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두 개의 모임 약속이 있어 아침부터 마음이 분주했다
게다가 며칠전부터 끄적거리던 글도 있어서 전날 저녁엔 잠을 설쳤고
아침에는 5시에 일어났지만 글을 손 본다고 새벽운동도 가지 않았던 차다
가족들에게 부지런히 조반을 챙겨드리고 또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런데 전화가 따르르릉 울린다. 오전 10시, 친정어머니의 전화인데
친정집 현관 열쇄를 가지고 빨리 와달라고 하신다
현관문이 잠겨있다고, 어머니는 열쇄가 없어서 들어가지를 못해 밖에서 떨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코! 난 바쁜데.....과천에서 잠실까지 지금 당장? 하던 일은 어쩌고?
미국서 온 조카가 아침에 곤히 자고 있길래
열쇄도 안가지고 어머니는 잠시 목욕탕에 다녀왔는데
그새 문 잠그고 나갔는지... 아직도 자는지... 샤워중인지....모르겠다고
윗집에 가서 집에다 전화를 계속 해보아도 받지를 않는다 하신다
내보기에는 조카가 외출한것 같고 저녁에나 오지 싶다
그렇다면 내가 열쇄를 갖다드릴수 밖에 없는것 같다.
그런데 당장 떠나야되는 도서관 약속은 어떡하지?.....
눈치가 9단인 어머니는 내목소리가 어째 부담스러웠는지
열쇄 가지러 양재동에 갈까 사당역에 갈까 하면서 중간에서 만나자고 하셨고
내가 사당역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는 내 마음이 편치 않다
내가 만사 제끼고 무조건 뽀르르 달려갔어야 했는데
내 바쁜 생각만 하고 어머니를 잠실에서 멀리 사당역까지 오시라고 했구나
나는 주섬주섬 책상을 정리하고 컴퓨터를 끄고
화장도 해야지 옷도 갈아입어야지 손보다 마음이 바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편치 않은 상황에 마음속이 좀 부글거렸다
남편이 날더러 벌써 나가느냐고 물어서 어머니의 전화내용을 전하면서
할 수 없어서 가는데 사실은 좀 짜증이 난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공감해주기는 커녕 도리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딸래미는 얼마전에 아침 출근하자마자 회사에서 당신 전화를 받고서
회사일 제끼고 엄마심부름으로 집에 들러 당신 여권을 가지고 인천공항에 가져다 주었쟎아
그깢 사당역에 가는걸 가지고 뭘 그러는가
그말에 나는 말문이 콱 막혔고 정신이 번쩍 났다
남편 말이 맞다...그때 딸이 여권을 안가져다 주었으면 난 발칸여행을 못 갈뻔 했다
내가 여권을 복사하고 복사본만 가방에 넣었고 서둘러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웬지 불안하여 공항에서 가방을 뒤져보니 여권이 없는 것이다
여권을 복사기에서 꺼내는 걸 깜빡 했기 때문이다
10시 15분 비행기였는데 내가 8시15분에 딸네 회사로 전화를 했고
막내딸은 회사일이 많아서 자리를 뜰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하기사 직장생활 3년차인데 쉬운 일은 아니징....
난 필사적으로 도와달라했고 결국 딸이 8시반에 강남역에서 택시를 탔고 오고있다고 했다
일행들은 모두 짐을 부치고 공항안으로 들어가버렸고
여행에스코트와 남편은 굳이 따라 들어가지 않고 내 옆에 서 있다
내 잘못으로 크게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이다
시계는 9시반......비행기는 9시반에 마감한다는데....10시 15분에 이륙한다는데....
시간은 흐르고 여권은 오지않고......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남편이름으로 9시15분에 내짐을 마지막으로 비행기에 실었다
140키로로 달리다가 나중에 공항로에서는 속도계 보기가 무서울 정도로 날아왔다고 했다
목숨을 걸고 달려와준 택시기사에게도 너무나 고마웠다
딸이 과천 집에 들러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9시 45분이었으니
하마트면 비행기를 못탈번 했다
지은 죄가 있어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친정집 열쇄를 찾아들고
사당역에 가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벤치에 얌전하게 앞을 보고 앉아 계시다가 반색을 하신다
물을 좀 마시게 해드리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가는 전철을 태워드렸다
그러저러해서 그날의 내 모임 약속은 놓쳤다
두 곳을 다 못 갔으니 사정 모르는 이들은 날더러 거짓말장이라 하겠지만
급한 불부터 꺼야하니 어쩌겠는가
무거운 마음을 하늘에 날려보냈다
내가 실수를 하나도 안하는 완벽주의자 였다면 아마
아직도 짜증이 안풀려 있을 지도 모른다
이미 지은 죄가 있으니 어머니를 쉽게 용서할 수 있었고
짜증도 가볍게 털어버릴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이런 것도 고난 후의 축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