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평론─수필과 생각의 뿌리/ 김시헌

이예경 2009. 12. 4. 01:16

─평론─

隨筆과 생각의 뿌리

                                                                                       金 時 憲

 1.생활과 철학

 

사람들 가운데는 별다른 철학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날 그날을 생각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돼지의 행복이냐 소크라테스의 고뇌이냐를 물었을 때, 돼지의 행복 쪽에 들어가는 사람이라고 할까. 그래서 차라리 돼지가 될지언정 생각을 버리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 그만큼 생각은 고뇌를 동반하고 그 고뇌에서 철학이 나온다.

같은 생각을 반복해서 오랫동안 계속하고 있으면 그 안에서 공통되는 원리 같은 것이 발견된다. 그러나 생각의 반복만으로는 철학에 이르지 못한다. 그것을 통합 정리해서 앙금을 거두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철학적인 지식의 축적을 곧 자기 철학으로 오인한다. 지식이 철학을 낳는 기초 역할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를 철학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철학적인 지식은 기동성이 없다. 지식의 한계 안에서 사물을 판별할 수는 있지만, 자기 철학으로서의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힘이 약하다. 샘물과 주전자의 물을 두고 양을 측정했을 때 샘물은 한정이 없이 계속해서 흘러나오지만, 주전자의 물은 곧 바닥이 나고 끝이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각기 나름의 깊이에서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철학이 체험과 생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행동 이전에 생각을 하고, 행동하면서 생각을 하고, 행동이 끝난 뒤에도 생각을 한다. 그러한 생각의 반복과 축적과 관리에서 철학이라는 수확물을 얻는다.

어떤 사람은 생각이 깊어서 한 가지를 통해 다른 여러 가지까지도 추리 판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더 깊은 철학이 있다.

철학이 무엇인가?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말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 또 그러한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다만 생활 속에 있는 철학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을 때, 어떤 사태 또는 문제의 저변에 깔려 있는 근원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물의 근원에는 공통되게 존재하는 뿌리가 있다. 여기 나무가 있다고 하자. 무성한 가지와 잎은 모두 줄기에 연결이 되고 그 줄기는 더 아래에 있는 뿌리로 이어진다.

이때 뿌리는 어떤 힘으로 생명을 유지하느냐 했을 때, 또 그 아래에 있는 존재를 찾아야 한다.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 또는 그 종말에 철학이 있다고 하면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가 될까. 그래서 철학은 근원, 바탕, 본질, 핵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사색에서 얻어진다. 용광로에 쇠를 넣어 달구고 녹여서 껍질은 버리고 알맹이만을 얻었을 때 그것을 철학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용광로가 무엇인가? 그러므로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철학이 있다. 어떤 문제를 얼마나 어떻게 생각했느냐에 따라 철학의 양과 질과 깊이가 결정된다. 사랑의 문제, 돈의 문제, 고독의 문제, 늙음의 문제, 죽음의 문제 등에 부딪치면 어쩔 수 없이 생각을 해야 한다. 그 생각의 반복에서 철학이 떨어진다.

인간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 사건은 제각기 양상이 다르다. 교통사고가 주위에서 수없이 발생하고 있지만, 빈틈없이 똑같은 두 가지의 사건이란 있을 수 없다. 동기, 양상, 다친 정도, 치료 과정, 분위기 등 그때 그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그런데도 교통사고의 원인을 몇 가지로 묶어서 정리할 수는 있다. 그것에는 공통성이 있기 때문이다. 부주의, 과속, 신호 위반, 고장 등이다. 이때 네 가지의 원인이 되는 그 아래의 원인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어떤 대답이 나올까?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면 “인간이란 무엇이냐?”에 이르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이냐가 되면 그곳에 이미 철학이 기다리고 있다.

신(神)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어떤 철학가는 “사물의 제일 원인”이라고 대답했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인간의 역사는 끝없는 토의를 계속하고 있는데 위의 대답은 얼마나 명쾌한 철학적인 표현인가.

생활은 철학을 낳는다. 생활 가운데서 저항을 받고, 마찰을 일으키고, 갈등을 겪을 때 철학은 잉태된다. 생활이 없으면 철학도 없다. 학문으로서의 철학도 생활에서부터 나왔다. 그것들이 체계화되고 논리화되어서 철학이라는 방대한 한 분야를 건설하였다. 따라서 철학은 생활의 부산물이다. 부산물이면서 결과적으로는 근원과 근간과 뿌리가 되어서 인간의 생활을 관리하고 통제하고 정의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나무의 잎과 꽃과 가지들이 뿌리에 의해서 관리를 받고 있는 이치와 같다고 할까.

문학과 철학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꽃은 예술이요, 뿌리는 철학이라고 말한 미학자가 있다. 뿌리에서 시작한 나무는 가지를 거쳐서 끝에다 꽃을 피운다. 꽃은 향기와 빛깔과 조화된 형태를 갖추어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그 모양으로 예술작품도 정서라는 향기에다 형식이라는 형태를 갖추어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그 창조 과정에서 예술작품은 주제를 많이 문제삼는다. 주제란 무엇이냐? 흔히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나타내려는 의도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의도가 대부분 철학적인 과제와 연결을 가지고 있다. 주제가 곧 철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주제를 있게 하는 바탕에 철학이 있다. 그래서 어떤 철학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그 작가의 주제는 한계를 가진다.

몇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주제에 가지가 뻗고 잎이 돋아서 한편의 소설이 되고 수필이 된다. 그렇게 볼 때 소설, 수필은 주제의 현현물이다. 주제에다 향기와 색깔과 모양을 갖추어 한송이의 꽃을 만든 것이다. 만들었으면서 주제 따로 형태 따로가 아니고 그 속에 주제가 녹아서 하나가 된 것이다. 이것을 일러 형상화라고 하는 것 같다. 주제 또는 철학을 형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된다.

그렇게 볼 때 생활은 철학을 낳지만, 반대로 철학은 예술을 낳는다. 철학에서 싹이 트고 과학이라는 가지를 거쳐서 예술이라는 꽃이 핀다. 한편의 소설이 이루어지자면 과학이라는 인과관계를 필요로 하듯이, 예술의 창작 과정에는 과학적인 사고 형식(있을 수 있는 일)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개화가 된 꽃에는 과학도 철학도 아닌 완성품으로서 꽃이 있을 뿐이다. 그 꽃 속에 철학도 과학도 함께 녹아 움직인다. 철학이 없는 예술은 씨앗이 없는 과일과 같고 씨눈이 없는 무정란과도 같다.

앞에서 나는 생활 속에서 철학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것은 뒤에 말한 철학에서 예술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철학을 형상화해 놓은 것이 예술이라면 철학과 예술은 정신과 육체의 관계라고 할까, 육체와 의상(옷)의 관계라고 할까. 그리하여 생활에서 얻어진 철학이 다시 형태를 갖추어서 예술이라는 생활로 환원이 된다. 생활로서의 환원이 무엇인가, 그것이 곧 형상화이다. 주제 또는 철학을 상상이라는 힘을 빌어서 제2의 생활을 창조해 놓은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체험의 재구성이라 말한다. 플라톤이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고 말한 것도 체험의 재구성을 이야기한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것들이 곧 인간생활의 실제를 닮았다고 느낀다. 작가의 상상에 의해서 문학(시나리오)이라는 작품이 창작되고 그것이 영상을 통해서 더욱 구체적인 생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형상화된 예술은 그래서 작가의 철학(주제)이 생활로 재현된 것이 된다. 재현되었으되 그것은 작가의 상상을 거쳐서 있을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해 낸 의도적인 생활이 된다.

 

2.문학과 사상

 

사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한 것을 문학이라고 말한다. 이때 사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사상은 곧 철학인 것일까, 아니면 일상의 단편적인 생각도 사상이라고 해서 되는 것일까.

장년(壯年) 한 사람이 길을 걷고 있었다. 앞에 많은 군중이 둘러 서서 구경거리를 보고 있었다. 장년도 궁금해서 그 속을 뚫고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60대의 남자 노인에게 20대의 여인이 삿대질을 하면서 덤벼들고 있었다. 이유인즉 서로 양보하지 않고 꼿꼿하게 앞만 보고 길을 걷다가 부딪친 것이다. 20대의 여인은 몸이 약해서 넘어지고 손에 상처까지 입었다. 여인은 왜 사람을 밀치느냐고 항의했고, 60대는 “나는 바로 걸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삿대질을 받는 노인은 죄인으로 보였고 여인은 피해자로 보였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구경꾼은 어느 편이 될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유교 사상, 유교 도덕에 젖은 사람은 젊은 여인이 나쁘다고 하리라. 노인에게 길을 양보하지 않고 부딪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여인에게 동정이 가는 사람은 고집스럽게 부딪치기까지 한 노인을 나쁘다고 하리라. 여기에도 사상이라는 성격의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사상은 신념, 신앙, 저의식 같은 것이라고 할까. 철학보다도 더 아래에서 철학을 조종하기도 한다. 사상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여인에게 장유유서라는 철저한 질서의식이 있었다면 노인과 부딪칠 수가 없다. 의레 젊은 사람이 옆으로 비켜서야 한다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구경꾼 가운데는 누가 옳으냐에 대한 선악 판별이 일어나지 않고, 막연히 구경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 가운데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이 없는 사람도 있다.

사상은 한번 내면에 만들어지면 그것에 의해서 사물을 판단하려 한다. 판단뿐 아니고 사상의 부피에 따라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노인과 여인의 싸움을 바라보다가 어떤 사람이 여인을 나무라면서 싸움을 중지시켰다고 하자. 그 중지시킨 행동은 성격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성격을 발동시킬 수 있는 힘은 그의 내면에 쌓인 사상의 힘이라고 보아야 한다.

동일한 어떤 사태에 부딪쳤을 때 철학 또는 사상을 가진 사람과 내면에 그러한 준비가 없는 사람과는 바라보는 눈에 차이가 많다.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사건만 해도 그렇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공통된 생각도 있지만 다른 생각도 있다. 공통된 생각 중에서도 그 격렬성과 심도에서 또 차이가 많다. 그것은 체험과 사색과 갈등과 견문에 따라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사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사상이라고 하면 자유주의 사상, 사회주의 사상 등 하는데, 주의(主義)가 붙을 정도이면 한 시대를 움직이게 하는 큰 조류가 되었을 때이고, 그렇지 않게 평소의 생활 속에도 수없이 많은 작고 큰 사상이 사람의 판단과 행동을 규제하고 있다.

문학에 있어서의 ‘사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한 것’ 했을 때의 사상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 싶다. 소설 『이방인』은 흔히 실존주의 문학이라는 말을 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뜨거운 햇볕이 신경을 건드리니까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양로원에 있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애인과 어울려 해수욕을 한다. 부모가 죽었을 때는 커피를 금지하고 있는데도 마시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커피를 마신다. 어머니의 장례 행렬 속에 섞여 걸으면서 상주라고 해야 하는 아들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등이 이 소설 속에는 표현되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햇볕 때문이란 것은 말도 안 된다.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왜 눈물이 나오지 않느냐 하겠지만 나오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나? 주인공에게는 그런 것들이 죄도 아니고 부도덕도 아니다. 왜 그럴까? 그 대답은 실존주의라는 사상에 있다.

현재의 삶 자체만을 문제삼을 때 인간은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을 인정할 수 없다. 도덕도 법률도 제도와 풍속도 다 인간이 있고 난 후의 문제들이다. 그런 것은 여러 사람이 살기 위한 방편물일 뿐이다. 그래서 단독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찾아 들어갈 때, 거기 보이는 것은 죽음의 바다 위에 놓인 자신의 생명뿐이다. 그 앞에서 다른 무엇이 중요하랴? 인간의 존엄성을 극단으로 찾으려는 사상이 실존주의를 낳았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의 권위 밖의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보호 사상이다.

2차대전 후에 생겨났다는 실존주의 철학을 소설로 형상화한 것이 『이방인』이라고 한다. 실존주의가 무엇이냐를 이해하지 않으면 이 소설은 공감이 덜 갈 수도 있다. 우리 나라에도 6·25사변 후에 실존주의 소설이 많이 읽혀졌는데 전쟁에서의 파괴와 살육이 이런 사상을 낳는다고 말한다.

위의 보기는 극단의 경우이지만, 우리 나라에서 쓰여지고 있는 많은 장편 또는 단편 소설에도 사상은 있다. 작가가 무엇을 쓰겠느냐의 물음 앞에 섰을 때, 그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철학과 사상이다. 주제란 대개 철학과 사상에서 실마리를 얻는다. ‘인생은 비극이다’를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 그러한 주제로 소설을 썼다면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사건은 대개가 비극으로 엮어진다. 비록 아름다운 연애 사건을 소설 속에 설정했다 해도 그 결과는 비극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흔히 철학과 사상을 비슷한 것으로 판단한다. 한 가지 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으면 거기 철학이 낳아지지만, 그 오랫동안의 생각이 굳어지고 엉켜져서 신념이 될 때 사상이 된다.

사상은 철학보다도 더 아래에 있는 바탕이라고 할까. 그래서 철학과 사상은 아들과 어머니 같은 관계인지도 모른다. 사상은 생명력을 가진다. 신앙과도 같은 힘을 지닌다. 자기 안에 만들어진 정신의 한 현상인데도 마침내는 그 힘에 자기도 지배를 받는다.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때, 어떤 경우에도 불법으로 자유를 구속하는 장면을 보고 그냥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이 행동에까지 나타나느냐 의식의 움직임으로 끝나느냐는 다른 여러 가지 요인과 관계가 있다.

‘사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한 것’ 했을 때 사상과 감정은 어떤 관계일까? 파도와 그 아래의 심해와의 관계와도 같다. 파도는 끊임없이 흔들거린다. 그러나 그 파도는 심해에 연결되어 있다.

격랑이 일어날 때는 심해에도 동요가 온다. 사상은 만고 불변이 될 수 없다. 인생을 흔들 만한 큰 사건을 체험하면 사상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한때 일본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십대에 공산주의를 안해 본 사람도 바보이고, 40대에 공산주의로 남아 있는 사람도 바보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대개 하나의 성격에 의해서 사건이 엮어진다. 성격이란 그 안에 사상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 주인공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한결 같은 성격을 유지해야 한다. 사상이 갑자기 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사건을 체험하면 변화가 온다. 깡패 역을 맡은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다가 신부님의 설교를 10년 동안 듣고 선인(善人)이 되었다면 그의 감옥생활은 성격(사상)을 바꾸어 놓은 셈이 된다. 출옥 이후에 일어날 주인공의 행동 또는 사건에는 당연히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사상과 감정을 부침(浮沈)의 차이에서 구별하지만 나타날 때는 마음이라는 하나가 된다. 마음 안에 사상도 있고 감정도 있다. 많이 움직이는 부분을 감정이라 하고, 적게 움직이는 부분을 철학 또는 사상이라 할 뿐이다. 여기 잎이 무성한 나무가 있다고 하자. 나무의 뿌리는 땅 속에 묻혀 있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은 가지와 잎에 있다. 이때 뿌리가 사상이라면 가지는 철학이 되고 잎은 감정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마음이 잎, 가지, 뿌리라는 여러 형태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3.개별성과 보편성

 

“가장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가장 한국적이란 무엇인가? ‘가장’이라는 말에 힘이 주어져 있다. 일상생활에서 개별성은 무엇이고 보편성은 무엇인가.

사람들의 생활은 그날 그날이 대체로 비슷하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직장에 나가고, 종일 일을 끝내면 집으로 돌아간다. 저녁에 모인 가족들은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고 밤이 깊어지면 잠자리로 들어간다. 이튿날도 그와 비슷한 생활이 반복된다. 그런데 이 비슷한 생활이 사실은 구체적으로 날마다 다르게 진행된다.

오늘 아침의 식사 내용은 어제와 똑같을 수 없고,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어제의 그 사람과 똑같을 수가 없다. 비록 같다고 해도 만난 시간이 다르고 주고받은 이야기의 내용이 다르다. 그렇게 볼 때 똑같은 하루 하루란 있을 수 없다. 제각기 다른 그날 그날을 개별성이라 말할 수 있다. 개별성이란 그래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개체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이 개별성의 밑바닥을 살펴보면 동일한 것이 흐른다.

신문의 사회면을 읽고 있으면 사랑과 관계되는 사건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사귄다 해서 여인을 살해하는 사건, 사랑하는 사람끼리 결혼이 되지 않는다 해서 동반자살을 하는 사건,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졌는데도 몇 년 후에 사랑이 식자 이혼을 했다는 사건 등 많다.

이러한 사건은 제각기 원인, 과정, 결과에서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다르면서 크게 묶어 바닥을 살펴보면 몇 가지 원인으로 집약이 된다. 사랑의 속성이라고 할까. 사랑은 즐겁다. 사랑은 뜨겁다. 사랑에는 질투심이 따른다. 질투심은 죽이고 싶은 감정을 유발한다. 사랑이 식으면 남이 된다 등……. 이러한 속성이 곧 보편성이 된다. 개개인의 사실 속에 숨어 있는 공통 요소라고 할까. 보편성은 어떤 인간, 어떤 사건에도 공유한다. 동서양, 남녀 노소의 구별도 없다.

보편성은 개별성의 수직적인 천착에서 얻어진다. 가장 아래에 깔려 있는 공유의 존재여서 철저하고 지극한 천착이 있을 때라야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리하여 개별성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저변에 보편성이라는 분모로 연결이 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은 세계적인 것” 하는 말도 한국에 있는 개별적인 것을 철저히 추구, 천착해 들어가면 그 바닥에는 세계적인 것이 있다가 된다.

문학에 있어서의 개별성과 보편성도 마찬가지이다. 한 편의 수필은 구체적인 문장을 통해서 독자에게 개별성을 전달한다. 그때 구체적인 표현 또는 사건의 묘사가 정확, 철저하지 못할 때 독자는 사건 속에 숨어 있는 보편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르렀다 해도 막연한 추상적인 보편성으로 실감을 덜 느낀다. 여지없이 바닥을 해부했을 때라야 사람들은 감격과 감동을 얻는다. 사람들의 취미는 이상하다. 겉에 나타난 현상을 통해서 그 바닥의 것을 기어이 찾아보려는 고집이 있다.

 

4.수필과 사상

 

수필에도 사상이 있느냐? 철학이 곧 사상이 아니냐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수필의 주제가 한결같이 하나의 문제에 집착한다. 이를테면 사랑, 허무, 고독, 미(美), 신(神), 우국(憂國), 자연, 존재, 죽음 등이다.

청년 때 지극한 사랑을 했는데 그것이 결혼으로 연결이 되지 않고 아쉽게도 헤어졌다면 그는 그 문제에 많이 집착한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허무를 계속 수필로 이야기한다. 허무를 이야기한다 해서 평소의 생활이 항상 허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감정의 밑바닥에 허무가 깔려서 관련되는 사물을 만나면 그때마다 고개를 든다.

사상의 눈은 밝다. 사상은 잠자다가도 자신의 투영물을 만나면 금방 눈이 떨어진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의 존재 문제에 수필의 주제가 집중된다. 인간이란 무엇이냐? 어디에서 왜 온 것일까? 등을 두고 물음이 계속된다. 나름의 답을 얻었다 해도 그의 물음이 중지되기는 어렵다. 인간에게 있는 근원적인 질문을 풀지 못하고 가지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소재 또한 그러한 것과 관련이 있다. 동일한 사람의 많은 수필이 한결같이 동일한 문제로 끈이 엮어지는 이유는 내면에 그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경수필보다는 중수필에 사상이 더 짙게 표현된다. 까닭은 중수필이 생활 주변의 감성적인 이야기보다 자연과 인생의 철학적이고 객관적인 과제에 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변수필에도 사상은 있다.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소한 사건도 그 저변에는 거대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사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상 또는 철학을 직설적으로 바로 표현한 중수필보다 신변의 사소한 사건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경수필이 오히려 더 문학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10편 이상의 동일한 사람의 수필을 읽고 있으면 작자의 사상을 어느덧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참어둠은 글자 그대로 무명(無明)이어야 하며, 이 무(無)는 무아(無我), 무념(無念) 따위와 이어지는 것이라 느껴진다. 거긴 검은 옥처럼 어둠이 보이는 그러한 비교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없는 것이다. 무엇이 있어도 그것은 모조리 무화(無化)된다. 거기에 어찌 비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본디 인간은 참어둠에서 태어난 것이다. 참어둠이란 진실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어둠이 갖는 넉넉함과 신비스러움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창작 수필』 겨울호에 나와 있는 김병규 씨의 수필 ‘참어둠’의 한 대목이다. 조금은 난해한 것을 느끼지만, 이 대문의 앞과 뒤에는 어둠에 대한 긴 이야기가 형상화되고 있다. ‘인간은 어둠에서 태어났다. 모든 것은 없는 것이다. 무엇이 있어도 그것은 모조리 무화(無化)된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등에 내재하는 작자의 사상은 무엇일까? 고독, 허무, 우주, 자연, 완전, 무존재 같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한국의 수필이 생활 주변에만 맴돌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생활의 표현이 곧 수필이라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수필의 운명이 아닌가. 한데 그러한 소리를 왜 하는 것일까. 사상이 없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난 뒤에 글의 바닥에 깔려 있는 작자의 사상을 발견한다면 그러한 소리가 나올 수가 없다. 사상에는 작고 큰 것이 없고 한국과 세계가 없고 현재와 과거, 미래가 없고 인종과 계층도 없다. 그러한 것을 모두 초월한다. 인간에게 공통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강아지의 귀여운 재롱을 보면서 인간존재의 근원을 찾아볼 수도 있고, 할아버지의 주름을 보면서 우주의 운행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한 생각들이 현상의 표면적인 관찰에만 그치지 않고, 그 아래에 있는 사상이라는 거대한 해류와 연결이 될 때 그 수필은 사상이 있는 수필이 된다.

 

5.맺음말

 

현상과 본질, 생활과 철학, 개별성과 보편성, 예술과 사상 등에 대해서 소박한 대로 이야기해 보았다. 그것은 겉에 나타난 것과 속에 숨은 것과의 관계라고 할까. 사람들은 취미가 이상하다. 겉에 나타난 것만으로는 만족을 못하고 위와 같이 속에 숨은 것을 찾으려 한다. 그리하여 겉과 속, 양쪽을 드나들면서 인간은 사색이라는 작업을 또한 즐긴다. 그러나 나는 그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고 깊이도 없다. 다만 수필에 있어서의 사상이란 어떤 것인가를 두고 평소에 가끔 생각해 본 일이 있다. 그것을 이야기해 본다는 것이 침범해서 안 될 영역까지 말을 해서 못남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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