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버리는 연습/ 김시헌

이예경 2009. 12. 4. 01:18

버리는 연습

                                                                                             金時憲

 반생은 모으면서 살고, 반생은 버리면서 산다던가. 땅에 처음 떨어질 때는 육체와 감각뿐이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는 빈 그릇이다. 그러나 세 살만 되면 자기 장난감과 남의 장난감을 구별한다. 다른 아이가 자기 것을 만지면 빼앗으려고 덤벼든다. 빈 그릇에 욕망의 싹이 생겨나는 현상이다.

유치원, 초등학교를 가게 되면 새것을 배우고 다른 사람과 사귀며, 꿈을 키우고 남보다 잘하려고 경쟁심도 가진다. 그리하여 30세쯤 되면 사람이 겪는 일은 거의 다 경험한다. 현재까지 가진 것이 무엇이고, 가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도 안다. 그리고 가질 수 없는 것도 예측한다. 욕심을 부려보아야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한번 체념한 것은 아예 생각도 않는다.

40을 넘기고 50에 이르면 자기 한계를 깨닫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 생각에 이르지 못하였을 때 그는 욕심이 너무 많거나 깨닫는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너무 가지려고 하다가 가진 것조차 잃는 사람이 많다. 어디까지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는 데에 그칠 뿐 실행이 안  된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몸에 짐을 가득 가진 여자 노인이 앞에 걷고 있었다. 나그네 하나가 뒤를 따랐다. 왼손에는 예쁜 형태의 큰 돌을 들었고 오른손에는 잘 다듬어진 판자 하나를 잡았다. 머리에는 큼직한 호박이 얹혀 있고, 어깨에는 줄에 꿰어진 보자기가 덜렁거렸다. 노인은 너무 무거워서 걸음도 제대로 못 걸었다.

나그네는 노인 가까이 다가가서 “왼손의 돌은 버리십시오” 해 보았다. 노인은 돌을 들고 보더니 아까운 듯이 “버려도 됩니까?”고 물었다. 버리고 보니 걷기가 훨씬 쉬었다. 나그네는 머리의 호박도 내려놓으라고 권했다. 노인은 나그네의 말이 옳다싶어 호박을 땅에 내려놓았다. 머리의 부담이 줄면서 몸 전체가 많이 가벼워졌다. 나그네는 따라가면서 든 것, 걸친 것을 다 놓게 했다. 노인은 그것들을 당연히 들고 가야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놓고 버릴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다 놓고 보니 몸이 날듯이 가벼웠다. ‘놓아도 되는구나!’ 비로소 노인은 깨달아졌다. 들고 얹고 걸치고 걸어야만 된다는 생각에 묶여 있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버리지 못하고 있느냐? 돈인가 명예인가 사랑인가 미움인가 아니면 자존심인가 열등감인가 더듬어 나가 보면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버리면 야단날 것만 같다. 빈 껍데기만 남을 것 같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버린다 해도 그것들이 어디에 가겠느냐이다. 어디엔가 떨어져 있을 것 아닌가. 다만 나에게서 놓여졌을 뿐이다.

허공에 돌아다닐 수도 있고 땅에 굴러다닐 수도 있다. 산산조각이 나서 흔적도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주 안 어디엔가에 있다. 있으면 그만 아닌가? 반드시 그것들이 나에게 붙잡혀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숫자의 영(零)을 생각해 본다. 영은 아무것도 없음이다. 완전한 빈자리이다. 그것에 1 2 3 4…를 보태기도 하고, 1 2 3 4…를 빼기도 한다. 그 중간인 영(零)은 空 또는 無이다. 원점이라고 할까. 사람들이 가진 것을 놓는다는 것은 원점인 零으로 돌아감이다.

나기 이전에 우리는 어디 있었던가? 그곳이 곧 零의 자리였다.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서 나는 태어났다. 그리하여 한 생애를 살고 돌아가는 곳도 나기 이전의 그 원점이다. 원점에서 와서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할까. 그것을 사람들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침을 먹고 열 시쯤 되면 끈이 길게 달린 가방을 들고 나는 집을 나간다. 나가 보면 세상이 너무 넓다. 하늘은 높게 높게 터져서 파랗고, 길 좌우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무성한 잎을 달고 여름을 흔들고 있다. 그 가운데를 걸어가면서 현재 나를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를 찾아본다.

그러면 어떤 때는 어제 낮부터 가슴에 걸려서 떨어지지 않던 자존심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쓰다가 쓰다가 둔 원고 내용이 아직 남이 있을 때도 있다. 그것들이 다 무엇인데 하면서 큰마음으로 떼어 낸다. 붙어 있는 종이를 떼내듯이 아니면 핀셋으로 바늘을 찝어 내듯이…….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소인인가를 깨닫는다. 그런 작은 일에 매달려 있는 나 자신이 불쌍해지기도 한다.

떼고 나면 시원하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하늘은 더욱 파래지고 건물과 사람과 나무와 자동차들이 전체가 되어 나의 가슴 안에 수용이 된다. 수용! 그것을 나는 조화로 느낀다. 그 조화에 취해서 그때부터 나는 유쾌한 아침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