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기도와 어머니 20160703

이예경 2016. 7. 3. 00:04

 92세 시어머님께 또 뇌졸증이 왔다. 세번째로 쇼크가 온것이다.  지난주까지는 보행기 의지해서 걸으셨는데 갑자기 왼쪽이 마비되셨다. 아침에는 평상시와 다름 없이 복지관 버스를 타고 가셨는데 귀가길에 버스에서 내리다가 주저앉으시더니 도통 일어나지를 못하셨다. 겨우 부축해서 집에 들어 오신 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시니 화장실도 식사도 혼자서 해결을 못하신다.

 

다음날 병원에 입원하시자고 말씀 드렸는데 어머니께서는 완강하게 안가시겠다고 하셨다. 요즘 마침 메르스가 유행인데 그거 옮아서 죽기는 싫다는 말씀이셨다. 우리도  병원에 모시고 가는 것이 조심스러워 며칠 집에 계시다가 시동생들이 모셨다.  예상대로 의사는 뇌검사를 비롯하여 피뽑는등 각종검사를 했고 지금은 왼쪽마비가 왔는데 곧이어 오른쪽으로도 올 수 있다며 증상 완화를 위해 계속 길게 병원에 계셔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를 뵈니 얼굴이 달라보인다. 정신은 말짱하시지만 틀니를 빼신데다 말씨가 어눌해지셔서 열심히 말씀하셔도 절반은 못알아듣겠다. 그런 중에도 검사하느라 주사바늘로 아프게 찌르고 이방저방 옮겨다니며 힘들기만하지 나아진 것도 없다고 말씀하신것 같다. . 입원동안 온식구가 병원으로 다니랴 어머니께서 간병인에게 불만이 많으시고 더구나 간병인이 엿새만에 쓰러져 못나오게 되는등 편치않은 일들이 지나갔다.
 
첫번째쇼크는15년전에 온 것같다. 77세일때 겉보기엔 평소와 크게 달라져보이지 않았으나 아버님께서 어머님이 총기도 떨어지고 좀 이상하니 병원가서 검사받아야겠다 하셨다. 닷새간 입원하여 정밀검사 결과, 뇌사진에 하얀점이 여러개 보이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을거라했다. 일생을 야무지게 자신만만하게 살아오신 어머니께서 가끔은 어린애같을 때가 있어 잠시 편하게 보일때도 있었다. 퇴원후부턴 아버님께서 설겆이도 해주시고 집안일을 도우시며 사셨는데, 설겆이가 이렇게 힘든건지 몰랐다고 하셨다.
 
두번째 뇌졸중쇼크는 84세에 심하게왔고 초기에는 발가락하나도 못움직이시던걸 조금씩 회복되어 두달이지나면서  물리치료 받으시고 보행기 의지해서 걸으셨다. 손가락하나 못움직이다가 걷게되니 처음 두 달간 병원비가 8백만원이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그때는 나날이 좋아지셔서 우린 정상 회복에 대한 희망이 클 때였는데 의사는 보행기 의지하여 공원에 산보 정도 가실수 있으면 최선이고 어머니 걸음이 더이상 좋아지긴 힘들다고 했지만 우리모두는 계속 최선을 다하면 더 나아지실것으로 믿었다.그래서 동서가 잘 안다는 인천 은혜병원에 4개월 계시며 물리치료를 열심히 받으시도록 해드렸는데 의사가 말해준대로 더나아지지도 않았다. 월2백만원 병원비도 감당이 쉽지 않았지만 더이상 달라질것도 없다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를 우리집으로 모셔왔다 

 

내집에서 모셔보니 요실금 변실금 보행불편 상태라 오물 빨래가  많았고 병원에 갈일도 자주 생기고 외출시 휠체어를 차에 싣거나 부축해드리고 목욕시켜드리는등 육체적인 일이 6십대인 내가 각오했던 것보다 힘들었다.매번 휠체어로 모시고 다녀야하고 고혈압 당뇨 고지혈약은 복용중이었지만 조금 불편한대로 식사는 계속 잘하셨으므로 그 상태로 6년을 살아오셨다. 그런대로 부축해드리고 목욕시켜드리고 휠체어를 밀어드리면 만족스러워 하시며 여왕같은 자태로 고개를 들고 둘러보시며 잘 적응하셨다. 변덕도 있고 워낙 불같은 성격이신데 어머니께서도 뭔가 각오를 하신것 같았다.  

 

낮에는 노인복지관의 주간보호실에서 어르신들끼리 어울려 운동 노래 종이접기 점심식사 간식시간을 즐기고 오후에 귀가하셨다. 그런데 바깥에서는 성격이 원만치 못하셔서 이웃들과 툭하면 크고작은 불난이 생기기도했다. 그럴때면 자신은 다 잘하셨는데 못배우고 못된것들이 대든다고 매우 노여워 하셨다. 때로는 어성을 높히어 좀 앞뒤가 맞지않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세상에 어머니편이 하나도 없다고 하시니 보기 딱했지만 그래도 나는 며느리니까 어머니편으로서 잘 들어드려야할것 같아서 열심히 끄덕이며 경청했다. 하시고싶은 말씀이 많으신데 아들이나 손주가 들어줄것 같지는 않아서다. 

 

 그런데 나도 노력은 하지만 매일 좌충우돌 싸운 이야기만 하시니 언제까지 그러시나 싶어서 상담학 책을 구해 읽어보며 때로는 상대방의 기분에 대해 생각해보시게하고 전과는 다르게 대처하는 방법을 제시해 드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공감을 못해서 기분이 언짢으신 표정이었는데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을까싶다. 차츰 잘 들어주시더니 6개월이 지나면서 다행이 싸운 건수가 줄어들었다. 며느리 말대로 실행해보니 괜찮구나 하신 것 같다. 에레베타에서 만난 이웃들은 누구나 양보해주고 친절하게 대해주니 고마웠다. 
 
어느날 독일에서 사는 내친구가 잠시한국에 들렀다. 목사 사모님인 친구는 시어머니를  보더니 마음에 상처가 많으신거 같다고 내게 어머니를 모시고 가정예배를 시작해보라고 했다. 내집에 계신동안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못할게 뭐가있나싶어 남편에게 말하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매일아침 7시에 어머니방에서 단둘이 예배를 시작했다. 예배주관을 처음 해보지만 진심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어머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리라 싶었다. 갈라디아서로 시작. 찬송, 기도, 말씀3절 읽고 간증, 찬송, 서로 포옹하고 기도로 맺는 예배를 1년 넘도록 매일했는데 어머니께서 예배시간을 기다리시고 기뻐하셨다. 놀라운일은 기도응답이 왔다는 사실이다. 에레베타에서 만나는 이웃들이 어머님 인상이 처음에는 무서운 할머니였는데 부드럽게 바뀌었다고 인사를 했다. 
 
그런대로 내집에서 6년을 모셨는데 그러다가 사단이 났다. 허리병이 생겨 내가 누워버린 것이다. 결국 척추수술을 하게되었고 3개월간 앉지도 말라는 몸조리를 해야했으니 ..... 집안에서 환자 두 명을 함께 돌보는게 감당이 안되니 어머니께선 다른 집으로 가시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많으니 "다른아들네로 가면 되지" 하시며 태평이셨다. 그런데 그때 시동생들의 본색이 다 드러났다. 어느 아들도 오라는 집이 없었던 것이다.  세 명의 시동생들은 지난 4십년간 큰형의 그늘 덕을 볼 때는 형님과 형수를 떠받들며 우애롭고 다복한 가족이 자랑스럽다고 자랑하고 다니더니 형님에게 우환이 생기자 도움은 커녕 모두 돌아앉아버렸다. 각자 사정이 있겠지만 아픈 내가 죄인일 뿐이다. 
 
그뒤로 여러가지 예기치않았던 일들이 지나갔고 형만한 아우 없더란 옛말을 실감했다. 우여곡절끝에 세동생들이 6개월씩 모시며 한바퀴 돌아가고 양로원에도 잠시 계셨고 최근에는 딸네 계시던 중이었다. 두어달전 손녀 결혼식에도 건강하신 모습으로 오셨고 잘계셨는데 갑자기 응급상황이 왔다. 올해 연세가 92세... 이번에도 2달 입원하시면 걷게 되실까? 지금은 10년전 쓰러지셨을 때처럼 대소변 받아내랴 식사때 떠먹여 드리랴 말씀도 어눌하고 거의 식물인간 상태신데 10년전 같이 다시 회복되실수 있을까 ... 조만간 음식을 못삼키게되면 콧줄튜브로 식사하실수 있고 그렇게 병원에 누운 채로 십년씩 사시는 분들도 있던데... 
 
입원 1주일만에 검사를 마쳤지만 어머니는 나아진 증상이 하나도 없고 편마비 와서 온몸이 거동불편이신데 병원에서는 더이상 해드릴게 없다고 했다. 시누이는 어머니를  퇴원시켜 다시 집에 모시고왔다. 정신 말짱한 어머니를 인간적으로 어떻게 낯선 병원에 두고 올 수 있겠느냐며 자신이 집에서 편안하게 잘 모셔보겠다고 한다. 힘들거란 것을 모를리 없는데 너무나 고맙고 미안하다. 시누이는 자기가 결혼 후 살기바빠서 친정에 공헌한게 하나도 없었다는 것과 아버지 생전에 어머니의 마지막을 딸이 돌봐드리라고 유언하셨다는 것을 말하며 천사같이 웃는다. 어머니께서 복이 많으시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마이너스게임인데 그래서 자손들이 현명하게 잘 버텨얄텐데.... 오늘도 이런저런 걱정하면서 엎치락 뒤치락 잠을 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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