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시 산책

가을이야기-법정

이예경 2013. 11. 4. 10:16

[가을 이야기]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 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 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 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 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대중가요에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가사 하나에도

곧 잘 귀를 모은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깊은 밤 등하에서 주소록을

펼쳐 친구들의 눈매를

그 음성을 기억해낸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여는 연약한 존재임을

새삼스레 알아차린다.

 

이 시대 이 공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연줄로 맺어져

서로가 믿고 기대면서

살아가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잡힐 듯 하면서도 막막한 물음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태어난 것은 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

 

그런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노상 아쉽고 서운하게 들리는 말이다.

 

내 차례는

"언제어디서일까?"

하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을 아무렇게나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두고 싶다.

 

이 다음 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서로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 들을 사랑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법정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