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마음

살구나무 정원

이예경 2021. 8. 21. 17:47

살구나무 정원

 

오월, 어느새 살구철인가 보다. 노점상에 발그레 잘 익은 살구가 바구니마다 그득하게 담겨있다. 보자마자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려니 내 시선이 살구에 꽂힌 것을 알아차린 과일장사는 얼른 다가와 살구를 먹어보라고 손에 쥐어준다. 어찌 거절하랴, 못이기는 척 입에 넣어본다

 

... 이럴 수가... 절로 웃음이 나온다. 신맛은 어디로 갔는지 달콤하고 향기로운 살구 하나가 나를 온통 행복감에 휩싸이게 한다. 한바구니 그득 담아 사들고 오는 발걸음이 붕붕 뜬다. 이걸 입에 물고 활짝 웃을 식구들 얼굴이 떠올라서다.

 

친정집 팔판동 기와집 한옥 마당에 있던 살구나무가 떠오른다. 새봄에 꽃이 활짝 필 때 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면 흰 꽃 가득한 마당에서 그윽한 살구향에 내 몸이 휘감기며 하루의 피곤이 날아갔다. 열매가 해마다 흐드러지게 열리진 않아도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 알이 크고 달았다어머니는 살구꽃 꽃말이 아가씨의 수줍음이라면서 살구꽃 전설을 알려주셨다. 옛날 후한의 재상 조조가 아끼는 살구나무가 있었는데, 열린 살구가 매일 줄어들자 머슴들을 모두 모이라고 한 후 이 맛없는 개살구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했단다. 그때 머슴 하나가 이 살구는 참 맛이 좋은데 아깝지 않습니까?” 해서 살구도둑을 잡았다고 했다. 그 살구나무도 내 집 마당의 살구처럼 맛이 좋았나보다.

 

살구꽃 필 때가 꽃모종을 옮겨 심을 때라 부모님께선 꽃밭에서 오순도순 시간을 많이 보내셨다. 그런데 주말이면 아버지께선 화초를 솎아준다고 모종들을 절반은 뽑아버렸고, 다음날 어머니는 뿌린 씨앗들이 터서 자라난 여린 생명이 애처롭다며 버린 화초들을 울타리 다른 곳에 여기저기 옮겨 심었다. 퇴근 후 아버지께선 꽃밭 정리가 깔끔치 않다고 다시 뽑아냈다. 잉꼬부부셨지만 모종다툼에는 서로가 양보가 없어서 꽃모종 다툼이 며칠씩 가곤했다.

 

살구는 좋아했지만 나무에 벌레가 많이 생긴다고 어머니는 걱정을 하셨다. 살구나무가 가지를 남쪽으로 벋어가니 이웃집 영감님은 자기 집 지붕 위로 벌레니 낙엽이니 자꾸 떨어져 지저분하다며 그쪽으로 벋은 가지를 자르겠다고 톱을 들고 나타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햇살따라 남쪽만 좋아하는 고집쟁이 살구나무는 사정도 모르고 이웃 지붕 위로 계속 가지를 벋어갔고 이웃집 영감님은 어느 날 기어이 나뭇가지를 잘라버리고야 말았다

 

사랑만 받던 살구나무였는데 한쪽이 잘려나가니 나무를 볼 때마다 가족들의 가슴이 언짢아졌다. 해가 바뀌자 초봄에 아버지께서 정원사를 불렀다트럭에 크고 작은 바윗돌을 가득 싣고 온 정원사는 살구나무부터 뽑아버리더니 가져온 바위들을 이리저리 멋있게 배열해놓으며 정원공사를 시작했다대문 쪽 마당에 포도넝쿨을 올리고 한쪽에는 철쭉이 만발하고 바위사이로 겨울에도 죽지 않는 화초를 심는 등 사철 아름다운 정원으로 제법 모양을 갖추었다.

 

그러나 달라진 정원이 한동안 낯설었고 내 마음 한구석에는 살구나무가 자라고 있었나보다나는 살구 철이면 무조건 살구를 사오고 본다. 살구 철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너무 시다고 식구들이 안 먹을 때도 있지만 설탕에 재워두고 나 혼자라도 먹는다. 살구와 함께 추억을 먹는 그 맛이 잠시나마 나를 태평스럽고 꿈 많던 어린 시절로 이끌어준다.

 

시큼한 살구를 깨물며 신 침이 고이고 추억과 함께 살구향이 코끝에 감돌면서, 모종을 가지고 이리저리 뽑고 옮겨 심으며 다투시던 부모님 생각도 난다. 그때는 몰랐는데, 내가 결혼하여 살아보니 부부간에 꽃모종 다툼이야말로 아름다운 부부싸움이 아니었나 싶다. 살다보면 세상사에 부딪치며 속 끓는 부부싸움이 얼마나 많은가. 아옹다옹 살면서도 살구에 설탕을 치듯 다른 맛을 가미해가면서 어울려 살아간다. 베타카로틴이 풍부한 살구가 강력한 항산화작용, 항암효과, 노화 방지, 대장운동을 원활하게 해주어 호흡기질환을 개선해주는 효능도 있다니 누구라도 참고 먹어볼만 하지 않은가.

 

딸들을 분가시키고 부모님 노후에는 아파트로 이사하여 편리함을 즐기며 사셨다. 어머니는 취미로 채색화를 배우기 시작하여 한국화의 매력에 푸욱 빠지셨다. 팔순에 대장암수술 때문에 입원하시면서는 그려놓은 작품도 많은데 개인전도 평생 못해봤구나 노래같이 하시더니 항암치료를 마치고 회복 2년 만에 인사동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전시회장에 들어서니 온통 꽃그림. 전면에 살구가 주렁주렁 매달린 살구나무하며 살구꽃들... 서울 북촌 팔판동 한옥의 꽃밭이 그대로 펼쳐진 듯하였다. 어머니 손끝에서 다시 살아난 살구나무 정원의 모습에 탄성이 나오며 어머니 머리와 가슴은 항상 꽃으로 가득 찼던 사실을 알았다. 아파트로 이사 후 삼 십 여 년.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어도 마음속에선 계속 정원을 가꿔 오신 것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올해는 오랜만에 날씨가 가물어서 열매들이 모두 달다고 한다. 가뭄은 누구나 좋아하지 않지만 설탕에 재운 것같이 달고 즙 많은 살구가 나왔으니 잠시라도 행복에 젖어본다.

'노인의 마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의 숙제  (0) 2021.08.21
효(孝)‐ 심의(心醫)와 식의(食醫)  (0) 2021.08.21
내 집에 가고 싶다  (0) 2021.08.21
노인들을 위한 잔치에서  (0) 2019.04.11
아버지의 당부 4  (0) 2018.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