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일상성/김은주
2011. 5. 18. <경주수필 특강자료>
<열며>
매 순간 왜 쓰는가에 대해 생각합니다. 초기 습작의 순간도 그러했고, 어느 정도 글을 쓴 지금도 이 물음은 마찬가집니다. 스스로 물어보지만 선명한 해답을 찾기란 글쓰기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이 근원적인 물음의 해답이 선명한 사람일수록 독자에게 읽히는 글을 쓸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혹자는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도구로 글을 쓴다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세상에 내지르고 싶은 말이 있어 글을 쓴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이 물음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제시하고 타당한 해답을 얻어내야만 글쓰기가 진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에 글을 읽을 때는 그 속에 재미나 감동 그도 아니면 정보나 웃음이라도 있어야 읽힙니다. 독자란 참으로 변덕스러워서 홀리지 않으면 금방 읽기를 포기합니다. 글 속으로 독자를 모시고 와 끝까지 읽게 하고 다 읽은 다음 울림을 느낄 수 있게 하려면 작가는 독자보다 한발 앞서 가야 가능한 일입니다. 읽히는 글, 이 어렵고도 지난한 화두에 대해 이야기 할까 합니다.
<펼치며>
*소재가 곧 창작이라는 통념 날리기
글감 즉 소재가 곧 창작이라는 통념이 수필 계에 만연하다. 글감이 글쓰기의 재료가 되니 중요하긴 하지만 특별난 소재가 곧 좋은 작품으로 이어진다는 공식은 한 번쯤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수필은 곧 소재의 문학이라고 단정 지어 말하는 이도 있다. 이런 수필계의 통념은 수필을 가벼운 글쓰기(붓 가는 대로 쓴 )로 간주하는 데서 나온 그릇된 발상으로 보인다.
어떠한 소재가 작품이 되려면 그 글감에서 주제를 어떻게 잡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란 관문을 거쳐야 한다. 소재(요리의 재료)만으로는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재료도 요리하는 사람에 따라 그 맛이 다 달라지기 때문이다. 습작의 초기에는 별스런 소재를 찾아내면 좋은 글이 탄생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이론에서 멀어지고 있다. 소재는 다만 주제를 위한 하나의 도구 일 뿐이다. 별반 색달라 보이지 않는 평범한 소재를 "오래 들여다보기"로 잘 요리해낼 수 있는 힘은 주제를 얼마나 선명하게 작품 안에 그려내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우리 일상에서 자주 접하고 느끼는 소재들이 작가의 역량(주제 심기)에 따라 일품요리도 되고 일반 요리도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굳이 글쓰기의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소재(글감)보다는 주제(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더 무게 중심을 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 사물이나 사태를 오래 들여다본 후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잘 숙성시켜 나만의 목소리로 재탄생시키는 일이 곧 글쓰기다.
그런데 이런 유의 글쓰기를 하는 작가들의 단점은 한 가지 소재를 너무 오래 들여다보다 보니 가끔 생각의 갈래가 나뉘는 경우가 있고 한 작품 안의 화소가 여러 개로 중첩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생각은 여러 갈래로 하되 그 생각을 하나의 주제에 모으는 일" 이것이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글이 선명할 것인가? 흐릴 것인가? 이것은 글의 주제를 얼마나 잘 드러내는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 무엇에 대해 글을 쓰지? 보다는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보고 무엇을 말할 것인지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고 창작에 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시시한 것에 말 걸기
문학은 말에 의한 충격이다. 이 얘기는 단순히 문학이 표피적이고도 외부적인 놀라움이나 준다는 뜻이 아니다. 감각의 혁신과 함께 인식의 갱신을 문학이 예비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수필은 매우 조촐하고 다소곳하다. 한국의 수필이 예외 없이 짓고 있는 보편적인 특색은 바로 이 안존함에 있다. 떠벌리지 않고 나대지 않고 마치 작은 집처럼 수필은 존재하고 있다. 수필은 서사시 같이 웅대하지도 않고 소설처럼 트릭도 없다. 서정시처럼 좀 느슨하다는 느낌을 가릴 수는 없지만 수필은 수필다운 존재증명의 정확성을 다지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면서도 수필은 웅변의 논리며 힘을 가지고 있다. 소설다운 사건에 관한 진술도 곧잘 수필이 해낸다. 서정시의 균형 잡힌 통합도 엔간히는 감당해 내는 게 수필이다. 그래서 수필은 조촐하면서도 탄력성이 있다. 물론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상태가 불안일 수도 있고 동요일 수도 있다. 수필은 분명히 작은 그릇이다. 하지만 그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부피에 대한 융통성은 무한하다. 작으나 융통성이 큰 것, 이것이 수필의 속성이다. 작으면서도 융통성이 큰 사실, 조촐하면서도 가변성이 뛰어난 사실은 수필로 하여금 높은 기동성과 적응성을 갖게 한다.
수필에서 가장 큰 화두는 일상이다. 일상도 특별난 일상이 아니라 시시하고 조촐한 그런 일상이 수필의 가장 큰 글감이 된다. 스쳐 지나가게 마련인,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생활의 작은 구석들, 예컨대 누수로 벽이 갈라진 일, 등 굽은 노인이 길에 서 있는 모습, 골목에 강아지가 똥을 싼 일, 수필은 이런 시시한 일에 붓을 들이댄다. 이것은 다른 장르의 문학이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있는 곳은 언제나 수필이 있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말이 있게 마련이고 말이 있는 곳에 수필이 있다.
이런 소소한 일상성과 사람들은 금세 친해져 버린다. 물과 공기를 마시듯,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듯 예사로 일상성을 대하고 만다. 이것이 일상성의 “마취작용”이다. 무감각의 막이 일상적인 것들을 가려 버려 때로는 없는 듯이 최면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일상성의 포기, 지나치게 친숙함으로써 대상을 아주 없는 듯이 무화해 버리는 것, 일상적인 것이 우리 옆에 있되 우리들의 의식은 그것들을 늘 말살하고 있는 것이다.
수필은 이점을 일깨운다. 우리가 마취된 것, 포기하고 있는 일상성에 대해, 수필은 울림은 적으나 다부지고도 알찬 목소리로 경고해 불시에 눈을 뜨게 한다. 살아 있는 일상성, 깨어 있는 일상성, 수필은 일상성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수필이 더러는 신변잡기라는 꾸중을 들을 소지를 아주 배제하지는 못한다. 일상성이란 신변의 잡동사니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작은 그릇인 수필은 작은 것을 찾아 사랑을 베푸는 일상성에 대한 송가다. 수필은 사물과 세계와 인간 사이에 매듭을 맺고 고를 뜬다. 일상성 속에 사소한 것들이 의미와 연관되어 우주적 논리로 엮어질 때 시시한 것들이 생기를 얻어 한 편의 수필이 탄생하는 것이다. 수필의 진정한 가치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허구와 다른 상상력
문학은 상상력의 세계다. 상상이 배제된 글쓰기는 날것의 음식을 그대로 섭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수필이 체험의 세계를 그린 것이라 할지라도 작가의 체험은 작가의 풍부하고 깊이 있는 상상력을 통해서만 문학적 가치를 획득한다.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글쓰기에 적용할 때 기억이라는 상상을 통해 그것을 유추해 낼 수밖에 없다. 사실이란 것은 시간이 지나게 되면 지극히 불완전한 상태가 된다. 아무리 정확히 사실을 옮겨와도 잊힌 실체까지 복구할 수는 없다. 그 잊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수 있는 것이 우리 기억의 현실이다. 따라서 수필은 사실 체험을 작품화한다고 하지만 사실의 모방이요, 재현이요, 상상의 산물이다. 하니 처음부터 허구로 창작을 하지 않는다 말할 뿐이지 자의든 타의든 어느 정도 허구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객관화된 진실이라 할지라도 작가 본인만의 검증이니 신뢰성도, 보장성도 약할 수밖에 없다. 어떤 대상을 언어의 그릇에 담을 때 언어의 자율적인 체계에 의해 그 대상은 재편성될 수밖에 없다. 경험을 언어로 표현할 때는 전적으로 작가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수필이 상상을 떠나 존재할 수 없는 문학이라면 소설의 허구를 침범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상상을 확대해나가 볼 일이다. 퓨전이나 메타수필을 눈여겨보며 창작수필의 영역에도 관심을 가져봐야 할 것이다.
<나가며>
창작에도 비법이 있을까? 이 질문은 "인생살이가 뭐지? 하는 물음처럼 따로 정답이 없다. 고작해야 더 좋은 삶을 위해 학습하고 일을 하듯이 창작 역시 일상의 매 순간 에서 생겨나고 자라 열매 맺는 것이다. 내가 당장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디에 매진하고, 있느냐가 곧 창작이니 그 비법은 자신 안에 숨어 있다고 봐야 옳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실체를 알아채지 못하고 늘 밖을 향해 창작의 목마름을 호소한다. 인생도, 글쓰기도, 누가 일러 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스스로 알아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 안에 고인만큼 정직하게 퍼낼 수 있는 것이 글쓰기다. 대단하고 특별난 것이 아니라 내안에 예사로 나뒹굴고 있는 시시한 일상이 위대한 글쓰기의 단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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