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강가의 느티나무 한 그루/ 김선화

이예경 2009. 8. 5. 21:44

 강가의 느티나무 한 그루

- 우송 김태길 선생 추모의 글 -‘우송 선생과 나’ 


                                                                                  김선화


  강가에 품새 좋은 느티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고속도로를 지날 때면 우연히 마주치는 나무인데, 딴 생각에 넋을 놓고 있다가도 그 나무와 맞닥뜨리면 정신이 번쩍 난다. 마치 웅숭깊은 어르신을 우러르듯 하는 내가 보인다. 어느 한 곳도 막힌 곳 없는 강가에서 품이 저리 넉넉해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세파를 견디었을까. 들판의 곡식 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윗가지를 들썩들썩 했을 것이고, 물고기들이 꼬리지느러미를 치며 장난질을 할 때면 간질간질한 뿌리를 옹송그리며 천진스레 응수했겠지 싶다. 그러면서도 시시로 변하는 세상 이야기에 가끔은 시름겨워 가지를 축축 늘어뜨렸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오랜 전부터 큰 나무를 좋아했다. 특히 넉넉한 가지를 드리운 나무를 동경했다.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나무는 외양이 번듯하여 운치가 있을뿐더러 은근한 멋이 풍겨서, 흠모하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된다. 문학을 알고 수필을 쓰면서 품새 넉넉한 그늘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계간수필과의 인연에서 비롯된다. 첫 호부터 매회 분을 독파하며 문장을 익혀왔는데, 엄선된 필진으로 수필잡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커다란 매력이었다. ‘수필문우회’란 이름 뒤편엔 이 시대 철학을 전파하시는 우송 선생님이 우뚝 서 계셨다. 


  연전 출판문화회관에서 문학아카데미가 열리던 첫날 나는 우송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선생님은 ‘어떤 수필이 좋은 수필인가’에 대해 곧은 어조로 강의를 하셨고, 내게 스승 되는 모촌 선생님도 ‘수필인의 격(格)’에 대한 당부의 말씀을 남기셨다. 오래도록 뵙기를 소망하던 어른을 가까이서 뵙고 어려움을 누르며 인사를 드렸을 때 우송 선생님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아, 김선화 씨! 수필 잘 읽고 있어요” 하셨다. 그 한 말씀에 나는 가슴에 불이 난 것 같았다. 더러는 외로운 인생길에서 지켜보는 올 곧은 어른이 계시다는 것, 이 얼마나 값진 자산인가. 


  온 나라가 국상(國喪)을 치르느라 침울할 때에, 평생 철학수필을 강조해 온 우송 선생님이 저 먼 곳에 드셨다. 수필의 강가에 결 곱고 품 깊게 서 계시던 어른…. 선생님께 미처 비치지 못한 인사의 글월을 올린다. ―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먼 곳에서도 참수필의 길 몰라 방황하는 저희를 만나거든 호되게 꾸짖어주십시오. ‘높은 곳으로 향하는 마음이 간절하되 좀처럼 낮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 그것을 진솔하게 그리면 좋은 수필을 얻을 것이다’ 하고 말이지요. 모쪼록 편히 잠드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