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사는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더라구요 - 유미숙

이예경 2010. 11. 24. 17:27

지난 여름 내가 부장으로 있는 우리 교회 초등부 교사 젊은 집사님이 두통을 호소했습니다.

만성두통이라는 진단에 사진을 찍어보라는 권유가 있었으나

병명이 나오지 않으면 200백만원 가량의 비용이 든다는 말과 별일 아니겠지 하는 맘에 그냥 돌아왔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도 낫기는 커녕 더욱 심해진 두통에 구토까지 하는 바람에

다시 병원을 찾으니 뇌암이라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그 후 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아니 그의 가족의 삶이 모두 달라졌습니다.

여름방학 어학연수를 떠난 초등학교4학년 딸은 가자마자 돌아오고

활달한 그의 부인은 모든 생활을 접고 병간호에 매달렸으며

그는 항암치료에 괴로와하며 나날이 야위어 갔습니다.
 
얼마 전 그의 가족은 공기 맑은 곳을 찾아 제천 깊은 곳으로 요양차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보러 갔습니다. 딸은 TV도 게임도 학원도 없는 시골학교 학생이 되었고

밤이면 별을 세며 아침이면 새소리에 잠을 깨는 산골소녀가 되었습니다.

공기가 맑으며 요양원의 밥이 참으로 맛있고 황토방의 쑥향이 좋다는 나의 말이

그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방 한 칸에 몇 가지 세간살이로 세 식구가 사는 모습을 살펴보자니

그의 아내가 말합니다. 사는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더라구요.

제천에 다녀 온 다음 날 어깨가 결렸습니다.

무거운 카메라들고 한라산에 남이섬에 광나루갈대밭을 쏘다니고 오랜시간 운전해서 그런가보다고

풀어 주러 수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통증까지 왔습니다.

다음 날 병원을 찾으니 에이 젠장 어깨뼈와 팔뼈 간격이 좁아 서로 부딪히며 염증이 생기는

"충돌증후군"이랍니다. 전국민의 15%가 이런 구조를 가졌다며

팔돌리는 동작을 삼가하고 당분간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물리치료 받고 약까지 먹은 터라 곧 낫겠지 하였으나 통증은 더 심해져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움직이는 대로 진동이 가슴까지 전해져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습니다.

어깨아래가 쏟아져내려 잡고 있어야하고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거의 죽음이었습니다.

 

남편이 침대에 눕혀줬고 미동도 할 수 없는 통증이 계속됩니다.

이렇게 아플 수는 없어. 며칠 전까지 계속된 기침으로 균이 폐로 들어갔던지 갈비뼈가 부러졌던지

아니면 뭘까? 죽는 병일까 고등학생인 아들은 엄마없이 바르게 크려나 생각하며

서러움에 몸부림치다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이 되니 더 아팠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병은 아침에 더 아프답니다.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남편은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병원에 동행했습니다.

충돌증후군으로 인한 대흉근(소위 갑빠)경련이랍니다.

죽지 않겠냐는 남편의 질문에 뭘 원하냐며 대꾸하는 의사의 화기애애한 말투로

일단 죽을 병이 아닌지 알았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통증은 죽음과 바꾸어 손해나는 장사라 해도 그냥 바꿔버리라고 유혹합니다.

나는 며칠 지나면 낫지만 잠간이나마 근육경련을 격어보니

근육무력증으로 점점 균형을 잃어가는 환자들의 고통과 무력감이 전해져 하염없이 슬퍼집니다.

그리고 나의 엄살이 많이 미안합니다.
 
남편이 이삼일 살림을 했습니다.

설겆이가 서툴러 씻어야 할 것은 씻지 않고 씻지 않아도 될 것은 씻으며

10분이면 끝낼 일을 한 시간 넘게 합니다. 일을 마치고 TV 앞에 앉은 얼굴에는

가족을 위해 하루를 바친 주부의 행복한 미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피곤했는지 눕혀주어야하는 환자가 있다는 걸 잊은 채 먼저 잠이 듭니다.
 
나는 이제 어느 정도 일상에 복귀했습니다.

무거운 것 들지 말고 팔돌리는 동작 금지라는 지시를 잊어버리고  또 무수리처럼 살지만

살아 숨쉬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무리 좋아한들 그깟 수영 못하고 사진 좀 못 찍으면 어떻습니까?

고통이 나를 겸허하게 합니다. 또 공손하게 합니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음에도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을 가슴 한 켠에 둡니다.

눈물이 납니다. 사는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그의 부인이 말이 떠오릅니다.

내 예쁜 구두와 선그라스와 핸드백 액세서리 뿐 아니라

잘난 체 하던 마음, 사람 차별하던 못된 마음, 판단하는 어리석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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