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가족들/ 김시헌

이예경 2009. 12. 4. 01:19

가족들

 

 

                                                                                       김시헌

공공 공공, 마당에 발을 내디디면 반드시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발을 멈춘다. 짖는 소리에도 이유가 없지만 발을 멈추는 나의 거동에도 이유가 없다. 고양이 새끼만한 강아지가 아파트 문 창살 속에서 나를 보고 짖는다. 그냥 습관일 뿐이다. 습관에 무슨 이유가 있으랴? 눈에 분노가 가득하다. 나는 소리가 귀엽다는 손짓을 한다. 알았다는 신호이다. 강아지는 더 열심히 짖는다. 분노가 극에 달한 표정이다. 자리를 옮겨가면서 짖는다. 나는 그 동작이 귀엽기만 하다. 몇 번 손짓을 하다가 발을 옮겨 놓았다. 무관심해진 나는 걸음을 빨리 하면서 길 모롱이를 돈다.

아파트 입구에 이르면 소나무가 몇 그루 있다. 키가 관리사무소의 지붕 위에 올라가 있다. 가지를 수평으로 펴고 있는 소나무가 나는 좋다. 시원한 푸른 빛깔이 나를 시원하게 해준다. 가지를 길게 수평으로 뻗었는데도 그들은 충돌을 피하고 있다. 상대의 손이 닿아오면 비켜주는 모양이다. 아니면 닿지 않는 구멍을 찾아서 손을 뻗치는 모양이다. 나는 그들의 균형감각에 경의가 간다. 사람도 균형이 잡혀 있는 인품은 남을 존중할 줄 아는데 하는 감정이 온다. 바라보면서 발을 옮기고 있으면 까까까 하는 소리가 난다. 나뭇가지 속에 묻혀서 소리만 낸다. 나는 한발 물러서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면서 까치의 정체를 찾아낸다. 등에 검은 점을 찍고 배가 하얀 까치가 나를 보고 짖는다. 나를 향해 무슨 말을 한다. 나도 까까까 한다. 그에게 주는 대답이다. 까치가 나의 대답을 알아들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래도 대답은 해야 한다. 그의 내음이 내게 오고 나의 내음이 그에게 가고 있다고 믿는 그 자체에 기쁨을 느낀다. 생명과 생명끼리의 교통이 얼마나 귀한데……?

너비 10미터의 도랑이 있고 그 도랑 위에 콘크리트 다리가 가로놓여 있고 다리 위에서 비둘기 대여섯 마리가 바닥을 쪼고 있다. 몇 번을 쪼다가 고개를 까닥까닥 흔들면서 전진하다가 또 바닥을 쫀다. 나는 그들을 피해서 콘크리트 다리 옆으로 바싹 다가서서 가는데도 푸르륵 날아버린다. 어쩔 도리가 없다. 허공으로 올라가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아파트 18층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올라가서는 아파트를 안으면서 크게 회전한다. 허공을 돌고 있는 그들에게도 낭만이 있는 모양이다. 사람도 자유로 날 수 있다면? 하는 감정이 일어난다. 한 놈이 앞장을 서서 길을 잡으면 다른 놈은 조건 없이 따라간다. 언제부터 붙은 그들의 질서일까.

한길로 나서면 신호등을 건너야 버스를 탈 수 있다. 정거장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우왕좌왕한다. 제각기 자기 버스의 번호를 기다린다. 그 속에 끼어서 나도 서 있으면 어떤 사람은 나를 보고 인사를 한다. 내가 고령자이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얼굴을 알아낼 수가 없다. 어리둥절해 하는 내 표정을 보고 어떤 사람은 무안한 표정이 된다. 그때마다 나는 내 눈을 나무란다. 그래 보아야 또 다음에도 그러한 실수를 범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자신도 없으면서 상대편을 보고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그러면 저쪽 편에서 어리둥절해진다. 아차! 또 실수를 했구나. 하지만 그 이상 더 발전이 없다. 한 지역에 그것도 작은 마을에 6,`7년을 살았으니 그런 현상이 벌어진다. 어쩔 수가 없는 사람 사이의 일들이다.

생명과 생명을 만나면서 얻는 빛(光)! 그것이 존재와 존재와의 확인인지 모른다. 나이가 많아지면서부터 더욱 그 빛이 소중해진다. 끝없이 높은 하늘이 있고, 몸통을 송두리째 내밀고 있는 산도 있다. 그들에게도 생명은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일도 즐겁다. 내가 그들이 되고 그들 속에 내가 들어가기도 한다. 한몸이 된다는 것, 그것 자체가 곧 인생의 의미라는 것을 요즘은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