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를 사먹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가는 것 같다.
언젠가 친구 따라 김치공장을 견학 갈 기회가 있었는데
방문객들에게 김치 실습도 해보게 하고 할인가격으로 주문할 기회를 주었다.
친구들 대부분이 생각보다 위생적이고 믿을 만하다며
자신의 몫은 물론 딸네 김치까지 주문을 하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이 약간 흔들려 주문할 뻔 했었지만, 그냥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가을에는 김장을 집에서 하지 말고 김치를 사먹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내가 척추 디스크 수술 후라서 몸조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병문안을 왔던 친구들이 내게 당부하는 말은 이젠 제발 공주같이 살라는 거였다.
재발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데 생각만 해도 겁나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입원 후부터 지난 한 달 간 살림을 해본 남편은
자기는 손발로 나는 입으로 합동작전을 해서 김장을 할 수 있단다.
자신 있으니 꼭 해보고 싶다는 거다.
순간 무수리 기질이 발동한 나는 아침 일찍
김장거리 쇼핑으로 시작해서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3개월간 앉기, 운전, 등산, 수영, 층계 오르기가 금지된 것도 무시하고
나는 자동차 조수석 의자를 젖혀 누워서 시장을 따라갔고
입으로 쇼핑을 했고 남편은 혼자서 짐을 다 날라 왔다.
남편은 내 말에 따라 흙 묻은 무단을 부엌에 들여와 수세미로 하얗게 씻고
채칼로 무채를 만들고 양념을 버무리고 씩씩하게 일을 하며
수시로 이거 다음에는 어떻게 뭐를 할까 묻는다.
나는 서서 실파를 다듬고 이것저것 야채를 씻고 썰고 양념거리를 장만해서
무채 위에 수북이 쌓아놓으니 남편이 잘 섞어서 빨갛게 만들어놓았다.
부엌일하는 남편의 모습을 결혼생활 사십년 동안 한 번 상상해본 적도 없었으나
지금은 눈앞의 현실이다. 한편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 쾌감도 느껴지는 게 우습다.
마침 휴가내서 문병 온 39세 큰딸이 초밥을 사들고 왔다가
어머니는 거실에 누워있는데 아버지가 부엌에서 무를 씻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딱 벌리고 서서 잠시 말을 못한다.
뜸을 들이다가 겨우 한다는 말이 "아빠 멋있어요!" 하더니 히히 웃는다.
초밥을 먹으면서 남편은 딸에게 고맙다며 엄마랑 둘이서만 있으면
툭하면 말다툼을 하게 되는데 예쁜 딸내미가 같이 있으니 분위기가 좋다고 하였다.
말다툼이라니 억울하다.
주부9단인 내가 초보도우미 남편에게 부엌일을 가르쳐 주느라 말은 좀 했지만
집안일을 요령 없이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할 때가 있어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인데
남편은 정답도 모르면서 알아서 하겠다며 멋대로 하는 적이 많았기 때문인데....
내 말을 들은 딸은 빙긋이 웃기만 한다.
남편은 딸에게 모처럼 얻은 휴가니 엄마랑 얘기도 나누고
쉬라고 하면서 김치 만드는 일은 손도 못 대게 하였다.
딸이 가버린 후, 부엌이 모자라 거실까지
무채로 김치속 버무린 커다란 함지박이 두 개, 절인 배추를 건져놓은 채반이 두 개,
돌산갓이니 동치미 무가 수북하고 이것저것 벌여 놓아
집안에는 양념 냄새로 진동을 하는데,
남편은 일하는 사이사이 급한 일이 있다며 잠시 사무실에 다녀오더니
바람이 불어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을 놓칠 수 없다며
동영상을 찍으러 카메라를 들고 다시 15분간 나갔다 왔다.
세상에 바쁜일이 없는 사람 같다.
진득이 앉아서 김치를 완성하는 데만 열중하면 좋겠는데
들락날락 하는 남편을 보니 공부하다가 한눈파는 입시생 같다는 생각이 들어 픽 웃는다.
할 수 없이 내가 일하고 있었더니 뒤늦게 들어온 남편이 펄쩍 뛰며
무리하면 어떡하느냐며 다 놔두고 들어가 누우라고 한다.
안 그래도 진땀이 나서 쉬고 싶던 차에 남편더러 속을 혼자 넣으라하고 방에 들어갔다.
친정아버님 생각이 난다. 내가 8개월 아기 적에 어머니가 김장을 하게 되었는데
옆에서 아기를 봐주던 아버지께서 김치속을 버무려 넣을 때가 되니
어머니께 아기를 안겨주시더란다. 아기엄마 손에 매운맛이 배면 아기가 싫어한다며
몇십포기 배추에 혼자서 속을 다 넣고 마무리를 해주셨다고
어머니가 김장 때마다 내게 해주시던 말씀이다.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김치 속을 다 넣었다는 말에 부스스 일어나 부엌에 갔다.
검사를 해보니 김치속이 배추 허리에만 들어있고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할 수 없이 하나하나 다시 수정을 해서 통에 담으며 시간이 좀 걸렸다.
난생 처음 하는 일이니 남편에게 뭐라 할 수도 없다.
겨우 배추 12포기에 돌산갓김치며 동치미 3단을 가지고
결국 새벽 2시가 다되어 일이 끝났다.
그래도 완성된 김치통 8개를 보며 남편이 흐뭇해한다.
아침 8시부터 서둘러 수고 많았다고 역사에 남을 일이라고
나는 그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렇게 기대했던 것도 아니고 내가 아프기 전에는 상상도 못해본 일이다.
남편이 일 무서운 줄 모르고 뭐든 닥치는 대로
집안일을 해주려는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이 고맙다.
그런데 나는 누워보니 진땀이 나고 허리가 뜨끔뜨끔 아프다.
아무래도 무리했다는 신호 같은데 어쩌나.
공주같이 살라고 당부하던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눈앞으로 지나간다.
“아유, 그러게 내가 뭐랬어. 김치는 사먹자고 했지”
천정을 보고 반듯하게 누워서 과로한 허리를 만지며 혼자 중얼거린다.
공주 노릇 해보려고 결심을 했으나 해묵은 무수리 기질이 자꾸 튀어나오는걸 어쩌나.
이번 3달간 몸조리 잘 해서 앞으로 30년을 건강하게 살라고
당부에 당부를 하던 동생의 말이 생각난다.
내가 무식하고 미련곰퉁이 바보 같아서 짜증이 난다.
내년에는 김치를 진짜로 사먹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내일은 종일 쉬어야지.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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