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마음

아버지의 숙제

이예경 2021. 8. 21. 17:56

 

해마다 명절이면 귀향행렬을 보게 된다. 교통대란으로 정체가 심해도 그들의 표정들은 밝기만 하다. 이북 고향을 떠나온 지 54, 고향이 있어도 가볼 수 없는 부모님께서는 그런 광경을 보실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장손이셨던 아버지께서는 본의 아니게 54년 전에 고향을 떠나오셨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어도 장손이신 아버지께서는 어머님과 동생들의 안부가 항상 궁금하시다. 요즘은 세월이 좋아져서 여러 해 전부터 미국 친척을 통해서 고향소식을 알게 되어 반가웠지만 그들이 잘 사는 것 같지 않아서 가슴이 편치 않으시다. 이산가족 상봉 기회를 얻고자 신청서를 해마다 내보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생전에 통일이 될까

툭하면 물으시는 말씀이다. 이제 부모님 연세가 팔순을 넘기면서 건강이 약해지시니 하루도 고향얘기를 안 하시는 적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던 중 고향 친구가 북의 동생을 중국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으셨고, 아버지는 200312월에 여동생과 조카를 중국에서 만날 계획을 세웠다며 내게 같이 가자고 하셨다. 팔순을 지낸 아버님은 파킨슨병 치료중이라 가벼운 산책 외에는 외출을 삼가왔는데, 그 멀고 험한 나들이를 결정 하셨다니 평소와는 좀 다르다. 추위와 건강을 이유로 친척 모두가 만류했지만, 아버지께서는

너희는 내 맘을 모른다.”

하신다. 목적은 두 가지, 헤어질 때 14세였던 여동생도 만나보고, 큰조카를 만나 손잡고

너는 나의 양자이다

하며 뭔가 물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리고 내일을 모르는 노인의 건강이니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나는 부모님의 간호사 겸 가이드로 따라 나서기로 했다. 우리는 카메라니 시계니 그쪽에서 요구한 여러가지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 중에, 불법체류 중국인 단속기간이라 비행기표가 동이 났다느니, 폭설로 교통이 마비되었다느니 여행불가로 결론이 나는 등, 황당한 일이 많았으나 우여곡절 끝에 다시 연결되어 영하 30도의 추위를 무릅쓰고 떠나게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서 우리는 모두 무사귀환을 빌었다. 아버지는 오줌통을 가리키며

"이걸 쓰던 안 쓰던 이게 옆에 있어 맘이 편하다"

고 하신다. 나는 여권이니 돈 가방에 짐까지 책임지고 있어서 어깨에 메고 손으로 꼭 붙잡고 내내 신경이 쓰인다.

장춘에 내리니 뺨에 닿는 냉기가 심상치 않은데 어제는 영하 40도였다 한다. 공항실내 입구에는 두터운 매트리스 같은 검은 장막이 내려져있다. 낯선 중국말과 함께 공항직원이 내 이마에 대고 사스감지용 적외선 총을 쏘질 않나,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장춘에서 연락받고 우리의 마중을 왔다며 승용차에 타라고 하질 않나, 어째 생소한 일 뿐이지만 차에 올랐다.

장춘시를 벗어나니 눈 쌓인 고속도로, 그 뒤로는 주로 산길로 인적이 드물다. 백두산이 가까워지면서 칠흑같이 어두운 밤인데, 가도 가도 첩첩 산길이다. 산이 깊어지니 여우고개 같은 곳도 나오고 호랑이까지 나올 것 같다. "여긴 날이 춥다해서 이 코트를 빌려 입고 왔어요." 어머니가 느닷없이 장백아주머니에게 말한다. 목에 밍크털이 달린 비싼 코트를 입으신 어머니는 뭔가 바가지를 쓸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 되시나보다. 이렇게 가다가 갑자기 이 사람들이 차를 세우고

"있는 돈 다 내놓아라"

하면서 돈을 뺏고 아무데나 우리를 버리면 우리는 쥐도 새도 모르게 길에서 그냥 얼어 죽게 생겼다. 쓸데없는 공상에 잠도 안 오고, 어쩌다가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고모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할지, 고모를 만나 대화 중에 충격을 받아 부모님께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돌아올 수 있을지..... 별별 공상 상상에 말똥말똥 눈을 뜨고, 편치 않은 마음으로 컴컴한 창밖을 응시하며 달리고 또 달리는 중에 톨게이트를 열두 개도 더 지났다.

따르릉...”

갑자기 장백아주머니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디만큼 왔냐고 묻는 소리가 들린다. 그새 깜빡 졸았는지 곧 장백이라고 한다. 새벽부터 달려온 길고 긴 여정이었다.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저녁 8시에 주택가 골목길에서 자동차가 멈추었다. 판자로 만든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이제 현관문이 열리면 고모를 보게 될 것이다. 문을 열고 안쪽에 두꺼운 장막을 들치고 아버지를 뒤따라 들어갔다.

"경자야"

"오빠"

하면서 두 분이 마주보고 섰는데, 아버지의 얼굴이 애써 웃으려다가 구겨지고 눈에 물기가 서린다. 어머니도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더니 어쩔 수가 없나보다. 서로 손을 잡은 채 한동안 말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른다. 고모는 아버지 손을 붙잡고 방으로 이끈다. 조카는 사정이 있어 못 왔다고 한다. 할 얘기가 서로 많으니 연신 묻고 대답하는 옆에서 나는 사진을 찍으며 머리 속에는 녹음기를 돌린다.

첫눈에는 앞니가 두 개나 빠진 노파 얼굴인 고모가 낯설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니까 고모 얼굴 속에 아버지의 얼굴이 들어있다. 목소리는 내동생과 음색이 같고, 말투와 표정이 닮아서 친척이라는 걸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다. 내 눈에도 그렇게 느껴지니 공항에서 장춘아주머니가 아버지를 보자마자 고모와 똑같애서 금방 알아보았다고 한 것이 이해가 된다.

우리는 장춘아주머니네 집에서 같이 23일 간 묵을 것이다. 새벽 두시가 넘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을 청했지만 누워서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고모, 아버지, 어머니, , 순으로 나란히 누웠는데, 다들 흥분과 피곤으로 잠이 올 리 없다. 고모는 사진으로 보던 오빠의 모습과 실물이 많이 다르다면서 이렇게 불편한 몸인 줄 몰랐다고 한다. 연신

"나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보려고 그 먼데서 그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왔소"

하면서 감격한 듯 목멘 소리로 되뇐다. 아버지는 잠결에 고모가 아버지 손을 꼬옥 잡더라 하신다.

고모는 옛날에 그렇게 미남이던 오빠가 이렇게 팔십 노인으로 변했다며 울먹거렸다. 자기들이 도움을 주어야 할 형편인데 도리어 만나러 오라는 둥 뭘 보내달라는 둥 당치않은 부탁을 했다며,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한다. 11살 소녀가 칠십을 바라보는 노파로 변했으니 어이가 없기는 아버지도 매한가지이다.

둘째날도 셋째날도 우리는 온종일 한 자리에 앉아서 밥 먹고 얘기하고 밥 먹고 얘기하고 시간도 잊었다. 지주들의 수난시대로 친척들이 거의 수용소에 갔는데, 젊은이들은 돌아오지 않고 할머니만 7년 만에 풀려 나온 일, 할머니가 돌아가시며 통일 후에 큰아들이 오면 산소에 흙이나 뿌려 달라 유언 하셨던 일, 이야기는 끝이 없다. 고모가 고생한 얘기로, 유복자 여동생을 잘 거둬주지 못해 평생 마음이 쓰이던 아버지는 가슴 저린 얼굴이다. 친척 친구 사촌의 이름을 대며 하나하나 소식을 물으며 지나간 오십 여년의 인생 진도를 서로 조정해 나간다.

그런데 새벽녘 잠결에 아버지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다. 숨 가쁘게 초읽기 호흡을 하신다. 나는 잠이 벌떡 깨어 아버지를 붙잡고 손이니 가슴을 맛사지 하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팔굼치로 나를 밀친다. 나는 아버지를 흔들며 무슨 꿈을 꾸셨느냐고 물으니 커다란 짐승이 덮쳐눌러서 놀라셨다한다. 나는 기도 밖에 할 수 없다.

우리는 집을 떠난 후 종일토록 쪼그리고 앉아 이야기에만 열중하다보니 일어설 때마다 오금이 당기고 몸이 말을 안 듣는다. 고모도 놀고먹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며 감옥살이 같다고 한다. 아버지는 재래식 화장실에서 오금이 펴지지 않아 일어나시지를 못하여 우리가 화장실에 들어가 결사적으로 끌어당기는 등 힘든 점이 많았다. 나는 귀가길이 편하시라고 노인들께 지압을 해드렸다. 고모에게는 평생에 한번 해드리는 서비스라 정성을 다했다.

떠나기 전날엔 마음들이 착잡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고모의 팔뚝을 당기며

고모, 우리 따라 한국 갑시다. ”

한다. 그 순간에는 뭔가 길이 있을 것 같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꼭 모시고 같이 가고 싶었다. 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다. 고모는 흠칫 놀라며 도리를 치신다. 나이 칠십에 무슨 호강을 하겠다고 자기 자녀들을 떠나겠느냐 한다.

23일의 상봉시간이 너무나 짧다. 저녁이라 이제는 떠나보낼 시간이다.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좀 황당했던 일이라면 헤어져야 한다는 것 또한 어이가 없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상봉이 엊그제였는데 이제는 영영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아니 못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서로가 말은 이렇게 한다.

"빨리 통일되어 다시 만나자"

이젠 오빠의 건강만 챙기고 오래오래 사세요. 이제 다시는 물건 보내달라는 편지는 안 할 겁니다.”

하면서 계속 손을 흔들고, 껴안고, 악수하고,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한다. 장손인 조카를 만나지 못한 아버지는 편지와 봉투를 전하며 당부의 말씀을 한다.

다음날 장백을 떠나면서 고모가 간밤에 건넜다는 압록강변에 가보았다. 참 그것도 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강변 폭은 이백 미터를 넘지 않는데 새하얗게 눈이 쌓인 강변에 숱하게 많은 발자국이 있는걸 보니 건너는 사람들이 적지 않나 보다. 강 건너 저쪽에만 제법 큰 건물 옆에서 군인들이 서 있는데, 소리쳐 부르면 다 쳐다볼 것 같이 가깝다. 너무 좁고, 너무 가깝고, 뭐라 말 할 수가 없다. 물의 폭은 3 미터 정도, 깊이는 발목부터 허리정도라 한다. 우리 모두는 압록강을 바라보다 이쪽저쪽 자유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하염없이 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귀국 며칠 후, "한마음 축제"라 이름한 자선파티에 다녀왔다. 이북에는 요즘 굶어 죽는 사람보다 얼어 죽는 사람이 더 많아 난방 문제가 시급하다고 한다. 실상이 그렇다면 인도적 차원에서 연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허리띠를 졸라매고 무기를 증강하여 여차하면 원자탄을 던져 이기고 봐야 한다는 김정일 정권 하에서는 한 푼도 도와줄 맘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가슴은 머리와는 다르게 돌아간다. 거기가 혹 이라크라던가 외국이면 나도 구경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동생이, 내 부모가 살고 있어도 그럴까. 내 몸 한쪽이 곪는다면 내 몰라라 둘 것인가, 짤라 버리고 불구자로 살 것인가. 잡기도, 놓기도,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검은 매트리스 장막의 나라, 강추위의 나라에서 집으로 와보니, 고모를 만난 게 꿈이었나 싶기도 하다. 함경도 사투리가 귀에 쟁쟁하고 궁금증을 조금은 풀었지만, 의문점은 더 많이 생겼고 답답함은 더해졌다. 다행히 아버지께서는 54년에 걸친 숙원사업을 이제야 마무리했다고 하시며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신 듯하다.

3달 후면 중국에 다녀온 지도 4년이 된다. 그동안 편지 왕래하던 명환, 종환 등 아버지의 사촌동생들은 이미 운명을 달리하셨다. 나의 사촌들도 회갑을 넘기고 점점 나이가 들어간다. 통일이 되면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고향에 뼈를 묻어달라고 당부하신다. 그런데 아버지 없이도 그들이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 이유로 자서전을 써서 흔적을 남겨두고 싶으신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기적이 일어나서 통일의 그 날이 오는 꿈을 꾸어 본다. 꿈이라도 자꾸 꾸다보면 현실로 변할 지도 모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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