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수필 산책

작가노트/ 김 영 만

이예경 2009. 8. 19. 21:27

작가노트/  김 영 만


 그간의 ‘작가노트’를 일별(一瞥)하면서 나는 은근히 적지 않은 위안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이제 대가의 반열에 올라있는 분들의 입에서도 ‘전력투구, 오랜 각고 끝에야 겨우 수필 한 편을 건질까 말까하다’는 말을 들으니 말이다. 그간 원고지 앞에 앉아 낑낑대고 있는 자신을 저만치 바라보며, 아니, 남들도 다 저러할까, 저래 가지고 글은 무슨 글, 하며 자조와 자탄과 자비(自卑)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내니 어찌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러고보니, 그간 글을 쓰면서 위안이 됐던 말들, 아니 그 알량한 의기마저 꺾여 풀처럼 고개를 떨구었던 일들, 그래도 한줄기 소나기인양 자신의 모습을 정갈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용인이 된다면 그 몇 토막의 얘기를 여기 내놔 볼까 한다.

 언제였던가 금아 선생에게, 선생님이 가장 인상에 남는 좋은 작품을 하나 대주세요하니, 선생은 서슴없이 ‘염소야, 윤오영의 염소지,’ 하곤, 당신도 갑자기 여러 상념이 몰려오는지 허공을 한참 바라보시더니, ‘윤오영은 달랐어, 천재야, 그 염소도 단숨에 써서 날 보여주더라고,’ 하시는 것이다. ‘염소’를 읽고는 흥분에 못 이겨 나도 이렇게 한번 써볼 것이다 했지만 끝내, 당구(堂狗)의 폐풍월(吠風月) 짝이 됐던 내게, 선생의 말씀 두마디, ‘달랐어, 천재야’ ‘단숨에’가 비수처럼 가슴을 찢었다. 그래, 뭔가 다른 거야, 달리 태어난 거야, 단숨이라니, 어떻게 단숨에 쓴단 말인가. 천재들이나 하는 일이지. 

 심란해진 마음이 또 한번 뒤흔들렸던 건 박연구선생과 이정림선생에게서였다. 하루 무슨 말 끝엔가, 박선생은 ‘나는 거의 퇴고 없이 그냥 내놉니다. 수필 한 편을 쥐고 며칠씩 쩔쩔매는 사람이 무슨 수필갑니까.’ 하는 것이다. 

 수필공원 출신들이 첫 작품집을 냈을 때이다. 편집 때부터 조력을 해주시던 이선생이 몇몇 작품을 들어 말씀하던 중 내 것 하나를 짚으며, 이건 수필이 뭔지 모르고 쓴 것 같아요 하는 것이다. 등골이 오싹했다. 벌써 20여년이 흐른 얘기지만 지금도 난 이선생 앞에 글을 내려면 매맞을 것부터 생각을 하곤 한다.

 20대 후반, 난 고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가끔 에세이 비슷한 걸 쓴 게 용기가 됐던지 그 곳에서 발행되는 c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한 편을 응모했다. 정말 젖먹던 힘까지 다 소진한, 그래선지 내딴엔 뭔가 될성불렀던 것인데, 결과는 가작으로 끝이 났다. 옆에서들 위로하기를 당선작 없는 가작이니 당선된 거나 진배없다 했다. 사실은 바로 그게 문제였다. 당선작으로 내놓기엔 뭔가 결정적 흠결이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시상식엔 가지도 않고 원고를 은사님 앞으로 들고 갔다. 그 자리에서 한참 읽어보시던 은사님, 날 빤히 쳐다보시더니, 자네 뭘 쓴 건가. 자네 얘기가 없잖아. 자네 얘기가. 가작이라도 감지덕지하다는 말씀이었다. 화로를 뒤집어쓴 게 그래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싶었다.

 한편, 범촌선생이 해주던 언젠가의 말이 내겐 두고두고 위안이 된다. ‘나는 왜 이 짐을 지었는지 몰라. 빚이라도 잔뜩 진 사람처럼, 단잠 한번을 씩 자지 못하고 친구들과 텅빈 시간 한번 갖지 못하고, 산보를 하다가도, 공을 치다가도 문득 이 진 짐이 천근처럼 내려눌러. 내가 이 글만 안 썼어도 더 행복했을 거야, 더 잘살았을 거야.’ 글 쓰는 자의 팔짜타령이었다. 이것은 이제 걸음마를 하는 병아리였든 하늘을 나는 봉황이었든 마찬가지, 범촌은 그러니 너는 글을 쓰지 말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나 나나 팔짜가 이러하니 어쩔 수없이 그 짐 지고 갈 수 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아니 어차피 질 짐이라면 한번 옹골차게 져보기라도 해보잔 그 말이었다. 

 정봉구선생이 어느날 자신의 수필집 몇권을 내 앞에 풀어놓으시며 자신의 작품론을 하나 써달라 했다. 나는 참 난감했다. 완곡하게 거절을 했지만. 그러나 ‘말잘하는 사람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지, 조금 어눌해도 믿음이 실린 말을 들어보려 부탁하는 거야.’라는 말씀에 꼼짝없이 감히 대가의 작품론 80매를 썼다. 이 글은 이상스럽게도 본인의 맘엔 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평론청탁이 여러군데서 들어왔다. 허세욱 선생으로부터도 내겐 힘에 부칠 수밖에 없는 부탁을 따뜻한 격려와 함께 받았던 것같다.

 어느 늦은 밤, 10시는 되었을 것이다. 수화기를 들으니 난데없는 난대선생님의 목소리다. 나 읽었어, 그 ‘세월’ 말이야, 이번에 낸 졸고를  읽으셨단 말씀이다. 글 안쓴다고 걱정을 해오시더니 반가운 맘에 얼른 읽어보신 모양이었다. 이 시간까지 책을 읽고 계셨구나, 시계를 올려다보고 또 선생님 연세를 떠올리며 침상에 오르려는데 따르릉 또 벨이 울린다. 그런데 그 동생들은 지금 다 뭣하고 있는가. 둘째는. 네, 하난 대학교수가 됐고 또 하난 큰 회사 사장이 됐습니다하니, 그러면 그렇다는 얘기까지를 써놔야지, 읽는 사람들이 궁금하잖나 하시며 이제 잠을 좀 자겠다 싶었는지 가볍게 끊으신다. 난 쉬 수화기를 놓지 못하고 그대로 한참동안을 앉아있었다. 이건 위안이 아니라 행복이었다. 온몸으로 온몸을 부딪혀나가는 한 수필인의 행복이었다. 

 친구들 가운데는 하필 왜 수필이냐, 그건 아무나 쓸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사람이 지금도 있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당대의 문장은 결국수필에서 나올 거라는 걸 믿음처럼 알고 있다. 짚어보니 꼭 14년 전의 일이다. 난 그때 갓 설흔의 신예 평론가인 권성우를 알고 있었고 그를 사랑했다. 이유는 그가 처음으로 수필에 대한 본격 평론을 썼고(비평의 매혹, 김훈의 내가 읽은 책과 세상에 대하여 1993, 문학과 지성) 또 변두리장르라 하여 외면하고 있는 평단에 주의를 환기해줬기 때문이다. 난 급히 그를 우리 모임에 초빙했고, 함께 주목한 한국일보 기자, 김훈의 에세이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땐 ‘칼의 노래’도 ‘자전거여행’도 나오기 전이었다. 김훈, 지금 그는 성공한 소설가이다. 그러나 그를 성공시킨 건 과연 소설이었을까. 아니다. 김훈문학의 지배소(支配素)는 그의 수필, 그의 에세이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재작년인가의 일을 주목한다. ‘화장’이란 소설로 이상문학상을 탄 김훈이 자선대표작으로 내논 건 소설이 아니라 수필 두 편이었다. 같은 해 평단의 주목을 받았던 동서문학상의 배수아가 쓴 소설제목은 ‘에세이스트의 책상’이었다. 나는 이들의 이상행동?에서 큰 통쾌감을 맛봤다. 물론 ‘써 놓은 소설이 없어서’라는 문학사상 편집자의 구차한 해명이나, 20쪽 이상의 지면을 할애하여 소설로의 귀환을 촉구한 백낙청의 평문(창비 124)이 나를 다시 우울하게 했지만. 그것은 문학이 아니니 어서 돌아오라 손짓을 하고, 편집자가 나서 해명까지 해야했는가. 배수아의 말은 그러나 진실했고 긴 여운으로 지금도 내 귓전을 울린다. ‘나는 에세이를 쓰고 싶었으나, 그러기위해 소설의 힘을 빌렸을 뿐이다’(문학동네 2003,197쪽). 지금 몇 년째 시도, 소설도 산문화되어간다며 갸우뚱하는 평단의 수런거림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지금 이런 얘길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좋은 수필은 수필인들의 자존이 회복되는 자리에서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윤오영이 염소를 쓰고 금아가 인연을 쓸 때의 수필환경은 오늘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난 내일의 우리 수필을 낙관한다. 만난을 운명처럼 감내하면서 우리 수필에 온몸을 던지는 이들을 지금도 가까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수필의 현장을 떠나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아무도 몰랐다. 아니 알 까닭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날 아침, 절교장과 함께 들어있는 이정림선생의 원고청탁서를 받고 난 울컥, 온몸을 뒤흔드는 감동을 누를 수 없었다. 그것은 나 같은 사람 하나를 찾아 미로를 헤메 듯 찾아 온 이 편지 한 통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 수필을 향해 온 몸을 사르는 처연하기조차한 순열한 불꽃 하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낙관하고 있다. 우리 수필의 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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