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딸 / 김영만

이예경 2009. 8. 19. 21:28


방학만 되면 막내를 외갓집으로 보내 버린다고 벌써부터 벼르고 있었지만 막내는 되려 손을 꼽아 기다리고 있다.


끝엣놈들이란 다 그런 것인지 막내는 중학생이 되었는데도 저의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더구나 가끔 안방에서 질색하는 소리가나 들어가 보면 저고리 새로 손을 집어 넣다가 그만 야단을 맞는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좀 두지 그러는가 싶은데, 그새 뿌리쳐 떼버리는 걸 보면 저의 어머니도 대단하긴 하다. 하긴 머슴아이가 이제 다 자라 그 손이 징그럽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놈은 장난이 워낙 심해서 외갓집엘 간다고 해서 환영 받는 그런 축도 못된다. 한 열흘쯤 생각하고 보내지만 사흘도 못 돼 이런 저런 얘기가 들려온다. 더 두고 싶어도 미안쩍은 생각에 그만 데려오고 만다.


이놈에겐 외갓집이 그지없이 만만한 것이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이모, 누구 하나 쉽지 않는 사람이 없다. 나이 좀 적은 이모는 오히려 손찌검까지 하며 횡포를 부린다.


그런데 묘한 것은 저쪽에서 보면 이놈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딸이야 그렇다 해도 백년 손님이 사위라 했던가. 바로 그 사위의 자식이고 보면 그렇게 쉽게 볼 놈은 아닌 것이다. 넘어져 콧등을 하나 깨친 친손자 이상으로 마음이 켜지고 신경이 가는 것이다. 선인들 말에 '외손을 귀여워하느니 부지깽이를 귀여워 하라' 한 말도 그냥 나온 말이 아닐 게다.


놀래는 것은 이 천방지축의 놈이 다녀와서는 그래도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이러니 저러니 지껄이는데 그것이 나한테 하는 말이 있고 저의 어머니에게 하는 말이 있다. 한번은 얘기를 듣다가 그만 참을 수가 없어서 가가대소하고 말았더니 놈도 멋쩍게 따라 웃고 만다.


'내가 잘하는 건 엄마를 닮아 잘한다고 그러고 뭘 좀 잘못하면 너 누구 닮았니 하고 아빠를 은근히 욕한다'는 것이다. 있을 법한 얘기다. 또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기도 한데 제딴엔 그게 좀 맘에 얹혔던 모양이다. 놀랬다. 가만히 보니 외갓집에 가 있을 동안만은 아빠편이 분명한데 나타내진 않아도 그 속에 다 집어넣어 두고 와선 이렇게 일러대는 것이다.


한번은 저의 이모가 놈의 가방을 열어보니 별의별 것이 다 들어가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 불러서 물어보니 저의 할머니 줄 것, 아빠 줄 것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저의 친할머니 줄려고 외할머니 반짙그릇에 있는 이것 저것을 주어다 놓은 것이다. 정말 출가 외인이란 말이 그 자식에게서 더 느끼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 손을 잡고 외갓집에 가던 생각이 너무도 선하다. 그보다 더 좋았던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한 가지 일만 빼놓으면 말이다. 그 일은 내게 정말 참기 힘든 일이었다. 모처럼 가는 외갓집인데, 얼굴에 온통 흑검정을 칠해 아주 못쓰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아무리 새옷을 입고 새신을 사 신었으면 무얼 하나.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할머니로부터 다녀오라는 허락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그것은 외손을 탐내는 외갓집 귀신들을 속이기 위한 하나의 방액이었다. 만일 외갓집에 다녀온 후에 몸이라도 성치 않는다고 하면 어머니의 처지는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 자신이 서둘러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정밀 돌림병이 심하던 때 부계 혈통을 중시하다 보니 그런 괴괴한 일들을 꾸며 놓기도 했음직 하다. 지금 생각하면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어린 나이에도 정말 외갓집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귀신들이 탐을 내 잡아갈지도 모르는 그렇게 위험하고 먼 집이었던가. 또 딸이란 무엇인가. 귀신까지 들먹이며 얼굴에 환칠을 하고 오는데도 그래도 반가워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는다 하는가. 실컷 먹고 또 싸들고 돌아가면 다시 남의 집이 되어 바라보듯 멀리 서 있는 것. 예부터 딸 가진 죄인이란 말도 있고 잘해야 본전이란 말도 있다. 딸 셋이면 기둥뿌리도 뽑힌다 하고 도적도 딸 많은 집 문 앞에는 가까이 하지 않는다 했읜 정말 딸 좋다 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서일까, 근자에 딸 낳기를 기피하는 풍조가 우심해졌다는 것이다. 회임 중에 성별을 알  수 있는 의술이 더 큰 부채질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국민학교 선생님들은 남녀 짝꿍이 맞지 않아 애를 먹는다고 하고 사계에서는 사회문제로 눈지내 보지를 않는 것 같다. 나도 처음엔 그저 호사가들의 괜한 걱정이려니 했는데 정말로 그러저러한 사람들을 실제로 주위에서 보고는 이것 큰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각박한 세태가 이렇게도 나타나는 것일까.


우리 집엔 지금 딸이 하나 있다. 불원 외갓집이 될 것 같다. 분명 부지깽이만도 못한 놈들이 몰려 올 것이고 또 환칠을 하고 제 집 주머니를 찬 채 왔다가는 흉만 모아 갖고 돌아 갈 게 뻔하다. 또 나 같은 사람은 하나라도 기둥뿌리가 흔들릴지 모른다.


그런데 그 딸이 나는 그저 귀엽고 좋다. 아직 당해 보지 않아 그런다고 핀잔을 당해도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방학이 가까워 온다, 그런데 이번 방학만은 아이들에게 얘기를 좀 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우리집도 외갓집이 된다는 걸. 그리고 너희 같은 외손들이 몰려와 분탕질을 치고 갈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아들만 갖고 느긋해 하는 친구들을 혼내줄 한두 마디 말을 찾아야 겠다. 가령'외할아버지 소리 한번 못듣고 어찌 세상을 다 살았다 하겠는가' 라든가 '외갓집하는 것도 품앗이인데 그 짐을 어떻게 할려고 지고만 있는가' 라는 등등. 하여튼 그 말을 좀더 찾아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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