 2009. 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