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소설의 허구와 수필의 허구/ 김시헌

이예경 2009. 12. 4. 01:15

소설의 허구와 수필의 허구

                                                                 金 時 憲

 1. 상상과 허구

 

‘수필은 체험의 표현이다.’ 하면 어떤 사람은 체험을 굳이 ‘사실’로 대체해 놓는다. 사실로 대체한다 해서 많이 다를 것은 없다. 하지만 그 의도에 문제가 있다. 신문기사의 사실처럼 수필도 주제, 주관이 없는 모사만의 글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어디까지를 체험으로 보느냐에도 문제는 있다. 체험을 나누어서 간접체험, 직접체험한다. 간접체험은 책을 읽는 것, 영화를 보는 것,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해서 직접 몸으로 당하기보다 사이에 매개물이 끼어 있을 때이다. 직접체험을 다시 둘로 나눌 수도 있다. 하나는 외적 체험, 다른 하나는 내적 체험이다. 외적 체험은 대상을 두고 그것과 직접 부딪칠 때이고 내적 체험은 부딪치는 대상 없이 내면에만 일어나는 생각들이다.

생각도 체험이냐고 하겠지만 뇌의 움직임이 있고, 생각해 보지 않는 것과 생각해 본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른 새벽에 잠이 깨었다고 하자. 더 잠이 오지 않을 때, 누운 채로 온갖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 가운데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수직적인 생각이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왜 살아야 되느냐? 인생의 종말은 무엇과 연결이 되느냐? 등의 일직선상의 생각들이다. 다른 하나는 구상적인 생각이다. 내일 누구와 만날 약속이 있다면 그와 만난 뒤에 어떤 대화를 해야 하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뒷처리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구상이다. 구상적인 생각은 수직적인 생각보다 훨씬 더 계획적이다. 왜, 무엇이, 어떻게 따위의 6하원칙 같은 구상이 따른다.

두 가지를 두고 볼 때, 하나를 사색이라 한다면 하나는 상상이 된다. 하나에는 사건이 없고 하나에는 사건이 있다. 하룻밤에 기와집 열두 칸을 짓는다는 공상은 뒤의 것이다. 그래서 사실이 아닌 상상만의 사건을 허구(虛構)라고 말하기도 한다.

소설, 희곡에서 말하는 허구는 뒤의 것이 된다. 그런데 상상과 허구를 동일시하는 사람이 있다. 상상은 허구를 포함한 모든 구상적인 생각 전부이다. 과학자가 비행기가 없을 때, 땅에서 기어다니는 자동차를 보고 저 놈을 공중에다 날게 할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고 하자. 그것은 상상일 뿐 허구라 할 수는 없다. 그 상상이 마침내 비행기의 발명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화가가 상상 속의 어떤 여인을 그대로 화폭에 옮겼다고 하자. 그릴 때 수많은 상상을 하겠지만 그것을 허구라고 하지는 않는다.

허구는 주로 소설, 희곡을 창작할 때 그 안에 만들어 넣는 사건을 말한다. 사건이 없는 소설, 희곡은 없다. 필수적인 요건이다. 사건에는 6하원칙이 따른다. 그러한 조건을 생각하면서 체험의 사실이 아닌, 생각만의 사건을 허구라 한다. 허구(虛構)의 構는 비었다이고 없음을 말한다. 無에서 有가 되고 여기에서는 有가 곧 ‘있어진 사건’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상상 전부를 곧 허구로 동일시한다. 넓고 넓은 상상의 세계를 허구라는 좁은 뜻으로 축소시킬 수는 없다.

‘문학은 허구성을 가졌다.’라는 말도 있다. 문학에서의 창작적인 요소가 다 허구성이 될 수 있다. 사실만이 아닌 상상 속의 여러 가지가 문학에는 표현되기 때문이다. 허구성은 허구적인 요소라고 할까, 허구의 성격이라고 할까 그래서 허구와 허구성은 구별이 된다. 허구는 사건을 사실 아닌 것으로 엮어 짠 것을 의미하고, 허구성은 넓은 의미의 창작성이다. 허구성 안에 허구도 들어갈 수 있지만, 허구가 곧 허구성이 될 수는 없다.

‘시는 허구성을 지녔다.’ 하면 말이 되지만 ‘시는 허구로 되어 있다.’는 말이 안 된다. ‘소설은 허구로 되어 있다.’는 말이 되지만 ‘소설은 허구성으로 되어 있다.’ 하면 뜻이 애매해진다.

그래서 허구성을 그대로 허구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사건의 요소가 있는 것만이 허구가 되어야 한다. 허구를 확대 해석해 버리면 허구성과의 구별이 없어진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체험은 내적 체험까지를 포함하고 그 내적 체험은 상상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상상을 곧 허구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허구는 허구이고 상상은 상상인 것이다.

 

2. 소설의 허구와 수필의 허구

 

소설에서는 허구가 문제되지 않는데 왜 수필에서는 문제가 되느냐? 그 답은 간단하다. 수필은 체험의 표현이라는 원칙론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했을 때 시, 소설, 수필이 있고 희곡 시나리오가 있다. 이러한 장르가 생긴데는 이유가 있다. 희곡은 연극을 위해서, 시나리오는 영화를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다. 시, 소설, 수필도 제각기 이유가 있다. 소설은 제한없이 사건을 그려내기 위해서 허구가 필요했고, 수필은 허구 아닌 실제의 체험을 그리고 싶었다. 똑같은 허구의 수용이면 수필이란 종류가 따로 필요 없었다. 짧은 산문을 위해서라면 소설 형식의 콩트도 있다.

동시, 동화도 그렇다. 하나는 운문이고 하나는 산문이다. 동화에는 소설처럼 허구가 허용되고 있다. 허구가 허용되는 동화가 있으니 허구가 허용되지 않는 실제의 체험만을 표현하고 싶다면 동수필도 있어야 한다. 어른의 수필에 ‘동’을 붙이면 동수필이 된다. 귀엽고 밝은 느낌을 주는 용어여서 참 좋게 느껴진다. 다만 그것이 동화와의 혼돈이 생긴다면 굳이 따로 동수필을 만들 필요가 있겠느냐가 된다.

수필에 허구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끓임없이 계속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소재의 확대, 상상의 자유, 따라서 창작성의 제한없는 확충이다. 그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허구의 자유, 그 무제한한 창조의 자유를 수필에도 수용하자는 의견 자체는 건설적이다.

하지만 앞에도 말한 모양, 수필의 발생 동기는 체험만이라는 제약에 있었다. 제약없는 소설과 제약 있는 수필, 두 가지를 따로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만 수필의 존재 이유가 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수필은 체험의 사실을 표현한다는 독자와의 약속이다. 언제부턴지 모르게 그 약속은 지켜져 왔다. 소설은 허구임을 인정하지만 수필은 허구를 인정하지 않는다. 수필에 허구를 도입하려면 독자에게 새 선언을 해야 한다.

체험한 사실만으로 소설을 썼다 해도 독자는 그 소설을 허구로 믿고 허구만으로 수필을 썼다 해도 독자는 실제의 체험으로 믿는다. 이 믿음을 어찌하랴?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으리라. 그것은 수필의 역사가 대답해야 한다. 그 믿음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도 하고 싶으리라. 그 잘잘못도 수필의 역사에 맡겨야 한다.

수필은 체험만으로 쓴다는 제한을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그래서 허구의 도입이 제안되기도 한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그 방법을 이미 제시해 놓고 있다. 찰스 램의 『꿈에 본 아이들』이다. 상상만의 세계, 또는 허구의 세계를 실제의 사실로 오인할까봐 어느 부분은 ‘꿈’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의 행동은 눈에 보이지만, 상상은 작자 자신만 알 뿐 독자에겐 보이지 않는다. 그 보이지 않는 부분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허구 또는 상상임을 밝힐 필요가 있다. 아들이 없는 찰스 램이 상상 속의 자기 아들과 놀았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면 어떠한 결과가 올까? 독자는 찰스 램에게 아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부인할 어떤 근거도 없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하리라. 찰스 램에게 아들이 있다고 독자가 믿으면 또 어떠냐고… 그러나 찰스 램에게 아들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친구나 이웃집 사람은 어떻게 하랴? 그는 결국 거짓말을 수필 속에 썼다가 된다. 수필이 아니고 소설이었다면 문제될 것도 없는데… ….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미혼 여성이 결혼한 뒤의 일을 상상하다가 그것을 수필에 썼다. 남편과 신혼 여행을 간 이야기, 새 살림을 차린 이야기, 남편이 퇴근한 뒤의 행복한 가정생활 등… ….

그랬더니 작자의 친구가 잡지에서 수필을 읽었다. 친구는 깜짝 놀라서 전화를 걸었다.

‘얘, 너 결혼했더구나. 나한테 말도 안 하고… ….’

하면서 수필 속의 사실을 언급했다면 그때 작자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

그것은 허구였다고 하면 되는 것일까? 독자의 이와 같은 착오를 막기 위해서 수필 속의 허구는 ‘허구’였음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다. 수필 속의 허구가 독자에게 이미 허구로 인지되는 때이다.

옛 글에도 허구로 된 수필이 있었다.

‘규중칠우 쟁론기’이다. 바늘과 실과 골무… 들의 말다툼을 그리면서 인간을 풍자한 내용이다. 내용을 작자의 사실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지원이 썼다는 ‘호질’도 그렇다. 그 글을 소설로 보느냐 수필로 보느냐도 있지만, 수필로 본다 해도 그 속에 있는 내용을 박지원 자신의 이야기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태길 씨는 ‘대열’이라는 수필에서 대학생들의 데모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당시의 심경을 ‘꿈’으로 다루었다. 실제로 꿈을 꾸었느냐, 만든 이야기냐를 따질 까닭은 없다. 작자가 꿈이었다고 했다면 그대로 믿으면 된다.

허구를 사실로 오인할 요소가 있는 수필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것이 허구임을 글 속에 밝혀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수필의 독서계에는 큰 혼란이 일어난다. 신기한 이야기를 수필에서 읽을 때마다 독자는 그것이 허구이냐 실제이냐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

일본에 있었다는 『우동 한 그릇』도 그 때문에 일어난 혼란이었다. 처음은 수필로 알았는데 뒤에 가서 동화라고 했기 때문에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뒤에 가서 실망하든 말든 처음의 감동은 대단했던 것 아니냐, 한다면 작자의 이성을 좀 검토해 보아야 한다.

 

3. 역사와 역사소설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고, 역사소설은 역사적인 사실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다. 수필을 위의 문제와 연관시켜 보자. 어떤 사람은 수필이 사실의 기록에 그친다면 역사와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그러니까 문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수필을 써 본 사람이면 수필을 쓸 때 역사의 기록처럼 사실 그대로만 쓴다는 사람이 없다. 수필에는 주제도 있고,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섬세한 체험은 가감도 한다. 또 심리 표현 부분에서는 작자의 창작성도 발휘된다. 그런데 왜 역사의 기록과 같다고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허구의 도입이 안 되면 문학성도 없다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역사소설은 어떤가.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하면서 나머지 부분은 작가의 창작에 의해 만들어지는 문학작품이다. 그때 작자는 역사적인 사실을 임의로 바꿀 수가 있다.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어떤 것은 빼고 어떤 것은 새로 넣는다면 그것은 역사의 왜곡이 된다.

이성계 때 있었던 사실을 세종대왕 때로 옮겨 써도 안 된다. 역사적인 사실에는 허구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역사관에 따라 해석에는 작가의 철학이 따른다. 또 기록에 없는 부분은 보충도 해야 한다. 역사소설에 나오는 동작의 묘사, 심리의 표현, 대화의 삽입 등은 모두가 작가의 창작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수양대군과 단군의 이야기를 역사소설로 쓴 것이 두 작품 있었다. 하나는 김동인이 쓰고, 하나는 이광수가 썼다. 같은 역사적인 사실이었는데도 두 사람의 사관에 따라 하나는 수양대군을 긍정적인 방향에서 썼고, 하나는 부정적인 방향에서 썼다. 정치면에서 보느냐 윤리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록에 있는 역사적인 사실에는 허구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역사소설과 수필을 비교해 보자. 수필에 허구가 허용되지 않는 것은 역사소설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바꿀 수 없는 것과 같다.

 

역사소설에 작가의 해석이 들어가고 기록에 없는 부분을 창작에 의해 보충하는 부분도 수필은 닮았다. 그런데 어째서 역사적인 기록 자체를 수필과 비교하고자 하는가. 역사적인 기록은 문학이 아니고 역사이다. 창작도 아니고 사실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체험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수필이 신문기사와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신문기사는 사건을 의미화할 수도 없고 표현에 창작성을 첨가할 수도 없다. 사실에 충실한 글이 되어야 가장 좋은 신문기사가 된다. 그런데 수필은 체험한 사실을 토대로 할 뿐 그것에 대한 의미화 작업, 작품으로 만들기 위한 적절한 구성, 세밀한 부분의 모사 등에서 작자의 창작성이 십분 발휘된다.

수필에 허구가 없다 해서 창작품이 아니라는 말은 너무 단순하다. 허구만이 창작이라는 뜻은 무엇에 근거한 말일까. 마치 상상을 모두 허구로 간주하려는 뜻과 비슷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다. 허구는 구성상의 창조적인 생각이라면, 창작은 그것까지를 포함한 문학작품의 제작 과정 전체를 의미하는데도… ….

 

4. 거짓과 진실의 문제

 

문학은 진실을 표현한다. 소설은 진실을 지적하기 위해서 길고 긴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사실과 사건을 바로 진실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들을 통해서 그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철학을 지적 제시했을 때 진실이 된다. 진실은 사실과 사건의 아래에 떨어지는 앙금이다. 사람들은 진실을 만났을 때 쾌감이 온다. 나도 그러하더라는 공감이 된다. 그래서 문학은 ‘있을 수 있는 일’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하자. 도덕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문학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들의 교양이 거기까지밖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며 인간의 충동적인 본능이 그러한 악을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악인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다루었을 때 독자는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도달한다. 그 가능성에 진실이 있다. 있을 수 있는 인생사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허구는 진실을 표현한다. 허구는 꾸민 이야기이지만 그것에 진실이 담겨지고 있다. 수필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허구로 된 수필이라 하더라도 독자는 실감을 하면서 읽는다. 실감이 난다는 것은 그곳에 바로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수필의 허구는 거짓말이다.’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일까? 수필의 허구도 소설의 허구처럼 진실이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도 수필의 허구를 ‘거짓말이다’ 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독자를 표준으로 보았을 때 거짓말이 된다는 것이다.

독자 편에서 볼 때 소설의 허구는 이미 용인되고 있지만, 수필의 허구는 용인되고 있지 않다. 수필의 내용을 작자의 체험으로 믿고 있는 독자는 허구를 읽고도 실제의 체험으로 믿어 버린다. 그때 허구는 독자에게 거짓말이 된다. 그러니까 허구로 표현된 내용은 거짓말이 아닌데도 수필에 대한 독자의 믿음 때문에 거짓말이 된다. 거짓말이란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말한다. 수필에 쓴 허구와 작자 자신의 체험이 다를 때, 독자는 두 가지 사이에 끼인다. 그때 체험이 아닌 허구 쪽이 거짓말이 된다. 앞에 든 미혼 여성이 쓴 수필은 어떤가? 결혼을 하지도 않으면서 상상한 결혼 후의 이야기를 허구로 썼기 때문에 독자는 그것을 사실로 믿었다. ‘너 결혼했더구나…’ 하는 전화는 수필에 속은 결과이다. 만약 그 수필이 허구였음을 밝혔다면 어떻게 될까 독자는 속지도 않고 전화도 걸지 않는다.

이것을 작자 편으로 바꾸어 보자. 작자에게는 상상이 그대로 체험의 사실이다. 실제로 상상해 보았으니까 상상한 대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그것에도 거짓말이 없다. 그러한 상상은 실제로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또 상상한 사실대로 수필에 쓴 일도 거짓이 아니다. 누구를 속이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다. 상상한 대로 정직하게 충실하게 묘사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독자가 속았다는 결과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수필의 허구는 거짓말이다.’ 하는 말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5. 맺는 말

 

허구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정진권 씨에 의해 발설되었다. 그 뒤 정진권 씨는 허구성 쪽으로 뜻을 넓혀갔다. ‘문학에는 허구성이 있다.’ 하면 어떤 문학 종류에도 해당이 된다. 창작적인 부분을 허구성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허구성’이라는 말을 ‘창작’으로 대체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도 내고 있다. 어떤 용어이든 그런 것은 작은 일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허구성’에 대한 확대 해석이다. 허구도 허구성에 해당된다는 넓은 수용이다. 그로 인해서 허구인지 허구성인지 구별도 안 되는 ‘허구’ 도입설이 다시 고개를 든다.

허구는 작자가 알 뿐 독자는 모른다. 허구라도 말하지 않으면 그대로 작자의 체험으로 믿는다. 체험으로 믿으면 어떠랴? 재미가 있고 감동이 크면 그만 아니냐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허구 문제는 작자에게 맡기자는 말도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다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네거리에 선 교통순경과 같은 심경이라 할까. 그러나 작은 손으로 아무리 흔들어 보아야 갈 차는 가고 올 차는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