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손바닥배미/ 김선화

이예경 2009. 8. 19. 21:18

손바닥배미

김선화

 

카니족 사람들은 돼지가 옆으로 누워있는 모양으로 논을 만들었다고 한다. 돼지가 복을 준다고 믿는 성향이 우리나라의 그것과 같은지는 잘 모르지만, 능선에 기댄 다랑논의 모양이 한결같다. 숲과 안개, 구름과 물, 그리고 벼가 어우러져야 쌀을 낳고 식량을 얻을 수 있다는 그들의 자연 숭배사상이 사람을 숙연케 한다.

친정 가는 길에도 다랑논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차령산맥을 휘돌아가는 길목에서 잠시 쉼을 하며 내려다보던 작은 논들은 한 폭의 수채화였다. 여러 길손들의 가슴에 잊혀져가는 향훈(香薰)으로 자리하던 고만고만한 논 골짜기. 지금은 차령고개에 터널이 뚫려 아스팔트 안에 곱게 묻혔다.

고향시냇가에 다랑논 몇 배미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논을 잊을 수가 없다. 1년 농사라야 벼 한 말 나는 손바닥배미인데, 나이 열네 살에 아버지로부터 하사받은 네모반듯한 내 논이었다. 남의 땅 도지를 내야만 벼농사를 짓던 시절, 개울가의 문서 없는 그것들은 아버지가 개간한 우리 것이었다. 수확물을 땅임자에게 상납하지 않아도 되던 온전한 내 것. 쭉정이가 반이나 되어도 걱정 없던 땅. 큰물 질 때 귀퉁이가 떠내려가도 할 말 없던 땅…. 그래도 현실에 발목 잡혀 옴짝달싹 못하던 청소년기의 내게 가없는 희망으로 넘실거리던 논이다.

지금도 길을 가다가 다랑논을 보면, 남몰래 가슴이 쿵덕쿵덕 뛴다. 묵고 있는 논배미 하나 폭폭 떠서 단걸음에 훔쳐오고 싶다. 흐르는 물가에 나무껍질 홈을 놓아 물을 대고, 봄 햇살에 토실한 독새풀 갈아엎어 논두렁 반질반질 붙이고 싶다. 그리고는 모(秏) 두어 춤 눈어림으로 줄맞춰 꽂아, 실한 농사 한번 거두고 싶다. 그 쌀로 소반지어 정다운 사람들과 무릎 맞대고 둘러앉아, 후후 불며 나누고 싶다.

어느새 세상에서 가장 작은 논배미 하나 녹음 빛 짙게 뿌리 어우러지는 소리, 충만한 노래로 들어앉는다. ―흰 쌀밥 닮은 미소들이 훈김으로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