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우리가 넘가? / 박유정

이예경 2009. 12. 1. 12:44

그 때는 열차 창문을 열 수 있었다. 접이식 흔들거리는 좁은 쇠계단에 미끄러질세라 발을 가운데 잘 올려가며 기차를 타면 오른쪽 왼쪽으로 문들이 있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도톰한 비로도로 감싸 만든 긴 의자가 두 개씩 마주보고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두개씩 마주 보는 의자 옆으로 창문이 한칸씩 달려있었고 그 창문 위의 공간에는 짐을 놓는 쇠시렁이 붙어 있어서 어른들은 거기다 무거운 짐들을 올리곤 하였다. 창문은 가로로 나뉘어져 이 등분이 되어 있었고, 창문을 열려면 아래짝 창문의 밑부분 양쪽으로 집게처럼 붙은 장치를 양손에 하나씩 나눠 잡고 꾹 누르면 그 고리가 벽면에서 빠져나오고 창문을 위로 들어올릴 수 있었다. 들어 올린 후에는 다시 그 양쪽 고리를 중간에 난 홈통에 끼워 단단히 고정시켜서 다시 떨어져내리지 않도록 하면 창문은 덜그럭거리며 쿵쾅거리며 기차가 달려도 열린 채로 잘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 꾹 누르는 힘이 아주 세어야 했고 더구나 그 창문을 들어올리려면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니어서 여자들이나 아이들은 그 창문을 열지도 못 했다.
 
여름이었다. 후덥지근한 기차안은 바깥 공기가 들어오지 않아 더웠다. 사람들은 여기 저기서 창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남자들이 앉은 칸은 씩씩하니 창문을 쓱 들어올려 붙여서 시원한 바람이 훨훨 들어왔다. 그러나 여자들이랑 아이들만 앉은 칸은 그렇지 못 했다. 창문을 열고 싶은 아낙네들은 이 고리 저 고리를 붙들고 안간힘을 쓰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혼잣말을 하였다. "우째 이래 무겁노?" "하이고, 내 힘으로는 안 되겠다." "마, 창문 닫고 가야 하는갑다." 등등의 한탄을 남 들으라는 듯이 하면 다른 칸의 남자들 중 한 두어 사람이 쳐다보며 알은 척을 하였고, 그 중에서 제일 젊은 사람이 눈치껏 일어나 "지가 열어드리까요?"나 "이리 한 번 비키 보이소. 되나 안 되나 한 번 보입시더."하는 말들을 하며 창가로 와서 이리 저리 살펴보고는 끄어덕! 하고 창문을 들어올려 주었다.
 
"하이고, 이래 시원한거로!" 아주머니들은 감탄으로 젊은이들에게 치하를 하였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환성을 올려 창문을 열어준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야아! 바람이다! 바람 들어온다!" 나중에 내가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교에 가고...가는 곳 마다 영어 책에는 이런 상황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세련된 서구인들의 영어책에는 "May I help you?" 하며 남자들이 먼저 나서서 여자들을 도왔고 여자들이 허덕이며 먼저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여자들도 무슨 '하이고!" 등의 찬탄을 한다기 보다 아주 아주 세련되게 매끄러운 목소리로 "Thank you."라고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여자들은 무슨 힘든 일이 있으면 남자들에게 달려가 청할 수가 없었다. 내놓고 달려가 청하자면 누군가 한 사람을 정하여야 하는데, 그 낙점된 남자로서는 얼굴 붉어지게 당황스러운 일일 터이고 그 일을 청한 여자로서는 일대일 채무관계가 형성되니 그 여자가 뭐라도 감사의 표시를 살갑게 해야 할 터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창문 하나를 열어도 우선 힘없는 여자나 아이가 자기 나름대로 노력을 하며 그 일 자체가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과정이 있어야 했다. 창문을 못 열어 요란하게 끙끙거리면 그렇게 딱한 상황임을 사방에서 인정하게 되었고 그것을 돕겠다는 전체적인 어떤 공감이 일어나면서, 그 중에서도 도울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 중 물의를 일으키지 않을 사람이 순식간에 알게 모르게 서로 결정되며 말없는 허락과 지지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돕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도움을 받은 다음에도 딱이 그 도와준 한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도움을 받은 여자나 아이는 공중에 대고 그 모든 주변의 사람들에게 감사를 하기 위해 자신의 기쁨을 커다랗게 호들갑스러운 감탄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었으며 방향 모를 절을 하는 것으로 치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것이 우리 조선 사람들의 풍습이었다. 지금은 나도 그 풍습을 안다. 나이든 남자는 지그시 바라보며 도덕적 압력을 넣는 것이었고 다른 남자들 역시 서로 서로의 나이와 풍채를 가늠하며 책임의 수행을 누구에게 맡길 지를 고른는 것이다. 그런 중 가장 젊은 남자에 뭇시선이 조용히 머물렀다가면 그 젊은이가 알아서 벌떡 일어나 남존여비 장유유서의 질서를 수행해 내는 것이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시키는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어떤 질서가 존재한다는 느낌, 그리고 그 질서가 약하고 어린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든든함은 모든 사람들을 흐뭇하고 편안하게 하였다.
 
혹시나 그 와중에 가장 젊은 사람이 아닌 남자가 어중띠게 나서서 그 일을 하려 든다면 더 나이든 남자가 아예 나서서 질서를 잡기도 하였다. "여어, 저어 총각! 이리 와서 좀 봐바라. 여어 어른은 앉아 계시이소." 그러면 지목을 받은 총각은 총각이라고 불린 것이 부끄러운 듯 일어나 임무 수행을 하였다. 그럴 때보면 잠시 보는 사람들끼리라도 한민족 전체가 어떤 위계 질서가 있는 듯 하였다. 혹시나 그 위계 질서를 어기고 나선 사람이 동행한 여자라도 있을작치면 그 여자는 눈을 모로 세우고 자기 남정네를 볶아쳤다. "체신머리 없구로, 와 나서요? " 남의 여자를 돕는데 자기 남정네같이 이미 배우자가 있는 사람은 차순위라는것을 그 여자는 암암리에 체득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나서지 않았던 남정네들은 자기들은 그 불문율을 아는 수준높은 사람이라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그런 자그마한 징계를 즐겨 바라보았다.
 
나도 이제는 그런 보이지 않는 규칙을 안다. 그 규칙이 잘 지켜지는 것을 보면 그 안의 오가는 넓디 넓은 민족적 정서가 느껴져 흐뭇하다. 학교에서 신식으로 배운대로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해도 세상은 돌아간다. 그것도 흐뭇하게 빙글빙글 돌아간다. 오히려 똑 부러지게 "고맙다"고 하면 더 문제였다. 그것은 그 주고 받는 관계를 널리 인정받는 관계가 아닌 두 사람만의 채무관계로 축소시켜 버리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지방 사람들은 "고맙다" "미안하다"를 잘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마음 속에는 그 짧은 말보다 더 진한 감동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가 넘가?" "꼭 말로 해야 아나?" 하고 낯간지러운 신식 문화에 반감을 표시한다.
 
나도 그 때에는 왜 그렇게 하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하였다. 어린 시절 어리둥절한 순간들은 잠시 그 자리에서는잊히는 듯 하여도 머릿 속 어딘가에 반드시 자리잡고 앉아 자신의 답을 챙겼다. 그것이 평생이 걸릴 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