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교통순경과 욕심꾸러기/ 장영희

이예경 2009. 9. 7. 22:20

유학시절에 쓰던 자료들 사이에서 우연히 성경책 한 권을 발견했다. 별로 읽
지 않은 듯 아주 새것이었는데, 앞에는 ‘영희에게 브루닉 신부가’라는 영어
서명이 있었다. 오래 전 내가 유학 떠나기 바로 전날, 브루닉 신부님이 내게
선물로 주셨던 성경책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브루닉 신부님은 나의 대학 스승님이다. 아니, 단
지 스승을 넘어 신부님이 안 계셨으면 나는 아예 대학에 다니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신체장애에 대한 사회의식이 전혀 없던 70년대
초반, 내가 대학에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고등학
교에 진학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었으니, 대학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도
(아니, 아이로니컬하게도) 내 학교성적은 좋았고, 나는 꼭 대학에 가고 싶었다.






( Sargent, John / ' Man Reading')



내가 고3이 되자 아버지 (故 장왕록 박사)는 여러 대학을 찾아다니시며 입학
시험을 치르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학교측은 어차피 합격해도 장애인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했다. 아버지는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과
과장님이셨던 브루닉 신님을 찾아가 똑같은 부탁을 하셨다. 신부님은 너무나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시고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는가, 장애
인이라고 해서 시험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고두고 그때 일을 말씀하셨다. “마치 갑자기 바보가 된 느낌이었
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쁜 바보가 어디 있겠느냐”고.....

늘 붉은 기가 도는 얼굴에 반짝이는 눈을 가지신 신부님은 1학년 전공필수인
영문학개론을 강의하셨다. 그때 나는 서양문학 최고의 고전은 성경과 그리이
스 로마 신화이며, 성경에 관한 지식 없이는 영문학을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 Caravaggio / 'Amor Vincit Omnia')



신부님은 당시 우리말을 배우시고 계셨지만, 이미 환갑이 가까운 나이라 많이
힘들어 하셨다. 그러다가  한 번은 강의를 하시다가 문득 한국말에서 제일 발
음하기 힘든 두 단어는 ‘교통순경’과 ‘욕심꾸러기’라고 하셨다. 정말 신부님의
발음이 어찌나 우스꽝스러웠던지, 철없는 우리는 책상을 치며 깔깔대고 웃었
다. 조금 머쓱해지신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문학은 삶의 ‘교통순경’이다. 교통순경이 차들이 남의
차에 방해되지 않도록 자기 차선을 따라 반칙 없이 잘 가고 있는가를 지키듯
이, 문학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진정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지킨다. 그
리고 이 세상에는 부나 권력을 좀더 차지하려는 나쁜 ‘욕심꾸러기’들이 많지만,
지식과, 사랑, 그리고 꿈의 욕심꾸러기가 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책을 많이
읽고 제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라. 그리고 지식과 사랑의 욕심꾸러기들이
되어라”고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 William-Adolphe Bouguereau / ' Art & Literature ')



신부님은 성격이 온화하시고 늘 얼굴에 장난기 도는 웃음을 지니신 분이셨지만,
난 개인적으로 신부님이 불같이 화를 내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교
양 필수로 체육을 수강해야 했는데, 담당교수님은 내가 견학이라도 해야 D를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언덕길을 따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체육관까지 가는
것은 내게 ‘체육’을 넘어 에베레스트 등정보다 더 힘들었다. 2학년 봄 학기말
에 장마가 들어 세 번을 빠졌는데, 교수님은 비가 오면 안 와도 된다고 하신 말
씀을 깜박 잊으시고 내게 가차없이 F를 주셨다. (서강대학교에는 학점의 두배
수가 넘게 결석할 경우 F를 주게끔 되어 있다). 그리고 무슨 과목이든 F가 있
으면 수혜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원칙 때문에 나는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
다. 이 사실을 듣고 신부님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그리고 너무나 화가
나서 몸을 떠시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를 되풀이 하셨다. 그때 나는 분명히
보았다. 신부님의 눈에 고인 눈물을.

오랜만에 신부님을 기억하며 나는 새삼 생각한다. ‘삶의 교통순경’인 문학을 가르
치는 사람으로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제자들을 ‘지식과 사랑의 욕심꾸
러기’로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진정 제자를 위해 눈물 흘린 적이 있는지....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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