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한국을 깨우쳐준 '천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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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백경’에서 시작한 우리 것에 대한 탐구…
쉼없이 계속된 ‘38년 大항해’… 死神앞에서도 붓꺾기 싫었다
사실 이 땅에서 이규태의 독자보다 독자 아닌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8년 몸을 의탁하던 백담사 궁벽한 객사(客舍) 방을 TV가 비춘 적이 있다. 생활편의품 하나 없이 썰렁한 방에 책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놓여 있었다. 물러난 권력자가 황망하게 서울을 뜨면서 챙겨 온 것이 이규태의 책이었다.
이규태는 기자가 노력하면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기자였다. 조선일보에서 45년을 근속했고 퇴직한 뒤로도 2년을 독자와 함께 했다. 그가 연재한 대형 시리즈만 37개를 헤아린다. 1968년 60회를 이어간 첫 연재 ‘개화백경(開化百景)’부터가 한국 신문사상 가장 긴 전면(全面)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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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는 한국인에게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깨우쳐준 기자였다. 그 평생작업에 눈 뜬 계기가 작가 펄 벅과의 만남이었다. 1960년 방한한 펄 벅은 농부가 볏단 실은 소달구지를 끌면서 지게에 볏단을 지고 가는 모습에 감탄했다. “농부도 지게도 달구지에 오르면 될 텐데 소의 짐을 덜어주려는 저 마음이 내가 한국에서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규태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풍경에 펄 벅이 감동하는 것을 보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실마리를 잡았다. 왜 우리 음식엔 물이 많은지, 갓은 왜 비도 새고 바람도 새는지, 우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왜 가슴이 아니고 배가 아픈지. 의문이 끝없이 일었다. 우리 것의 원형을 찾는 대장정(大長程)이 시작됐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었다.
이규태는 널리 보고 오래 기억하는 마지막 박람강기형(博覽强記型) 기자였다. 다들 인터넷에 널린 남의 것 골라다 쓰는 세상에 스스로의 눈과 귀로 지식의 곳간을 채웠다. 책 1만5000권이 메운 집 지하실은 ‘한국학 벙커’였다.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한 필법의 원천이었다. 책마다 책장이 접혀 있거나 밑줄 긋고 메모한 흔적이 책과 주인의 수십 년 대화를 말했다. 그나마 멀쩡한 책들이 그렇고, 훨씬 더 많은 책이 분해되고 오려져 파일에 담겼다. 그가 시행착오 끝에 나름대로 창안한 분류법으로 만든 색인이 10만개를 넘는다.
이규태는 이름이 ‘한국학’ 앞에 붙어 불렸던 기자였다. 그는 근래 부쩍 “저 비싼 책, 희귀한 자료들을 누군가 활용하면 좋을 텐데” 되뇌곤 했다. “대학처럼 함께 공부하는 선후배들이 있었다면 참 할 일이 많은 분야인데 혼자 힘으론 한계를 절감한다”고 했다. 그는 아사히신문 논설위원 출신으로 일본 민속학을 개척한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 이야기도 자주 했다. 야나기다가 채집한 방대한 자료를 후세가 정리해 체계를 세우는 ‘야나기다학(學)’이 생겼듯 ‘이규태학’도 곧 나올 것이다.
이규태는 겉은 질박하고 속은 따스한 기자였다. 전북 장수의 외진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종이를 처음 보고 너무 신기해서 그걸 접어놓고 자다가도 펴보곤 했다”고 말했다. 어렵게 자란 만큼 그는 평생 검약하게 살았다. 집 변기 물통에 벽돌을 넣어 물을 아꼈고 점심은 몇 천원짜리만 먹었다. 그러나 뜻 맞는 후배들과는 곧잘 낙지집, 선술집에서 소주 자리를 벌였다. 맨날 그 양복이 그 양복이었어도 후배 전세금은 선뜻 빌려주곤 했다.
그는 이발소에 가지 않고 주례 서지 않고 TV에 나가지 않는 ‘삼불(三不)’을 지켰다. “생긴 것이 둔하고 말주변 없어서”였다. 수십 년 고정 칼럼을 이어온 피 말리는 행군은 그 굼뜬 듯한 무던함, 진중한 참을성, 질박한 성품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규태는 자기를 알아보고 배려해 준 윗사람에게 글로 보답한 기자였다. ‘이규태 한국학’의 출발점 ‘개화백경’과 세계 언론사에 남을 ‘이규태 코너’ 연재를 그에게 권한 이가 당시 사장이던 방우영 명예회장이다. 방 명예회장은 ‘이규태 코너’라는 칼럼명도 지어줬다. 일본에 가면 헌책방에 들러 이규태가 반길 유익한 책을 두어 권씩 사다 주기를 낙으로 삼았다. 방상훈 사장도 그의 글을 하늘이 끝낼 때까지 쓸 수 있게 배려했다. 그는 소주 자리에서 두 경영자에 대한 고마움을 말하곤 했다.
그는 병상에서 이미 열흘 전에 ‘이규태 코너’를 접는 고별 원고를 기자 아들에게 구술해 놓고도 매번 “이제 신문에 실으라고 할까요”라는 아들의 여쭘에 답을 하지 않았다. 사신(死神)을 앞에 두고도 끝내 붓을 꺾기가 싫었던 것이다. 이규태, 그는 천생 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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