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방

고집과 줏대의 차이

이예경 2020. 1. 3. 01:58

고집과 줏대


고집과 줏대는 유사하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고집(固執)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자기 의견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굳게 지켜서 우김.” 고집은 처음의 계획과 주장을 수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상황들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줏대는 조금 다릅니다. 


줏대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자기의 처지나 생각을 꿋꿋이 지키고 내세우는 기질이나 기풍.” 고집과 달리 줏대에는 처지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변화무쌍한 상황을 인정하고 오류가 발견되면 방향을 수정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재점검하는 것입니다. 


고집은 독단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줏대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계획을 수정하고 보완하려는 노력으로 인하여 독단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줄일 수 있습니다. 성서는 고집이 아니라 줏대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고집이 아닌 줏대를 간직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줏대가 고집으로 바뀌는 순간, 또 다시 회개하며 줏대를 묵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줏대를 다시 세워갑니다. 내 행동이나 말의 선함을 고집하지 않고 내 안에 있는 악을 발견하면서 회개하고 줏대를 세울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성령께 감사합니다. 


이 묵상은 자연스럽게 본문으로 인도했습니다. 다시 본문을 묵상해 보겠습니다.“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본문은 “사랑장”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의 결론에 해당됩니다. 사랑을 묵상하기 전, 그러니까 어렸을 때에는 옳고 그름에만 집착하고, 작은 의에 집착했지만 이제 사랑을 묵상하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답니다. 어린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사랑 여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해하고 어떤 사람은 이해 못하고 어떤 사람은 걸려 넘어지고 어떤 사람은 넘어서고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성서는 그 차이를 성숙과 미숙에서 찾고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이해하고 넘어서지만 미숙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한답니다.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문턱을 넘어서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숙한 사람이 이해하고 넘어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늘 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 때문입니다. 


숲 속에서는 길을 잃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보면 숲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길이 보입니다. 성숙은 하늘위에서 볼 수 있는 시선과 같습니다. 하늘 위 시선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곧 사랑입니다. 옳은 말을 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면 달라집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장성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처럼 형과 아버지의 마음이 다르듯이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다릅니다. 주님은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알곡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당장 문제를 해결하고 싶겠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의와 부정을 눈감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기다리며 더 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턱을 넘을 때 가능합니다.


문턱을 넘으면 무엇이 보일까요? 무엇보다도 사람이 보입니다. 결국 사람입니다. 부와 명예보다 사람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사람에게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철학을 필로조피(philosophy)라고 합니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에 의하면, 사랑이 지혜랍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된 지혜란 사랑의 이유를 묻고 찾으며 실천하는 능력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혜란 문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랑을 방해하는 문턱을 넘어서 사랑할 이유를 찾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문턱을 넘어서면 또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세우고 축복하는 일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묵상해 보겠습니다.“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본문은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어린아이는 작은 문턱도 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답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큰 문턱도 넘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성서에서 찾아보면 그 중에 하나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입니다. 요셉은 주 예수의 육적인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성서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일컬어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정혼자인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셉은 분명히 자기의 아이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내 아이가 아닙니다. 마리아가 간음을 했습니다.”만약, 요셉이 이렇게 말했다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요셉은 문턱을 넘어섰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러한 행동은 사랑의 완성이며 성숙함의 표본입니다. 요셉의 행동은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을 때의 행동방식, 즉 장성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방식입니다. 사랑은 이해를 넘어섭니다. 사랑은 계산도 넘어섭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부했던 교회였습니다. 병을 고치고 방언을 말하며 예언과 같은 은사들이 풍부한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성숙을 나타내는 표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의하면 이것은 결코 성숙이 아니었습니다. 


성숙은 문턱을 넘어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랑장이라고 일컫는 고린도전서 13장의 결론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결론은 문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 결혼하고 직장에 다니고 돈을 번다고 성숙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의하면, 이해를 넘어서 문턱을 넘어서는 것, 바로 이것이 장성한 사람이며 성숙한 사람입니다. 어른아이라는 말처럼, 신앙적으로도 어른아이들이 많습니다. 문턱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은 2019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 시간은 인생에서 결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저는 해가 바뀐다는 것의 의미를 문턱을 넘어서는 것에서 찾습니다. 문턱을 넘지 못하면 2020년이 되어도 여전히 2019년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문턱을 넘어서지 않으면 미래가 없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시는 가나안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출애굽 1세대와 2세대의 차이는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광야에서 죽은 출애굽 1세대들은 출애굽 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의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2세대들은 그 문턱을 넘어서 가나안으로 향했습니다. 우기(雨期)에 범람하는 요단강을 넘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여러분은 문턱을 넘으셨나요? 이제 하나님의 시선, 즉 사랑으로 그 영혼과 사건을 바라보며 문턱을 넘어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 즉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복이 있습니다. 이 복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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