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같은 봄바람
이예경
올봄 들어 오래간만에 하늘이 파아랗고 햇빛이 화창한 날이다.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갔고 바람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번에 몰아치던 눈보라로 하얗던 산꼭대기가 이제야 제 색깔로 보인다.
청계산 초입에 들어서자 산들바람에 들려오는 새소리가 반가워 웃음이 절로 난다. 올라갈수록 이름 모를 다른 새들이 나타나 새타령합창이다. 대지는 촉촉하고 나무들은 가지치기를 끝낸 듯 단정하고 아름다워 지난주 모습과는 딴판이다.
산들바람보다 먼저 오는 것이 돌풍 같은 봄바람이다. 지난주에는 청계산 초입부터 바람소리가 요란했다. 숲 속의 모든 이파리들이 흔들리고 잔가지가 부대끼는 소리가 마치 바닷가에서 밀려드는 파도소리 같았다. 북과 남, 냉기와 온기의 세력다툼이 심해서 산위에 오를수록 돌풍 같은 바람 때문에 눈을 뜰 수도 없고 말을 주고받기도 어려웠다.
한바탕 지나가는 바람에 내 몸까지 날아 갈까봐 발바닥에 기운을 집중하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불안했다. 회오리바람이 올 때 제일 굵은 소나무를 꽉 껴안았는데도 보기와는 달리 움찔거림이 몸에 느껴졌다. 그 소나무도 돌개바람을 이기기는 어려운가보다. 나무 꼭대기의 솔잎들은 바람 따라 요동을 치고 죽은 가지와 마른 잎이 우수수 떨어져 날아갔다. 잔가지에서 굵은 가지로, 기둥까지 흔들리는 바람에 흙 속에 박혀있던 뿌리마저 뽑힐 것 같았다. 나는 바람이 그렇게 심할 줄도 모르고 등산을 왔다며 후회하였다.
지나간 꽃샘바람도 대단했다. 영하의 기온을 몰고 와 하루 종일 눈송이가 날리는데 바람이 거세어 우산을 내리면 눈송이가 눈을 찔렀다. 겨울의 끝자락이 제법 따스하여 봄이 온 줄 알고 있었기에 난감했다. 나는 겨울옷을 다시 꺼내 입으면 되지만, 성질 급하게 올라온 새순과 철 이른 개나리꽃들이 걱정이었다.
바람에 맞서느라 온몸에 힘을 주어 그런지 정상에도 오르기 전인데 피곤해서 앉을 자리를 둘러보게 되었다. 바위틈 무풍지대가 눈에 띠어 그 안에 잠시 머물러 숨을 고른다. 길동무와 귤을 까먹으면서 전에도 자주 다니던 길이었는데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을 알았다. 바람이 불면 그 위쪽의 나무들만 흔들리고 바람을 등진 바위 사이에는 포근함마저 감돈다. 찾아보면 어딘가 피난처가 있는데도 필요하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나보다. 잠시나마 편안함이 느껴지면서 지난세월 내가 인생의 바람언덕에 서 있을 때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주위에서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던 사람들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났다. 여러 가지 추억이 떠올라 새삼스럽게 그 당시의 고마움이 가슴에 밀려든다.
인생길에 불어 닥친 바람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자존심을 낮추고, 이생각저생각으로 고민 속에 잠을 못 이룬 적이 많았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런 중에 하고 싶은 일을 줄이며 욕심을 버리는 등 해결책에 몰두해, 나도 모르게 인생 공부는 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프게 인생의 가지치기를 했던 셈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언덕을 넘을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에, 아이들을 무조건 보호하고 어려움을 대신해주었다. 하지만 봄바람이 불 때마다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피난처가 필요는 하지만 바람과 맞부딪혀보는 것이 더 필요한 인생경험이 아닐까 싶어서다.
자연은 이렇게 초봄에는 센바람이 지나가며 나무에 필요 없는 잔가지와 마른 잎을 정리하여 기둥까지 흔들어 놓고, 봄비를 보내 뿌리 틈으로 공기랑 물기가 스며들게 한다. 이것이 나무가 새 기운을 찾는 방법이며 자연의 이치일 것이다. 집안과 이웃, 그리고 나라 안팎으로도 이런저런 바람이 불고 있고 우리는 그 속에 살고 있다.
때가 이르러 훈풍이 냉기를 밀어내면 봄비가 대지를 적셔주고, 움츠렸던 새싹들도 더욱 튼실하게 올라올 것이다. 따스한 햇볕을 따라 꽃 소식이 올라올 날을 기다린다. 대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자연에는 없나보다. 풍성한 열매는 그 다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