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명절에는 요양병원에서 집으로 아버지가 나오셨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오고 있는데 날이 갈수록 구십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된다. 뵐 때마다 아픈 데는 하나도 없다고 하시지만 보행과 용변이 불편하시기 때문이다.
힘은 드셨어도 여러 해 만에 미국에서 셋째가, 캐나다에서 넷째가 아버지를 뵈러 오니 한국에 사는 딸들까지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우셨을 것이다.
맏이인 나도 출가외인 사십년 만에 처음으로 친정에서 명절을 보낼 생각에 감개가 무량했다. 나는 결혼 후에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종손며느리로 내 집에서 명절을 치르느라 당일아침에는 친정에 올 수가 없었다.
추석 전날 오전에 친정에 도착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장을 보는 것부터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집안에 들어서자 마침 아버지를 침대에서 화장실 좌변기로 앉혀드리는 중이었나 보다.
다섯째 동생내외랑 어머니까지 합동으로 달려들어도 아버지의 우람하신 체구를 옮겨드리는 일이 쉽지 않았고, 이동 후에는 한참을 기다려도 된장공장이 가동을 안 하니 어머니는 목욕부터 시켜드리자고 하였다.
체구가 작은 다섯째 사위가 솔선해서 옷을 벗어부치고 장인의 반바지를 걸치더니 스스럼없이 수건으로 밀며 씻겨드린다. 그 모습에 고마운 마음이 밀려오고 아버지의 기분 좋아하시는 모습에 모두가 힘든 걸 잊는다.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드는 일은 뒷전이고 아버지를 욕조에서 침대까지 옮기는 일이 우선이다. 욕조에서 물에 젖은 미끈한 몸을 완전 두레박 올리듯 들어 올리고 옷을 입혀 휠체어로 다시 침대로 옮겨드릴 때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아버지. 힘드셨는지 침대에서 곤히 잠이 드셨다.
아버지 한분을 목욕시키고 옮겨드리는 일에 여럿이 매달려 애를 쓰다 보니 문득 아이들 여섯을 키우실 때 한꺼번에 우리들을 안고, 업고, 무등 태워주시던 옛 시절의 체격 좋으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왠지 죄송한 마음이 든다. 어쨌거나 다들 그로기 상태가 되어 각자 방방이 흩어져 누웠다. 자손들이 60대 50대이다 보니 쉬운 일은 아니었나보다.
장보러 가자는 말도 못해봤는데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자매들이 모이니 지난 이야기 보따리가 펼쳐지고 여러 손이라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뚝딱 조리하여 다채로운 밥상이 차려졌다. 우선 치아가 부실하신 아버지의 반찬으로 종류별로 다져서 여러 개의 종지에 나누어 담았다.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침대에서 식당으로 나오실 때 또 다시 겪을 힘든 과정이 떠올라 아버지도 편하게 침실로 가져다 드릴까 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펄쩍 뛰시며 온 가족이 모였으니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야 한단다. ‘아차!’ 했다. 자식의 치사랑이 지어미의 지아비사랑을 넘지 못하는 것이었나 보다.
파킨슨병으로 다리 기운을 하나도 못쓰시니 아버지께 옷을 갈아입히고 휠체어에 다시 앉히고 식탁까지 모셔오는데 시간이 걸려 세월아 네월아 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 숟갈 위에 반찬을 얹어드리고 식사시중을 들어드려도 치아부실로 천천히 씹으니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주위에 둘러 앉아 담소하는 아이들 일일이 눈 맞추시고 웃음을 지으실 때는 우리 모두의 피곤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미소는 백만 불짜리 미소인가보다.
일제 강점기에 함경남도에서 대 지주의 장손으로 태어나 사랑 속에 성장했지만 때마침 전국적으로 돌던 콜레라로 단번에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버지를 잃고 13세에 가장이 되셨던 아버지. 이후 서울에서 직장을 가지셨는데 38선이 생기고 고향길이 막혀서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사셨다.
6자매를 키우시며 어디 비벼볼 언덕도 없이 자수성가하여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하며 애쓰셨으니 이제는 편히 휴식하고 애기처럼 사랑 받으면서 사셔야할 때가 왔다.
그런데 아버지가 5박6일 예정으로 집에 오신 거였는데, 사흘밖에 안 지났는데도 아침부터 가방을 싸라고 하셨다. 딸들이 깜짝 놀라 불효막심하게 무언가 잘못한 게 있었을까 반성하며 난감한 표정들이다.
아버지는 식구들이 시중드느라 너무 힘든 것이 안쓰럽다며 요양병원으로 돌아가시겠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오셨는데 더 계셔야한다고 명절 때라 교통도 밀릴 것이라고 우리 모두가 만류하여 겨우 연장해서 머무르시게 되었다.
아버지와 같이 식사할 때마다 어릴 적에 육자매가 조롱조롱 아침마다 밥상에 둘러앉았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한명씩 차례로 이것저것 물어보시고 생선이니 김이니 가려서 밥 위에 얹어 주시고 일일이 대화를 들어주셨다.
식사 때마다 새둥지의 아기 새들처럼 재재거리며 서로 먼저 말해서 아버지를 독차지하려고 야단스러웠지만, 식사와 더불어 아버지 말씀도 같이 먹은 것 같고 그 덕분에 6자매가 영양과 사랑의 결핍을 모르고 성장한 것 같다.
다복한 가정을 물려주신 아버지. 맏딸인 내가 집안을 아우르며 부모님을 많이 그리워하며 살 것이다.
귀가하여 어제를 떠올리니 마음이 촉촉해지는 기분이다. 명절이 별건가. 오랜만에 일가를 만나 부모님 모시고 같이 밥 먹고 서로 말렸던 이야기 진도를 맞추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따스함을 안고 흩어지면 사랑, 더 바랄게 무엇인가.
. 노인의 앞일을 몰라 안타깝지만, 아버님께서 오래오래 사시기를, 심신이 평안하시기를 항상 기도하는 마음이다.
힘은 드셨어도 여러 해 만에 미국에서 셋째가, 캐나다에서 넷째가 아버지를 뵈러 오니 한국에 사는 딸들까지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우셨을 것이다.
맏이인 나도 출가외인 사십년 만에 처음으로 친정에서 명절을 보낼 생각에 감개가 무량했다. 나는 결혼 후에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종손며느리로 내 집에서 명절을 치르느라 당일아침에는 친정에 올 수가 없었다.
추석 전날 오전에 친정에 도착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장을 보는 것부터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집안에 들어서자 마침 아버지를 침대에서 화장실 좌변기로 앉혀드리는 중이었나 보다.
다섯째 동생내외랑 어머니까지 합동으로 달려들어도 아버지의 우람하신 체구를 옮겨드리는 일이 쉽지 않았고, 이동 후에는 한참을 기다려도 된장공장이 가동을 안 하니 어머니는 목욕부터 시켜드리자고 하였다.
체구가 작은 다섯째 사위가 솔선해서 옷을 벗어부치고 장인의 반바지를 걸치더니 스스럼없이 수건으로 밀며 씻겨드린다. 그 모습에 고마운 마음이 밀려오고 아버지의 기분 좋아하시는 모습에 모두가 힘든 걸 잊는다.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드는 일은 뒷전이고 아버지를 욕조에서 침대까지 옮기는 일이 우선이다. 욕조에서 물에 젖은 미끈한 몸을 완전 두레박 올리듯 들어 올리고 옷을 입혀 휠체어로 다시 침대로 옮겨드릴 때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아버지. 힘드셨는지 침대에서 곤히 잠이 드셨다.
아버지 한분을 목욕시키고 옮겨드리는 일에 여럿이 매달려 애를 쓰다 보니 문득 아이들 여섯을 키우실 때 한꺼번에 우리들을 안고, 업고, 무등 태워주시던 옛 시절의 체격 좋으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왠지 죄송한 마음이 든다. 어쨌거나 다들 그로기 상태가 되어 각자 방방이 흩어져 누웠다. 자손들이 60대 50대이다 보니 쉬운 일은 아니었나보다.
장보러 가자는 말도 못해봤는데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자매들이 모이니 지난 이야기 보따리가 펼쳐지고 여러 손이라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뚝딱 조리하여 다채로운 밥상이 차려졌다. 우선 치아가 부실하신 아버지의 반찬으로 종류별로 다져서 여러 개의 종지에 나누어 담았다.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침대에서 식당으로 나오실 때 또 다시 겪을 힘든 과정이 떠올라 아버지도 편하게 침실로 가져다 드릴까 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펄쩍 뛰시며 온 가족이 모였으니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야 한단다. ‘아차!’ 했다. 자식의 치사랑이 지어미의 지아비사랑을 넘지 못하는 것이었나 보다.
파킨슨병으로 다리 기운을 하나도 못쓰시니 아버지께 옷을 갈아입히고 휠체어에 다시 앉히고 식탁까지 모셔오는데 시간이 걸려 세월아 네월아 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 숟갈 위에 반찬을 얹어드리고 식사시중을 들어드려도 치아부실로 천천히 씹으니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주위에 둘러 앉아 담소하는 아이들 일일이 눈 맞추시고 웃음을 지으실 때는 우리 모두의 피곤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미소는 백만 불짜리 미소인가보다.
일제 강점기에 함경남도에서 대 지주의 장손으로 태어나 사랑 속에 성장했지만 때마침 전국적으로 돌던 콜레라로 단번에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버지를 잃고 13세에 가장이 되셨던 아버지. 이후 서울에서 직장을 가지셨는데 38선이 생기고 고향길이 막혀서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사셨다.
6자매를 키우시며 어디 비벼볼 언덕도 없이 자수성가하여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하며 애쓰셨으니 이제는 편히 휴식하고 애기처럼 사랑 받으면서 사셔야할 때가 왔다.
그런데 아버지가 5박6일 예정으로 집에 오신 거였는데, 사흘밖에 안 지났는데도 아침부터 가방을 싸라고 하셨다. 딸들이 깜짝 놀라 불효막심하게 무언가 잘못한 게 있었을까 반성하며 난감한 표정들이다.
아버지는 식구들이 시중드느라 너무 힘든 것이 안쓰럽다며 요양병원으로 돌아가시겠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오셨는데 더 계셔야한다고 명절 때라 교통도 밀릴 것이라고 우리 모두가 만류하여 겨우 연장해서 머무르시게 되었다.
아버지와 같이 식사할 때마다 어릴 적에 육자매가 조롱조롱 아침마다 밥상에 둘러앉았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한명씩 차례로 이것저것 물어보시고 생선이니 김이니 가려서 밥 위에 얹어 주시고 일일이 대화를 들어주셨다.
식사 때마다 새둥지의 아기 새들처럼 재재거리며 서로 먼저 말해서 아버지를 독차지하려고 야단스러웠지만, 식사와 더불어 아버지 말씀도 같이 먹은 것 같고 그 덕분에 6자매가 영양과 사랑의 결핍을 모르고 성장한 것 같다.
다복한 가정을 물려주신 아버지. 맏딸인 내가 집안을 아우르며 부모님을 많이 그리워하며 살 것이다.
귀가하여 어제를 떠올리니 마음이 촉촉해지는 기분이다. 명절이 별건가. 오랜만에 일가를 만나 부모님 모시고 같이 밥 먹고 서로 말렸던 이야기 진도를 맞추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따스함을 안고 흩어지면 사랑, 더 바랄게 무엇인가.
. 노인의 앞일을 몰라 안타깝지만, 아버님께서 오래오래 사시기를, 심신이 평안하시기를 항상 기도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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