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밤꽃 필 무렵 /김선화

이예경 2009. 8. 5. 21:37

밤꽃 필 무렵  

           - 고부.5 -


                                                                            김선화




  밤꽃 필 시기엔 비가 많다. 하여 마늘이며 감자 캐는 손이 바쁘다.


  형님네 농장에서 땅거미 질 때까지 열무작업을 하고 헐레벌떡 올라왔으나 대문 안엔 어머님이 계시지 않았다. 아버님 산소가 모셔진 산밭에서 아직 내려오지 않은 것이다. 나는 무섬증이 있는 어린 두 아이만을 집에 둘 수가 없어, 앞세우고 걸음을 재촉하며 산밭을 향했다. 밤꽃 냄새 내려앉는 어둑한 밭고랑에 어머님이 쭈그리고 있다. 


  “저물었는데 내일 하시지 않고요.”


  “곧 장마가 온다잖냐? 대구 애기 백일에도 다녀와야 하고.”


  그 말씀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절간에서 행자생활을 하던 여성을 큰스님 주선으로 넷째며느리로 맞았으니 어머니에게 있어 그녀는 부처님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내게는 아랫동서요, 어머님으로서는 만만하게 여겨도 될 며느리다. 그러나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너무도 쉽게 받는다. 집안에서 아예 그녀를 부처님 대하듯 하니 말이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바로 윗동서로서의 내 눈엔 그렇게 비치니 분명 시샘이라면 시샘이리라.


  날은 점점 어두워져 이젠 아예 어느 것이 마늘이고 어느 것이 돌멩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나는 울컥하는 서러움을 호미에 실었다. 반은 선걸음으로 성큼성큼 호미질을 하며 손끝의 감각으로 동글동글한 것이면 무조건 캐냈다. 작은아이는 아예 흙에 주저앉아 처분만 바라고, 일곱 살짜리 큰애는 일을 거든답시고 바닥에 캐놓은 것들을 플라스틱그릇에 주워 담는다. 


  겨우겨우 포대에 여미어 이고 지고 돌아오는 발길이 천근이다. 장마에 대비한다는 말은 하나의 구실일 수 있다. 발등에 불 떨어진 모양으로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다가오는 손자 백일에 가시려고 그렇게 일을 몰아서 하신 것을 내가 왜 모르랴. 전등 아래 토방에다 짐을 부리고 보니 과장하여 마늘 반, 돌 반이다.


  “응, 대구 갈 때 쓰려구.”


  늦은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오니 어머님은 새 양산을 매만지며 역시 대구 아들네에 전화 넣어보라 하신다. 번호를 돌려드리니 무어라 몇 말씀 나누시다 말고 조용하시다. 그리고는 전화기를 밀어놓으며 벽을 향해 모로 누우신다. 아예 내 얼굴은 보지도 않으려는 듯. 왜 그런지 묵시할 나도 아니어 여쭈니, 부처님으로 알았던 며느리가 단칸방에다 날 더운데 어딜 오시냐고 했단다. 올라와 백일잔치를 하고 가라는 말에도 대답이 시원찮고.


  동서가 어머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멀리 사는 아들네 살림살이 구경도 한번 하고 한창 젖살 오르는 손자도 보고 오려 한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처사였다. 그리고 이곳에 집안사람이 많으니, 아들네가 올라오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손자자랑 할 마음에 가슴 한껏 부푸신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나는 애나 어른이나 토라져 말이 없을 때를 무척 거북해한다. 스스로 풀릴 때까지 두고 보는 성향이 못 된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얽힌 불편요인이 뭔가를 알아보아 얼른 해결점을 찾아 제시해야 마음이 편타. 하여 동서에게 재차 전화를 걸어 어머니 의중을 전하였다. 새 양산까지 사놓고 기다리신 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동서가족은 아기를 데리고 올라왔다. 나는 수원장을 보아다가 집에서 음식장만을 하여 큰 손님을 치렀다. 스님이며 사돈네가 다녀가고 한마을에 사는 일가들이 수십 명 몰려와 아기를 보고 갔다.


  그러는 사이 평소 몸 관리를 잘해야 하는 우리 큰애는 피오줌을 눴다. 핏빛! 앵두빛깔이었다. 나는 무너졌다. 사랑방 구석에 웅크리고 토하는 내 오열을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다. 사업에 미친 남편은 1주일에 한번이나 올까말까 한 처지이니 나 혼자 이런 저런 일들을 감당해야 했는데, 그때는 시어머님도 윗동서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설령 남편이란 사람이 내 곁에서 지켜보았다 해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그는 그 무렵, 내게 다정하다가도 자기 혈육 앞에서는 안사람을 몸종 대하듯 하는 언사가 자연스러웠으니까. 뿐만 아니라 그다지 내세워지지 않는 한 가문에서 그러한 권위가 풍속이라면 풍속이었으니까.




  그 길로 큰아이는 대학병원에서 1주일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신장담당의로부터 한심스런 엄마란 취급을 받으며 나는 아이를 살폈다. 어머니는 “너 병원에서 살거니?” 하며 호통이시고….


  지금도 그 일만 떠올리면 가슴이 에인다. 세월 속에 그날의 아찔한 순간을 곧잘 잊고 살지만 탱글탱글한 햇마늘을 보면 회한의 물결이 인다. 나를 누르고 주변 살피기에 급급했던 지난날들로 목이 먹먹해진다. 다시 그런 처지에 놓여 시집살이를 하게 된다면, 슬금슬금 꾀도 피며 내 자식을 조금은 더 아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몇 세기가 흐른다 해도 사람간의 주변 헤아리는 덕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싶다. 특히 암암리에 이어져오는 여인네들의 평행선은 무언의 약속과도 같다. 그 질서 속에서 화합의 노래는 울려 퍼질 테니까.


  세월이 이만치 비낀 지금 내 젊은 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남편은, 마치 남의 과수댁이야기를 훔쳐듣는 표정이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언제? …그랬어? …으응”하며 심심찮게 응수한다. 꼭 먼 길을 소풍 다녀온 사람 같다.  (200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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